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친 이후에 다른 책들에 묻혀살다 n.p 를 읽었다. 키친의 그 소파의 푸근함과 돈가스덮밥의 따스함이 아직 남아있는듯 한 기분으로 책을 들었다. 생각대로 좋았다.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비극적인 발상이었다. 한 남자가 겪은 고통은 내 상상보다 끔찍하고 잔인했으리라...사랑하는 여인이자 딸이었던 그 여자는 그 사랑했던 남자이자 아버지가 남긴 일기같은..편지같은 소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정말 잔인한 소설이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쓰여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은 그런 것들이 하나도 추하거나 더럽거나 근친상간이라는 저질스런 요소로 보이지 않게 한다. 다만 그 인물들이 많이 아팠겠구나. 자살할만큼 그 남자는 얼마나 괴로웠을까...그 절절하고 가슴 아픈 그들의 이야기를 번역하던 사람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상한 시작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실제로 존재한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갈망만이 남는다. 여기서 키친에서 보여진 요소가 보인다. 죽음에 대한 바나나의 시선. 어떤 사람들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제 할일만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바나나는 누구보다 죽음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누가 죽었다고 평생으로 고통과 슬픔 좌절로 식음을 전패하고 헤매는 사람은 없다. 슬픔은 가슴으로 묻고 그 또한 자신의 생활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으며 죽은 이를 가슴 한켠으로 밀어둔다. ...그렇다고 그들이 잊는건 아니다. 항상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굳이 크게 말할 필요도..그렇다고 정작 그 사람만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이 주위에 있을것이란것. 그 사람과 상처를 함께 치유해 가는 것...그런것들을 보여준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자신의 생살을 꿰매듯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과 나누면, 마취를 한듯...아프지 않을 것이다. |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것은 작년 초여름, 이렇게 표지가 이쁜 책이 아니라 언제 나왔는지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분명 오래되었을것이 분명한 먼지쌓여 누렇게 변해 학교 도서관 제일 아랫쪽 구석에 꽂혀 있었던 N.P 였다. 그땐 한창 일본현대여류문학에 빠져있던 참이라 요시모토 바나나부터 시작해서 유미리, 에쿠니등등, 지금은 작가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일본현대여류문학라는게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감정만 넘쳐나고 만화같은 전개에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 환타지 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쉽게 끌리지만 그만큼 또 쉽게 질려버린다. 이 독특한 문학장르에서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책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였고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N.P였다. NP 역시 감정이 넘치고 바나나 특유의 상처치유와 행복찾기,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런 게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저런 점에 반한게 아니다. 내가 이 책에 반해버린 것은 바로 이 책에서 풍겨져나오는 존재의 생명력 에서 였다. 스이는 삶을 포기한듯 하지만 그 속에서 더욱더 강하게 풍겨져 나오는 삶에 대한 광기와도 비슷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져 있는 줄이 금방이라도 뚝 끊어져 버릴듯 아슬아슬하면서도 눈을 땔수 없는 어떤 에너지. 나는 이 느낌에 반해버린 것이다. 스이는 분명 삶을 지겨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삶을 계속 이어가는 자신을 경멸한다. 하지만 그런 삶 속에서 스이는 계속계속 찾고 있다. 삶을 살아가야만 할 의미와 이유를.. 삶 속에서의 끝없는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이 강해지면 지는거다. 스이의 삶은 어떤 의미로 판돈이 큰 내기 같았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그래서 눈을 땔수 없다. 책 속에서 '나'의 냉정한 눈으로 스이를 바라보는게 재밌었다. '나'의 스이와 같은 삶을 살고 싶으면서도 또한 저런 삶은 절대 살고 싶지 않다는 두가지 마음 사이에서 결국 한가지를 정하지 못하고 허둥되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객관적인 시선이 좋았다. 이 책의 계절은 여름이다. 스이의 생명력도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과도 같다. 누군가에겐 기분좋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겐 고역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본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요시모토 답게 황당하고 엉뚱한 구석이 많았지만 넘처나는 생명력만은 진실 이였다. |
