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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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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주의 운동이었다. 나폴레옹을 필두로 한 운동의 흐름은 전 유럽에 널리 퍼졌으며, 이는 머지 않은 훗날 자본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운동의 시초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하지만 결코 현실화 되긴 어려운 진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어렵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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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주의 운동이었다. 나폴레옹을 필두로 한 운동의 흐름은 전 유럽에 널리 퍼졌으며, 이는 머지 않은 훗날 자본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운동의 시초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하지만 결코 현실화 되긴 어려운 진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어렵지 않게 우리는 그의 이름을 교과서에서 듣곤 했다. 장 자크 루소. 그 진실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천부인권설 등의 단어를 외우기에 급급했던 지난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일컫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사상에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혁신적이고도 혁명적인 부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는 디드로나 볼테르 등 루소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었던 이들로부터도 말도 안 되는 거지 철학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로서는 굳이 루소에 대해 비판을 한다면, 그 내용 보다도 형식에 대한 것들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공상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예전과는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진보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신분제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루소가 살았던 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소유 여부 혹은 소유 정도에 따른 또 다른 불평등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틀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본 책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책은 제네바 공화국 의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편견없이 받아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 이후에 1,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다. 루소는 불평등을 신체적 불평등과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은 나이, 건강, 체력 등에 있어서의 차이로 사회 안에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적/정치적 불평등은 타인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타인의 손해에 기초해서 생겨나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신체,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로 인하여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의 신체적 불평등 역시도 사회에서 용납되어진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루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의 불평등에서는 논의 외적인 요소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는 미개인과 현 인류를 비교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미개인의 본능에 근거한 삶이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야기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 보다 더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듯 했다. 루소는 소유가 없는 곳에서는 바르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로크의 격언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은 미개인과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 즉 자기 발달의 가능성을 내포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인간은 다른 종의 동물들에 비해 약한 육체를 타고 났으나 머리를 쓸 줄 알았기에 일방적으로 자연에 순응하거나 도태되지 아니하며, 자연을 이용해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존재였다. 루소는 인간이 정신과 이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해 서술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루소는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농업에 있어서 좀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종 농기구를 만들고, 자신의 것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화폐를 만드는 과정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루소가 보았듯이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일정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 비해 국가의 규모가 커진 당시 사회에 적용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은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국민들에게 중요한 법률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진 것이 아테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스파르타의 제도를 이상적인 제도로 칭송하고 있는 듯 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약간 의아했다.) 대신, 그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혜로운 행정관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그 국가가 멸망치 않고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행정관들에게 위임된 국민의 권한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설명했다. 그는 아버지는 아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들의 주인일 수 있으나, 그 기간이 지난 후 아버지와 아들은 평등해진다고 보았다. 즉,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있으나 일방적으로 복종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아동을 개별적인 주체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국가 권력, 즉 행정관이 국민들에게 절대적이지 아니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이들이 진정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선거에 출마한 이들 중 국민 개개인의 마음에 드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선거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무효표를 던져야 하는가? 이는 선거가 지닌 하나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약 루소가 오늘날의 정치를 본다면, 계속적으로 가중되는 불평등의 참혹함을 두고 그는 무엇이라고 할지 궁금하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생산성의 추구를 위해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속성을 모두 망각한 듯 하다. 평등에 대한 논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나마 존재하는 자유 역시도 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한 자유만이 인정된다. 특히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평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일종의 금기로 여겨졌다. 평등한 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식의 추상적인 논의를 벗어나 구체적인 계급을 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폐쇄적인 체계 속에서 어쩌면 루소의 인간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혁명적, 진취적인 무언가로 남아있지 않은가 한다.
q*****2 2003.11.24.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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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진단은 현재도 유효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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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나마 접한 것은 고등학교 사회 혹은 정치경제 시간이었으리라. 루소가 어쩌고, 로크가 어쩌고, 홉스가 어쩌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을 짝짓기 하며 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이들의 이름과 저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루소를 제대로 다시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서양근대철학사 시간.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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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나마 접한 것은 고등학교 사회 혹은 정치경제 시간이었으리라. 루소가 어쩌고, 로크가 어쩌고, 홉스가 어쩌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을 짝짓기 하며 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이들의 이름과 저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루소를 제대로 다시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서양근대철학사 시간. 그러나 철학에서 루소는 칸트나 헤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대한 사상가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던지라 이때도 그저 어설프게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대학 4학년. 나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학사논문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의 저작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에밀>을 읽고, 역시 동일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다. 다음의 독서계획은 역시 그의 <사회계약론>이다. 책세상문고에서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이라는 그의 또다른 저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싶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본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함께 언급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따로 떼어 다시 쓴 것이다.

