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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을려고 했는데.. 겉표지랑 다르게.. 깊고 무겁네요..
세상의 진실의 끝자락을 핧아본 사람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저도 살짝 핧아보니 지식증가의 달콤함 뒤에오는 고뇌와 공허함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사는건 무엇일까요?
이제 절반읽었는데.. 리뷰를 쓰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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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무엇입니까?".... "상호작용하는 것들의 총체이다"
이 작가의 통계학 교수의 대답으로 미루어보면 철학이든 과학이든 문학이든, 모두 '우주' 에 대한 학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시를 쓰는 특이한 작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힘든) 시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불확실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사실 나에게는 그 시를 이해하는 것이 과학이론들을 이해하기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지만..) 과학의 이론을 일상화시켜서 생활속에서 사람사이의 관계속에서 풀이하는 점이 인상깊었다.
과학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보일 정도로 약간은 억지스러운 설정이 있긴 했지만, 가장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감정조차도 어느정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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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아주 흥미롭게 읽고 가끔 다시 뒤적거리기를 또 몇해.. 오늘 다시 처음부터 펼쳐 읽게 되었군. 참 쉽지 않은, 다시 펼치고 싶은 책이란! 삶이, 생명이, 존재가, 생명 무생명이든 우주의 존재 자체가 물리의 법칙?에 따라 흐르는 현상임에, 나의 일상속에 맞닿아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케 하는 글! 김병호 작가의 매력에 다른 작품들을 검색하며 시집 한 권을 바구니에 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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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리처드 파인만의 말 과학 인문학/김병호/글항아리/2010.2 학문간의 통섭이 대두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어떤 과학자는 시인이었고, 또 어떤 시인은 현미경같은 눈으로 현상을 해부했다. 통섭이 와닿는 것은 이미 위대한 천재들은 시와 과학이 맞닿아 있다는 것, 인문학과 생물학(<인문학 콘서트>)이 두갈래가 아니라는 것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E=MC² 가, 중력이, 양자역학이, 상수가 얼마나 시적이며, 시인과 과학자가 본래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에 동의할만한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결의에 찬듯 쏟아내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시인이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사실을 써먹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가뜩이나 골치아픈 시에 진저리를 치고 말것이다. 과학용어들이 일종의 금기처럼 시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금기로 삼을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愛詩가로서 변명하자면 '태양 고도의 변화로 겨울을 맞은 우리집 안마당에 프렉탈적 눈송이가 중력의 작용으로 살포시 내려앉았을때', 그 모든 상황을 주시하던 시인은 태양부터 우리집 안마당을 꼬치 하나로 꿰는 직관으로, 과학적 탐구물로써 충분한 눈을 시라는 언어에 녹여내리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물론 관찰력과 직관력이 뛰어난) <과학 인문학>의 저자는 과학이 추구하는 일과 문학이 통찰하는 분야의 동일함을 사랑에서, 무한에서, 시선에서, 상수에서, 양자역학에서 찾아냈다. 그가 인용한 과학적 용어가 불순물처럼 끼어든 시들(시인인 저자의 시를 포함해^^)은, 그의 말대로 툭, 불만스러웠지만 희소성만으로도 아름답고 익살스러웠다. "시인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라는 파인만의 질책성 질문에 대한 한 권의 성실한 답변이었고 유쾌한 시도였다. 현대의 문학은 대중문화와 어렵지 않게 통섭했지만(유하의 <무림일기>,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인 김언의 말대로 자연과학적 감수성이 한국시의 토양에는 부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어로 하나의 세계가 건축되길 꿈꾼다는 김언은 <소설을 쓰자>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시의 경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과학이 과학의 벽을, 시가 시의 벽을 넘는 지점은 '통섭'이 화두로 떠오른 인문학 부흥의 시대에 더이상 가로막이 아닐른지 모른다. 