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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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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선조 19년) 나주 관아에 기이한 訴가 접수 되었다. 다름아닌 칠순의 노파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는 주장과 원고측은 노파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당시 나주 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이는 학봉 김성일이었다. 일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게의 송사라는 것이 노비임을 부정하는 것이 태반사 일텐데 이번의 경우는 스스로 나서서 노비라고 주장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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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선조 19년) 나주 관아에 기이한 訴가 접수 되었다. 다름아닌 칠순의 노파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는 주장과 원고측은 노파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당시 나주 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이는 학봉 김성일이었다. 일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게의 송사라는 것이 노비임을 부정하는 것이 태반사 일텐데 이번의 경우는 스스로 나서서 노비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니 송관인 김성일의 입장도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노비로서이다>는 다름아닌 조선시대의 집행되었던 법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회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책이다. 문화라는 키워드를 법과 접목시켜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법감정에서부터 소송의 준비과정과 절차 그리고 판결에 이르는 일련의 형태를 통해서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생생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가 돋보이는 책이다. 법이라는 규칙규범은 윤리라는 도덕규범과 더불어 한 시대 문명의 잣대를 가름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규칙규범인 법은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핵심적인 소프트웨어로 고조선의 시대부터 명문화되기 시작하여(물론 이전 선사시대에도 이러한 규칙규범은 존재했을 것이다) 위정자의 정책이념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더욱더 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왕조국가에서의 법집행은 절대권력자인 군주의 영향력이 지대했겠지만 일반민중들의 법감정 역시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기에서 언급한 소송의 예를 보더라도 극히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이렇듯 최하층의 계층에게 까지 소송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 법감정으로 재단하긴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서 그동안 곡해되었고 잘못 알려져 왔던 조선시대의 법과 사회에 대한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조선사회는 소송이라는 쟁송이 잦지 않는 사회, 즉 유교적인 집단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혈연과 지연으로 무장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소송이 거의 없었을 거라는 착각, 그리고 비단 소송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근대적인 법집행, 형식이나 절차등과는 사뭇 다른 관리의 일방 독주적이고 전근대적인 법집행이 자행되었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소송이라는 행위자체가 신분상 양반계열에서나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등 이러한 일련의 속설아닌 정설을 한방에 해결해 주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만만한 사회도 아니였고 그리 매정한(법집행면에서) 사회 역시 아니였다. 고려가 멸망했던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과도한 송사가 한 몫을 차지했듯이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소송의 남발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결국 수많은 송사로 지방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소송당사자 역시 사대부를 떠나 모든 계층에서 각양각색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노비가 주인을 대리하는 소송도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점을 볼때 오히려 지금의 우리사회보다 법대로라는 의식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의 법원과 법관의 역활을 담당했던 지방관들은 소송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일일이 사안에 대한 확인과 검증절차를 거쳐 판결을 했다. 물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상급심에 해당하는 중앙관서에 항고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왕에게 호소할 수 도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조선의 법집행과정이 안하무인격이 아니였다는 점 역시 확인된다. 어린 사촌동생이 버선을 훔쳐갔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촌형에게 오죽했으면 태형을 가하고 벌금을 물릴 정도로 조선의 지방관은 부임과 동시에 소송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고 최초의 목민서 역시 소송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는 소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해답은 다름아닌 신분제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평등한(100% 수긍할 수 는 없는 부분이더라도)사회와는 달리 반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관아에 호소하는 소송이라는 형태가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역사 사초를 살펴보더라도 유독 신분관련 쟁송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조선의 민중은 자신의 한계를 달리 호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법은 사회전반에 걸쳐 있는 문화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라는 컨텐츠가 법이라는 형태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법을 살펴보면 그 사회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주관아에 접수된 이 소송은 판결은 원고의 승소로 그 막을 내렸다. 피고인 다물사리는 자신이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관청의 하급관리와 결탁하여 관노비로 투탁까지 하여 노비신분을 회득했지만 결국 이러한 전모가 밝혀져 원래의 양인신분으로 돌아갔다. 이는 자신이 노비와 결혼하여 낳은 자신들이 결국 원고의 노비로 귀속됨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던 방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모계의 신분을 따라가는 종모법을 선택하였기에 다물사리는 사노비보다는 자식들을 좀더 자유로운 관노비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신분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과 또한 철저했을것 같았던 신분사회의 헛점 역시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소송의 절차와 형식 그리고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마치 고을 동헌에 나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현장감 있는 저서이다. 우리는 이번 저서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법질서와 법집행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사회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 

