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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가 견디어야만 했던 무려 27년에 달하는 고통의 세월이 없었더라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는 세상의 지탄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그는 변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제 몫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 부각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 남았다. 한 개인의 인간 승리가 곧 모든 문제의 종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암흑과도 같은 시간 동안 소중한 이를 잃고 마음의 상처를 얻은 이들을 보듬을 수 있어야 진정 성숙한 사회라 말할 수 있다. 인종차별 정책이 종식되고 212년형을 선고 받은 인물이 하나 있다. 히틀러와 동급이려나? 그가 감옥에서 보낼 시간의 무게는 상상하기 버거울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를 머리에 뿔 달린 악마 즈음으로 여길 순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이미 악은 평범하다고 말한 탓이다. 유진 드콕, 그는 가정에서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의 아이들은 제 아버지를 사업가로 소개했다. 아내 또한 그가 실제로 무슨 일을 수행하는지까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훗날 이혼을 청구했다는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얼지 알 듯도 했다. 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TRC)에서 일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졌으나 언제나 용두사미였던 우리나라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조금 달랐다. TRC는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보다는 희생자 가족에 주목했다. 어떠한 행위로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가 개입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이었다. 평생 분노와 무기력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해자와 만나고, 나아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자의 역할이었다. 살인자다. 내 소중한 사람을 죽였고, 그것 또한 공무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주어진 일을 행했을 뿐이라는 식의 자기변호가 또 다른 분노를 부르리라는 건 누구나 짐작 가능한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과정에 함께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잊는 게 결코 아님을 그는 잘 알았다. 유진 드콕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그는 ‘악의 화신’이라 불렸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나치에 동조했던 많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온몸의 털을 제거당했으며, 같은 옷을 착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개성을, 더 나아가 인간성을 말살 당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몸뚱아리로 전락한 유대인들을 죽이는 일이 어찌 살인이란 말인가. 나치 군인들의 눈에 유대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마 유진 드콕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검은 피부의 소유자에 연민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유진 드콕의 손을 ‘방아쇠를 당긴 손’으로 인식하는 저자 또한 어떤 차원에서는 그러했다.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기에 앞서 살인자로서 유진 드콕을 인식하는 건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 대다수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유진 드콕으로부터 인간성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는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이 인물도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음을 저자는 눈치챘다. 악한 인물이라 하여 단 1초도 예외 없이 악한 건 아니다. 저자에게 혹시 주변에 자신으로 인해 죽은 이가 있는지를 묻는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그 또한 용서를 빌고 싶었고, 용서 받고 싶었으리라. 난 그렇게 믿는다.
용서는 진심 어린 공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때때로 우리는 어떠한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한 채 그저 용서할 것을 요구 받는다. 마음 없는 용서는 기만에 불과하다. 공감 없는 용서는 피해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다. 우리 사회에, 어쩌면 내 안에도 깃든 폭력성으로 인해 오늘도 누군가는 죽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만이 살인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