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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를 죽이는 시대, 애도의 비평 - 나민애, 『제망아가의 사도들』 나민애는 첫 비평집인 『제망아가의 사도들』(천년의시작, 2017)에서 죽은 이(특히 죽은 아가)에 대한 애도를 통해 타자와 만나는 사도로서 비평가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제망아가’는 아가(雅歌)가 사라진 시대를 향한 시적 애도이면서, 동시에 아가를 죽이는 세계를 향한 사회적 애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민애 비평의 중심에는 ‘세월호’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이 깊디깊게 새겨져 있다. “마치 쓰나미처럼 사회 전체를 덮치고만 충격이었다.”라는 진술에 나타나는 대로, 그녀는 ‘세월호’를 문학적으로 기억함으로써 애도의 글쓰기로 가는 비평의 길을 마련한다. 신과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가 형식인 아가(雅歌)와 사회=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간 아가들의 사이에 억울하게 죽은 타자들의 세계인 ‘세월호’의 기억이 있다. 시와 사회, 혹은 기억과 현재라는 시간적 경계에서 나민애의 비평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1) 문학은 은유로서 그들을 다르게 기억한다. 미래가 없는 과거는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기억에 불과해 조금씩 낡아가는 2014년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일을 끊임없이 은유해야 한다. 이때 은유는 단순히 비유어법이라는 전통적 의미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은유는 상이한 영역에 속해 있는 두 주체들 사이에 함의를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서 그 바다를 나의 바다로 만들어주는 것이 은유다. 그들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어주는 것이 은유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필요하다. 은유화를 통해 먼저 간 이들의 집을 자아 내면에 다시 만든다.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허물어가는 세계를 감당할 힘이 생길 리 없다.(177~178쪽)
2) 이 작품이 최루성 신파를 위해 지어진 가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는 약육강식의 지옥에서 아이가 희생당하는 것이 현실의 일부임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있는데도 없는 척 해왔기 때문에 천국을 정글로 만든 것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바로 ‘여기-나’라는 자책감을 버릴 수 없다. 문제는 자책감과 그에 대한 용서를 구함이 아니라 자책감의 유지이다. 이 시를 읽으면 물론 슬프다. 그런데 그저 슬픔으로 끝난다면 막내는 죽어서도 배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조시弔詩는 다음과 같은 것을 요청하고 있다. 슬프다면 영원히 슬퍼할 것. 진혼鎭魂한다면 내면으로 할 것. 그래서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영혼에 흉터처럼 각인될 것을 소망하라고.(184쪽)
세월호의 통곡을 문학은 은유로서 기억한다. 세월호가 더 이상 ‘세월호’라는 배가 아니라면, 우리는 세월호라는 이 기억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나민애는 “그 바다를 나의 바다로 만들어주는 것이 은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들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어주는 것이 은유”라면 타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 나의 죽음이 되어야 한다. 세월호의 아이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세월호의 아이들을 기억하는 ‘나’도 죽은 것이다. 죽음은 저들만의 상황이 아니라 저들을 바라보는 나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나민애는 자신만의 비평적 윤리 감각을 표출한다. 세계의 재구성은 바로 타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비평 주체의 이러한 윤리 감각을 경유해서 이루어진다. 타자의 기억을 나의 기억으로 은유함으로써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는 이렇게 나=타자가 되는 윤리적 세계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1)의 내용에 근거해서 보자면 인용문 2)는 은유된 사건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다. 세월호의 문학적 은유는 죽은 아가들을 위한 진혼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아이가 희생당하는 현실은 두말할 필요 없이 추문(醜聞)이다. 추문을 추문으로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추문을 은유로 기록하여 이 세상으로 되돌리는 게 문학-시이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추문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한편으로, 타락한 세계를 은유하는 구체적인 사실로도 기록될 수 있다.
