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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종일 후텁지근하더니 이제야 비가 내린다. 남과 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창을 활짝 열어두었지만 습도 높은 여름 날씨는 무덥기만 하다. 그나마 빗소리가 들리니 한결 낫다. 어제 모처럼 도서관에 들러 빌려온 책을 읽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을 거절할 수 없었나보다.
김화영 시인이 2002년도에 신문에 소개한 시들을 골라 엮은 책이다. 번역가로 잘 알려진 시인이 가려뽑은데다가 사진으로 유명한 구본창 작가의 작품까지 곁들여져 있다고 해서 기대를 갖고 책을 폈다. 솔직히 사진에 더 많은 기대를 했는데 아무리 펼쳐봐도 세 장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본문의 시들과 잘 어울리는 사진은 작가의 명성에 맞게 오래 눈길을 붙잡았다.
면지조차 시원한 바다 색이다. 역은이는 무더운 여름날, 벼락치는 단순함으로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차례를 보니 오규원, 정현종, 서정주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인들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요즘 시인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 책을 펴낸 시기가 벌써 10년도 훌쩍 전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의 이름과 아직 시를 발표하고 있는 시인들의 이름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제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애월"이다. 이수익 시인은 애월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을까. 소나기, 섬 하나, 열대야, 바다, 물빛, 숲 속에서, 늦여름 오후에 등 제목에서부터 여름이 느껴지는 시집을 펼친다. 정말 더위를 쫓아낼 서늘한 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
소나기/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운우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마지막 한 줄을 여러 번 읽는다. 이러면 더위가 나갈까 싶어서.
격포우중/서정주
여름 해수욕이면 쏘내기 퍼붓는 해 어스럼, 떠돌이 창녀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 변산 격포로나 한번 와 보게.
자네는 불가불 수묵으로 쓴 시줄이라야겠지. 바다의 짠 소금물결만으로는 도저히 안되어 벼락 우는 쏘내기도 맞어야 하는 자네는 아무래도 굵직한 먹글씨로 쓴 시줄이라야겠지.
그렇지만 자네 유랑의 길가에서 만난 사련 남녀의 두어 쌍, 또 그런 소질의 손톱의 반달 좋은 처녀 하나쯤을 붉은 채송화떼 데불 듯 거느리고 와 이 뇌성 취우의 바다에 훗뿌리는 것은 더욱 좋겠네.
거침없는 언어 사용이 시원하다. 소나기를 쏘내기라고 했을때 느껴지는 맛이 확연히 다르다. 한자가 많아서 읽기 힘든 시였다.
애월/ 이수익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파란 바닷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네 말이 무슨 비망록처럼 자주 떠오르곤 했지만 제주가 초행인 아내를 위해서는 성산일출봉과 민속촌, 정방폭포, 삼굼부리 등속의 관광명소를 먼저 보아야 했으므로 결국 그곳은 가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 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 둘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미지의, 선연한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랜 날들을 나는 즐겁게 시달리리라.
애월,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 같은, 그 이름 떠오를 적마다.
요즘엔 '애월' 하면 이효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못잊을 장소를 떠올려보는 시간을 갖는 것만 해도 한동안 더위를 잊을 만 했다.
시는 노래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래내어 읽을 때 한결 더 시가 주는 느낌이 다가온다. 마흔 한 편의 시를 소리내어 읽으며 더운 여름 하루를 보냈다. 바쁜 세상에 시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전기세 하나 들이지 않고 더위를 잠시 잊은 것을 보면, 시를 활용하는 지혜가 부족할 뿐 무한 생산되는 시를 가지고 탓할 건 아닌 듯 하다. 마지막으로 이성복의 '귀향'을 옮겨 본다. 아무렇지 않게 낱말을 붙잡아 노래하는 이성복의 시는 잘 들여다보면 숨소리 하나조차 치밀하게 자리배치를 한 듯해서 시인의 성정이 그러한 가 싶을 때가 많다.
귀향/ 이성복
밥을 끓듯이 그곳에 우리의 사랑이 끓고 있다 나는 귀 기울인다 잔나비가 울 듯이 무엇가 해 지기 전에 울고 있다 우리들의 등뼈가 아직 기울지 않은 그림자를 끌고 간다
울음의 바깥에 접힌 하늘은 밥 타는 냄새로 가득하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강가에서 저녁을 빨리 해먹고 물 건너는 사람들을 근심하며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