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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권태를 넘어 지루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의 군생활. 1997년 임영태는 그렇게 다가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와 '비디오를 보는 남자'를 연이어 읽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일상이 소설 속에서, 현재의 내 모습처럼 투영되어 있었다. 그랬던 임영태를 한동안 잊었다. 작가의 말로는 '전직 소설가'란 농담을 들으며 한동안 침잠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를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란 소설로 조우했다.
근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릇 마흔이 넘어 그 사람의 습관을 고치라고 하면, 비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을까? 그는 대필작가인 나를 통해 일상과 환상, 우연과 운명을 넘나들며 마치 자전적인 얘기를 풀듯 일상을 관조한다. 예전의 그가 그랬듯. 하지만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꿔놓는다. 세상과 맞서 싸우려고 했던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갖은 것만으로, 능력껏 할 수 있을 만큼만을 욕심내며 살아간다. 나 역시도 대필작가(그의 사무실 이름이 제3의 작가였다)의 경험이 있다. 잡지의 경우에는 특히 빈번하다. 가령 영향력 있는 저자의 이름만 빌려다가 내가 기사를 쓰는 경우가 있고, 대부분은 가공의 자유기고가를 만들고, 쓰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엄밀한 의미의 대필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 맥 빠지는 일이다.
예전 MB 초기 인수위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 브로슈어를 제작한 적이 있다. 당시 마무리 작업을 내가 진행했었는데, 청와대에 컨폼을 받으러 갔다가 디자인이 잘나왔다며 흐뭇해하던 그를 생각해보았다.(물론 직접 대면은 아니었고, 해외문화홍보원 담당자가 대신 마주했었다)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보고서, 기업인들의 자서전 및 회고록, 기업의 사사 등은 기본적인 팩트와 약간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가 글을 쓴다. 호불호를 떠나 그들이 클라이언트이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써내려가기란 쉽지 않다. 문득 주인공의 사무실 이름이 '제3의 작가'란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클라이언트의 비위에 맞춰야 하며, 온전히 밥벌이를 위한 글쓰기 노가다인 셈.
그는 죽은 사람을 본다. 공간적 배경이 연남동 일대다. 홍대 입구를 기준으로 서교동, 동교동, 성산동의 사이에 자리한 그곳. 잡지사 기자였던 아내는 항상 그를 이해하며 말없이 내조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죽고, 취미 삼아 만들던 문패 하나가 그에게 들려진다.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란 이름으로.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9번의 이사를 했던 자신을 발견했다. 또한 끔찍이 아꼈던 죽은 태인(진돗개)을 기억한다. 버려진 강아지를 사무실로 데려오며 그 강아지가 9번째 강아지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두번째 대문은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에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서울과 시골의 공간적 이동도 수시로 일어난다. 운명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고민한다. 수시로 죽은 자가 출몰하여 일상 속 산 사람과 함께 거리를 거닌다.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 그 출구가 두번째 대문으로 점철된 건 아닐까? 문을 연 순간, 죽었던 태인이 버려진 강아지로 돌아오고, 역시 죽었던 아내가 그를 위해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이며 맞이하진 않을까?
임영태의 소설은 항상 심심했다. 넉넉한 심성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삶을 관조하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소설로 풀어나가는 점이 뭔가 새롭고, 자극적인 서사를 원하는 이들에겐 심심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임영태 소설의 주인공들은 외롭다. 일상의 결락을 일정 부분 맛본 사람들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에서 '사람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라고 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것,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는 아닐까? 그에게 아내는 늘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반하게 한 아내의 시다.