l******e 2010.04.20. 신고 공감 7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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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민사소송이 잦았다고? -나는 노비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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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책을 읽다보면, 그 시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깨지면서 그 시대와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이런 즐거움이야 말로 역사책을 읽으면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노비로소이다'도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네 죄를 고하여라'가 조선의 형법에 관련한 내용이었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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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책을 읽다보면, 그 시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깨지면서 그 시대와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이런 즐거움이야 말로 역사책을 읽으면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노비로소이다'도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네 죄를 고하여라'가 조선의 형법에 관련한 내용이었다면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요즘으로 치면 민법에 즉 민사소송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에는 개인간의 '송사'를 꺼려서 소송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민사소송이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됐고, 특히 노비 소유건이나 산송 문제로 인한 재판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잦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15,16세기에는 노비와 관련한 소송은 그야말로 봇물을 이루었는데, 이런 민사소송의 만연은 물론 행정력의 소모시킨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소송법과 소송기술의 발달과 체계화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 또한 나타났다.

 

뜻밖이었다. 민사소송이 많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민사소송이  원님재판이란 말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이것도 빗나갔다.  현대와 비교한다면 그 체계적인 점에서는 뒤쳐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를 제기하는 단계에서부터, 또 재판과정 또한 허술하지 않았다. 양자의 진술을 조사하는 과정도 그렇고, 또 상위 관청에 재심을 청구할 수도 있었다니, 조선이란 사회는 알아갈수록 예상했던 것보다 사회 시스템이 정교했고 체계적이었던 면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1586년 봄 나주 동헌에서 벌어진 이지도와 다물사리간에 벌어지는 소송을 통해 조선의 법과 사회를 들여다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송은 여늬 소송과 다른 점이 있었다. 보통 자신이 노비가 아니고 양인이라고 주장하고, 반대 쪽에서는 양인이 아니라 자신의 노비라고 주장하는 소송이 대다수인데,이 소송에서는 다물사리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또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특이한 소송의 예를 통해서 한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개인 간의 법적 분쟁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 시대의 배경와 법률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물사리는 그녀의 주장대로 양인이었지만, 사노비와 혼인함으로써 그녀의 자손들은 모두 노비의 신분이 돼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성균관 소속의 공노비였다고 거짓주장을 하면서 자신과 후손들이 모두 공노비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렇게 신분세탁까지 하면서 공노비임을 주장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은 천민 신분이라도 일단 사노비보다는 공노비가 덜 고됐다는 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일부러 세력가나 관청에 몸을 맡기는 투탁이 꽤나 성행했다는 점이다. 세금이나 요역을 회피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양인을 강제로 혹은 모르게 자신의 호적에 올려 노비로 삼는 이른바 압량위천(壓良爲賤)은 무거운 처벌을 받았는데, 자발적으로 투탁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사회의 수취체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철저하게 신분제 위주로 짜여진 조선 사회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그 속에서 노비로서의 억압보다 더 심한 요역과 세금을 피하려고 신분적 굴레를 기꺼이 감수하려 들었던 것이다.재판 과정이 생각보다 양반쪽으로 기울어 진행되지는 않았다 해도, 양인이나 노비의 고충이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교수가 쓴 책은 대체적으로 대중저술가가 쓴 책보다는 재미나 독자들이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하고, 흥미있게 읽을까 하는 고민을 덜하고 쓴 듯한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나는 노비로소이다' 에서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친절하지 않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생소한 그것도 조선시대 법 용어가 자주 나오는데, 구성도 그렇고 편집도 그렇고 좀 밋밋하다고 할까, 내용을 전하는데에만 신경쓰고 급급하지 않았나 싶었다. 구성에 더욱 신경쓰고, 독자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풀어쓰고 강조하고, 그런 기술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조선시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은 썩 좋았다. 개인 간의 송사에 대해서도 그렇고 조선의 민법 체계나 소송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었고, 발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또 양인이나 노비들의 고충을 새삼 다시 되새겨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교적 체계적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사대부들이 노비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국 그 법 역시나 신분제 기틀을 유지하는 방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0 2013.05.22. 신고 공감 3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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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비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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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척도는 재산 즉, 몇 평의 아파트인지, 몇 CC의 무슨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지 어느 곳에 살고 있는지 등등 가시적으로 기준을 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의 사회는 노비의 양이 현 사회의 물질적인 양으로 대체된 듯 싶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라는 제목을 대할 때 어떤 사회적인 소송이라기 보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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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척도는 재산 즉, 몇 평의 아파트인지, 몇 CC의 무슨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지 어느 곳에 살고 있는지 등등 가시적으로 기준을 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의 사회는 노비의 양이 현 사회의 물질적인 양으로 대체된 듯 싶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라는 제목을 대할 때 어떤 사회적인 소송이라기 보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말의 저자 임상혁의 글을 대할 때 이 책 한 권에  실렸던 저자의 내면 자체가 곧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책의 구성은 총 5장으로 칼럼 세 편을 부록식으로 중간에 끼어 넣었다. 또한 마지막에는 '부록'이란 장을 마련하여 1517년 노비결송입안과 이지도 판결문 전문 그리고 미주로 마무리 했다. 독특한 구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 내용이 조선시대 나주 관아에서 벌어진 노비 소유권 문제를 다루었는 데 대부분 각 단원마다 다른 내용으로 단원마다 끊어져 있는 데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어져 있고 중간에 삽입 요소들이 무궁무진 하다. 물론 그 요소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문제나 이두, 현행 민사소송과의 비교, 판례, 소송심리 순서에 입각한 구성이나 실체법적인 민사 규정 등을 섞어 놓고 있다. 이는 소설처럼 한 번에 읽어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구성 자체가 흥미와 판결의 궁금증을 더하게 했고, 지루할 수 있는 소송에 관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재밌는 예화를 들어 결코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게 엮어냈다.

