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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선불교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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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을 찾아 떠나는 여행- 한병철, 『선불교의 철학』       선(禪)불교는 외부에 있는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꼭이 선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라, 불교가 그렇지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있지도 않은 부처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합니다. 허상이고 환상이니까요. 부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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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을 찾아 떠나는 여행

- 한병철, 『선불교의 철학』

 

 

 

()불교는 외부에 있는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꼭이 선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라, 불교가 그렇지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있지도 않은 부처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합니다. 허상이고 환상이니까요.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은이는 의지 혹은 주체성의 부재야말로 평화로운 불교의 토대(19)라고 주장합니다. 실체 혹은 주체를 상정하면 권력이 나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나누는 권력. 권력은 언제나 남성이 지배하지요. 여성과 아이는 남성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권력은 배타적 주체성을 내세웁니다.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권력=주체성은 안심을 합니다. 폭력이 왜 권력과 늘 붙어 다니겠습니까? 배타적 주체성으로서 권력은 타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가 있어야 존재하는 나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의심에 의심을 반복해서 데카르는 의심을 하는 는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진리의 최종 자리에 신을 놓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한 사람이 왜 을 의심하지는 않았을까요? ‘생각하는 나에게 확실성을 부여하려면 신이 필요했습니다. ‘를 확실하게 정립하기 위해 그는 신을 불러낸 셈입니다. 도겐 선사가 이런 데카르트를 보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도겐은 데카르트의 의심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깊어진 의심 속에서 그는 의 관념도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뻗어 나간 겁니다. 이렇게 큰 의심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어쩌면 기쁨에 겨워 다음과 같이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네크베 코기토 네크베 숨(Neque cogito neque sum(나는 생각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생각하는 나가 없는 장소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그렇게 있는 영역에서는 ‘(인식하는) ‘(나와) 다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24~25)

 

선불교는 외부에 진리를 놓지 않습니다. 진리를 품은 마음도, 진리를 품은 주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은이 말마따나 깨달음(Satori<사토리さとり>)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자신무아경’, 즉 기이한(비범한) ‘망아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42)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평범함 속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우리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자아라는 장막에 갇혀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에 있던 깊은 내재성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자아라는 장막을 걷으면 우리는 깊은 내재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에는 우리는 사는 이곳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깃들어 있습니다. ()를 묻는 제자들에게 선사들은 큰소리를 지르거나, 제자를 때리는 기행으로 답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기도 했고, 차나 한 잔 하라며 확답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서 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선사들은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을 들여다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보는 사물이 어떻게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선불교에서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 무엇보다 진리에 매인 자신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깨달음은 실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닙니다. 지은이의 말을 들어볼까요. 불교의 중심 개념 순야타sunyata(‘비어 있음>’)는 실체와 여러 면에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실체는 가득 찬 것 같습니다. 실체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순야타고유한 것을 제거하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순야타는 불변하는 존재자 혹은 자기를 고집하거나 자기를 자기 안에 가두는 존재자를 비워 제거합니다. 순야타는 그런 존재자를 개방성, 즉 드넓게 개방된 곳으로 가라앉힙니다.”(59) 비어 있음은 실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권력이 들어 있지 않고, 여기와 저기를 나누는 존재론적 단절도 없습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공은 색이고, 색은 공입니다. 구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비움은 채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움과 채움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분별심이 싹트게 됩니다. 분별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시비(是非)로 나누려고 하지요.

 

하이데거와 같은 서양 학자들도 비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비어 있음에는 언제나 자기가 들어 있습니다. 비어 있음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기라는 관념에 매여 있는 겁니다. 지은이는 선불교의 비어 있음에는 이러한 중심으로서 자기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라는 중심을 세우지 않은 선불교는 그래서 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는 산속에 있다는 것도 집착일 뿐입니다. 산속에 있는 진리가 왜 일상에는 없는 걸까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에 나타나듯,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음은 자기에 얽매여 있지요. 천 명의 사람이 사물을 보면 천 개의 사물이 있게 됩니다. 천 명의 사람들이 사물에 의미를 붙이는 것이지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어떨까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자기를 내려놓은(비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운 사람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할 리가 없지요.