고등학교 때 루소를 알고 있던 것은, 그가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견해에 맞서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선악의 개념을 모르고 있는 백지상태에 불과했고, 따라서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해졌다. 그는 인간은 본래 자연상태에서 따로따로 행동하며 살았으나 이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그들간의 계급이 생겨났고 따라서 누구는 핍박받고 누구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예술과 학문, 문화가 발달해 사치가 극성을 이루고 이런 사치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한번 악해진 다음에는 다시 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18세기 당시에는 이러한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고 루소의 생각은 지금 사회에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 라는 그룹에 속하는 볼테르, 디드로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 저작으로 인해 볼테르로부터 '거지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루소가 볼테르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은 그저 흘려버릴만한 대목이지만, 루소와 볼테르 둘 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에도 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그의 관용론이 현대 사회에, 우리나라에,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타난 그의 생각 또한 지금에서 다시 되돌려볼만한 요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은 네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시민, 부르주아, 주민, 하층원주민이 그것이었는데, 루소는 최하층에 속하는 계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환경적 영향이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소는 사실 당대에도 이 저작으로 인해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주목을 받았지 칭송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칭송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진 뒤였다. 프랑스 혁명의 힘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후에야 제대로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대개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이 저작은 그다지 체계적이고 눈에 쏙 들어오는 글은 아니다. 번역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 도입부에서 이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사회계약론>등에서 구체화되는 루소의 정치사상 체계의 서론적 성격을 갖는 저작이라 아직 체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된다. 또한 저자의 난해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루소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고, 이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목 또한 들어봤을 법하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고전 중 이 책이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번역본의 부재도 그에 한몫을 했을 것이나 이번에 책사상문고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d*****t 2006.02.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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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로 묶여버린 인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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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였다. 대학학부때 읽어보려고 시도도 하지않았던 루소, 그를 처음 만나는 책이었다. 홉스와 로크 루소를비교해 가며 배웠던 고등학교 사회시간을 빼 놓고는 대학에서도 루소는 거론되지 않았다. 울 학교 서양정치사상사를 듣지 않은 내 잘못도 있곘지만,사상사 그 한과목을 제외하고는 당췌 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울학교 정외인의 특징이기도 했다.(어설픈 변명이다--[;)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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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였다. 대학학부때 읽어보려고 시도도 하지않았던 루소, 그를 처음 만나는 책이었다. 홉스와 로크 루소를비교해 가며 배웠던 고등학교 사회시간을 빼 놓고는 대학에서도 루소는 거론되지 않았다. 울 학교 서양정치사상사를 듣지 않은 내 잘못도 있곘지만,사상사 그 한과목을 제외하고는 당췌 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울학교 정외인의 특징이기도 했다.(어설픈 변명이다--[;) 루소. 처음에는 읽기 어려웠는데 점점 빠져들었다. 그가 어떤사유를했는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빨려들어갔다.맑스를먼저 알았기에, 루소를 읽을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맑스가 지적한 인간 사회의진보를 루소가 가장 먼저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의기원을 거듭거듭 올라가면서 문명인과 미개인을 설명하고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알아낸 루소. 그는 우리가 불평등해 진것이 사유재산이라고 명명한다. 그것은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이루어 진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을 축적하고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타고난 무한한 권리를 소유권으로 바꾸고. 자연인이 가지는 누구도 침범 할 수 없는 자유를 시민의자유로 바꿔버린 무지몽매한 민중들에게 루소는 외쳤다. 자유를 얻기 위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는게 느껴지나...결국 그 책 에서 얻은 것은 의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으며 자연인으로서 우뚝 솟아있음이, 인간이 가장 자유로울 때라는 것, 물론, 기술의진보를 퇴보하자는 주장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p******9 2004.02.0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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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존경의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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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루소라는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을 거다. 그리고 조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장 자크 루소라는 풀 네임을 알 것이며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도 어렴풋하게 기억날지 모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저서 '에밀'로 유명하지만 왠지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더 친근해서, 한 번 공략해보리라 마음 먹은지 몇 년만에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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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루소라는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을 거다. 그리고 조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장 자크 루소라는 풀 네임을 알 것이며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도 어렴풋하게 기억날지 모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저서 '에밀'로 유명하지만 왠지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더 친근해서, 한 번 공략해보리라 마음 먹은지 몇 년만에 드디어 읽어내려갔다. 이 책은 프랑스의 디종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공모전 주제 '인간 사이의 불평등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에 대한 논문이다. 이미 '학예론'으로 명성을 얻은 바 있던 루소는 더 이상 명성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저술해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당연히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적인 내용이었고, 수상은 커녕 박해를 받는다. 결국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프랑스에서 발간되지 못하고 루소의 조국 스위스에서 출판된다.