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 빛이었거든
소설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움직이는 진돗개 태인. 그는 개를 키우며 삶을 소통하고 공감하는 방식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어느날 문득 목을 매고 자살한 태인(개가 자살도 할 수 있나 싶지만). 어느 스님은 그 집 개가 안주인을 위해서 대신 죽은 거라 얘기한다. 김훈의 '개'에서도 온몸으로 세상을 알아가는, 그 흔적을 새기는 보리가 있었다. 그는 꿈 속에서나마 태인으로 변신해,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설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역할 교체. 세상을 다양하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임영태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어떤 공감을 살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사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변함없는 그의 글쓰기가 반가웠다. 하지만 내심 일상의 탈주나 기발한 상상력을 기대했었다. 새로움이 부재하는 일상의 비루함. 어떻게 보면 임영태만의 글쓰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의 노력을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으로 보상했는지도 모른다. 때론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항변해 보지만, 하릴없이 비디오 영상에 자신을 반추해보지만, 결국 그가 써내려가는 소설은 우리의 일상인 것이다. 그의 세번째 대문을 활짝 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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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문학상수상작이라 손에 들었다. 작가도 잘 모르고.. 수상작들이 다들 수작은 아니지만 기대를 해 보며 읽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로 이어지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의 일상사가 좀 몽환적인 내용으로 엮어간다. 몽환적인 내용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선택한 책이 또 이런 거다. 일상적인 내용이라 재미있게 속도감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좀 지루하다. 이런내용이야 라고 얘기할 만한 커다란 줄거리가 나오지 않으니 책을 읽다가 뭔가 있겠거니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냥 이 대필작가의 삶속으로 들어가야한다. 꽤나 섬세히 몽환적으로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읽으면 말그대로 재미없는 소설이 되어 버리지만 작가 자신의 얘기를 많이 투영했기에 그 속으로 푸욱 빠져들어간다면 의외로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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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무료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것들이 작가의 손 끝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변해간다. 늦은 아침 몽롱하게 눈뜰 수 있는 반지하의 작은 공간, 삼거리 모퉁이의 실내 포장마차, 골목길 끝 빵집과 그 옆 모텔, 사거리의 낡은 건물, 횡단보도에 이르기까지... 하다못해 뉴스 시작 전 이삼십 초에 짧은 광고의 온갖 스토리도 그의 글을 통해서라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익숙한 모든 것들에 이토록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자신이 직접 대필작가의 삶을 살았던 것을 계기로 작가 스스로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었다는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저자는 인생에 얽힌 수많은 관계가 바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라고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내던지고 있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란 알 수 없는 뜻의 제목과 대필작가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사실 유명한 소설이라면 극적인 스토리와 인물간의 갈등, 독특한 인물들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안에는 여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나 극적인 반전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양념이 덜 된 것처럼 심심한 기분도 들었고 자연스레 책을 읽기 전 나는 화려한 수상 타이틀이 이 책에는 맞지 않는 옷을 입힌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란 느낌을 가지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의 화자는 제 3의 작가로 불리는 대필작가이다. 출판사에서 일한 경험으로 대필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작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도 대필작가로서의 원칙이라는게 있다. 생계비를 벌겠다고 시작한 마당에 대필에 원칙을 세우는 것은 어찌보면 사치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정신의 사치는 우울증을 막아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었기 때문에 원칙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일째 의뢰인의 문의 전화도 없고 째깍째깍 시계 초침소리만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사무실은 내내 고요하기만 하다. 마침 허기를 느낀 나는 골목길 모퉁이의 포장마차로 향한다. 오늘은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사람을 보는 건 이 동네뿐이다.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의 공허한 눈빛과 그 어떤 표정도 느낄 수 없는... 생전에 아내가 만들었던 문패에는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무 의미없는 말을 새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아내와 함께 해온 시간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오늘도 새벽녁에 골목길을 나선다. 소설속의 내가 바라보는 골목길 구석구석의 풍경은 고요하고 적막한 일상과 만나 어느새 묘한 분위기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그런 저자의 글은 곧바로 읽는 이로 하여금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가지게 했는데 바로 이런 느낌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화자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도시 풍경의 섬세한 묘사였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그의 상상력에 쉽게 빨려들고 말 것이다. 