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운오리의 일화를 아는지? 오리 무리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결국엔 백조 무리로 돌아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한 번 따져볼 일이다. 미운오리는 정말 행복해졌는지. 이에 대해 기막힌 의견을 낸 사람이 있다. 철학자 김용석씨다. 왈(曰), 자기들과 다르다고 미운 오리를 배척시킨 오리 세계는 당연히 닫힌 세계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과 같기 때문에 받아들인 백조 세계도 결국 닫힌 세계다. 요컨대 미운오리는 평생을 닫힌 세계에서만 살았다는 뜨악할 관점! (닫힌 세계에서의 삶도 지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뒤로' 버튼을 눌러도 무관하다.)
이런 기발한 발상을!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궁금해질지 모르겠다. 2000년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쓴 문화, 인간에 대한 철학에세이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푸른숲.2010)이 출간 10년을 맞이하여 개정판을 선보였다. 10년전 이야기니 구닥다리아니냐고? 전혀. 오히려 지금 세대가 봐도 설마, 라고 생각할만한 미래적인 관점이 당신을 기다린다.
김용석씨가 말하는 새로운 개념은 '유크로니아', '사이의 문화', '탈인간성' 등으로 설명된다. 유토피아에서 따온 유크로니아는 여유있으면서도 빠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시대다. 과거가 무조건 빠르게를 외쳤다면 지금은 보다 효과적인 빠름을 추구한다. 흔히들 현대로 오면서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큰 덩어리의 가족체계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소중해진다. 나, 너, 우리보다 나와 너 사이, 우리 사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회로 변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주 시대를 예견한다. 이 작은(!) 지구에서 벗어나 전 우주로 우리의 삶을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는 너무도 많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래지향적인 모습만 담아낸 건 아니다. 단순한 소비 사회에서 생산을 유도해내는 방식으로 변화된 모습, 미를 소유하는 생활 등 현재 우리의 모습 또한 고스란히 담겨있다.
때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동화, 예술가, 배우 등의 비유를 들며 쉽게 철학의 사유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때로는 각종 전문 서적 사이를 끌고다니며 그 깊이를 가늠케 한다. 양립할 수 없을듯한 두 지점을 잘 조합시킨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마치 카멜레온같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독자들을 생각의 지평으로 끌고간다. 그러나 말미에서 김용석씨는 말한다. 책으로 들어갔으면 나오기도 해야한다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의견들을 받아들이는 건 이 책을 바르게 읽는 방법이 아니다. 이 책은 단지 소통의 도구, 사유의 시작점이 되면 그만이다. 진짜 이야기는 독자들 개개인의 머리와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날테니.
|
|
요즘엔 책을 읽을 시간도, 잠을 깊이 잘 수 있는 시간도, 쉴 수 있는 시간도 모자랐다. 2월 13일 설연휴가 시작되던 날부터 시작된 감기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고, 갑자기 쏟아지는 업무에 휘둘리다가 주말이 되면 결혼준비를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마다 300km씩 서울로 달려갈 때 조금씩 꼭꼭 씹어 삼킨 책을 이제야 풀어 놓는다.
글쓴이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육군 공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2007년 겨울이었다. 신문을 들춰보다가 동화를 바탕으로 풀어 쓴 철학 이야기가 나왔다는 광고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철학정원>이었다. 동화와 철학의 오묘한 상관관계는 미하엘 엔데 할배에게 조금 배웠지만, 김용석 선생은 본격적인 탐구에 가까웠다.
철학에세이는 때로 정말 버겁다. 철학이 힘든 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을 다 쏟아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가 보통 소설을 읽듯 술렁술렁 읽어버리면 글의 맥을 놓치게 된다. 그러다가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서로 자기 생각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의 흐름을 체감한다. 철학적인 글을 읽다가 마주하게 되는 곤란한 상황도 그 흐름을 함께 하느냐, 놓치냐에 달려있다. 철학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을 좇지 못하면 어느 순간 인쇄된 활자들이 핑그르르 도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철학자가 불친절하다는 느낌도 이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용석 선생이 써낸 이 책도 마찬가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숨이 가쁘지만, 차근차근 대화하는 기분으로 읽어간다면 이 책과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정말 많은 걸 얘기한다. 한 번 읽고 얻어낸 다섯 뿌리는 “시간, 일상, 소통, 문화,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내 기준이지만.
