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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기술이라는 말은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들어 본적이 없다. 그래서 흥미를 더욱 느꼈을까?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절대로 쉬운 책은 아니다. 내가 통섭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면서 느낌점을 지금부터 조금만 이야기해 보겠다. 통섭이라는 말은 20세기 말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드물었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저서 통섭, 지식의 대 통합 (최재천교수역)이 출간된 이후로 일반인들에게도 약간씩 이 단어가 친숙해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통섭이라는 말을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하고 있으며 나 또한 그러하였다. 이번에 최민자 성신여대 교수가 발간한 통섭의 기술은 아마 윌슨의 통섭과는 큰 맥락은 같으나 의미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다고 본다. 윌슨이 말하는 통섭은 불교적 색체가 다분히 강한 “큰 줄기를 잡다. 지식의 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가 해석하는 통섭은 “없는 곳이 없이 실재하는 원융무애한 생명의 역동적 본질”이라고 한다. “원융무애” 이 말부터 우리는 이해를 해야지만 이 책의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다. “원융(圓螎)”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이르는 말로 “모든 법의 이치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융합하여 구별이 없다.” 라는 말이고 “무애(無礙)”는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다. 저자의 해석을 좀 더 쉽게 풀이 하자면 “ 어느 곳에나 실재로 존재하고 모든 이치에 맞아서 하나가 되어 융합된 거리낌이 전혀 없는” 이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겠다. 한문이나 혹은 불교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쉽게 이해를 하겠지만 한문과는 그렇게 친숙하지 못한 나에게는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 했다. 이제 통섭의 뜻을 이해했으니 저자가 이야기하는 통섭의 기술에 대하여 조금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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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IT, BT, NT의 기술결합을 통해 새로운 사회문제를 하여 해결방안을 찾아 나가고 있다. 21세기는 지나친 자민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세계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금 세계는 섞임과 혼합, 융합과 퓨전의 세계가 되었다. 요즘 사회 전반에 부는 퓨전의 물결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음식에서부터 가구, 건물, 패션, 음악, 미술 등 우리생활 전반 어디에서나 다양한 분야와 장르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퓨전문화의 등장은 다문화와 탈(脫)장르, 융합기술 등의 강점이 강조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통섭에 대한 고민과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통섭에 대한 고민은 기술융합 시대가 되면서 기업에서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통섭’이 기업 혁신의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 학계에서도 학제 간의 교류를 넘어 학문과 지식의 통일 또는 통합적 지식을 지향하는 통섭으로 발전하고 이제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 사회적인 화두가 되었다. 도대체 ‘통섭’이란 무엇인가? 통섭이란 우리말로 지식의 대통합이란 말로 쓰이는데 새롭게 등장한 말이 아니라 예전 원효가 사용했던 말로 ‘통섭’은 학문의 통합이라기보다 사회 전반에 걸쳐 각자 높은 벽에 갇혀있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의 벽을 허물어보자는 것이 통섭의 요지라고 한다. 융합과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 ‘통섭’이라는 데 통섭이 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이 합해져 새로운 것이 되는 ‘퓨전’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이러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통섭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통섭의 기술』은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최민자 교수가 쓴 책으로 모시는 사람들에서 펴냈다. 이 책은 바야흐로 통합과 융합, 그리고 통섭의 시대를 맞아 사회 전반의 핵심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의 의미를, 지식차원이 아니라 과학, 예술, 종교 전반과 인간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있다. 제1부에서는 통섭의 이해라는 주제로 통섭이란 무엇인지, 통섭의 본질과 메커니즘, 상대계의 비밀, 삶과 죽음의 통섭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제2부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통섭적 세계관이라는 주제로 마고의 삼신사상과 동양과 서양의 통섭적 세계관을 통해 천부사상을 비롯하여 유·불·도와 힌두사상, ‘한’과 동학과 생명 등의 통섭에 대해 살펴보고 동 서양의 통섭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제3부 ‘통합 학문’의 시대와 ‘퓨전(fusion)’ 코드에서는 과학과 종교,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과학의 통섭 등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만남, 통합 학문과 퓨전 코드, 예술과 인생, 예술과 생명 그리고 진화 등 통섭의 원리와 진수를 밝히고 있다. 