    전체의 맥이 되는 내용은 원고가 양반인 이지도(李止道)라는 남성이고 피고는 여든이 된 노파 다물사리(多勿沙里), 그리고 그 재판을 담당한 송관은 김성일 나주 목사로서 노비 소유권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의 과정을 풀어놓는다. 조선시대와 현대의 법률 용어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법관이나 법원의 구실 등에 대해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있는 상세한 해석이 주를 이룬다.

    나주 목사인 학봉 김성일은 일본 정부의 위협과 무례에 대해 남들은 적당히 넘어가려는 사회적 분위기 앞에서 당당히 시정을 요구하며 맞설 정도로 강직함이 소문난 사람이었다. 특히, 1574년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경들은 나를 이전 시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누군가는 "요순 임금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학봉은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어디 같은 부류인가?"라고 물었다. 김성일은 "올바른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 미치광이가 됩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고명하시어 요순이 되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간언을 거부하시는 병이 있습니다.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걸주가 망한 원인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예화 뿐만 아니라 저자는 학봉 김성일에 대한 법관으로서의 자질 문제도 거론하고 있다. 또한 임씨 ·나씨의 소송으로 김성일의 수난을 얘기하고 있다. 쟁쟁한 집안인 두 가문의 겹친 민형사로 얽힌 판결은 문제가 되었던 듯 싶은 데 이는 임씨의 아버지는 장흥의 수령을 지낸 고관이며, 그녀의 큰 오라비는 문명을 크게 떨친 백호 임제였고  「북정일록」을 보면 김성일이 임제를 만났다는 기사가 있어 면식이 있는 관계였음에도 문벌가인 임제 집안에게 불리한 판결을 서슴없이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법제는 양인과 천인이 서로 통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였고, 엄한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다. 양천간의 혼인으로 나온 자손을 노비가 되도록 한 것도 그에 대한 규제일 수 있다. 노비인 첩의 자녀, 이른바 천첩자녀는 또한 노비로서 아버지의 다른 자손들에게 상속될 수 있는 존재이다. 곧,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부려지게 되는 것이다. p65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천첩자녀도 자신의 피가 흐르는 자식임에 틀림없는데, 그를 비롯한 자손들이 이후 노비로서 다른 자식들에게 부려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 수 없음은 일반적인 정리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지위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의 비첩(婢妾)소생들을 양인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p66

