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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혼란과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한데 규합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일은 영웅만이 감당할 수 있다. 영웅은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무나 다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영웅에 부합하는 자질을 타고난 사람만이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다. 신라가 기울던 무렵을 떠올려 본다. 백제의 세련된 귀족문화, 고구려가 품은 대륙의 기상에 비한다면 신라는 미미했다.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어쩄건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했으며, 천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무너지지 않고 존재했다. 몰락은 마치 다 차오른 달이 서서히 기우는 것과도 같이 일어났다. 권력은 부패해 제 배 불리기에 급급했으며, 대다수의 민중은 스스로 제 생존을 해결해야만 했다. 여전히 신라를 대표하는 천재적 인물로 우리에게 불리곤 하는 최치원은 이러한 시기를 살다 갔다.
그의 신분은 육두품이었다. 성골과 진골에 의해 가로막힌 유리천장. 최치원의 부모는 아들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봤던지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최치원을 당나라로 유학보냈다. 아마도 육두품이라는 신분이 지닌 제약으로 인해 아들이 재능을 충분히 꽃피우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그리 했던 것이리라. 낯선 땅에서 십 년 안에 과거에 급제해야만 했던 최치원은 주어진 시간을 다 사용하기도 전에 목표를 달성했다. 이후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당나라에서 그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저자는 최치원을 좇아 대륙으로 향했다. 원래는 함꼐 하려던 인물이 있었지만 무슨 사정에서였던지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는 혼자만이 올랐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조선족이 가이드를 자처했다. 그런데 최치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낯설어 했다. 가이드에게 너무 깊은 지식을 요구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는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무지는 때론 왜곡 못지 않게 두려운 결과를 낳는다. 중국 국적을 가진 가이드가 영영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 내 얼굴에는 난감함이 서렸다.
한 때 최치원은 교류의 상징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양저우와 부산이 서로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하는데 매개체 역할을 한 것 또한 최치원이었다. 하지만 도시 간 교류는 일종의 유행과도 같아서 이젠 예전처럼 활발하지가 못하다. 한 때 부푼 꿈에 취해있던 최치원의 삶을 향한 열정이 차츰 식어가는 것도 이와 같았을 듯하다.
저자는 현준이라는 인물에게 최치원을 투영했다. 그는 병약했기에 학교를 남들처럼 다니지 못했고, 검정고시로 이른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아직 미성년자여서 동기들과의 어울림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는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여러 모로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으므로 남들이 100을 행할 때 자신은 1000, 2000을 행하겠다는 인백기천의 자세를 잊지 않으려 들었다. 그런 그에게 최치원의 야망 꺾인 삶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양저우로 떠나기 불과 여덟 시간 전에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아 좌절감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 이곳저곳을 기웃거린 저자는 이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렸다. 신라로 돌아와서도 지방관 이상은 오르지 못한 최치원이다. 그가 도교에 빠져들고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더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게 된 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지금도 함양에 가면 울창하게 우거진 수풀을 만날 수 있다. 최치원 시절에 조성한 제방이라고 했다. 그가 지방관을 역임했던 고을들은 어떠한 형태로건 그의 치적을 찬양하고 있다. 내려놓기에는 너무도 허망한 삶, 바라던 성공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현준은 그런 최치원의 삶으로부터 또 하나의 교훈을 읽어냈다. 시대를 읽어내지 못한 채 그저 성공만을 갈망했던 지식인의 초라한 결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최치원은 제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난 영혼없는 공무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마찬가지겠으나 공무원들도 제 승진을 위해 노력한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만이 목표인 사람은 일에 매몰돼 그 일이 품은 사회적 의미 따위를 고려할 여력이 없다. 그렇게 지난날 고위직에 오른 이들은 친일을 서슴잖았다.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었고 독재를 용인했음을 우린 결코 좌시해선 안 될 것이다.
다시 최치원이다. 성공을 좇다가 실패를 만났고, 그처럼 살진 말아야지 다짐을 했지만 우린 최치원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가 해인사에 머물 때마다 들었을 물소리는 여전하다. 세상 온갖 번민을 씻어주었을 그 물소리로 나 또한 마음의 혼란을 덮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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