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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970년대였지 싶다.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 역사상 인물로
이순신장군과 신사임당이 뽑혔던 것 같다. 이순신장군은 나라를 구한 인물로, 그리고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우리가 따라 배우도록 국가가 앞장서서 교육했다는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속셈은 우민화의 일환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당시에는
나라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이순신장군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그리고 신사임당과 현모양처를 동일시 하면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순신장군이나 신사임당에 대해서 국가가 역사를 왜곡하거나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떤 부분은 무시하고 또 어떤 부분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유달리 강조했을 뿐이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 인물로 신사임당을 꼽을 수가 있다. 화가였던 그녀가 시대에 따라 어머니로, 현명한 아내로 그리고 효녀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으로 재조명
되었다. 물론 그만큼 재료가 많았기 때문일 게다. 여성의
권리가 제한되던 시절 그녀는 그림으로 큰 성취를 이루어냈고, 또 율곡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율곡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신사임당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1551년부터 근대이전까지 사임당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는지를 그녀의 작품과 학자들의 글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 태어나 1551년 서울에서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열아홉 살이던 1522년 이원수와 혼인했다. 자식은 4남3녀를 두었고
율곡은 5번째 자식이었다고 한다. 율곡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을 때 정1품 정경부인에 추증되었고, 율곡이 서인의
종주로 추대되면서 그녀는 부덕의 상징이자 현모양처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화가라는 사실은 사임당 담론에서 중요한 자원이라고 한다. 근대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임당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그림을 매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사임당에 대해 얘기를 한 사람들은 모두 그림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여성관 등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사임당의 그림이 처음 세상에 소개된
것은 그녀의 나이 45세 때였다고 한다. 소세양, 정사룡, 어숙권 등 당시의 문인들은 시문이나 발문 등을 통해 시대를
대표하는 산수화가로 신사임당을 꼽았다. 유교적 남녀역할론이 작동되는 사회였음에도 이들은 여성의 능력을
편견 없이 서술했다고 한다. 사임당에 관한 자료로는 율곡이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어머니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저술한 [선비행장]이 있다. 사임당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여기에 근거하며 보태거나, 빼거나, 강조하거나,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재구성되었다고 한다.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지난 17세기가 되자 사임당의
그림은 율곡과 결부되어 서술되기 시작했다. 율곡 선양을 위한 조건으로 사임당이 부각된 것이다. 김장생은 [율곡행장]에서
사임당을 유교적 부덕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였으나 그림이야기는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유교관과는 맞지 않아서이다. 그 후 사임당을 이상적인 어머니로 부각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송시열이었다. 그는 사임당을 그림을 소재로 삼아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구현한
여성으로 연결 지었고, 이는 이후 폭발적으로 발화된 사임당 담론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림을 놓고 이야기하지만 그림을 논하기보다는 가부장적 가족질서에 순응하는 여성상으로서의
어머니역할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자 사임당은 유교적 부덕에 충실한 여성이란 프레임으로 재배치되면서 그림이 그 매개가 되었다. 사임당의 초충도가 시경에 나오는 시 [초충]을 형상화한 것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중국 문왕의 어머니가 지은 시를
본떠서 그린 것이라는 등 실제로부터 멀어지면서 점점 추상화 되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북송대의
성리학자 정호, 정이 형제의 어머니이자 부덕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여성인 후부인에 비유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발휘하는 신사임당의 이미지 중 하나는 자녀교육에 성공한 어머니상이다. 그러나 7명의 자녀들 중 사임당 사후에 어머니를 기억한 것은 율곡의 [선비행장]뿐이며, 그나마 자녀교육과 관계된 내용은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곧바로 꾸짖는다'라는 내용뿐이라고 한다. 이런 사임당을 자녀교육과 연결시킨 것은 율곡의 사후 전개된 율곡과 사임당 높이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장생이 [율곡행장]에서 언급한 용의 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는 말이 지속적으로 인용되면서 사실화되어 갔으며 이는 태교이야기로 발전되었다. 태교에 성공한 어머니로 역사에 이름을 전하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고자 지었다는 당호 사임도 이렇게 태교와
연결되면서, 사임당은 중국 고대의 성녀들과 동일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사임당의 이야기가 풍부해지면서 효녀의 이미지, 교육가의 이미지도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에 관해 시대마다 달리하면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우선 그녀가 매력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가부장적 질서아래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사임당에게 자신이 원하는 인물상을 투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까지도 이어졌다. 1970년대 민족중흥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에게 신사임당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