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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과학 분야가 그러한데, 재미를 느끼면서도 기억에 남기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그게 스스로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읽은 내용을 시간이 좀 흘러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내 것이 되면 좋으련만.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슨이나, 돌연변이나 이기적 유전자나, 더러 들어본 말들이다. 이 책의 작가는 앞선 그러한 이론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요약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주장하고 있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고 내용들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별도 되지 않으며 어렴풋이 뭔가 다른 게 있기는 한가 보다 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하나라도 기억했으면 싶은 내용들을 따로 타이핑을 해 보기는 했는데, 글쎄 효과는, 기대가 안 된다.
글 내용에 대한 나의 형편없는 인지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설레는 기분이 든다. 뭐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힘이, 보잘 것 없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물론 내 힘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생명에 대해 우주에 대해 끝없이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그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비록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과는 미미할지라도 계속되고 있고 바뀌고 있고 나아지고 있는 것 같고 희망을 주는 것 같고...
경쟁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협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싸워서 상대를 죽여야만 내 생명이 내가 속한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론은 감정적으로만 생각해도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들마저 협력이라는 말로 풀어놓고 있으니, 과학적으로 타당하든 그렇지 않든 나처럼 모르는 입장에서도 그저 고마운 것이었다. '싸우자' 보다는 '함께 하자'가 분명히 낫지 않겠는가.
글쎄, 유전자의 속성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형편이니, 자칫 그릇된 이론에 빠져 정확한 현상을 파악할 줄 모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 분명한 근거도 없이 낭만적인 태도만으로 현실을 더욱 왜곡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알고 있고, 죽이는 것보다는 살리는 쪽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믿고 싶다. 생명의 기본인 유전자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싶고. 앞으로도 더러는 이런 책을 읽어 봐야지. 흐뭇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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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 질문으로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책 제목이 바로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유명한 역설을 이야기한 천재 물리학자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생명을 바라봤을 때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유전자에 ‘정보’가 담겨 세포로 복제되고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아니었을까? 작은 원자단위의 유전자가 복잡하고 체계적인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슈뢰딩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물리학자, 생물학자들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유일무이한 선물인지 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노벨상을 수상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말했듯이 우리는 늘 ‘경외심’을 갖고 생명을 대해야 한다. 또한 생물학이 결코 최후의 비밀을 들추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생명은 얼마나 유일무이한 선물인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협력하는 유전자」 1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학자로서의 진지함과 솔직함이 그대로 담긴 듯해 1장을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저자 요아힘 바우어는 진화에 관한 다윈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결코 유전자는 ‘이기적’이거나 ‘우연’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만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진화 = 다윈’ 이라는 단순한 도식적 사고가 머릿속에 입력된 많은 사람들에겐 분명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유전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협력적’으로 생명을 구성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슈뢰딩거의 ‘유전자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유전자와 세포가 서로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지 ‘물질’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협력하는 유전자를 요약해서 설명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요약은 마지막 장에 훌륭하게 정리돼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읽게 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아힘 바우어는 진화가 오직 자연도태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다는 다윈주의적인 극단과 또다른 극단인 설계(보편적으로는 창조)이론의 사이에서 ‘생명’과 ‘유전자’라는 ‘생물학적 실체’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창조론을 반박하기 위해 다윈의 진화론이 한 세기 이상 사용되다보니 이 개념은 거의 ‘사상’이 되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진화’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표현하며 학문적 담론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생명, 그리고 생명을 구성하는 유전자와 세포의 작용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별하는 사상적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다. 이렇게 신비한 생명의 실체 앞에서 학문으로서의 탐구를 벗어나 종교, 사상이라는 관념적인 형태로 그 영역이 확대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결국,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전자가 서로 협력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만들어 내듯이 학문 또한 다양한 영역이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는 모든 사물의 시작에 관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불가지론을 고수함으로써 만족해야만 한다.” 다윈은 온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를 발견한 지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몇 가지를 반박한 뒤에 불가지론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왜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은 신, 인간, 자연도태, 우연, 종교, 불가지론 등과 연결되는걸까? 지금보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 앞에 드러날 ‘진실’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지금으로선 저자가 1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결코 최후의 비밀을 들추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하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그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각자가 ‘자유의지’로 학문을 탐구하고 해석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 과정에서 참된 진리는 밝게 빛날 것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