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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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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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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에게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책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세미나에서 만난 지식인, 혹은 성당의 미사나 사찰의 법회에서 만난 종교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란 놈은 참으로 특이한 족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경계에서 춤추다』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경식 작가와 타와다 요오꼬 작가에게 신뢰를 넘어선 아름다움, 즉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스트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꼬가 열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주고 받았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편지글이 갖는 은근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작가는 '남과 여'라는 이질적인 성별과 10여 년의 나이차가 나는, 속물적 시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들이 나누었던 열가지의 주제에 대해 지성인으로서의 폭 넓은 사색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고한 기품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행'을 주제로 나누었던 두 작가의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툭 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와 더불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p.68 서경식이 타와다 요오꼬에게)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철도에 의한 이동은 육체의 이동입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수천 킬로미터나 옮겨놓는 것이죠.  이것은 이른바 집필활동이 서재 안에 갇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무대예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일본어가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언어를 그 내부에 포함하는 까닭에 온갖 언어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부터 또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운동 자체에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p.75~p.76 타와다 요오꼬가 서경식에게)

 

이 편지들은 재일교포 2세 작가로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서경식 작가와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타와다 요오꼬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글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편지가 마치 서로 다른 악기 두 대가 화합하여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 협주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말입니다. 

 

두 저자의 사유의 방향은 서로 합치 되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생한 소통의 현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의 열가지 주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고 그에 화답하면서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엮여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목소리에 대하여 쓴 타와다 요오꼬의 말은 재밌습니다.

 

"저는 얼굴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음성이나 말할 때의 리듬, 언어 선택 등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언어를 말하면 이미지가 싹 바뀌어버리기도 해서,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싶어 불안해집니다."    (p.130)

국적, 성별, 세대가 모두 다른 두사람이 ‘언어(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두사람이 지니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재일조선인인 서경식은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규정해왔으며, 타와다 요오꼬 역시 일본인 여성 지식인이지만 1982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살아가는 이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어와 투쟁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기를 희망하는 두 작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아름다운 두 지성인의 사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s*****l 2014.04.09. 신고 공감 1 댓글 5
리뷰 총점 종이책
경계: 思考의 매트릭스로 빠져든다, 문득 세상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진다
"경계: 思考의 매트릭스로 빠져든다, 문득 세상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진다" 내용보기
1.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이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필 왜 그때 그 일이 일어났을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아니 그냥 내 주변의 신변잡기들조차 꼬리에 꼬리를 문 수수께기 풀이처럼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뒤의 후유증이다.(흠, 글쎄 뭐 사실은 나 자신이 워낙 생각이 많은 족속이었기에 이런 말은 아무 의미 없는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
"경계: 思考의 매트릭스로 빠져든다, 문득 세상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진다" 내용보기

1.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이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필 왜 그때 그 일이 일어났을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아니 그냥 내 주변의 신변잡기들조차 꼬리에 꼬리를 문 수수께기 풀이처럼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뒤의 후유증이다.(흠, 글쎄 뭐 사실은 나 자신이 워낙 생각이 많은 족속이었기에 이런 말은 아무 의미 없는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

 

2. 

서경식, 타와다 요오코 선생 두 분이 어떤 특정 사건/사물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놓은 책이니, 최소한 단일 건에 대한 두 개의 생각/의견이 있을 테지만, 막상 두 선생님의 머릿속도 매우 복잡다단하여, 실상은 하나의 소재에 대해 수많은 입장이 이어지는 형국이며, 그 입장들에 대한 역사/연원이 재치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책이다. 서경식 선생의 글이야 워낙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타와다 선생의 글 역시 깊으면서도 참신하다.

한없이 가볍게도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원제대로 '당구서간'(다마쯔끼서간) 정도의 제목을 달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말 제목이 <경계에서 춤추다>라니, 공연히 무거워 보이게 만들어서 뭐하겠다는 것인지?

 

3. 나 자신을 위해서 몇 구절을 기록해놓는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의 일부다.