 

홉스는 '만인에 의한 투쟁상태'니 어쩌니 하며 인간은 자연상태로 놔두면 투쟁만 하니 반드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이론의 바탕에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소는 이를 부인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성선설을 지지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루소는, 인간은 미개인의 상태에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고 할 뿐이다. 1부에서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인간 사회의 기원을 살펴 올라가는데, 그 내용이 너무 길어 읽는 내 입장에서는 '대체 이 미개인의 상태를 뭣 때문에 이리 길게 서술하는거야'라고 투덜거릴수 밖에 없었다. 분명 1부는 지루하다. 1부 뒤에 가서야 살짝 내비치는 인간 불평등은 바로 개별적으로 살던 인간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추리해낼 수 있다. '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니 소유가 시작되어 불평등이 발생했다는 거군' 하고 말이다. 물론 그 말도 맞긴 한데 이보다 더 근원적인 단계가 하나 끼어있다. 그건 바로 '존경'의 감정이라는 거다.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수밖에 없고, 강자과 약자가 비교되며 매력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비교된다. 그리고 물론 이런 개인적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데,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초의 불평등을 일으키는 근본감정이 바로 이 '존경'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 존경을 바탕으로, 존경받는 자가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리하여 인간 불평등이 발생한다는게 루소의 생각이다.

 

사실, 이 책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대표적 사상이 별로 녹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정도만 읽어도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이 어떻게 발상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이전의 상태, 즉 미개의 상태, 인간이 소유로 평가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평가되며 하루 하루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마 루소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도 알고 있고, 루소도 알고 있었겠지만 인간은 퇴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앞으로도 영영 자연으로 돌아갈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루소나 홉스나 인간에 대해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었을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형성된 1단계가 부자와 빈자, 2단계가 강자와 약자, 3단계가 주인과 노예라고 정의해서 말하는데,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면 현재 21세기에서 이 생각이 딱히 새롭다 할 것도 없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알게 모르게 무의식중에라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루소는 18세기 사람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로 옮겨가 살았고 이 논문을 썼던 때는 한창 루이 시리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왕정시대를 평정하던 시기이다. 천부인권이고 권리장전이고 인권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97%의 평민들은 가축과 하등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고 또 그런 취급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축들은 노예적인 삶을 살기만 할 뿐이지만, 평민은 거기에다가 세금까지 더 내야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루소라는 사람이 인간 불평등은 이러하게 기원했는데 기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평등한 상태를 재구축하려면 뒤짚어 엎고라도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라는 것이 사실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특권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 동조한 국민들은 어느정도 따라야하지만 그 불평등이 지나칠 경우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국민의 빈곤한 삶과 대비되는 왕족의 사치스런 삶을 드러내며 이런 불평등은 결국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이 논문이 어찌 그 시대 기득권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겠는가? 가히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상적 토대라고 할만한 책이다. 루소가 만약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더라면 기득권자들에게 '사회이 혼란을 야기하는 반역자'라고 하여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2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혀도 시대적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 사상에, 아직 인류는 그 오랜시간을 더 살았어도 딱히 발전된 사회구조를 구축하지 못했음에 씁쓸하기도 하다. 그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보면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불평등을 합법화함을 초월해 미화시키는 자본주의와 국경을 뛰어넘는 무한 경쟁시대를 사는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속에서 국가에 쇠사슬을 채이고 자유를 안정에 팔아버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사실 평범한 국민에게 갑자기 절대적 평등과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채 혼란한 삶을 영위하겠지만 인류가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 방종의 상태를 못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마치, 억압되었던 고3이 방탕한 대학생활을 조금 만끽한 후에야 정신차리고 공부를 하는 이치와 약간은 비슷할까.

h******0 2009.06.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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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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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읽어내려가기가 어려운 논문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루소가 논문공모에 제출한 글인데 낙방이었다.   가재가 게편이듯이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편일 수는 없으니까.   나도 재대로 이해를 못했기에 북다트-요즘 애용하고 있는 책갈피인데 비싸게 주고샀지만 마음에 든다-로 꽂아놓은 부분의 문장만 적어놓기로 한다.   인간 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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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읽어내려가기가 어려운 논문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루소가 논문공모에 제출한 글인데 낙방이었다.