| 요즘 계속 요시모토바나나의 책을 읽었는데도 어느 한권도 마음에 와닿지 않아 '왜 그런걸까...?' 생각해보게됐다. 물론 가장 간단한 이유는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이겠지만 왜 내 취향에 안맞는걸까. 소설속의 대화는 인물의 성격, 사건의 진행, 소설의 주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다. 읽는 것에 빠져들다보면 나중엔 따옴표의 존재가 거슬리지 않게 되고, 주인공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되기까지 하는데.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속 사람들은 정말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 그게 주제랑 관련있는 대화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이 때론 주제를 너무 곧바로 다루고, 때론 주제와 전혀 관계 없는 딴 대화를 한다. 그래서 소설과 나의 거리가 적당한 선에서 계속 이어지지 않아 소설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인물의 성격을 대화나 사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직접 "너는 이렇고 이런 사람이야. 그래서 이렇지."라고 묘사를 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처음 등장할때 기대했던 인물과 전혀 다른 인물이 거기에 있다. 이 소설에선 주인공과 스이가 더욱 그런데, 스이는 등장하기 전에 묘사된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인데다가(처음엔 그녀가 "마물"이라고 한다) 오토히코가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지않다. 막판에 가서야 '사실은 스이가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사건은 늘 충분히 서술되지 않은 채 해결되어 버리고, 그것은 언제나 다른사람은 다 져버리고 마는 운명같은 것에 주인공은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된 것이다. 주인공들은 말은 담담하게 하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둘려버린다. 바나나의 소설은 마치 자기들끼리 놀며 시청자들에게도 웃음을 권하는 TV의 쇼프로그램같다. |
| N.P 노스 포인트의 약자로 오래된곡의 제목이고 다카세 사라오라는 작가의 소설 제목이고 이 글의 작가, 그리고 이글의 번역가 모두 죽음. 처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역시 요시모토는 죽음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려 하는구나. 이정도로 읽어내려갔는데. 근친상간을 강하게 소재로 삼고있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역겨웠다. 그녀의 순정만화같은 스토리 전개와 감상적인 필체가 아무리 맘에 든다해도 , 다 좋을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를 완전히 사랑하기는 사람이나 소설이나 물건이나. 다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글. 왠지 매력이 있었다. 그러기에 단숨에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것이지... 안그랬음 근친상간에 말도 안되는 , 이유도 모를 그런 허무한 죽음들에 그냥 책을 접었을것 아닌가? ㅋ 아무튼 요시모토 바나나는 못말린다. 스이라는 인물. 작가는 많은 의미를 담고 싶어했던것이 분명하다. 설정 자체에서 정말 엄청난 발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애인 그리고 그의 죽음이후 이복동생과의 연인. 그런그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해서 였을까? 물론 이해는 가지 않는 인물이나, 나름대로 궁금하게 만드는 신비감 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스이에 대한 느낌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만한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주인공 카자미. 스이를 지켜보고 설명해준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엔 스이의 사랑이었던 오토히코와의 관계에 어떤 발전 가능성을 남기고 글이 그친다. 카자미와 스이의 관계가 참 난감하다. 그저 카자미. 그러니까 소설속의 '나'는 스이와 모호한 관계일수 밖에 없는데, 독자는 나의 눈을 통해서 스이를 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해 해야만 했다. 물론 이해 하던 그렇지 않던 그건 독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작가가 스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지금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난 어쩌면 이 소설의 충격적인 설정과 수많은 의문들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끝까지 눈을 쉬지 않고 내려갔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의문들은 아직도 답답한채 그렇게 남아있고... 이제 다른 책을 읽고 있는데도 , 이 소설이 꺼림찍한 기분으로 남아서 이렇게 끄적대지 조차 않으면 안되는 기분에 사로 잡혀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또 요시모토의 다른 소설을 읽으려 한다. 중독인가?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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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번역되어 있는 모든 - 실제 저서는 모두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다 - 그녀의 책을 읽기를 시도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모든 책을 한꺼번에 접하기보다 띄엄띄엄 텀을 두고 손에 쥐고 있어 모든 책을 읽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책 말고 아직 한 권이 더 남았다. <암리타>.
그녀의 소설은 매우 친절하다. 그녀의 작자 후기에 따르면 - 사실 작자 후기를 넣는 작가는 요시모토 바나나 말고는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 자신이 지금까지 써온 테마 전부 (레즈비언, 근친간의 사랑, 텔레파시와 심퍼시, 오컬트, 종교 등등)을 가능한한 적은 등장 인물과 조그만 동네 안에 쏟아 부었다고 말한다. 이전의 소설도 그러했고, 이 소설 또한 이전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비주류인들의 아픔을 한데 묶어 그들의 아픔을 살펴주고, 상처를 보듬어준다.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다른 등장인물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언제나 이야기 구조는 똑같다. 줄거리의 결말은 그녀의 소설 첫부분을 읽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우리가 그녀의 소설을 읽는 까닭은, 언젠가 내가 다른 리뷰에 썼듯이,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치유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처가 치유됐건 그렇지않건간에. 적어도 우리는 그런 작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그녀를 접한다.