(서경식의 첫 번째 편지 中 타와다의 베를린 집을 보고 마치 '운송회사 사무실' 같다고 느낀, 그 연장선상에서 옮겨적은 글. p.25)

 

그런 순발력있는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 농담 삼아 스스로를 웃어가면서 실은 우리에게 침투해 있는 고정관년 그 자체를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디아스포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경식. p.55)

 

또다른 날,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랑랑이 빈필하모니와의 협연으로 ... 모짜르트라고 하는 천재가 또 한사람의 천재의 몸을 빌려 눈앞에 강림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비상한 재능을 지니게 되어버린 인물은 모짜르트가 그랬듯이 오래 살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런 공상을 했습니다.

요시다 히데까즈는 "모짜르트는 미묘한 귀를 가진 덕에 분명히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 100미터가 아니라 1킬로미터 반경쯤 되는 시야를 지닌 천재가 나타납니다. ... 그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협소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커다란 기쁨을 줌과 동시에 끈임없이 자신의 세계 밖을 더욱 잘 파악하고 싶다, 바깥쪽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는, 분수 넘치는 초조함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 빼어난 작곡가의 작품을 뛰어난 연주로 듣는다는 것은 덩벗는 기쁨이기만 때로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는지요. (서경식. p.145)

[그런데 이 글에서 모짜르트나 '작곡가'를 '예수'로 바꾸어 놓으면 어떨까? 왠지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4. 자살에 대한 서경식/타와다 선생의 묘한 입장 차이

 

자살이란, 긍지를 지니고 혹은 절망하여 혹은 허무감에 몸을 맡겨 개인이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자살은 生보다는 性표현의 하나로, 연극적 요소가 강하고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이 만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타와다. p.181)

 

카네코 후미꼬의 경우는 ...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과 에로스를 관철하는 것은 이런 경우 일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스스로의 '생사'를, 또한 '성애'를 '신'이나 '국가'로부터 되찾아옴으로써 정신적인 독립을 쟁취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타와다. p.193)

 

5. 책을 읽은 뒤에 다시 꺼내보거나 혹은 '읽고/보고/듣고'싶어진 것들

* 마야코프스키 시집 (막상 다시 읽어보니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지만)

* 영화 '타인의 삶' (역시 꽤나 지루했던 영화다)

* 공산당 선언 [맑스/엥겔스]

* 초현실주의 선언 [앙드레 브레똥]

*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 The namesake' [줌파 라히리]

* 파울 첼란의 詩

* 테레싸 텡의 노래 ['첨밀밀'을 부른 가수]

*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그림들

* 모짜르트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 모짜르트 <레퀴엠>

 

그렇지만 역시 이 책을 읽고 난 뒤, 무엇보다 해외에서 장기체류하며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흠.

r******a 2010.11.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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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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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은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로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부르는 사람. 일본어와 한국어 사용자. 다와다 요코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독일로 건너가 수십 년간 그곳에서 살면서 스스로 ‘제2의 모어’를 갖게 된 작가다. 일본어와 독일어 사용자. ‘나고 자란 곳, 속한 곳’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들, 혹은 그렇게 살고자 열망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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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은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로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부르는 사람. 일본어와 한국어 사용자. 다와다 요코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독일로 건너가 수십 년간 그곳에서 살면서 스스로 ‘제2의 모어’를 갖게 된 작가다. 일본어와 독일어 사용자. ‘나고 자란 곳, 속한 곳’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들, 혹은 그렇게 살고자 열망하는 이들에게 서경식과 다와다 요코는 특별하다.

