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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할 때 이런 말을 곧잘 듣는다. "분석하지말고 즐겨라."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사물을 제대로 보려는 의지와 분석은 항상 친구처럼 달고 다녔던 것 같다. 실제 몸에 익어서 그 부분때문에 당혹했던 적은 없는지, 한번도 고민한 적 없던 걸 최근에서야 겪게 되었다. 철없던 아이시절,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그 나이때면 당연히 안아보고 싶은 곰인형이나 푸른 눈의 새하얀 공주인형을 한번도 사주신 적이 없었다. 대신 책장에 전집의 동화책, 위인전, 세계명작문학, 두꺼운 백과사전등을 한살 한살 먹어갈 때마다 채워주셨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이상적이며 관념적인 어머니! 그 덕분에 마룻바닥을 온 몸으로 누비면서 하루 종일 책만 봤다. 어머니의 속깊은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책으로 감성이 풍부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론적이고 설명적이며 고집스러워졌다고 할까. 책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보다 피아노나 바이올린같은 황홀한 악기들을 만져보고 싶었다. 한 때 유행했던 스타일인, 디스코 머리를 땋아 예쁜 리본을 맨 소녀들이 피아노 악보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한없이 부러웠다. 어깨에 기다랗게 뭔가를 맨 남자아이들도 부러웠다. 나도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이런 생각으로 어머니의 눈치를 봐가며 나는 무럭무럭 커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떼를 써가며 해야겠다는 의지는 아예 하질 않았다. 그저 부러움만 컸던 철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중년의 나이가 되어 예술적 취향이야말로 삶의 대부분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건강과 일상을 꾸려 갈 노동이 삶의 기본 조건이라면 예술적 취향은 그런 삶을 따뜻하고 활력있게 한다. 살아갈 맛을 준다고 할까. 삶의 시간이 중간을 넘어가면 감성의 오묘한 맛을 느끼고 싶어하나보다. 보다 세련된 감성의 표현을 만끽하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내 몸속에서 스스럼없이 나오는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럴려면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해보는 게 좋은데 그게 바로 "노는 일"이다. 나는 놀려고 악기를 배우고 노래를 배운다. 잘 놀아보려고, 그러면 감추어진 내 감성의 세련된 모습이 발현될까 싶어서. 그런데 이 노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다. 앞서 말했다시피 어린 시절 내 책들은 나를 제대로 놀 수 있게 하지 않았다. 하나의 목표가 되는 읽기가 좌뇌에 왕성한 활동력을 제공해주었을 지 모르지만 매사 자유롭지 못한 틀, 형식이 나를 옮아매었다. 틀이 되버린 그 습관은 내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내 옆의 타인을 통해 내 모습이 반영될 때 감추지 못하는 성격상 이제껏 엄두를 못냈던 일들도 도모해본다. 언제나 늦은 나이는 없다고 맘대로 생각하며 덤볐던 음악의 세계가 만만치 않았다. 어려서 한두시간 투자할 일이 시간이 지나면 반나절이 되고 어느 시기동안은 집중적으로 한나절을 투자해야하지만 나처럼 나이들어버리면 하루종일 하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다. 일상의 잘잘한 간섭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기 때문이다. 때를 맞이하여 학습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음악전공자들이 들으면 아주 가관이라고 말하겠지만 놀이의 개념이 그저 논다는 의미가 아닌 한 분야에 대해 즐기는 경지를 뜻한다고 한다면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일들은 학습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하위징아가 저술한 [호모루덴스]는 언어학자가 쓴 놀이의 개념을 언어적 접근과 인류학적 시각으로 쓴 내용이다. 노는 일이 뭐에 중요하다고 인문학적 통찰력까지 동원하여 이런 책을 읽어야 하나 싶지만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노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한국적 교육환경에서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들이 나라밖에 나와서 타국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을 보게 될 때, 나는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제대로 노는 법을 몸 속에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학습위주의 공부뿐 아니라 체험과 독립적인 태도는 노는 일과 무척 관계가 깊다. 우리는 놀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던가. 막상 놀라고 멍석을 깔아주면 당신은 잘 놀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뭘하고 놀건가. 우리 삶에 분명 영향을 미칠 제대로 노는 일에 대한 생각이 약간은 어렵고 갑갑한 글속에서 내가 찾은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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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놀고 있네.’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 이 표현은 빈정거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논다, 놀기, 혹은 놀이’라는 표현에 담긴 학문적 깊이를 책을 통해 알게 된 이상 편안히 쓸 수가 없겠다. 아마 쓰려고 해도 그 순간 목구멍에 걸릴 것 같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비유의 반대의 경우라고나 할까?