    조선시대의 재판에 대하여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구별이 없었다거나, 사실상 구분되기 어려웠다고 보는 시각들이 많다. - 하지만 오래전부터 민사절차와 형사절차는 개념상 구별되어 있었고, 그 운영도 달랐다. 중략 - 같은 기관에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둘의 차이가 없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도 동일한 법원에서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을 수행하고 있으며, 법관들도 또한 두 업무를 두루 맡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중앙에서는 오히려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담당기관이 분리되어 있었다. 곧 전택(田宅)에 관하여는 한성부가, 노비에 관하여는 장예원이 맡았고, 형사소송은 형조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가헌부는 풍속에 관한 사건을 맡았다. 사안이 다르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 또한 달리 이루어져야 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p106


    현재는 소장을 제출한 후부터 소송이 시작되는 데 3장의 '법에 따라 심리한다'에서 조선시대는 피고를 직접 데리고 와야 했으며 그렇더라도 우선은 소지 즉 판결을 구하는 소지를 제출해야 하며 그것이 지금의 소장이 되는 셈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이두가 섞여 있는 문장으로 된 소장을 보여 민사상 구제와 함께 사기죄에 대한 형사상 고소의 예를 현재의 소장처럼 해석해 표현해 이해를 돕고 있다. 공문서에서 이두 즉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한 이두에 대해 참고 문헌을 -조선시대의 문헌-소개하며 이 자료들을 활용하고 보존해 온 서리들의 계층에 대해 사회 경제적 법률 업무에 대해 관하고 있다. 소송법서인 『사송유취』 등 중요한 법령들과 법전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실체법과 절차법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남겨진 기록을 꼼꼼이 찾고, 해석할 수 있었던 저자의 이면에는 아마 법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해박한 법규정에 대해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다는 것은 그저 지식적인 학습뿐만 아니라 법관들의 판결에 대해 어떤 회의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곳곳에 조선시대의 판결과 슬쩍 비교하거나 조선시대 때의 명판결의 예화를 든 이유가 현재 문제시 되고 있는 판결에 이의를 든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달리 생각해 보면 '노비'라는 최하위 계층을 들어 그래도 그 노비들의 살 궁리가 마련될 수 있었다는 점은 돈이 없으면 소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대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법관의 자질은 그저 시험에 합격이 되면 인성은 그저 관심 밖의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너머북스 펴냄)는 조선시대 나주 관아에서 벌어진 노비 소유권 문제를 다룬 것으로, 원고는 양반 남성 이지도(李止道)이고 피고는 여든이 된 노파 다물사리(多勿沙里), 그리고 그 재판을 담당한 송관은 김성일 나주 목사로서, 그 문제를 어떻게 판결해 냈는지를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라고 오마이뉴스에도 올라온 걸 보면, 노비는 현대에도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다. 카스트 제도가 계급사회를 지칭하지만, 포루투칼 언어였고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만든 확대된 개념이라 할 때, 노비는 자본주의가 만드는 현대판 노예제도 속의 사람들을 건지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책은 조선에서 건너오면서, 닳고 낡아 행간을 오로지 상상력으로 읽어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까짓 노비의 기록보다는 양반의 기록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당시 사회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다. 시간이 더 속도를 내어 책을 밖으로 글자를 꺼낸다. 멋진 책이다.
 