가슴이 뛰고 문장을 읽어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들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든 머물 수 있음에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r*******s 2017.11.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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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아 - 서로에게 - 허물없이 - 경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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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나라에 떨어져 사는 두 작가가 편지로 마음을 나눈다. 써놓고보니 상투적이다. 하지만 마음을 나누는 일만큼 상투적인 일은 없다. 방법은 상투적이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은 극히 세련되어 좀 긴장을 하며 읽어야 할까 싶지만 서경식 선생의 글은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의 여지가 있겠다. 서경식 선생의 글 안에는 날이 선 칼날이 깃들어있지만 그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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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나라에 떨어져 사는 두 작가가 편지로 마음을 나눈다. 써놓고보니 상투적이다. 하지만 마음을 나누는 일만큼 상투적인 일은 없다. 방법은 상투적이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은 극히 세련되어 좀 긴장을 하며 읽어야 할까 싶지만 서경식 선생의 글은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의 여지가 있겠다. 서경식 선생의 글 안에는 날이 선 칼날이 깃들어있지만 그 칼날이라는 것이 마치 깃털과 같이 가볍고 온화하다고 해야 할까. 하는 이야기들은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드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저 편안하기만 하다. 그 편안함이란 옛날 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뜨끈뜨끈한 온돌에 몸을 지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 책 또한 그럴까 싶었는데 저자는 두 사람, 서경식 선생과 타와다 요오꼬라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작가. 그렇기 때문에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들은 일본어라는 언어로 편지를 주고받는데 당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서울과 베를린.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생활을 한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이란 열 가지 테마로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어는 일상적이지만 그들이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말을 주고받기에 편지의 무게는 그다지 가볍지 않다. 그러다 문득 느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그래 다 가벼운 것들 투성일 수도 있겠다. 나 혼자 이렇게 마음 속에만 담고 있다면 정말 좁쌀 한톨만한 무게도 지니지 못하겠구나 싶다. 제아무리 무거운 존재감을 띠는 존재(혹은 단어)라고 해도 나 혼자 중얼거리는데 상대방(혹은 세계)이 알지 못하는 이상 두려울 건 하나도 없으리라. 체계가 있어도 그만, 암흑 속을 날으는 파리 한 마리와 같다고 해도 그만이다. 훌쩍, 울어주고만 싶다. 그건 인간이 아닌 거잖아. 사람이 할 수 있는 많은 작업들 중 고독이라는 게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거라지만 누군가에게 중얼거리지 않는다면 하나마나 ,있으나마나  0에 가까운 존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100에 가까운 존재감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도 경계에서 춤을 추듯 서로에게 손짓, 발짓을 하고 있으니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편한 자세를 취하고 페이지를 넘길 수만은 없다. 덮고난 후,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시집을 읽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들이 마음을 담아 서로에게 허물없이 경계 없이 소곤거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나도 끊임없이 소곤거리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난 후 느낀 점이다. 124쪽의 베르메르의 그림 [류트를 켜는 여인] (1662~63년)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류트를 켜지 않았을까. 별무리 가득한 한밤중 양떼들은 곤히 자고 있는데 목동은 잠이 오지 않는다. 들판에 누워 찬 이슬을 맞으며 별 하나를 콕 집어서 그 별에게 밤새도록 마음 속 이야기를 건넨다. 머리카락이 긴 목동은 밤이 무서운 것도 잊은 채 이야기에 열중하다 깜박 잠이 들리라. 평화롭고도 근사한 소통의 밤을 보내리라.

 

그런데도 저는 번역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가의 겹바른 터치와도 같은 낌새랄까 감촉을 거기서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마리삼아 고흐나 루쉰과의 소통, 대화 혹은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겠지요. 이 과정은 번역자와의 소통, 대화, 투쟁이기도 합니다.

 

  망의 허망함이라니, 어쩌면 그리 희망과도 같은지.

 

타께우찌 오시미가 옮긴 [들풀]에 실린 <희망>이라는 시의 잘 알려진 한구절. 이 어색한 문장을 보며 저라는 독자는 원문이 어땠을까를 생각하고, 원문을 새겨넣은 루쉰과, 그것을 고투 끝에 색다른 일본어로 옮긴 타께우찌 요시미에 대해 부족하나마 상상을 펼쳐보는 것입니다. (160)  서경식

 

언어가 되지 못한 타인의 기분을 읽어내는 능력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타인에게 분위기 파악을 요구하고 자신의 요구를 언어화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태도 역시, 인간으로서는 오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20)  타와다 요오꼬  

v******s 2011.02.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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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허무는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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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면 미묘하게 전율을 느끼곤 한다. 뭐랄까 날것의 생생함, 두 사람간의 간극이 없는 접점을 체감해서 일 것이다. 퇴계와 고봉의 편지도 그렇고, 절박한 상황에서 왕래한 여타 옥중서신들이 그랬다.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책은 이런 반열에 드는 책이다.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 두 사람이 경계를 넘나들며 나눈 이야기라고 하면 어울까! 경계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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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면 미묘하게 전율을 느끼곤 한다. 뭐랄까 날것의 생생함, 두 사람간의 간극이 없는 접점을 체감해서 일 것이다. 퇴계와 고봉의 편지도 그렇고, 절박한 상황에서 왕래한 여타 옥중서신들이 그랬다.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책은 이런 반열에 드는 책이다.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 두 사람이 경계를 넘나들며 나눈 이야기라고 하면 어울까! 경계는 모든 것을 속박하는 말이다. 성별, 세대, 국가(지역)… 경계는 허물어지기 보다는 더욱 견고한 벽으로 높아간다. 두 사람이 경계에서 ‘춤판’을 벌인 것은 편지를 통해서이다.