여기에 장면을 몇 가지 설정하겠다. 장면 1. 박 빈둥 씨는 오늘도 할 일없이 방 안의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네모반듯한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당구대를 떠올렸다. 그 후 한 시간 남짓 그는 가상의 당구를 아주 재미있게 친다. 장면 2. 올 해 고3이 된 홍 열공 군은 좀처럼 영어단어가 외워지지 않는 것이 고민거리이다. 신문을 보던 그는 자신에게 딱 맞는 광고를 발견하고 당장 그 물건을 구입한다. 그 광고는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일명 ‘깜빡이’에 대한 것이다.
박 빈둥 씨는 왜 당구를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홍 열공 군은 깜박이를 이용해서 영단어의 달인이 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 시켰을까? 정답은 놀이이다. 천장은 일종의 놀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수인 그에게 천장은 놀이 공간을 제공해 주었고 그는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었다. 또한 홍 열공 군은 놀이를 하듯이 영단어를 외울 수 있었다. 단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서 보여 주면서 단어의 순서를 무작위로 바꾸어 제시해주는 깜박이는 그가 게임을 하는 긴장감 속에서 단어를 외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처럼 놀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 교묘히 숨어 있다. 우리는 이미 게임, 내기, 스포츠 안에 있는 요소로서의 놀이를 알고 있다. 하지만 놀이의 활동 영역은 매우 넓다. 아니 무한하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문화의 상위 개념으로서의 놀이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문화의 범주에서 놀이의 흔적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놀이에서 문화가 탄생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문화 현상보다 놀이가 우선인 것은 분명하나 놀이는 문화를 낳은 어머니의 역할보다는 문화를 더욱 다양하게 표출해 주는 필수 요소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된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놀이는 인간이 이루어낸 문화의 결과물 곳곳에 작은 별처럼 스스로 빛나고 있다. 저자와 함께 놀이가 가지고 있는 천의 얼굴을 찾아보자. 결코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이미 그에게나 우리에게 놀이이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역사학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흔히 떠올리는 부류의 역사학자의 모습은 아닐 듯하다. 그는 연표에 국한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기 보다는 보다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대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전반적인 양상이 모두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문화 인류학적 측면이라든가, 비교언어학적인 측면을 통해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예증을 통해 ‘호모 루덴스’라는 인간의 또 다른 면모를 낱낱이 밝혀내고 있다.
책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장에서 3장은 호모 루덴스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이론적 토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놀이의 본질과 의미는 이 후의 장에서 실질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이를테면 법률, 전쟁, 철학,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 속에서 서로 다른 놀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를 살펴봄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잘 못 노는지(?)도 알 수 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p.41)즉, 놀이는 태생적이라는 것이다. 인류와 함께 잉태된 본능과도 같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성장해 온 놀이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쉬운 예를 들어 특징을 살펴보자. 우선 농구를 즐기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농구는 일정한 형태(농구 골대)를 갖춘 경기장이 필요하다. 이울러 시간의 제한(4쿼터)이 있으며, 지켜야하는 규칙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구가 놀이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중요한 요소는 긴장감이다. 이는 곧 경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농구 경기가 끝나면 경기를 즐겼던 사람은 모두 일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자 여기에 놀이의 특징이 모두 들어 있다. 찾았는가? 첫째, 놀이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놀이는 일상생활 중에 나타난 인테르메조, 즉 간주곡과도 같다. 놀이는 신성한 의례 속에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데, 모든 의례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맞볼 수 없는 즐거움 등을 준다. 축제가 좋은 예일 수 있으며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 의식 속에 내포된 놀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매 주 하느님께 바치는 미사는 인간들이 일상, 즉 인간 세계를 벗어나 신의 영역을 체험하는 일시적이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놀이의 한 형태이다.