1. 시 간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셰익스피어, 정약용 한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사람들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을까. '인간은 죽는다'는 삼단논법을 꺼내지 않더라도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살아 있는 시간'일 것이다.
토플러 할배의 <부의 미래>에서 ‘타임 달러’에 대한 설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자신의 시간을 쿠폰처럼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예를 들면, 반려동물만 두고 7박 8일 간의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자신의 '타임 달러'를 이웃에게 지불한다. '타임 달러'를 받은 이웃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여행 간 사람의 반려동물을 돌보고, 다음에 자신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가지고 있는 '타임 달러'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하루라는 시간은 평등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속도를 빠르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더 이루려 한다. 더 이상 속도는 거리와 시간의 상관관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거의 모든 개념과 연결된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선생은 이 부분을 상식 이상의 단계에서 설명한다.
김용석 선생의 설명을 듣다 보면, 속도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시간 소요를 최소화’해서 어떤 일을 시행하는 데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여 최대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자원처럼, 인간의 시간도 같은 개념으로 간주한다.
2. 일 상
일상이란 단어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까. 내 경우에 일상이란 단어는 편안함과 나른함이 먼저 떠오른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삶의 궤적과 일치하는 시간의 흐름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눈을 잠깐 돌려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글쓴이는 조금씩 달라지는 일상의 모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단지 변화의 속도가 인간의 인지 속도보다 한 박자 늦기 때문에 바로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10년 단위로 달라진 일상의 단편을 떠올려 보자. 확연하게 일상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2000년에 핸드폰이 이처럼 기술적으로 발전해서 일상과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리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서울 지하철의 판매창구에 사람이 없어지고, 일회용 교통카드로 대체될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을까. 불과 10년 만에 일상은 이렇게 달라졌다.
전자, IT 기술의 진화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었고, 시간을 아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중이다. 전 세계의 모든 언론은 iPhone과 블랙베리(black berry), 안드로이드(android)를 찬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생활의 편리함이든,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든―가늠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밝은 곳이 있다면 어두운 면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김용석 선생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 ‘함께 있음’이 지나쳐서 생긴 사건은 많다. 기업에서 고객 관리를 목적으로 수집한 개인정보가 노련한 해커들이 빼내어 사용하기도 하고,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려 둔 사진이나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올려 둔 상품평들은 구글(google)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게 됐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블로그와 미니홈피에 자신의 정보를 가없이 공개하고 있다. 2PM의 박재범 군과 같은 경험을 자신이 겪지 말란 법도 없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변화는 필수다. 재핑(zapping)으로 하나의 상징을 삼을 수 있을 만큼 TV는 쉴새 없이 1초 간격으로 채널이 바뀌고, 기업에서는 매일 진보하는 사람을 원한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늘 장려되며, 개혁과 혁신은 약간 위험하지만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과연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올까. 현대의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확실한 만능열쇠가 될 수 있을까. 선생의 우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선생은 다시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권유한다. 변화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떠내려가게 하지 말고 인생의 중심에 서서 일상의 관찰자, 일상의 시인(詩人)이 되어 일상의 조감도를 그려보기를 권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작업은 때때로 엄청난 발견을 하게 해준다.
3. 소 통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대화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아무런 곡해 없이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바벨탑 이야기처럼 전 인류가 합심해서 신의 권능에 도전할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1:1로 번역이 되지 않기도 한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가 쓰는 말의 어휘 의미 차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화성남, 금성녀>이야기나, 롤러코스터의 <여자가 화났다>코너가 인기 있는 것도 그런 탓일 것이다.
서로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각 집단마다 사용하는 전문적인 어휘가 있다는 것은 오해의 시작이며, 세계를 나누는 시점(始点)이 된다.
책을 읽거나 TV토론을 볼 때, 강의를 들을 때 굳이 전문적인 학술어를 쓰지 않아도 될 곳에 굳이 쓰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일반 교양을 위한 책이나 강의, TV토론은 분명 불특정 다수의 비전문가들을 위한 이야기 장소다. 그러나 몇몇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언동을 보자면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갈 때가 많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암묵적 동의가 있거나 협약이 되어 있는 말’을 익힌다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김용석 선생은 열림의 가치를 설명하며, 개인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그대로 두고,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미운 오리새끼>를 분석하며 제시하는 사회의 분석은 정말 날카롭다. 안데르센이 대단한 건지, 분석한 이 아저씨가 대단한 건지.