  문학(책)과 미술(그림), 지형, 지물을 통한 지적교감은 너무도 현란하다. 내가 둘의 춤판에 끼어들어 얻은 것들이 너무도 많다. 지명에 매혹되었던 일로 나눈 대화를 듣고 나도 우리나라의 숱한 마을 이름들을 되뇌어 보았다. 골과 실과 나루 등 많은 이름들이 그곳의 풍경과 함께 눈앞에 스친다.



  디아스포라 2세인 서경석은 테오도르 아드르노의 에세이에서 인용한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의 일부다.” 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데 서경식의 제일교포 1세인 아버지와 한국의 유학을 와서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른 두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자주 불렀던 비숍 곡의 ‘즐거운 나의 집’은 아드르노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래의 배경을 알면 서경식이 아드르노의 도덕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영국인 비숍의 곡을 존 하워드 패인이라는 미국작가가 노랫말을 붙여 미국에서 더욱 유명해진 이 노래는 남북전쟁을 종식 시키고 분열된 미국을 사랑과 화해로 이끈 노래라고 한다. 집과 도덕, ‘집은 역사를 조망하는 전망대’ 라고 느낀 서경식은 이점을 말하고 있는 것 일게다.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구소련 시인 마야꼽스끼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 그리고 카페는 명암이 엇갈리는 編年같다. 다만 마야꼽스끼의 강인한 인상만이 변하지 않는 듯한데, 그의 읽어 보지 못한 시를 음송하고 싶어지는 까닭은 무얼까!


이     름


 이름은 디아스포라에게 있어서 ‘역사가 할퀴어 놓은 상처’ 라고 한 성찰은 대단한 사유의 결과이다. 디아스포라가 아니라도 이름에는 태생지의 흔적 혹은 종교성, 역사성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름을 매달고 지구를 떠돌다 보면 더욱 다양한 의미를 만나게 된다는 요오꼬의 말이나,  이름에 낙인 된 상흔을 응시하면 국가와 언어권에 갇혀버린 역사가 아닌 또 하나의 역사를 응시하게 된다는 서경식의 말은 일리가 있다.


여   행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게 맞는 말일까, 시간표와 지도를 좋아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나는 서경식과는 반대로 후자와 가깝다. 시간표 없이 되는대로 사는 것이나 지도를 펼쳐들기 보다는 그냥 끌려서 가는 맹목의 여행. 지도가 없던 시절에 별들을 지도로 삼아 가고 싶은 곳을 갔다던 선인들의 지혜를 생각한다. 여행은 관광이라는 개념과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여행은 간다(行)는 사념적인 면이 있으나 관광은 본다(觀)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하다. 요오고의 ‘탈것은 나의 서재, 여행은 집필의 시간’으로 본 것은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여행은 끊임없이 자기 이름을 말해야 하고, 신분을 요구하는 행위라고 본 관점이다. 신분을 증명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지면서 인간의 존엄이 훼손 된다는 것이다. 전신투시까지 해대는 여행자 검색이 만연한 시대다보니 그럴만하겠다. 무전여행이 통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여행도 시대에 따라 지표가 달라지는 걸까? 그래도 여행은 아름답다. 여행은 進步의 다른 이름이니까!


놀   이


 

 놀이란 사고의 한 양식이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숨겨진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놀이로 머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야한다, 고 하는 것은 놀이를 통하여 사고의 유연성을 기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머리가 굳었다’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절대적으로 놀이가 부족해서다. ‘일도 노는 것처럼, 공부도 노는 것처럼’ 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일과 공부의  중압감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중요한 방도이다. 일(공부)과 놀이는 서로 길항이 아닌 상승을 극대화하는 작용을 한다. 나는 흔한 말로 ‘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놀고’ 라는 말이 애정이 간다. 문제는 일보다는 놀이에 집중할 때, 일을 독촉하는 의미로 사용할 때이다. 일과 놀이는 경중이 없음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길 바란다. ‘그건 놀이에 불과 해’라는 상투적인 말이 때로는 커다란 폭력이 된다, 는 의미는 이를 두고 한 말일 터….