둘째, 놀이는 장소와 시간에 있어서 일상생활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며, 제약을 받기도 한다. 농구 경기는 일정한 형태가 갖추어진 경기장에서 펼쳐지면 시간의 제약(4쿼터)이 있다. 여기에서도 놀이를 찾아볼 수 있다.
셋째,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은 질서가 만들어낸 규칙 안에서 놀이를 즐긴다. 이는 행위자에게 긴장감을 준다. 긴장감은 놀이를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 을 한다. 긴장감이 없는 놀이는 다시 말하면, 질서가 없는 놀이는 더 이상 놀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또한 놀이는 남다름과 비밀성을 가지고 있다. 원시시대에 놀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축제가 벌어지는 경우, 부족 내의 모든 불화가 일시적으로 중지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는 놀이의 남다름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밀성은 ‘가장극’에서 생생하게 표현되는 데 현대 사회에서도 가면무도회는 실존하고 있다.
농구를 하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 이다. 저자가 중요시 하는 놀이의 ‘아곤’적 요소가 여기에 있다. 아곤은 경쟁을 통해서 발현한다. 모든 경기의 형태를 띈 놀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의 스포츠는 놀이일까? 저자는 스포츠가 놀이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현대의 스포츠가 더 이상 이기기 위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곤적 본질보다는 상업적인 이익을 중요시 하는 프로 경기들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외국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학부모들의 항의로 인해 정직당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교사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면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여교사가 정직을 당한 이유가 좀 특이하다. 성탄절이 며칠 안 남은 어느 날 그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을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아이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다. ‘산타클로스는 없다’라는 진살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이들은 충격에 싸였고 집으로 가서 그 사실을 부모들에게 말했다. 부모들을 아이들의 꿈을 짓밟은 교사를 더 이상 교탁에 설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어찌 보면, 교사가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비난받을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사건 속에서 놀이의 특징을 보았다. 놀이의 특징 중 하나는 ‘체하기’이다.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체’하는 행동을 인간들은 암묵적인 약속 속에서 행하고 즐긴다. 여교사는 모든 사람들이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체하는 놀이를 파괴한 것이다. 놀이를 파괴한 자는 속임수로 놀이를 이긴 자보다 훨씬 많은 비난을 받는다. 아이들은 어렴풋이 산타할아버지가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있는 체하면서 놀이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교사는 그것을 유치한 행동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기던 성스러운 의식을 단칼에 잘라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없앤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아이들은 항상 체하기 놀이를 즐긴다. 소꿉장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엄마인척 하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무조건 저자의 생각에 끌려가지만 말고 자신이 직접 놀이를 관찰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을 충분히 즐기려고 애썼다. 처음 읽었을 때는 시대를 초월하면서 각 문화권을 넘나드는 저자의 종횡무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책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방법을 바꾸었다. 책은 조금씩 읽으면서 대신 덮은 후 오랜 시간을 음미하는 데에 할애했다. 책 읽는 것을 놀이라 생각하고 즐기려고 했다. 스스로 놀이의 변신 모습을 찾아보고 그려 보았다. 효과는 좋았다. 내 주변에서 놀이의 숨어 있는 징후를 찾아내는 놀이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인류가 만들어 낸 거의 모든 문명 속에서 놀이라는 숨은 그림을 찾아낸다. 그리고 놀이가 가진 힘이 태초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저자의 눈으로 바라 본 오늘날은 놀이가 사라지고 있는, 아니 이미 사라진 시대일 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전쟁에서 예전처럼 기사도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고대의 전쟁은 적을 경쟁자로만 여겼기 때문에 전쟁은 명예로웠다. 엄격히 현실과는 구별된 채 현실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전쟁에 놀이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 속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내가 살기위해 꼭 제거해야하는 암적인 존재이다. 파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현대의 전쟁은 군인과 일반인과의 구분이 없다. 즉 전쟁은 현실 그 자체이다.