 

하이쿠에서는 세계 혹은 만물이 인간의 접근 방식 너머에서 빛나는 대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정령 같은 그것(비인칭)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정령 같거나 으스스하기보다는 오히려 친절합니다. 그것(비인칭)에 관한 시와 정반대로 하이쿠는 본래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즉 처분할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정령 같은 그것이 자아와 세계로 흘러넘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관찰해보면 그것에 관한 시는 자아를 하나 드러냅니다. 그 자아는 의미와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세계, 즉 이름 없는 비인칭의 허허벌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있는(그것비인칭이 주는) 사물로부터 말하려 나서는 자아는 소외된, 속이 빈, 세계 없이 배회하는, 찾아나서는, 기도하는 자아입니다. 사물들도 서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개개의 사물은 그것(비인칭)의 이름 없는 빈 되울림이 됩니다. 그것에 관한 시를 보면 완전한 관계의 상실이 떠오릅니다. 반면에 하이쿠는 관련성을, 즉 친절한 관계와 같은 것을 표현합니다. (110)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그것처분할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칸트의 물자체를 생각하면 됩니다. 물자체는 이성의 의미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성 밖에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지만 의미로 처분할 수 없는것이 그것입니다. 선불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안과 밖이 따로라는 인식이 가능해지니까요.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분별심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 세상은 시비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를 세우기 위해 비()를 없애야 하는 생각이 당연히 꿈틀거리겠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 옳으려면 누군가는 옳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옳으니 너는 당연히 옳지 않습니다. 나와 너를 시비로 나누는 분별심이 지배하면, 이 세상은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버립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를 생각해도 됩니다.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억누르려고 합니다. 진리는 힘을 쥔 자가 사물에 부여한 의미를 따라 달라집니다. 강대국은 핵폭탄을 가져도 되지만, 약소국은 핵폭탄을 가지면 안 됩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쳐들어가도 되지만, 약소국은 어떤 경우에도 강대국을 향해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강대국을 중심으로 세워진 논리입니다. 약소국 국민들이 왜 테러리스트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맞서 싸우기는 힘드니 테러로 강대국의 변방을 공격하는 겁니다. 약소국의 테러가 옳지 않다면, 강대국의 폭력도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늘 강대국의 편을 듭니다. 강대국의 논리로 이 세계를 바라봅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강대국의 편을 들지 않으면 우리가 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지은이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강대국의 편을 드는 이유는 경제적 실존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강대국의 편을 드는 것이죠.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많기에 강대국은 어떻게든 이 세상을 제 논리로 움직이려 합니다. 강대국은 많은 것을 소유한 국가입니다. 지켜야 할 게 많다는 얘기입니다.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은 바깥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도둑으로 생각합니다. 청년 시절에는 혁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왜 보수적으로 변하겠습니까? 가진 게, 지킬 게 많아져서입니다. 깨달음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비어 있음을 내세우는 까닭은 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는 지독한 욕심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밟고 일어서려고 합니다. 항아리가 가득 찰수록 사람들은 더 큰 항아리를 준비합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채우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인 것이지요.

 