 

가재가 게편이듯이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편일 수는 없으니까.

 

나도 재대로 이해를 못했기에 북다트-요즘 애용하고 있는 책갈피인데 비싸게 주고샀지만 마음에 든다-로 꽂아놓은 부분의 문장만 적어놓기로 한다.

 

인간 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 상태만을 보여주고 있다. ----- p 40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 옷이나 집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왔으며,

게다가 어려서부터 견뎌온 생활 양식이 어른이 되니까 견디기 힘들더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p 59

 

타잔은 집이 있는가. 없다. 숲속이 그의 집이다.

실로 집을 만들거나 옷을 만든 사람이 필요한 존재였나라는 생각은 든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집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사회는 없었을지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약한 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해진다. --- p80

 

부모한테 의존하는 아이는 항상 약하다고 생각한다.

등 따시고 배 부를 때 오히려 더 쉽게 나약해지더라.

살찌고 게을러지고 반성해야겠다.

 

현존하는 인간에게서 자연 상태의 근원적인 면모와 문명에 의해

형성된 인위적인 면모를 구분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 p149

 

이제까지 난 성악설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바뀐게 있는데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태어났을 때부터 선한것을 알지는 못하고 더불어 악한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선함이나 악함이나 다 학습의 결과인 걸까.

 

a*******g 2010.01.22.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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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지 열심히 읽을 수 밖에 없구요 루소의 그러니 아 근데 그거를 아직 정리를 잘 해 놨어요 가격도 저렴하고요 저는 2시리즈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가격이 저렴 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편하구요 또 굉장히 얇고 간편한 내용이라서 계속해서 재미있게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너무 재미있는 내용이고 알차네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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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지 열심히 읽을 수 밖에 없구요 루소의 그러니 아 근데 그거를 아직 정리를 잘 해 놨어요 가격도 저렴하고요 저는 2시리즈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가격이 저렴 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편하구요 또 굉장히 얇고 간편한 내용이라서 계속해서 재미있게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너무 재미있는 내용이고 알차네요이기 때문에 정말이지 편안한 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꼭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정말이지 굉장히 집중해서 읽으면 열심히 또 내용을 따라가면서 공부가 되는 그런 멋있는 내용입니다
s******u 2017.05.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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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간 불평등 기원론 -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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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자기가 다른 사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 이상으로 노예인 것이다"        -루소 『사회계약론』-노비들이 신분사회를 수긍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소박한 행복을 누리던 것을 현대 자유시민(?)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듯이후 새로운 사회의 사람들 역시 평등과 자유의지로 포장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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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 이상으로 노예인 것이다"        -루소 『사회계약론』-

노비들이 신분사회를 수긍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소박한 행복을 누리던 것을 현대 자유시민(?)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듯
이후 새로운 사회의 사람들 역시 평등과 자유의지로 포장된 불평등과 지배에 수긍하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현재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나 역시 평소에는 작은 일에 감사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소박한 민중이지만
36도를 넘나드는 더위조차도 인내심을 시험하며 그저 견뎌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수없이 체감한다. 
불평등한 현실을!

그래서, 불평등의 원인이 사회구조에 있음을 주장하여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인 바탕이 되었던
루소의 인간적인 애정과 분노를 들여다 본다.

●머리말
- 자연법의 성립요건
인간의 본성이 법의 강제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이성 이전에 인간의 가장 단순한 작용인 자기보존감성적 원리 사이에서 규칙이 만들어 져야 하는데
자기보존 욕구를 제어 할수 있는 것은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동정심이기 때문이며,
인간에 대한 연구 없는 이성적 지식을 비판함.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어떤 종류의 해도 입혀서는 안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인듯 하다.

 

● 본문

-인간의 근원적인 두가지 불평등(자연적(신체적) 불평등,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에서

후자가 전자보다 우위에 선 시기와 계기를 분석함.