 요오꼬는 쓴다고 하는 일에도 춤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詩를 놀다’라고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詩를 놀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시를 쓰고 싶다, 아니 시를 놀고 싶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어둠과 통한다는 말은 동양적이다. 극상통 즉 극단의 것들이 어우러진다는 경계를 지우는 말이다. 세간티니의 ‘알프스의 한낮’의 그림은 畵題만 들어도 풍기는 인상은 목가적이고 인간적이다. 세간티니는 독특한 점묘화법으로 알프스 고원의 눈부신 빛을 화폭에 담은 화가여서 ‘빛에 홀렸던 화가’라고 한다. 그러나 세간티니는 극단적인 인간 혐오를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하라 타미끼라는 일본의 작가를 처음으로 알았다.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를 목격하고 전쟁혐오와 염세주의로 평생을 살다가 철로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는 그의 일대기는 슬프다. 타미끼의 ‘알프스의 한낮’이라는 에세이에는 그림의 풍경과 자신을 대비 시키고 있다.


天窓으로 비쳐드는 광선이 바깥구름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그것이 또 눈앞에 있는 「알프스의 한낮」의 그림위에 날카롭게 되비치고 있어 나는 양치는 여인과 함께 쿡쿡 찔려대는 바늘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림은 더 없이 한가로운 풍경인데 양치는 여인과 함께 쿡쿡 찔려대는 바늘과 같은 광선을 함께 느낀다는 그의 감성은 망가져 보지만 세간티니의 염인(厭人)적인 면과 타미끼의 염세(厭世)적인 면이 통한 것으로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화가는 사람을 피하여 고원에서 빛에 홀려 살다가 암울하게 죽었고, 원폭투하의 섬광을 본 작가는 평생 전쟁 혐오와 세상을 피하여 철로에 몸을 던져 버렸다. 너무 강렬한 빛 때문일까… 알프스가 가까워지면 빛이 두려워 네덜란드의 우중충한 화풍에 매료될 수 있을까. 아베르캄프, 로이스달, 베르메르라는 화가들의 그림을 일일이 들여다본다. 맞다, 흐린 하늘이 내려앉은 광채와 어두컴컴한 실내의 가는 빛이 언어가 될 수 있겠다. 광선과 광채… 같은 듯 다른 빛.

 카뮈의 「이방인」에서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뫼르소의 말도 떠오른다. 정오의 한낮은 위험하다!


목 소 리


 소리가 없는 전기자동차에게도 기계적으로 소리를 입힌다고 한다.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청소기에도 소음을 입힌다고 한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소리가 있어야 구매력이 높아진다고 하니 무소음청소기 개발은 요원하겠다. 소리를 입혀서라도 존재감을 높인다거나 근접성을 확인시켜줘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부재를 느끼며 현대인은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서경식이 1997년 경 독일 뮌스터에 전시한 백남준의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조용히 연주하다.」를 아주 평이하게 감상하다가 모든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고서 감동과 감탄을 하게 된다. 50년대의 대형 자동차들이 당시 유행했던 도리스 데이, 코니 프랜시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라니, 그것도 장송곡이 애잔하게 흐른다면 상식을 깨는 것이 아닌가. 이런 백남준의 해학을 서경식은 현대문명의 진혼곡으로 읽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조용히 연주하다.」는 삼성자동차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 짐작하지만 레퀴엠을 제거하지는 않았을까. 문명의 최첨단 이기(利器)를 팔아먹는 최대의 재벌인데 장송곡을 하루 종일 틀어놓을까!