물리학으로 철학하고 물리학으로 시를 쓰고 물리학으로 문학을 바라본 <과학 인문학>은 통째가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다. 질량이라는 것은 에너지가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존재하는 형식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일이다. 시인과 과학자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바람을 사유할 것이다. 어쩌다 둘은 서로 다른 재능으로 세계를 탐험하게 되긴 했지만, 뉴턴이 찾아낸 만유인력의 공식(F=GMm/R2) 역시 일종의 언어라고 무심히 내뱉는 순간 과학을 향해 닫혔던 미닫이 문이 소란스럽게 열리곤 했다. 과학과 삶이 만나는 지점은 그보다 훨씬 수월했다. 피터 힉스가 말한 '힉스장'은 비어있다는 것, 곧 진공조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비어있다고 느끼는 것의 전부는 전 우주적인 요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이가 겪은 환멸의 생도 텅 비어버린게 아니라 삶 바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요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문학적 번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사랑' 앞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사랑은 에너지의 순환이다. 이것은 문학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아직 증명하지 못한 과학적 사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물리학도 시인의 말이니 믿어보자. 순수한 사랑이 혹은 욕망이 들끓는 에너지로 되어있고 그 에너지가 다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로 거듭난다는 사실은 문학이 하고 있는 사랑의 탐구와 진배없지 않은가. 인간 의식의 도약, 도약의 첫발자국은 과학이 찍어도 좋고 문학이 찍어도 좋다는 저자에게 과학과 문학의 통섭은 이런것이었다. 시와 과학 이 둘의 구동력은 같으며 아인슈타인의 시적 상상력의 언어가 단지 E=MC² 였을 뿐이었다고. 본래 완전한 둘이 아니란 말이다. 수학적 장애로 치른 수학능력시험(<인문학 열전>) 이후로 인연을 끊은 과학이 이제 막 시와의 맞선을 준비한다. 조건 좋고 물오른 결혼 적령기의 두 분야가 비록 쓰디쓴 첫사랑의 맛을 보았다해도, 바로 지금 하나의 문 앞에 원숙한 모습으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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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제목으로 뽑은 "삶을 한쪽 팔로만 더듬어온 모든 분들께 권한다" 라는 말은, 필자가 직접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다름아닌, 책 뒷 표지에 책의 광고 차원에서 쓰여 있는 카피이다. 대부분 광고는 과장됨이 자연스럽지만, 책을 읽고나서 뒷 표지의 이 글을 보았을 때, 필자의 느낌이 충분히 과장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되어 리뷰의 제목으로 과감히 선택하였다. 현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 중에 과학이라는 가치를 가장 좋아하며, 관련 된 일로 밥을 먹고 살고 있는 필자에게는 일종의 컴플렉스가 있다. 말하기조차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20여년 전 지금의 아내와 젊은 혈기로 스치기만 해도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시절, 햄릿의 작가를 잘못 이야기 한 - 정말이지 암기 위주의 대한민국 교육 체계에게 그 과를 돌리고 싶다. 진짜 핑계인가? - 너무나도 뼈 아픈 상처의 각인때문일까? 소위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괜한 호기심과 경외감마저 있는 필자이다. 중학교 시절, 옆 집 고등학교 누나가 신비의 대상이었듯이, 그렇게 인문학은 언제나 옆집 누나였다. 그런 필자의 아내가 문학을 전공하였으니, 옆집 누나가 이성(異性)과 인문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바구니에 들고 필자에게 굴러 들어온 격이지만,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배움을 키우는 단계를 이미 벗어났는지,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 돌아가기만 하는 시공간의 폐혜인지, 굴러 들어온 두마리 토끼를 만끽하지 못한지 이미 15년 정도가 지나가고 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 책 『과학 인문학』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껏 부풀리고 싶어서이지만, 어찌 보면 이런 필자의 과거에 대한 회한이 연결해 준 - 책 제목을 인터넷에서 접한 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책에 대한 특별함을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이기도 하다. 물리학. 지극히 개인적인 필자만의 기억에 의존하자면 - 말하고 보니 어폐가 있다. 타인의 기억에 의존할 수 있나? 좀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영화 "마이너러티 리포트"가 꿈꾸는 과학 기술이다 - 고 2때인가? 