의사소통의 목적은 자유와 연대를 위해서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 얘기하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소통이 필요하다. 거기에 더해져야 할 게 있다고 이 책에서 선생은 말한다.
4. 문 화
문화를 화두로 시작할 때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문화의 어원은 무엇인가’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의 어원 라틴어 ‘cultura’(경작하다, 밭을 갈다)에서 나온 말임을 안다.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부터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며, 문화는 공간적인 범위를 갖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문화는 한 사회의 구성원과 함께 발전하면서 조금씩 성격이 달라졌을 터이다.
사회의 성격에 따라서 조금씩 문화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 철학자 아저씨의 말대로 “이제 문화가 권력의 함의적 형용사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예전에 문화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커다란 톱니바퀴의 몫은 아니었다. 그저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거나 일부 상류계층이 사용한 부의 축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현대 문화가 ‘경제와 정략(政略) 결혼’을 했기 때문”에 문화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동력 축이 되어버렸다.
문화, 고급이든 저급이든 간에 이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큰 톱니바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의 소비가 어떻게 될까. 책에서는 흥미로운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소비는 생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문화의 소비를 강요 당하고 있고 쉴 때조차 무엇인가를 하면서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는 설명을 적고 있다.
세계적으로 문화는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과 유비쿼터스 기술 덕분인지 전세계 젊은이들은 같은 문화적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You Tube, 위키피디아, 트위터, Skype, 미니홈피, 블로그와 같은 양방향 인터넷 서비스가 그렇다. 물론 전 세계 젊은이들이―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기는 불평등의 문제는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의논이 필요하지 않을까―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다. 거리와 공간이 멀어서 소통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이제 전 세계적인 질서를 꿈꾸고 스케치를 그려봐야 할 때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과 문화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IT와 인터넷 기술 덕분에 인간의 삶은 지역(local)을 초월하여 전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삶과 문화, 그리고 공유하는 세계는 조화와 질서―Cosmos―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5. 인 간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그랬을까. 눈이 한 문장을 훑고 지나갔을 때, 분명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한 번 그 문장에 눈길이 끌려갔다.
인간은 계기를 통해 배운다. 꼬마 시절, 즐겨봤던 <드래곤볼>이란 만화에서 주인공 손오공의 성장을 보며 느끼던 쾌감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손오공은 매번 강력한 적을 마주하고 싸우며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가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엄청나게 강해진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단련시킬 뿐이다.”라는 말이 여러 번 생각났다.
사회에는 2:8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다. 20%의 열심인 소수와 80%의 보통의 다수. 경제 성장원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노동력에서 대량 생산으로, 다시 정교한 기술력으로,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기술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창의력, 창조력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동력,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성원이 점차 줄어가고 있는 듯하다.
농업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경제구조에 소속되어 생산자로 참여한다.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나 관리자가 되어 생산자로 참여하고, 일부 구성원은 ‘노동 가능성이 있는 실업자’가 된다. 그러나 최근에 강조하고 있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생산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소수다. 창의력이 있는 소수와 평범한 다수의 구조로 재편되는 것 같다. 김용석 선생의 지적대로, 모두가 창조, 창의력을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일부 소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늘 희망을 꿈꾼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 준 불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다. 동물과 같은 직감은 떨어지지만 위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인간적일 수는 없지만,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6. 마무리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때 빛이 나는 존재다. 인간, 인류는 지금까지 지구 위 작은 땅뙈기에 정착하고 문화를 경작해왔다. 동양에서 만들었든, 서양에서 만들었든 지구촌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지구의 문화다. 지금 까지 인간은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여태까지 만들고 쌓아 온 문화의 힘으로 극복해 냈다.
이 책은 2000년에 초판, 10년이 지난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10년 전에 예측했던 김용석 선생의 생각이 거의 현실과 맞아가는 듯하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렇듯 무의미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p.285)” 고민한다.
끝 없는 시간 위를 개인마다 주어진 만큼 조금씩 걸어가며,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로부터 반짝이는 깨달음을 얻고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에서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때, 조화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각 개인의 삶이 아름답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뜨거운 커피 여러 잔을 마셔야 겨우 정신을 놓지 않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주석의 무게와 개념으로 주고 받는 공놀이는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마음 속에 굵은 앙금이 하나 생기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