 

◎ 1부: 자연상태의 파악

-자연상태에서는 신체적 불평등이 있어서 약한 자들은 도태 될지라도 인간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이루어 지지는 않았으며 

자연상태에서는 선함을 모르므로 악함도 모르고, 자기애 이전에 연민(자신을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으로 

강제적인 규제 없이도 종 전체의 보존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기술발달과 사회화로 인해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게 되어 연약해 지고 비굴해 져서 

서로간에 이해를 성립시켜줄 규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감정적인 표현들.... 맘에 든다 ㅋㅋ)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고

"너는 죽고 싶으면 죽어라. 나는 안전하다"라고 몰래 중얼거린다.

..중략..

살해되는 자와 일체가 되려고 마음속에서 반항하는 자연(동정심)을 억제하기 위해서 철학자는 자기 귀를 틀어막고 조금만 이치를 따지면 된다.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휼륭한 재능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무턱대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폭동이나 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모여드는 것은 하층민 뿐이며,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슬쩍 피한다.

싸움을 말려서 점잖은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천민이나 거리의 아낙네들이다.

 

그러므로 연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함이 분명하다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부 : 불평등의 진행

-도구사용, 공동생활, 언어의 성립으로 불평등이 시작되고 이에 소유개념의 생성과 더불어

타인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상대적인 가치판단이 이루어져 소외(실체와 외관이 다른 상태)로 이어짐

 

 사람들은 이제 여러가지 사물들을 바로 보고 비교하는 데 익숙해 진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쁩에 대한 감정을 낳게 된다

..중략..

정신 속에 일종의 부드럽고 달콤한 감정이 스며들고, 사소한 반대에 부딪쳐도 심한 분노가 느껴진다.

사랑과 함께 질투가 싹튼다. 불화가 승리하고 가장 부드러운 정념이 인간의 피로 얼룩진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전제정치가 아버지의 권력에서 유래했다는 잘못된 논리로 군주에 의한 지배가 정당화 됨

 백성들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군주의 것이거나 군주가 그렇다고 주장함에 따라,

분명 자기 재산임에도 군주가 적선하듯 주는 것을 은혜인 양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다.

군주가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백성을 살려두는 것이 은총을 베푸는 것이 되었다.

 

-법률에 의한 사회구성으로 지배와 약탈이 정당화 됨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인간에게 예속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있다고 하는 것에 반론

 실제로 그들이 억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 그러니까 그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재산이나

자유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인간을 선출했겠는가?

..중략..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예속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있는지는 노예가 된 인민의 전락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로운 인민이 억압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행한 기적적인 행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자유가 소유권이 아닌 이유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할 권리까지 있는지는 적어도 확실치 않다.

양자 가운데 한쪽(자유)를 제가하면 인간의 품위는 떨어지고, 다른쪽(생명)을 제거하면 인간의 존재는 소멸된다.

 

 정리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예속관계를 은폐한다고 하는데

아래에 의하면 이미 우리는 "드러나게" 노예였다.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 1단계이고 행정권력의 제도화가 제 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 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그리고 경제 기본원리를 감정을 담아 언급하면서

(*효율성(Pareto Efficiency) : 사회구성원중 적어도 한사람이 불행해지지 않고는 한사람이 행복해 지지 않는 상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담함과 비참함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몇몇 세력가와 부자가 권세와 부의 절정을 누린다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만큼 후자가 이것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민중이 비참하지 않게 되면 부자와 세력가들은 상황을 바꾸지 않고서는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사회구조의 변증법적 순환을 설명한다.

(더불어 은근한 투쟁의 불씨를 ...... "엎어버려. 그건 특별하거나 대단한게 아니야. 당연한거야" 라는 말투다. ㅋㅋ)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분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로지 폭군만을 갖게 된다.

..중략..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여기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갖지 않으며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아무런 규범도 갖지 않으므로 선의 관념이나 정의의 원리가 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만 최강자의 법률로, 즉 하나의 새로운 자연상태로 귀결되어 있다.

..중략..