보어의 수소 이론과 전자의 에너지 상태, 그리고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빛에 대한 여러 실험들. 참으로 단편적으로 실려 있는 80년대 초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에 있는 이런 것들에 일종의 감동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무척 강렬했는데, 이런 기억을 이야기하면 "너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니?"등과 같은 반응이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은, "왜, 난 햄릿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록수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나?"하는 자괴감과 연결되기 십상인 우리의 감동에 대한 편견때문이기도 하다. 돌려서 이야기하면, 과학, 그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린다는 현대 물리학, 분자 생물학까지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는데, 일반 대중은 그런 감동을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감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일종의 편견인데, 그런 사회적 편견은 인문학 분야를, 끝까지 신비로운 옆집 고등학교 누나로 남게만든 한 요인이 되기에 충분했었다. 이런 개인적 아픔은 이제 잠시 뒤로하고, 그런 과정이 선택하게 만든 이 책 『과학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하이젠베르그 "불확정성 원리",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의 상보성. 일반적인 상식에 반하는 이런 자연의 현상을 그저 암기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김병호는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시를 쓴 사람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친구이고. 느낌이 오지 않나? 저자 김병호는, 이 책에서는 그는 하이젠베르그 "불확정성 원리",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의 상보성을 실생활에 견주어 이야기한다. 공부하라고 혼을 내서 방에 들여 보낸 아들 녀석이 하고 있을 일들 - 핸드폰 만지작거리기, 창 밖에 친구들 없나 둘러보기, 그냥 침대에 누워있기, 컴퓨터 게임, 어제 본 옆집 누나 생각, 그리고 공부 - 은 혼을 낸 엄마라는 관측자 입장에서 이는 모든 가능성이고, 방 문을 쓸쩍 열어 보면서 엿보았을 때 위에서 언급한 가능성 중에 한가지로 자리 잡은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세부적으로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와 정확히 맞는 예는 아니지만,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현실적 대응이다. 퇴근 후 집에 돌아 오는 길이 여러가지가 있는 신혼의 신부이야기로 접하는 빛의 상보성 또한 전율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두가지 예는 책에서 제시된 일상 생활의 인문학적 용어로 바라 본 과학 세계의 단편적인 한 면이다. 김병호라는 저자는 구수하면서도 색다르며, "정감어린 파격"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서체로 딱딱할 것 같은 과학의 인문학적 설명을 무척 흥미롭게 진행해 나간다. 인문학을 신비로운 옆집 고등학교 누나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하수 과학쟁이인 필자에게 저자는 부러움과 열등감의 대상이 되어간다. 비상금 5만원을 아내에게 빼앗긴 저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학적 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직설적이면서도 글자, 단어 하나 하나가, 아무도 없는 좁은 산길 옆을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물과 같이 입체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소박함으로 다가 온다. 놀라운 글쓰기 내공이다. 사실, 이 책에 나온 내용들만을 과학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방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인문학에 대한 괜한 경외감이 있는 인문학 초보에게, 특히 과학 분야에 대해서는 좀 안다는 인문학 초보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재미를 제공해 주는 책이다. 게다가 그런 글들을, 빼어나지는 않지만 술자리를 리드해 나아가는 재치있는 친구의 말투로 들려주는 이 책의 재미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결국, 김병호라는 저자를 관심 작가로 등록하게 되었다. 저자가 이 리뷰를 볼 수 있다면 어찌 어찌 연락을 하게 되어, 잃어 버린 비상금 5만원어치 정도만 필자가 술 한 잔 사고 싶다. 책을 읽고 나서 아내에게 달려가 "내가 빛의 이중성을 아주 재미있게 설명해 줄께" 라고 말하였는데, 설거지하고 있는 아내는 저리가란다. 서재에서 상상한 아내의 가능성은 예쁜 눈으로 "어머, 그래? 한번 설명해줘...." 였는데 필자 눈이 관측한 현실은 말 그대로 또 현실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