그동안 내가 가진 소설에 대한 환상은 이 책을 통해서 너무나 가식적이고 이기적이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아도 삶이 섞이고 각기 다른 인과관계가 우연을 거쳐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 진정한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가 소통할 수 있고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작가의 다음 행보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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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봄 느낌이 물씬나는 표지만으로도 왠지모르게 서정적이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를 빤히 보고 있으면 인적이 드문 시골의 골목들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지고 메마른 나의 마음을 봄비로 살포시 적셔줄 것 같은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책을 덮고난 후,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목적없는 여행을 떠나보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졌다. 꽉찬 일정으로 가득찬 여행이 아닌 아무 계획없이 발길 닿는대로 떠나는 여행. 언제쯤이면 떠나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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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사람을 보는 건 이 동네뿐이다. 이 동네만이 죽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는지,내가 볼 수 있는 범위가 이 동네에 한정돼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내를 잃고 대필작가로 살아가는 무료하면서도 따분한 삶을 살아가는 한 중년의 남자,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며 의례를 해 왔던 지난밤의 술자리의 남자는 그에게 이야기도 풀어 놓기전에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그 자리에 가야할까 말아야 할까. 그는 한번 우연히 만난 남자의 장례식장에 가서 그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나간다. 그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로 탄생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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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쪽 밑에서 4번째 줄 : 김밥 집 밖엔 → 김밥집 밖엔 (’집’이 ’영업을 하는 가게’를 뜻할 경우엔 붙여쓰는 게 원칙) - 195쪽 맨 밑줄 : 당구장 → 탁구장 (글의 전후를 살펴볼 때 당구장은 탁구장의 오탈자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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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이야기. 평지를 걷는 그런 느낌이었다. 앞 몇페이지를 읽으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대필작가의 삶. 심사평까지 다 읽고나서 책장을 덮었다. 아... 아려온다. 왜 아릴까? 왜 이렇게 싱숭생숭하면서 아려올까? 태인이가 보고싶다. 태인인 언제 올까? 오기는 오는걸까?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제목의 뜻이 궁금해 중간 중간 이게 뭘까를 생각해 본다. 책장을 덮고나니 어렴풋이 떠오른다. 주인공을 닮아가나보다. 지나고 나서야 뭔가가 스치듯이 보이기 시작하니 말이다. 삶과 죽음. 이 남자에게 삶과 죽음의 구분이 있을까?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이 남자의 삶. 너무나 평온하다. 게다가 그 사람의 감정이 느껴진다. 미안해... 괜찮아.. 태인이의 모습이 보인다. 진돗개가 아님이 밝혀질까봐 싸움의 재능이 없는 태인이가 죽을 힘을 다해 싸워이긴다. 서열을 지켜야한다. 내 주인이 실망하면 안되니 말이다. 주인이 알아버렸을까? 왜 내 목줄을 자동차에 메어두웠을까? 가슴이 아린다. 이 속에서 들려오는 울림이 뭔지 모르겠다.
태인이가 올꺼예요. 당신을 찾아 올꺼예요. 아내가 이야기를 했단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이 남자. 죽은 태인이의 환생을 믿으면 진돗개 싸이트를 찾는다. 진돗개가 아니었던 진돗개. 50만원에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한 태인이. 태인이를 짓돗개 싸이트에서 찾을수 있을까? 부인이 문패를 만들었단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뭐야 이거? 무슨 문패 이름이 이러실까? 이 부인도 혹시 영매가 아니었을까? 식스센스의 유령을 보는 아이. 유령인지 모른채 살고 있는 브루스 윌리스. 산자일까? 죽은자일까?
유기견 한마리를 얻었다. 몽이. 9번째 강아지란다. 문패를 달아야겠단다. 아내는 알고 있었다. 남편이 몽이를 키운다는 것을. 몽이가 태인일까? 아내와 같이 들어갔던 대문. 몽이와 함께 들어가는 대문. 산자가 들어가는 대문. 죽은자가 들어가는 대문. 죽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죽은자의 생각을 알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불행일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죽은자와의 대화. 그저 일상이려니 지날 수 있을까?
1억 원 고료 제 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이란다. 참 늦게도 읽었다.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정이현 소설가의 말 처럼 읽고나니 가슴속에 깊은 우물이 하나 파였다. 그러니 이렇게 아려오는 것이겠지.. 아리다. 심하게 아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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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자기 인생을 누구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이해라는 건, 자식이나 마누라가 아닌, 맞은편 막걸리 집에서 몽롱하게 취해 바라보는 어느 손님이 뜻밖에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_
혜지야, 저것들 중에서 재미있는게 뭐야,
잠자코 누워있다가, 혜지를 부른다, 혜지의 시선을 나의 검지 손가락 너머로 이끌어낸다, 나의 검지 손가락은 혜지의 책장에 꽂힌다, 나른하게 혜지의 방에 누워있다가 문득, 오감이 궁금해진다, 배는 부른데 입이 궁금한 것 처럼, 무언가 평온한 감성의 호수에 물장구 칠 '꺼리'가 필요해진 순간,
주무시는 거 아니였어요, 글쎄여, 저거 저_거 괜찮아요,
저거, 라는 말이 꽂힌 그 곳에 꽂혀있는 책은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제목이 뭐 저럴까,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라니, 정말로 책꽂이의 세번째 칸 여섯번째 책으로 꽂힐 만한 이름이군,
꺼리가 필요해진 만큼의 달달한 호기로 책장을 넘긴다, 즈륵즈륵, 내가 좋아하는 종이의 질감이다, 윤이나고 빳빳하고 새하얀 면에 인쇄된 활자들은 읽어 넘기기가 부담스럽다, 특히나 고등학교 시절 수학 문제집을 이런 종이로 만들면 연필자국 박이는 것과 볼펜 잉크가 번지는 것에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문제 하나를 푸는 데도 전전긍긍이었다, 문제의 본질보다 본질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미련들,