제4부 통섭으로의 길에서는 마음의 과학, 지식시대와 지성시대 등 마음의 과학과 온전한 앎과 온전한 삶, 지성시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할 정치 실천적 과제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에 대해 포괄적이고도 근원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통섭의 기술』은 최근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의 의미를 다양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통섭이란 원래 2005년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통섭-지식의 대통합>으로 번역하면서 받아들여진 지식으로 소통과 화합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은 진정한 통섭은 ‘지식의 통섭’이 아닌 ‘지성의 통섭’이 되어야 하고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지식의 통섭’은 학문으로 축적된 지식들의 재조합이므로 지성시대에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성의 통섭’은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온전한 앎을 높여 가는 통섭”으로서 지식의 범주에 국한된 ‘통섭’을 주장한 윌슨의 견해를 "통섭은 지식이 아니라 지성 차원에서 일어난다."며 반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통섭'이라는 용어부터 통섭을 한자로 '統攝(거느릴 총, 몰아잡을 섭)'이라 쓰고 '큰 줄기를 잡다', ‘끌어와 모은다.’는 뜻의 ‘統攝’이 아니라 ‘통하여 건넌다.’는 뜻의 ‘通涉’이라고 재정의 하였다. 저자는 마고(麻姑)의 삼신사상과, 천부(天符)사상을 비롯한 동양의 사상과 동학에 나타난 통섭을 설명하면서 통섭은 단순히 지식 차원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아(我 self)’와 ‘비아(非我 other)’를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헤겔 사상을 전공한 정치철학자로 25년 넘게 일관되게 주장하여온 가치가 결국 생명의 가치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저자는 “20세기가 과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과학과 영성의 접합시대라는 점에서 예술과 과학의 통섭은 시대적 필연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IT(Information Technology)와 BT(Bio Technology)의 본격적인 융합(convergence)은 시대적 필연이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일심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앎(knowing)이며, 앎은 지성에서 일어난다. 앎은 곧 ’봄(seeing)’이며, 봄 또한 지성에서 일어난다." -389쪽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결국 우리 인간은 인류의 건강과 행복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사람간의 보고 소통하는 지성이며, 지성은 건강과 행복을 지켜주는 수단이자 목적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본다. 21세기 IT와 BT 그리고 NT(Nano Technology)의 시대를 맞아 진정한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융합(convergence)을 추구하고 있다. 저자는 IT와 BT 그리고 NT 간에 적극적인 인적 교류와 만남을 주문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통섭’을 통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식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 때 세상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인류가 건강하고 무병장수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삶이 좋아지기를 기대하고 창조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차분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마음이 바뀌고 이성과 영성이 조화를 이루게 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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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대는 하루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퓨전과 통섭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하고 있다. 아마도 학문등 모든분야에서의 통합의 움직임이 거세게 작용하기 때문일것이다. 인문학과 자연학의 만남으로 학문도 한층 더 성숙하여졌다. 특히 자연과학중 생물학은 통섭의 대상인 인문학과 아주 조화가 잘되고 있다.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다보면 인간을 연구할필요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통섭에 대한 서구적 시각과 동양적인 시각 더나아가 우리의 현존 문제까지도 깊이 있는 설명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본래의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알수가 있으니 말이다. 서양의 학문이 부분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한다면 동양은 보다 종합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할수가 있겠다. 의학을 보더라도 서양의학은 수술등 몸속의 아픈부분만 집중적으로 치료를 한다 그러나 동양의학인 한의학에서는 인체를 하나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치료를 한다는 점이 대단한 특징인 것이다. 현재의 통합의 분야는 전부분으로 크게 확대가 되고 있다. 세상속의 모든것들을 깊이있게 관찰하기 위하여서는 하나의 나무를 보는 것보다는 숲을 보고 나무를 관찰하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삶과죽음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계절의 순환처럼 옷을 벗고 다른옷을 입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통합적인 견지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보다보면 죽음도 하나의 또다른탄생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분명 세포이 활동시기가 끝나면 또다른 시대를 준비할지도 모른다. 영원한 삶을 위한 우리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정신계적인 의문까지도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서적에서 우리의 삶은 영원하다고 하였는데 -- 이책은 좀더 실체적인 설명방법으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모든것이 본래 하나에서 발생이 된것이다. 하나에서 부분들이 나왔으므로 부분이 전체와 일치가 되는 것은 자연의 조화라고 생각을 한다. 책속의 내용중 종교적인 부분의 내용은 기존의 가치관을 좀더 깊이있게 알려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것이다.
