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동시를 써 오면서 내 동시가 어린이들의 생활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어린이들의 생활 속의 이야기를 쉽게 시로 써 보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사는 골목의 아이들과 몇 년 동안 친구로 사귀었답니다. 놀이터에서 그네도 함께 타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함께하면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이 동시집은 바로 그 골목의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 아이들이 노는 모습, 내가 아이가 되어 바라본 따스한 골목 풍경과 머리에 떠오른 생각 들을 시로 적은 것이랍니다. - 지은이의 말, 「따스한 골목의 불빛 같은 아이들 이야기」 책 앞에 실린 위 글을 읽으면 우리 동시단의 한계와 한계 극복 의지, 그리고 실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먼저 한계라면 우리 ‘동시가 어린이들의 생활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머리 속에 그려진 아이들이 등장할 뿐 실제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말이지요. 이러한 한계는 이준관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동시단이 고스란히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꾸준하게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준관 시인은, 오랜 시력을 고려할 때,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깨달음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들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골목의 아이들과 몇 년 동안 친구로 사귀’며 ‘놀이터에서 그네도 함께 타고’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아름답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성과를 보면 아직 멀었습니다. 시인은 ‘골목의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 아이들이 노는 모습, 내가 아이가 되어 바라본 따스한 골목 풍경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시로 적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골목의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를 찾기 어렵습니다. 가장 많이 노래한 것도 ‘아이가 되어 바라본 따스한 골목 풍경과 머리에 떠오른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조차 ‘내가 아이가 되어 바라본’ 것 같습니다. ‘친구와 같이 집에 갈 때는 / 할 이야기가 참 많다 // 꼬불꼬불 길처럼 / 꼬불꼬불 참 많다’(「꼬불꼬불 길처럼」), ‘친구 이름 부르면 / 창문을 열고 아이들이 / 얼굴을 쏘옥 내밀어요’(「친구 이름 부르면」), ‘창문을 열고 / 아이는 발뒤꿈치를 들고 / 골목길을 내다본다’(「창문을 열고」) 같이 골목을 노래한 시들이 거의 그렇습니다. 다행히 골목 체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는 시가 있기는 합니다. 「겨울 담벼락」 같은 시가 곧 그것인데 전문을 보면 ‘아이들이 발로 툭툭 차고 가고 / 낙서나 하고 가던 / 천덕꾸러기 담벼락. // 그 담벼락 밑에 / 나뭇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요. // 털모자의 방울처럼 생긴 참새들이 / 깃털을 오므리고 / 옹기종기 모여 있어요. // 찬바람을 피해 / 아이들이 해바라기 씨처럼 / 옹기종기 붙어 있어요. // 엄마 포대기처럼 / 포근한 담벼락 밑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이 드물게 성공하는 경우는 섬세한 관찰이 선행한 경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섬세한 관찰은 애정 없이는 불가능할 터 그것은 실천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바짝 다가서 바라보거나 함께 겪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시도 아이에게 바짝 다가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말썽꾸러기의 슬픔 오늘은 일찌감치 숙제를 다 했지요. 길을 묻는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고요. 털 빠진 불쌍한 개에게 “잘 있었니?” 등을 쓸어 주었지요. 혼자 훌쩍이며 우는 아이를 다정히 달래 주었고요. 하기 싫은 어머니 심부름도 냉큼 했는걸요. 그러나 아, 아, 아무도 묻지 않네요. “얘야, 오늘은 뭘 했니?”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