지은이가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방랑은 먼저 재산, 나의 것을 철저하게 포기해야 합니다.”(124)라고 말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십 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습니다. 목적이 뚜렷한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세우려고 합니다. 자기를 잃는 것은 곧 고향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고향에 가서 오디세우스는 자기 재산을 빼앗으려는 악당을 쳐부숩니다. 오랜 시간 집을 떠난 오디세우스는 자기를 지킨 덕분에 고향에 있는 재산을 지킨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식인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려 한 아브라함은 그 공덕으로 새로운 땅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을 떠나 새 집으로 갑니다. 오디세우스나 아브라함이나 목적지가 뚜렷한 여행을 한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방랑은 나의 것을 철저히 포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이쿠 시인인 바쇼는 펄럭이는 옷을 입고 그때그때마다 방랑하고, 그때그때마다 현재에 머무릅니다.”(124)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까닭이 세계에 대한 저주 때문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머무르는 것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황야에서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차가 다니는 거리의 군중 한가운데에서거주합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것은 거주의 한 종류입니다. 모든 욕구와 굳게 잠긴 자아를 버린 거주 말입니다. 그런 거주는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비어 있음은 어떤 부정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선불교의 길은 이렇게 부정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길은 다시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즉 사람들이 거주하는 다양한 형태로 된 세계 말입니다. 이런 긍정은 이미 인용된 선불교의 가르침의 깊은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이전처럼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나는 밥 세 그릇을 먹었고, 오늘 저녁에 죽 다섯 그릇을 먹었습니다모든 현존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위대하게 긍정됩니다.” (130~131)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부정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 마음은 한 곳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집에 갇혀 있으면 집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 밖으로 나와야 집이 제대로 보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집 밖과 집 안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으로써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나 거주하는 모순을 실천합니다. 어디에나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어디에나 거주할 수 있는 걸까요? 집 밖과 집 안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데, 어떻게 거주하는 마음과 거주하지 않는 마음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선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은 집안에 집착하는 마음을 부정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깨달은 이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깨달음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새로운 긍정을 위해 부정하는 이중 운동을 깨달은 이는 하는 것이지요.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깨달은 이들이 말하는 저편은 이편과 다르지 않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은이는 선불교의 큰 죽음은 내재성의 현상, 즉 내재적 전환을 의미(153)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행위는 마음을 비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분별심이 생깁니다. 분별심이 시비(是非)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내재적 전환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자기를 비워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지요. ‘내면성에 집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면성이 자기에 매인 마음이라면, 내재성은 자기에 매이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내재적 전환은 그러니까 시비를 낳는 마음에서 벗어나 청정한 마음 상태에 이르는 걸 말합니다. “사람들은 더위 혹은 추위에 대항하지 않고 그 속으로 자기를 가라앉힙니다. 거기에는 더위 혹은 추위를 겪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153~154)라고 지은이는 말합니다. 마음에 집착하는 자가 사라지면 더위니, 추위니 하는 현상도 사라집니다.

 

지은이는 태고의 친절이라는 말로 깨달은 이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펼치는 공감을 설명합니다. 공감의 대상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존재자 일반이 공감의 대상입니다. 태고의 친절은 감정이입도 아닙니다. 감정이입은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는 주체가 남아 있으니까요. 공감은 나의 감정이 아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174) 태고의 친절은 이를테면 숨 쉬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늘 숨을 쉽니다. 지은이는 인간이 숨을 쉬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숨이 숨을 쉽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숨을 한 번 멈추어 보세요. 잠깐은 이럴 수 있지만, 숨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숨은 어떻게든 숨을 내쉬려고 합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공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를 중심에 세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공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타자와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엽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아닙니다라는 지은이의 말은 여기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고 하겠습니다.

 

마하가섭의 미소 짓는 얼굴로 지은이는 글을 맺습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꽃을 들자 미소로 그 마음을 깨달은 인물입니다. 선불교는 부처님과 마하가섭 사이에서 일어난 이 태고의 미소로 시작된 셈이지요. 마음을 비우고 미소 짓는 얼굴은 사물을 구속하지 않습니다. 그런 얼굴은 그때그때마다 머무르는 사물들의 얼굴로(모든 모습으로) 있습니다.”(188) 내면성이 제거된 이 얼굴에는 태고의 친절이 담겨 있습니다. 태고의 친절로 타자와 공감하는 사람은 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로 사물과 마주합니다. 이런 얼굴에는 내면성이 자리할 장소가 없습니다. 내면성은 자기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지은이는 마하가섭의 미소로 마음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를 수 없는 세계를 언어로 표현합니다. 선불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에서 뻗어 나옵니다. 이성의 언어로 선불교를 들여다보는 순간 선불교의 진리는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립니다. 언어를 넘어선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일상에 진리가 넘쳐납니다. 선불교를 이해하려면 이 모순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가 나온 마음자리를 뚜렷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선불교로 가는 길은 그래서 목적지가 없는 길인 것입니다.

 

  

o*****s 2019.05.13. 신고 공감 4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