우리나라 국회에는 유머가 없다. 망치는 있지만 말이다. 의회 민주주의의 분위기와 매너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영국의 의회에서는 치열한 토론이 끝난 다음에는 최고의 적수들도 다정한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비열한 비난만이 남을 뿐이다. 양당 정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선거활동이 일종의 국민적 스포츠로 발달되어있다.(p.390) 서로 페어플레이를 하면서 놀이적 특성을 살린 정치활동을 한다. 이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가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너무나 경직된 나머지 감히 누구도 즐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들만의 이벤트가 되고 만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놀이를 조금만 알아도 정치문화가 확 바뀔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여기에 다루지 않는 수많은 놀이의 매력은 직접 읽어보면서 각자 곡 느껴보길 바란다. 영어의 “play"라는 단어가 ‘놀다, 운동하다, 연주하다, 연극하다’등의 다양한 뜻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모든 것이 놀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도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p397을 한번 읽어보라. 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잣대를 가지고 놀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 분명하다. 자, 이제부터 놀이의 심오함에 푹 빠져보라. 당신은 생산하는 인간인가? 놀이하는 인간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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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문학 분야의 교양수업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호이찐가(호이징거)의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또한 딱히 그런 수업이 아닐지라도 ‘호모 루덴스’라는 용어는 ‘호모 파베르’ , ‘호모 사피엔스’ 등과 함께 인류에 대한 수식어로 일반에게도 이미 익숙한 단어다. 사실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에 덧붙여 인류를 설명하는 용어는 무척 다양하고 지금까지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호모루덴스’라는 용어가 특히나 강조되는 것은 그 때까지의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본 획기적인 연구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호모루덴스를 그저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피상적인 단어로만 알고 있었지, (오래전에 홍성사 판으로 나온 적은 있었지만) 직접 책으로 읽어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암서가 판으로 산뜻한 표지를 한 채 나온 책을 보고는, 과연 “호모 루덴스”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첫 번째로 놀라웠던 것은 저자의 언어적 천재성이었다. 히브리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심취한 것도 그렇지만, 그리스어, 중국어, 셈 어, 알공킨 어 등 이름조차 생소한 언어에까지 연구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네덜란드 태생으로 라이프치히에 유학하면서 비교언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저자는 문화, 예술, 문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구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목차에도 보이듯 ‘놀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어적 기원을 시작으로 법률, 전쟁, 문학, 철학, 예술 등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조명하여 고대, 현대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의 장(章)만으로 하나의 책이 엮어질 수 있을 만큼 방대한 저술임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고등 형태의 ‘놀이’를 ①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과 ② 어떤 것의 재현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누고 있다. 또한 거기에 덧붙여 놀이와 의례, 종교, 주술과의 상관성, 놀이와 진지함의 관계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기(혹은 경쟁)와 놀이의 문화적 기능과 인간 문명의 각 분야 속에 내재되어 있는 ‘놀이’의 요소와 특징들을 설명하며 다양한 역사적, 예술적 배경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한 두 번 읽어서 이해될 성격의 책은 결코 아니다. 사실 온갖 분야를 총망라하는 저자의 박식함을 따라가기조차 벅차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고대, 중세뿐 아니라 21세기인 지금의 문화까지도 저자의 이론에 오버랩되어 조금 더 이해가 깊어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아하~’하며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에서 ‘놀이’의 요소를 발견해내고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어렸을 적 ‘얼레리꼴레리~’하고 놀려대던 아이들의 놀이도, 용에게서 공주를 구하기 위해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야하는 왕자도, 온 국민을 열광케했던 스포츠도, 하다못해 바로크, 로코로 시대를 거쳐서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현대의 패션세계에도, 게다가 그냥 보면 놀이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정치나 법정에까지도 의외로 놀이의 요소는 숨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1938년의 저작인 이 책이 지금도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짧은 몇 줄의 글로 <호모 루덴스>의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이 책 또한 한 연구자의 시각이기에 어떤 방면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를 이해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놀이’로서 이 책은 충분히 차고 넘친다. 그저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채 따라가지 못하는 내 자신의 우둔함을 탓할 뿐. 많은 인상적인 글귀들 중 한 두 개만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까 한다.
▷ 규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자는 ‘놀이파괴자’이다. 놀이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다. ……놀이의 세계를 아예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그는 놀이로부터 그 illusion(환상)을 빼앗아 버린다.