번   역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고 한다. 원작자의 섬세한 감정과 의도 등 모든 것을 똑같이 옮겨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흐형제의 편지는 네덜란드 인이던 그들이 프랑스어로 주고받은 것이라고 한다. 고흐의 그림 취향인 두껍게 덧바르는 터치는 투박한 질감이지만,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을  느낄 수 있고  ‘해바라기’의 황홀한 황금색을 볼 수 있다. 번역이 고흐의 캔버스에 물감을 겹겹이 덧칠하여 완성한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번역어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요오꼬가 답신에서 애써 부인하지만 분명히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어떤 면으로 고착시킬 수 있는 번역어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요오꼬는 일본 해부학의 번역고서인 「해체신서」에서 직역으로 쓰인 십이지장(十二指腸)의 예를 들어 ‘언어의 역사를 탐구하여 육체를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 배를 가른 카데바(해부용시신)에서 손가락 12개를 짚으며  언어로 만들어진 십이지장은 육체를 너무 조롱한 말이 아닐련지.   번역의 두 얼굴은 너무 극명하여 고흐의 그림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순    교


 인간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한다, 는 말은 자살을 미화하는 말일 뿐이다. 사람마다 상대적일 수 있는 존엄을 생명보다 우위에 놓기 때문에 죽음을 쉽게 결정한다. 인간을, 그것도 어리고 어여쁜 아이를 번제물로 바치고 도탄에 빠진 나라(백성)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아름답지 못하다. 희생이라는 말은 그래서 위험한 말이다.


 신이 살라고 명령해서 사는 것이라면 신으로부터 죽음을 명령 받았을 때 그것을 거절할 발판을 이미 잃어버린 것.


 사람들은 죽음으로 책임 질 수 없음에도 ‘죽어서 책임을 진다’고 한다. 순교 역시 자기가 믿는 가치를 죽음과 바꾸는 일이다. 죽은 자는 시성(諡聖)되지만 산 자는 배교(背敎)가 된다. 그래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인간은 혼란 속에 산다.


 태어나서 다행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과 정신적 독립, 즉 생명의 주권자로서 삶을 영위할 때 이런 혼란을 벗어 날 수 있다는 점은 수긍이 간다.

 

 고   향


 고향과 타향 역시 무시 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 이 경계가 견고할수록 ‘사람과 사람사이의 먼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말은 루쉰(魯迅)이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데 이런 연유가 아닐까. 박힌 돌(정착민)과 구른 돌(이주민)의 관념은 지역과 국가의 관념으로부터 벗어 났을 때 비로소 해소되는 것이다. 


동    물


 개는 인간과 가장 오래 함께 산 반려동물임에도 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다. ‘꼬리 친다’는 말은 개의 친밀성을 무시하는 작태를 보인 말이다. 개가 주인이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고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늑대의 무리지어 사는 습성 때문에 없어졌던 무리가 돌아오면 안심해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한다. 개는 인간을 한 무리로 인식하여 보호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동물에게 인간의 언어와 행동 양식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우위를 독점하려들면서 위험해지고 있다.


h***n 2011.05.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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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베를린, 당구와도 같은 왕복 서간
"서울-베를린, 당구와도 같은 왕복 서간" 내용보기
우연히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게 됨으로서 서경식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재일조선인이며 그의 두 형들이 한국에서 20년에 가까운 옥살이를 한 것 역시 알게 되었다. 그 뒤로 그들 형제의 책들을 찾아 하나씩 읽었다. <난민과 국민 사이>,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준식 옥중서한>, <서승의 옥중 19년> 등...   재일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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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게 됨으로서 서경식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재일조선인이며 그의 두 형들이 한국에서 20년에 가까운 옥살이를 한 것 역시 알게 되었다. 그 뒤로 그들 형제의 책들을 찾아 하나씩 읽었다. <난민과 국민 사이>,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준식 옥중서한>, <서승의 옥중 19년> 등...

 

재일조선인(재일교포)이라는 불안정한 위치, 항상 경계인, 국외자의 자리에 있는 느낌, 그는 그것을 수많은 책들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책 <경계에서 춤추다>는 당시 서울에 와있던 서경식과 독일에 체류 중이던 일본인 작가 타와다 요오꼬가 주고받은 서한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낸 것으로서, 그러한 경계인으로서의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 그들이 생각하는 여러 가지를 주고받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언어로 된 당구(고토다마?)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야기의 테마는 다양하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이러한 테마로 주고받는 대화들, 참 흥미롭다. 타와다 요오꼬의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처음 접하지만, 서경식의 책들은 많이 읽었기 때문에 '아아, 이 이야기는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혹은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다루었던 이야기군!' 하고 낯익은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다. 여전히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사상에는 깊이가 있다.