m*******e 2011.04.03.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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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조선시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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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조선시대를 보다인간은 끊임없이 자신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이 명제는 언제나 옳은 것일까? 인간성의 회복이나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이 일정한 생활자립도가 갖추어진 이후에나 성립할 수 있다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이익의 추구를 위해 자신의 삶의 질을 규정하는 부분을 포기하기도 한다. 배고픔과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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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조선시대를 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이 명제는 언제나 옳은 것일까? 인간성의 회복이나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이 일정한 생활자립도가 갖추어진 이후에나 성립할 수 있다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이익의 추구를 위해 자신의 삶의 질을 규정하는 부분을 포기하기도 한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가벼운 죄를 범하고 경찰서 유치장이나 교도소를 택하는 사람을 종종 접하게 되는 경우가 그럴 것이다.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위의 기준으로 본다면 다소 충격적인 말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누구나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되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낮추려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소송절차를 따라가며 조선시대 사법시스템을 분석한 책이 출간되었다. [나는 노비로소이다 :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는 법을 전공한 대학교수의 이색적인 접근이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신분사회가 정착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엄격한 사회분위기가 유지되었던 조선시대 1586년 나주 목 관아에서 벌어진 노비관련 소송을 통해 조선의 법과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조선의 법전으로 경국대전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것을 근거로 조선사회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송의 제기로부터 법에 따라 진행되는 절차와 이러한 소송이 제기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비롯하여 민, 형사상 제기되는 사건의 전말을 살필 수 있다. 그 배경은 역시 조선시대 노비제도이다.

[나는 노비로소이다]의 사건 개요는 1586년(선조 19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다물사리가 노비냐 아니냐가 주요요지다. 이 사건의 경우 소송의 원고는 나주의 이지도라는 사람으로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말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라고 반박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노비에게 부과되는 노역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와 자신의 자손이 노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다양한 이유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이 경우와는 반대로 더 일반적으로 벌어졌던 ‘나는 양이이다’라는 소송도 있었다. 미암일기로 유명한 유희춘의 경우를 살펴 일반적으로 신분상승과 아버지의 정을 나타내는 경우를 함께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나 현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법적, 제도적 보호 장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사실인가 보다. 고관대작의 신분이기에 노비의 면천 같은 중요한 사건에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독특한 시각으로 조선사회를 살피고 있다는 흥미로운 출발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했었겠지 하는 막연하게 생각을 벗어난 구체적으로 조선사회를 들여다보게 하고 있다. 그것도 민, 현사상의 사법제도를 통해 조선의 밑바닥 생활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더욱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서명이나 도장, 심급제도, 삼도득신법 등 오늘날의 법제도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어 조선시대에 대해 더 흥미를 가질 수 있다.

사회법률 제도의 적용에 대해 저자 임상혁의 시각은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다. 분쟁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며 화해와 조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동안 수많은 사건을 통해 일반화된 법률의 공정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태도도 함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막연함을 벗어나 이렇게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면 좋겠다.


m*****8 2010.04.23.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내 조상이 노비였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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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는 없지만 우리 조상은 양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읽고 나서 '우리 조상이 혹시 노비일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우리 조상이 노비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은근히 '양반입네'하고 가졌던 일종의 자만심같은 것에 상처를 입는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저자는 서문에서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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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는 없지만 우리 조상은 양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읽고 나서 '우리 조상이 혹시 노비일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우리 조상이 노비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은근히 '양반입네'하고 가졌던 일종의 자만심같은 것에 상처를 입는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저자는 서문에서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1/3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2/3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노비 소송 문제를 통해서 조선의 법과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했던 이 책은 '노비'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판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노비의 자식이 과연 누구의 소유냐를 두고 벌어지는 판결에 관심이 꽂힐 만도 하지만 나에게는 군데군데 보이는 판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 솔로몬의 재판을 보는 듯한 유쾌하고도 명쾌한 판결 이야기 몇 개는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더 놀란 사실은 조선시대는 엄연한 법치국가였음이다. 조상들이 얼마나 기록을 중요시했는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책을 보면 그 제도가 오늘날에 못지 않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그 신분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제도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는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일화처럼 전해오는 몇 가지 판결 이야기는 오늘날의 법조인들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15,6세기 소송의 대부분이 노비 문제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생산력의 대부분을 이들이 담당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사대부 양반들은 노비를 소유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구나 그 신분이 세속된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양반의 족보를 사고파는 행위가 허다했다고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노비제도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얼마나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면 족보를 통해서나마 벗어나고자 했을까.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h****i 2010.03.05.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