▷ 문화의 일반적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여러 분야를 약탈자처럼 침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약탈로 인한 지식의 부족분을 모두 채워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당장 글을 써 나가느냐, 아니면 그만 두드냐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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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화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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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활동,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인 놀이가 법률, 문학, 예술, 종교, 철학을 탄생시키는 데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저자는 현대에 이르러서 일과 놀이가 분리되고, 단순히 놀기 위한 놀이는 퇴폐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며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한 '놀이 정신'의 회복을 바란다. 그는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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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놀이는 평생을 함께한다. 놀이의 과학적 교육적 기능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고, 실제로 요즘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는 대부분 놀이 학습 위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즐거움과 함께 하는 행위는 강한동기와 흥미를 유발한다. 인류와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것은 놀이다. 저자는 인간의 놀이의 기능에 주목하며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인간) 과 함께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이라는 단어를 리스트에 올리며 놀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렇다면 놀이의 정의는 무엇인가? 얼마전 내가 술을 먹고 선배 성대모사를 해서 스트레이트 소주 3잔을 얻어먹고 뻗은것도 놀이고, 한 여당의 원내대표가 1년전에 만난 사람을 만난적이 없다고 연기를 하는것도 놀이다. 놀이가 무엇인지 느낌으로는 와 닿지만 정의 하라고 하면 애매하고, 딱히 이야기 하기 어려운게 놀이라는 영역인것 같다. 그만큼 놀이는 방대하고, 정의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속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놀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놀이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규칙은 쉽게 수정하거나 바꾸지 못하는 것이며, 경쟁심과 보상을 자극한다. 모든 인류의 문화사를 놀이에 관점으로 바라본 이 책은 놀이를 하듯 굉장히 흥미롭다. 놀이와 전혀 상관없을것 같은 다양한 학문과 사회 문화적 현상들이 저자의 깊은 연구와 노력덕에 위로 떠오른다. 다양한 학문속에 놀이적 요소를 찾는것이 놀이 같은게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이유를 쉽게 찾지 못하는 과거의 문화현상들을 놀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적절한 설명에 무릎을 치게 된다. 물론, 현재에도 많은 부분 적용 할 수 있다. 정치의 놀이 현상에서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서 무릎이 쳐지는건 좀 아프지만.
아무생각없이 지나갔던 나의 행동도 많은 놀이적 요소가 있었고, 엄격한 기준과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학문에도 놀이라는 단단한 시금석이 있었다. 인간은 놀이를 하며 나아갔고, 지금도 조금이라도 더 재밌는 놀이를 하기위해 나아간다. 그래서 놀이를 하듯 썼지만 놀이처럼 엄격한 규칙과 노력을 겸비한 이 책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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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문화 속에서 놀이 요소를 찾고 문화의 기원이 인간의 놀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1장은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고 이 장에서 자신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한다. 2장에서는 다양한 언어에서 놀이의 기원을 찾고 3장에서는 놀이를 '놀이(파이디아)' 와 '경기(아곤)'로 나누어 놀이의 특성을 정리한다. 4장부터 10장까지는 각각 법률, 전쟁, 지식, 시, 신화, 철학, 예술(음악, 무용, 미술)에서, 즉 다양한 문화 현상에서 놀이요소를 찾는 작업을 보여준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자료들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11장은 서양문명사를 관통하여 놀이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12장에서는 현대 문명에서 드러나는 놀이 요소를 분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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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스스로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가장 오만한 이름으로 제일 높은 자리에 등극한 이래, 또 다른 특성을 찾아보려는 다양한 모색을 이어 왔다. 호모 사이언스, 호모 파베르에 이어 저자는 인간의 특징을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로 규정한다. 현생 인류의 모든 문화와 생활양식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네델란드 출신의 학자로서 평생을 의례, 축제, 놀이 연구에 바쳤으며 이 연구의 결실이 바로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호모 루덴스”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 저자의 학설이 모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일부 학설에 대해서는 격렬한 대립과 첨예한 반론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전체적인 학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인다. 