그녀의 소설이 매우 친절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제나 그녀는 어둡고 아픈 그늘진 인생들을 그려내지만 그들에게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준다. 살아야한다. 나는 살아야한다, 는 그런 생에의 의지를 심어준다. 그대들을 향해 살포시 미소 지어주며 자 이리와봐. 내 어깨에 기대, 내 무릎에 누워 잠들어봐, 라며 기꺼이 나를 의지할 수 있게, 충분히 그들이 마음편히 기댈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의 그 친절한 미소는 이제 너무나 가식적으로 보인다. 숱하게 반복되는 '아픔-치유-희망'의 구조는 이제 더이상 내 영혼의, 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기엔 '지나치게' 친절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친절함은 인간의 본성의 선함을 증명해주는 듯 하지만, 때로는 그것의 반복이 무섭고 두렵기도 하다.
일장일단이 있겠지. 그녀의 모든 책이 아닌 어느 단 한권의 책을 손에 쥐었다면 그 친절함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똑같은 친절함의 반복을 경험한 나로서는 이제 그 친절함이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친절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반복된 친절은 나에게 무감각함을 선물해주었는지도. 뻔히 드러다보이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인기작가의 순정만화를 보는 듯한 기대감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더이상의 기대감을 저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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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N.P를 아는가요. 멀리 흐르는 인어의 눈물처럼 아련히 귓가에 맴도는 구슬픈 멜로디. 잡으려고 다가서면 멀어져 버리는, 나의 신기루, 나의 오아시스.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마음에 품고 사는 이름자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연인의 이름이었든, 친구의 이름이었든, 좋아하는 가상 인물의 이름이었든지 간에 누구나 하나쯤 머리가 아닌, 가슴에 품은 이름이 있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에서, 그러한 의미로 다가서는 이름 하나 품지 못함은, 그 얼마나 비통하고 가련한 삶인가. 유독 길가는 사람 중에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를 둘러싼 배경은 흐리게 처리라도 한 것 마냥, 주위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그 사람의 얼굴만이 또렷이 다가와 먼저 눈에, 그 다음엔 머리에 박힌다. 유달리 시야에 들어오는 얼굴, 얼굴 하나. 카자미 또한, 유달리 눈에 띄는 그들을 조용히 관찰하였다. 자신과 그들의 운명의 고리를 모른 채, 이미 운명이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실을 모른 채. 이윽고 우연이란 녀석의 장난으로 그들 중 한명씩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막연히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다. 비단,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좋은 느낌.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그러한 만남과 사랑에 관한, 느낌에 관한 이야기가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카자미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사키, 오토히코 남매와 우연히 만나 제각각 나름의 우정을 쌓는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만난 스이와도 언제 만나든 마음편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스이는 결코 평범치 않은 삶-아비와 통정하고, 이복동생인 오토히코와 통정하고-을 살아왔고,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남동생의 아이를 가지곤 자살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소설 시작부터 나를 둘러싸고 흐르던 알 수 없는 위태감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 누구든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카자미의 모습에서 어떤 이든 감화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스이는 자살계획을 수정하고, 그간의 얽힌 저주와도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된다. 사실, 누구나 자신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있다. 굳이 일본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지 않더라도 판단할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 하지만 과연, 정상의 눈에 비친 비정상이 정상인가 비정상의 눈에 비친 정상이 정상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분명 우리에게 낯설고 생소한, 그리고 조금은 거북한 배경이긴 하다. 근친상간. 그러나 그 거북한 소재를 전혀 거북스럽지 않게 풀어내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나는, 항상 무심한 듯 하지만 그 본질과 주제를 겉돌지 아니하는 바나나의 문체가 좋았다. 그녀의 글은 거스름이 없다. 그러한 말투로 근친상간을 다루든 자살을 다루든 동성애를 다루든, 다 수용될 것만 같다. 그렇게 막연히 파고드는 그녀의 글들이 좋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나의 믿음을 흔들지 않았다. .......그리곤 오래전 전해져 내려온 구슬픈 곡, N.P 그 자체로 남았다. 문득 책 표지에 적힌 글귀가 떠오른다. ‘사랑은 천국보다 더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읽고 나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왜 사랑이 그들에게는 천국이 아닌, 지옥이었는지. 왜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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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n.p를 읽으면서 참으로 오랜시간이 거렸다..
원래가 오랜기간 동안 두고두고 읽는 편이라..n.p 역시
두고두고 오래 읽다 어느날인가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중간까지 깨작깨작 됬던 부분을 뒤로하고
처음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집중을 하면서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에 빠져버렸다..
스이와 요토히코 그리고 카자미..
나는 요토히코에게 많은 감정이 쏠렸다..
스이가 표현햇던..비오는밤 마치 팔려나가는 새끼 말처럼 그렇게 요토히코가 서있었고
라는 구절은 나는 수십번 반복해서 봤다..그리고
몇일을 헤어나오기 위해...노력했다..
작가의 표현력이..참으로 맘에 들어..