시인은 추문의 현실을 은유의 언어로 기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극적인데, 그것은 그 추문의 현실을 “일회성이 아니라 영혼에 흉터처럼 각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나민애에게 은유는 타자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주체는 그러므로 나의 죽음 또한 애도해야 한다. 살아 있되 죽은 이 존재를 우리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슬프다면 영원히 슬퍼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타자의 슬픔이 나의 영혼에 각인되었으므로 슬프다면 영원히 슬퍼해야 하는 생의 윤리를 비평을 쓰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도라는 윤리 감각은 사실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이 애도의 한편을 형성한다면, 남은 자를 향한 위로는 애도의 다른 한편을 형성한다. 애도는 그러니까 죽은 자를 슬퍼함으로써 남은 자를 살게 만드는 위무의 형식이다. 죽은 자-타자가 산 자를 다시금 살도록 하는 애도의 역설적 의미망은 ‘부음의 시기’를 살아가는 비평가의 내면 심리를 규정한다.
나민애는 「‘부음의 시기’, 임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이라는 글에서 “가장 깊은 진혼은 남은 자에게 바쳐져야 옳다”라고 강조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는 무언가를 여전히 말해야 한다(침묵 또한 말하기의 다른 형식이다). 진혼의 언어는 살아남은 자의 입을 통해 죽은 자의 세계로 전해진다. “우리의 진혼 문학은, 떠난 영혼과 살아 있는 자 모두를 잊지 않고 있다”는 나민애의 주장은 이로써 애도의 비평을 살아남은 자를 위한 진혼의 비평으로 거듭나게 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민애의 이러한 애도와 진혼의 비평은 강은교 시에 등장하는 바리데기의 형상을 분석한 「진혼鎭魂,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노래」라는 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바리데기는 그녀가 부음의 시기에서 길어 올린 은유의 존재이다. 아비를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간 바리데기를 강은교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임을 넘어 남녀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버려진 자라는 의미를 지닌 바리데기(강은교 시에서는 ‘비리데기’로 나온다)가 남녀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민애는 강은교의 ‘비리데기’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중심이 아니라 이면에서 가장 무거운 추를 드리우고 있는 실질적 좌표, 존재 자체로 존경받는 그러한 절대적 신뢰의 존재”를 발견한다. 남성 영웅의 그늘에 가려 에코로만 존재했던 여사제의 모습을 그녀는 강은교의 ‘비리데기’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민애가 강은교의 시에서 발견한 바리데기의 형상을 남성 영웅처럼 영웅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이면서 여성이 아닌 바리데기의 형상은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자의 역설적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저승에 갔으니 그(녀)는 죽은 것이지만, 저승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그(녀)는 산 것이 된다. 죽었지만 살아 있고, 살았지만 죽은 바리데기를 이 부음의 시대로 불러냄으로써 나민애는 세월호 이후에 펼쳐질 문학(비평)의 길을 본격적으로 사유한다. 문학적 사유가 타자에 대한 깊은 사유와 다르지 않다면, 그녀의 비평은 정확히 세월호 이후의 타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글쓰기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저승에서 돌아온 자가 부르는 진혼의 언어-노래로 가득 찬다.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바리데기는 이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삶을 위무하는 여사제가 되어 세월호 이후에 펼쳐질 문학의 한 지점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바리데기는 아버지에게 버려져 저승까지 갔지만 결국은 살아남아 지상으로 돌아왔다. 바리데기가 풀어내는 생의 언어는 그러므로 어른에게 버려진 자의 언어를 대변하는 한편으로 저승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은유의) 언어로서 기능한다.
나민애는 바리데기 신화에 새겨진 이러한 이중의 언어를 통해 그녀 특유의 애도의 비평을 실천하고 있다. 세월호의 비극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시점(3년 만에 바다 속에 묻혀 있던 세월호가 지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실종자 9명의 유해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에서 타자를 향한 애도의 비평은 아가들이 행복하는 사는 세상을 향한 비평가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제망아가’를 실천하는 사도로서 나민애는 바리데기의 언어로 무장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비평이 가야 할 길을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탐구한다.
바리데기는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 돌아온 존재라는 점에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예시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애도하지 않고 남은 자들이 제 삶을 제대로 사는 건 힘들다고 봐야 한다. 아가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그녀는 바리데기의 언어로 그 비통한 소리를 위무하는 비평을 지향한다. 그것이 문학-비평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희망이 될지, 아니면 문학적 생을 포장하는 일종의 포즈가 될지는 오로지 문학-비평을 대하는 그녀의 열정에 달려 있다. 이제 첫 비평집을 낸 그녀의 행보를 앞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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