책 자체는 별로 두껍지 않지만 이 책이 품고 있는 주제의 무거움과 방대하고 해박한 전거들을 따라가기에는 일반인들의 교양으로는 벅찰 뿐 아니라 스치듯이 일독하기에도 엄청난 인내와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저자는 인류를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라고 규정하면서 놀이와 문화와의 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경기와 놀이에 대한 여러 국가의 단어가 가진 어원적 뿌리를 캐들어 가면서 태초 이래로 인류가 가진 모든 생활양식, 즉 정치, 경제, 과학, 철학, 법률, 전쟁, 종교, 예술 등등은 모두 경기와 놀이로 시작되어 그것이 문화로 굳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러한 주장의 시원으로 꼽고 있는 그리스 인들은 문화가 곧 놀이요 문화 속에 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보다 놀이적 특징이 더 적었기 때문에 세계 제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면서도 그 토대는 굉장히 허약하고 부실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겉만 꾸미는 저속한 반짝거림이 로마 문명 전체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모든 문화가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신의 학설을 시대적으로 개괄하기도 한다. 로마 제국시대를 시작으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놀이문화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별 놀이문화에 대한 간략한 해설은 이해를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저자는 인류의 모든 문명을 놀이라고 규정한 자신의 학설에 대한 이론적 기반으로 플라톤의 여러 학설을 거듭 인용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신들의 놀이를 놀아주는 노리개’라는 플라톤의 말이 눈에 띈다. 저자의 학설을 모두 수긍하거나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평생을 한 가지 주제에 몸 바쳐 연구하고 마침내 하나의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른 저자의 열정만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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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2장으로 이루어진 <호모 루덴스>는 아쉽게도 역자 이종인 선생이 밝히듯이 원문인 네덜란드 직역이 아닌 영어 판본의 중역(重譯)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직접 영문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니 비록 중역이기는 해도 충분히 작가의 취지가 전달됐으리라고 믿는다. 원래 언어학자로 학문을 시작한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사에 관심을 두면서 탁월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인류학의 길을 걷는다. 특히 그가 1919년에 발표한 <중세의 가을>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다룬 걸작으로 알려졌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나온 책으로, 하위징아의 중요 저작 중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자, 그렇다면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주창한 요한 하위징아가 생각하는 “놀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보다도 우선한 놀이에 대해서 총체적 현상에서 접근할 것을 작가는 주문한다. 놀이에는 특별하면서도 사회적 기능을 담보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요한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동시에 이 놀이에는 인간의 원형적 행위들이 들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놀이를 통한 ‘이미지 만들기’(imagination) 또한 쉽게 흘려 들을만한 주장이 아니다. 한편, 놀이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자 자유 바로 그 자체이며,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재현과 경쟁을 수반한다. 이런 놀이의 특징은 좀 더 고등화한 형태의 놀이로 진화해 가면서 의례, 축제 그리고 종교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작가는 설명한다. 즐거움이라는 기본 베이스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고등 형태의 문화에 놀이적 요소가 배어 있다는 연구가 놀랍기만 하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학문적 원류인 언어학에서 놀이의 뿌리를 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 개념의 추상화에 대한 그의 연구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찌 고대 그리스어 혹은 산스크리트어에 접근이나 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언어학을 전공한 작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진지함’과 ‘심각하지 않음’이 갖는 상보적 관계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언급이 인상적이었다. 승리와 부상이라는 측면을 통해 놀이의 경제성과의 연결점은 물론이고, 법률과 놀이 사이에도 놀이의 다른 모습인 경기라는 주장은 흥미로웠다. 다만, 그다음에 등장하는 놀이와 전쟁에서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대가에게 도전할 생각은 없지만, 놀이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에는 찬성하지만, 과도한 확대해석에는 이견을 제시하고 싶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가 가지는 문학적 특성에도 눈길을 돌린다. 신화에 등장하는 의인화와 은유의 과정에서도 그는 놀이의 요소를 채굴해낸다. 막연하게만 가진 신화에 등장하는 알레고리와 은유에 대한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철학과 예술에서도 그는 놀이의 개념을 캐내기 위해 계속 작업하지만 두 학문에 대한 알량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대가가 보여주는 총체적 연구의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현대 문명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예단 역시 찬란한 광휘를 발한다. 특히 의회 민주주의 역시 게임의 규칙과 페어 플레이라는 놀이가 가지는 요소들은 거세되고, 정치적 입장이라는 놀이답지 않음이 주류를 이루어 가면서 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코미디가 되는 현실에 저절로 냉소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요한 하위징아는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 문화를 관통하면서도, 도덕의 언저리에서 존재하는 놀이에는 개인적으로 중용이 벗으로 따라붙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즐거움의 방편으로서의 놀이에는 찬성하지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심각한) 경쟁에는 반대한다. 서구학자가 연구한 놀이에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다’(過猶不及)는 동양철학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른 이 말로 맺음을 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