모든분야의 학문이 이제는 통합의 과정으로 진보가 되고 있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그러하며 예술과 과학의 만남의 장도 그렇게 때문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에 깊이있게 생각을 하며 부분을 보기 보다는 전체를 함께 아우르는 지혜를 가져야 될것이다. 보다 넓게 보아야 더 많이 더깊게 볼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책에서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읽은후 나머지 부분들을 읽는것도 무방할것이다. 책이 두껍더라도 읽고나면 생각의 확장이 다가온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읽는 보람을 충분히 느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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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통섭, 파편화된 삶을 넘어 전일적인 삶으로 가는 길! 학문과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지식의 융합을 꾀하는 움직임이 학계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분석적 사고가 아니라, 복합적이며 다차원적인 통합적 사고를 지향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도 이와 같은 흐름에 한몫했다고 본다. 복잡해지고 다원화되는 세상을 하나로 통합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 최민자 교수님은 "자원과 에너지의 과잉소비, 지구 경제의 남북 간 분배 불균형, 빈곤과 실업의 악순환, 민족간, 종교간, 지역간, 국가간 대립과 분쟁의 격화, 군사비 지출 증대, 지구 온난화와 오존층 파괴,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와 대기, 해양의 오염, 유해폐기물 교역과 공해산업의 해외 수출 등 우리를 괴롭히는 이슈들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294-295고 진단한다. <통섭의 기술>은 이처럼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의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제시한다. 자연과학와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은 물론 물성과 영성 등의 이원적 세계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과학과 종교, 예술과 과학, 마음이 과학 등 살피는 층위가 그야말로 우주적이다. 웬만한 교양적 지식으로는 소화하기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이론을 구축하는 개념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었는지 자신이 없다. 최민자 교수님은 ’통섭’을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철학을 넘어선 하나의 종교적 영성으로, 그리고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다. "통섭의 기술은 단순히 다양한 지식세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아(我 self)’와 ’비아(非我 other)’의 두 대립되는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소통의 미(美)의 발현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다"(37). 정리하면, 통섭의 기술이란 한마디로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설명을 읽을수록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초월’이라는 개념이 머리에 그려진다. 그러나 학문의 방법으로서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라는 개념이 내겐 너무 어렵기만 하다. <통섭의 기술>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의식계와 물질계의 상관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며, 학문과 삶의 조화를 꾀한다. <통섭의 기술>은 삶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을 넘어서기 위해 ’통섭’ 개념이 등장하였다고 말한다. "비존재와 존재, 영성과 물성이 하나임을 알기 위해서는 앎을 존재로서 체험해야만 한다. 정신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분법은 앎의 원을, 삶의 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방편일 뿐, 진정한 앎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선과 악의 진실게임에 빠져들면 ’삼사라(samsara 生死輪廻)’가 일어나는 것이다"(61). (난무하는 동양적, 불교적 용어가 머리에 쥐가 나게 한다). <통섭의 기술>에서 최민자 교수님은 사물의 근본 이치와 관련된 초논리, 초이성, 직관의 영역을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과학 중심의 학문적 제국주의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종합적 사고가 융합할 때, 비로서 완전한 통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설명 차원이 아니라 이해 차원이 문제이며, 추론 차원이 아니라 직관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통섭이라는 툴을 사용하는 주체가 바로 일심이다. 일심[참본성, 영성]이 통섭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주 생명력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 지성이며 근본 질료인 까닭에 본체와 작용, 전일성과 다양성,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심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앎(knowing)이며, 앎은 지성에서 일어난다. 앎은 곧 ’봄(seeing)’이며, 봄 또한 지성에서 일어난다"(389). 최민자 교수님의 <통섭의 기술>은 무엇보다 자연과학 중심의 서구 통섭론의 문제점을 동양적 사고와 철학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통섭의 의미를 새롭게 풀어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어 보인다. 여기 제시된 ’통섭’을 이해하는 것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통섭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서구의 학자들과 대화하기에는 동양적인 개념과 추상적인 언어로 제시되는 테제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진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논하여지는 <통섭의 기술>을 소화하는 것 자체가 통섭의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최민자 교수님께 직접 강의를 들으면 이해하기 좀 더 쉽기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겐 너무 어려운 책, 앎과 삶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모색하는 <통섭의 기술>을 살짝 엿본 것으로 일단은 만족해야 할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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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쪽이 넘는 책을 받아드는 순간 “이걸 언제 다 읽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요즈음 화두는 ‘통섭(큰 줄기를 잡다)’이라는 시대개념에 맞게 일목요연한 정리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지금 세계는 섞임, 혼합, 융합, 퓨전이 대세다. 학문과 지식의 통일 또는 통합적 지식을 지향하는 통섭이 유행이다. 그러다보니 통섭을 논하는 사람도, 책도 부쩍 늘었다.