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두권이나 구입했다.. [인상깊은구절] 비오는밤 마치 팔려나가는 새끼 말처럼 그렇게 요토히코가 서있었고 |
| N.P - 바나나의 역작 그녀의 처녀작인 ''키친''을 읽으면서 이런생각을 했다. ''참 잔잔한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하고. N.P는 한여름과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피부에 달라붙는 모래알.. 훈풍... 짜증나게 더운 여름이 아닌, 그런 느낌이다. 읽고 난후 그런느낌이 드는 이유는 ''시이''와 ''나(카자미)''가 여름을 닮은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소설은 흔치 않은 주제들이 많지않은 등장인물과 역시 넓지않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N.P는 바나나의 역작이라한다. 그것은 바나나가 지금까지 소설에서 써왔던 소재를(근친관계, 텔레파시, 초능력-신내림 비슷한-, 레즈비언-이라기엔 뭐하지만..-) 집약시켰기 때문이다. 다케시가 썼던 N.P에 수록되지 않은 98번째 단편은 실재의 일이고, 그것은 자주 소설과 그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어렵게한다. 여자주인공이 그러하고 나 또한 그렇다. (사실 둘다 사실이고 현실이기에 구분할 필요는 없었지만..) ''스이''가 어떻게 살아갈것인가. ''나''와 ''오토히코''는 어떻게 될것인가 괜한 기대를 해본다. 소설은 끝이 났다. 여름날 햇볕에 탄듯한, 쓰린, 근질한, 그런마음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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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 >> 요시모토 바나나 글/ 김난주 옮김 이 책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가의 후기에서 " 지금까지 써온 소설의 테마 전부(레즈비언, 근친간의 사랑, 텔레파시와 심퍼시, 오컬트, 종교 등등)를 가능한 한 적은 등장인물, 조그만 동네 안에 쏟아 부은 이상한 공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라고 말했듯 이 소설에는 그녀의 재능과 기술을 총동원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의 책제목이기도 한 「N.P」 는 다카세 사라오라는 신통치 않은 작가가 미국에 살면서, 9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제목이다. 그 책의 98번째 공개되지 않은 단편을 번역하고 있는 쇼지와 그의 여자친구 가노와 다카세 남매인 사키와 오토히코, 스이 이렇게 5명이 이 책으로 인해서 서로 얽히게 된다. 98번째 단편을 미완으로 남겨 놓은 다카세가 사랑한 스이라는 인물은 나중에 자신의 딸임을 알게되고 다카세는 48 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스이는 98번째 단편을 쇼지에서 번역을 맡기지만 쇼지 역시 책을 완성하지 못 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스이와 오토히코는 서로 사랑하며 몇 년을 지내지만 결국 스이가 떠나게 되고 사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재능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오토히코와 가노는 함께 바다로 여행하며 이 책은 끝맺습니다. 다카세와 스이, 스이와 오토히코, 그리고 쇼지와 가노까지 이 소설은 부녀의 사랑, 남매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마지막은 모두 끝나고 만다. 가노는 이들을 만남으로써 차츰 쇼지의 죽음을 치유해 나가게 되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끝남과 동시에 여름이 끝나가면서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종적을 감추고, 삶을 이어갑니다, 이 소설의 배경인 여름처럼 주인공들의 뜨거운 사랑의 강렬함 만큼이나 강렬한 내용으로 마지막까지 빠져들게 만들었다. #YES24 #예스24 #북클러버 #도서서평 #요시모토바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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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었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책장을 펼쳐들었다.
그리곤 쇼지는 자살을 했다. N.P의 저주에 걸려버린 것 처럼.... N.P에 나오는 사람들 중 정상적인 생각이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보인다. 다들 불안정해보이고, 불빛에 흔들리는 듯한 흐릿한 영상으로, 하지만 자신들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삶은 또 강한 색깔을 뿜어내며 마력을 드러내며 주위를 빨아들인다. 스이에게서 느껴지는 어둠과 순수함, 그리고 타락과 불안정은 비조화속에서도 빛을 내며 아버지를 남자로, 형제를 연인으로 그리고 카자미를 흡수해버렸다.
자살의 기운을 풍기고, 자살을 생각하며 살아가던 스이가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왜 일까? 살아 남아야만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 어째서? 라는 무의미한 질문이 필요없다고 느끼게 하는것. 그것이 바나나씨가 스이와 카자미를 통해 말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든 삶에 문제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으니, 누군가의 잣대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생각하는 바대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바나나씨의 생각이 그대로 묻어난 듯하다. N.P의 주인공은 스이였지만, 그런 스이를 N.P속에서 건져준 카자미. 그녀는 N.P의 모든 불행한 인물들의 진정한 우체통이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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