오직 힘만이 지탱하고 있었던 그를 타도하는 것도 힘뿐이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경기도 어느지역 포도농장을 지나다가 향긋한 산지의 포도향을 못이겨 두박스 사면서 현금이 없어 카드결재 되냐고 물었을때

 "그냥 가져가시고 입급해 주세요" 하면서  내 이름과 전화번호도 안받으신 채로 (도데체 뭘..믿고) 

 계좌번호 하나만 딸랑 적어주신 아저씨를 떠올리며

 인간을 긍정하고, 자연에 어긋남없는, 자연에 조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 루소의 논리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미개인은 안식과 자유만을 추구하고 한가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아타락시아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 땀을 흘리고 불안해 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때때로 살아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위해 죽음으로 내달리며, 불멸을 찾아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증오하는 세력가와 자신이 경멸하는 부자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영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시의 비굴과 그들의 보호를 거만하게 자랑한다.

자신의 노예 상태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는 그 노예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얘기한다.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느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 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불평등한 여름 (지식채널e) 

m******5 2014.03.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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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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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들 단적으로 불평등을 나타내는 신조어인 금수저, 흙수저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간극을 제도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줄여나갈 수 있을 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그러한 방안을 고민하는 데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밀'과 같은 다른 저서들과 함께 고려하여 생각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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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들 단적으로 불평등을 나타내는 신조어인 금수저, 흙수저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간극을 제도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줄여나갈 수 있을 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그러한 방안을 고민하는 데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밀'과 같은 다른 저서들과 함께 고려하여 생각할 수 있는 루소의 주장인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대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겠지만...  읽고 저자의 사상을 온전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판단과 이해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현대의 우리에게도 루소의 사상은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8*****k 2017.08.2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eBook
진보가 과연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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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본서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사회계약론을 말했던 루소의 저작에 관심이 있어서 본서를 도서관에서 주섬주섬 읽었던 기억이 있다. 길지 않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는데, 크게 와닿는 부분이 없었다. 그냥 자연상태에 대한 예찬.  우리에게 진화는 중요한 테제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창조론이 서서히 그 힘을 잃었고 지금도 애쓰고 있지만, 실제로 다시 그리스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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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에 본서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사회계약론을 말했던 루소의 저작에 관심이 있어서 본서를 도서관에서 주섬주섬 읽었던 기억이 있다. 길지 않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는데, 크게 와닿는 부분이 없었다. 그냥 자연상태에 대한 예찬.

 우리에게 진화는 중요한 테제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창조론이 서서히 그 힘을 잃었고 지금도 애쓰고 있지만, 실제로 다시 그리스도가 오지 않는 한 종교는 그 힘을 다 할 것이다. 적어도 어느정도 먹고 살만한 곳에서는.  루소는 진보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문명을 옳게 보지도 않았다. 문자 그대로 야만은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지만, 평등이라는 관념 하에 야만은 이상적인 것이며, 문명은 패악한 것이다. 소유가 생기고, 강자와 약자가 생기고, 그리고 주인과 노예가 생긴다. 루소는 이 과정을 역사의 상상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에밀'에서도 중요시 여긴 자연상태는 본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자연상태에 대한 해석은 명확하지 않다. 모두 동의할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다른 자연상태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자연상태는 상상이라는 증명되기 힘든 상태이기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진보라는 과정도 루소의 것이다. 물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진화라는 과정을 호모 사피엔스의 폭력적인 과정으로 서술한 하리리의 '호모 사피엔스'가 떠오른다. 진화론자의 역사적 분석 속에서 진화의 폭력성은 18세기 루소에게는 인간 사회의 진보의 폭력성으로 그려진 것이다. 루소의 생각에 동의하든 하지않든, 적어도 역사는 그렇게 보인다. 강자가 있고, 노예가 있고. 현대도 모든 사람이 그 자유를 희생해서 품위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그 품위의 외면 이후에는 생명을 포기하는 인간을 소멸 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문명은 진보하더라도 그 인간성은 소멸하고 있다. 250여년 전에 쓰여진 상상속의 이야기가 현실 속에 전개된다는 차원에서 루소의 선견지명은 예리하기만 하다.

 

YES마니아 : 로얄 b*****c 2016.05.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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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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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향연속에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대한민국은 여느 나라와 비교해도 훌륭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보다 더 낮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히려 가난한 이름모를 아프리카 나라에서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들이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루소의 책을 읽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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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향연속에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대한민국은 여느 나라와 비교해도 훌륭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보다 더 낮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히려 가난한 이름모를 아프리카 나라에서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들이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루소의 책을 읽어야 할 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는 점점 커져가고 채워도 끝이없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헛수고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공허하게만 하는데, 루소의 고찰을 살펴보아야 할 때다. 

YES마니아 : 골드 c***b 2015.05.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