 


 

j******m 2010.03.3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언어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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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하얀 피부의 외국인이 다가온다.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 길은 없으나 영어로 말을 건네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으레 내 안에서 인다. 더불어, 미흡한 나의 외국어 실력을 의식한 듯 적지 않은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러한 감정은 그가 나를 지나치기까지 지속된다.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한 사람을 규정짓는다. 한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왠지 우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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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하얀 피부의 외국인이 다가온다.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 길은 없으나 영어로 말을 건네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으레 내 안에서 인다. 더불어, 미흡한 나의 외국어 실력을 의식한 듯 적지 않은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러한 감정은 그가 나를 지나치기까지 지속된다.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한 사람을 규정짓는다. 한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왠지 우리보다 위에 놓인 듯해 보이고, 그래서 우린 생존 차원에서 영어라는 언어를 알고자 안간힘 쓴다. 영어를, 아니 외국어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법이나 단어를 많이 아는 것으론 부족하다. 우리의 사고 방식 자체를 그 언어에 맞추어야만 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가두는 틀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간의 의사소통은 쉽지가 않다. 아무리 전문 번역가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특정 언어권에서 통용되는 미묘한 문화에까지 정통하지 않고서야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이메일이나 블로그 따위가 아닌 서신을 주고 받는 전통적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 정도가 더할 것이다. 그런데 두 저자는 굳이 예전부터 이어져오던 방식을 따랐다. 한 명은 서울에, 다른 한 명은 베를린에 머물면서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시공간의 장벽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인 듯, 두 인물은 상대의 글을 읽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로이 적어 나갔다. 진심은 어떠한 방해물도 극복할 수 있음을, 얇은 분량 속에 수록된 다채로운 주제들을 통해 나는 느낄 수 있었다.

10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쉬이 오갈 수 없는 두 공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가능했던 까닭은 그럼 무엇일까? 이리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난 두 인물이 제가 속한 세상의 변방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서경식 님이야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로 정의하는 인물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 한국인임에도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그는 국적 때문에 일본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를 구사치 못한다는 이유로 조선인도 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의 조국은 둘로 갈린 상태다. 조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북한/남한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다시금 요동친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타와다 요오꼬 씨도 조금은 이색적이다. 일본인이지만 그의 생활은 독일 베를린에서 행해진다. 그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어일 때도 있지만 독일어일 때도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언제 너의 나라로 돌아가냐고 묻는다. 이는 제 아무리 오랜 기간 독일에 체류하더라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일본어로 이루어졌겠지만, 각각 한국과 독일에서 둘은 같은 언어의 문제를 안고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극복하기 힘든 언어적인 한계. 둘은 이를 내용의 깊이로서 극복하려 든다. , 이름, 여행, 놀이,… 이 다양한 주제의 편지글들로부터 공통적인 형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형식을 초월한, 외벽을 뛰어넘는 깊이가 이 둘을 자유케 하고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소통해 왔던가? 무척이나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경쟁에서 앞서기만을 기도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편지는 낯뜨거운 무언가처럼 여겨지곤 한다. 책을 읽는 이가 적고 글을 쓰는 이는 더더욱 부족한 우리네 실정을 돌아보고 있자니, 형식이 같아도 내용이 부실하면 그 언어의 노예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흥미로운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생각할 줄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르는, 투명한 언어의 집에 스스로를 가두어 온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q*****2 2010.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경계에서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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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에세이스트인 서경식과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이 작가 타와다 요오꼬의 서간집. 각각 서울과 독일이라는 자신의 생활터전 밖에서의 삶의 시간을 가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는 듯 하다. 일상의 대화에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이르는 두 사람의 대화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볼만한 내용을 담아낸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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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에세이스트인 서경식과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이 작가 타와다 요오꼬의 서간집. 각각 서울과 독일이라는 자신의 생활터전 밖에서의 삶의 시간을 가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는 듯 하다. 일상의 대화에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이르는 두 사람의 대화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볼만한 내용을 담아낸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우리말 표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발음대로 표현하는 한국에서는 독특한 편집은 이색적이었다. 
c******e 2010.10.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