이 책 ‘통섭의 기술’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시중에 나온 통섭론을 말하는 책과는 조금 다르다.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라고 붙은 부제는 이러한 글쓴이의 집필 의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지은이는 진정한 통섭은 ‘지식의 통섭’이 아닌 ‘지성의 통섭’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에 이뤄지고 있는 ‘지식의 통섭’은 학문으로 축적된 지식들의 재조합일 뿐,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본다.
더구나 지식의 통섭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분별적인 근대의 눈에 익숙한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지식의 통섭은 획기적인 것이지만, 사실 동양에는 그보다 뛰어난 통섭의 사상들이 있었다는 통찰이다. 그러면서 마고의 삼신사상과 천부사상, 생태적 사유 등을 실례로 든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되는 시점 그것을 통섭이라고 한다는 정의가 마음에 와 닿았다. 가끔 주관적 생각과 객관적 사고가 달라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이 책은 첫장부터 흥미를 던져주었다.
거기다 그동안 우리가 흔히 말하던 '설명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이분법적 견해라고 비판한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가 나의 생각을 존재와 동일시하듯이 분리의식으로 통섭을 논하고자 한다면, 통섭은 그야말로 다학문적 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비판은 신랄하기까지 하다.
이제 ‘통섭’은 학계는 물론 일반인도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 되었다. 처음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뜻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소통하자’는 뜻으로 곧잘 쓰인다.
그러기에 통섭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기에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또 책장 뒤편 주석을 통해 경제용어를 설명한 것은 독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통섭하기위한 저자의 마음이라 생각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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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일반인에겐 벅찬 화두이며 내용이다.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통섭의 상이한 분야의 이론과 지식을 한데 묶어 화학적변화를 모색하는 통섭이 새로운 사조다. 구분된 장르와 카테고리의 장애 없이 범학문적 접근을 통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 널리지와 지성,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방법론이 곧 통섭의 기술이다. 결코 통섭 통섭이란 생경한 부분은 자칫 말장난이나 고급한 어휘의 유희에 그칠 개연성을 내포하고 근간에 통섭은 모든 지식의 교통이며 지식의 만물박사를 지향하는 측면이 강하다. 각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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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와 문화계에서 통섭이 화두가 되고 있다.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이분법적인 지적사고가 아닌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통해서 인류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통섭의 의미는 에드워드 윌슨을 시작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통섭적인 인간이 21세기가 원하는 인재상으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을 비판적인 어조로 다루고 있지만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한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현재의 통섭의 의미는 지식의 재조합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통섭에 관한 개념들이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국한된것이었다면 저자는 마고(麻姑)의 삼신사상과, 천부(天符)사상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사상 및 동학에 나타난 통섭적 세계관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통섭은 단순히 다양한 지식세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아(我 self)’와 ‘비아(非我 other)’의 두 대립되는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라고 말한다.
통섭의 개념이 학문적인 조합만이 아닌 인간의 모든 분야의 조화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보다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시각으로 확대 정의한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서구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남이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통섭이라는 말이 낮설게 다가오지 않으나 아직까지는 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