즈륵즈륵, 나는 베개를 뗏목삼아 활자의 바다에 몸을 맡긴다, 파동은 잔잔하다, 나는 잔잔한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다, 주변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사물들의 일상적임, 그래서일까, 나는 불쑥 수면에 손가락을 찔러 저어보고싶다, 비라도 와야할 것 같고 바람이라도 불어서 물결이 넘실거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차오른다, 뗏목이 뒤집어질 듯 책 넘김이 빨라진다, 스스로 물결을 일으켜보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상하다,
감정이 바다라면 그것을 분출해 내는 파동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은 담고 있는 많은 것을 밖으로 표출해 내지 않는다, 주변의 영향에도 흔들림이 없다, 이대로 파동의 크기는 한결같을 것이다,
나는 물질을 거두어 들이고 수면 아래를 들여다 보기로 한다, 손가락을 모아 두 눈 주위로 동그랗게 말아 쥔다, 그러고 보니, 저기 저 심연에 무언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람은 대필작가이다, 타인의 인생을 활자로써 대신 살아주어야 하는 사람, 그는 자신의 활자를 소설로서 담아낼 수 없고 그에게 의뢰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설을 활자로서 뱉어낼 수 없어 맺어진 편이하지만 묘한 관계,
나이가 마흔쯤 되면 버릇이 옹이처럼 삶에 박힌다. 무심코 반복되는 그것들 속에 욕망도, 상처도, 사는 방식도 다 들어 있다. 생계 문제로 벌이는 게 아닌 한 도둑질도 연쇄살인도 결국엔 버릇이다. 그러니 삶을 바꾸려면 버릇을 바꾸어야 하는데, 버릇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 먼저 바꿀 수가 없다. 나이 사십을 넘긴 사람에게 버릇을 바꾸라고 할 때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그는 많은 시간동안 타인의 삶을 가능한 실제와 맞물릴 수 있도록 재구성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 것이라고, 버릇인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사건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조금은 타인과 다른 공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내와 태인이, 그들과 숨 쉬던 공기들은 들숨이 되어 곧장 폐로 빨려들어가지 않는다, 곧장 날숨이 되어 연기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그 단어들은 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머리에서 문장으로 재배열되고 재배열되고 다시 재배열되어 침착하게 날숨으로 뭉쳐진다, 내가 심연에서 보았던 것은 뱉어내기 어려웠던 한 줌의 숨덩이들이 아니었을까,
나의 그 곳을 향한 아릿한 응시는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켠 몽롱한 시선일 것이라 생각한다, 심연에서 수면 위를 바라보는 그는 과연 뜻밖이었다, 라고 생각할까,
두둥게둥실, 수면 위를 찰랑거리는 뗏목과 나,는
며칠 후, 일상에 존재한다, 그를 만나기 전, 그리고 만나고 난 후에도 물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의 뜻을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연까지 들어가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편이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드니까,
그것은 책꽂이의 세번째 칸 여섯번째 책으로 꽂힐 만한 이름으로 그 곳에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니까 말이다,
episOde,11 임영택_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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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구. "1억 원 고료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언제나 그렇듯 상받은 작품은 일단 기본은 한다. 읽고 난 후 실망감은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적어도 내게는.
40대의 주인공은 아내와 사별한 후 남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대필 작가이다. 한때는 출판사를 다녔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시골행을 선택했지만 성실한 그의 아내는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 3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곳에서 강아지들을 키우며 생활했는데 남다른 기운을 갖고 있던 아내가 아프기 시작한다. 애정을 갖고 키우던 개, 태인이 죽어가는 안주인을 살리려고 자기가 죽은 것이라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말에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현실 속 그의 일상은 담담하고 매우 건조하다. 되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의 눈에 어느 날부터 죽은 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그의 삶 속에 들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특이한 제목인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은 죽은 아내가 문패에 새긴 것이다.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은 현실의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상징이자, 삶 속 깊게 침투해 있는 “욕망의 기호”이며, 마음속 깊이 울려 퍼지는 “육체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정이현 작가가 썼듯이 읽고 나니 가슴 속에 깊은 우물이 하나 파이듯,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 오더라.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하던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고 나니 남모를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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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같은 중년 남성이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의 반복과 나열이, 그러나 결코 사치스럽거나 단순하지만은 않은 일상이, 그 깊은 슬픔과 고통이 아주 담담하게 전해지는 소설이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죽은 사람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치열한 욕망의 성취를 위해 애쓰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온 어느 대필작가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문득 중년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느 중견 소설가의 감상평처럼 어떤 이끌림에 이끌려가는 느낌의 잔잔한 소설, 그리고 전혀 격렬하지 않게 슬픔을 전달하는, 아주 애잔하고 가슴 저린 도시인의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이 개를 기르는 대신 아이를 낳아 기를 줄 알았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슬픔은 없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