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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은 김춘수 님의 시를 읽으며 많은 좋은 시 중에서 [꽃]이 좀 더 친밀하게 다가 옵니다. 어렸을 적엔 그냥 좋다~ 생각한 것이 지금은 참 좋다는 생각이지요. 특히, 그 '알맞다'는 형용사가 썩 마음에 와 닿습니다: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함. 방랑자처럼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웹과 실제를 떠돌다 보면 꼭 그것이 웹이라고 해서 허허롭거나 풍요롭지도 않고 또 실제라고 해서 그와 뭐 표나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비슷한 무게 만큼의 무관심과 호기심과 그러한 와중에 또 가끔은 건지기 어려운 다정한 만남이 있더군요. 어렸을 적 국어 시간에 열변을 토하듯 반복되던 이 시의 주제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 몸짓은 꽃, 의미와 상대적며 빛깔과 향기는 참된 존재의 가치 혹은 본질' 등등.. 대체 국어 시간 시를 가르치는 수업이란 그렇게 해서 과연 '꽃'의 진정을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생각하니 살짝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서정적 자아는 간절한 부름을 기다리지만 그는 그에 앞서 이미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해서 '알맞은' 누군가를 기다릴 자세가 되어 있더란 것이지요.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나를 불러 주었으면 하던 바람이 깨달음을 가져와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불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또 그럴 수 있을지 더럭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먼저 불러 주어야 할 때라고 유려하게 마음을 움직입니다. 까닭은 내가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 상대도 내게 바란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요. 한 사람의 빵을 둘이 먹어도 '함께' 먹었다고 하겠고 두 사람 각자의 빵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먹어도 '함께' 먹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전자가 '희생'이라 한다면 후자는 '나눔'이라 하겠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랑의 교통 또한 어느 한 쪽의 희생이기 보다는 진정한 나눔이어야 한다고 '꽃'은 담담하게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