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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食과 생生의 숭고함 - 헨미 요, 『먹는 인간』 인간은 어디서나 먹는다. 전쟁터에서도 먹어야 하고, 병석에 누워서도 먹어야 한다. 몸이 건강해도 당연히 먹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먹지 못하면 남들이 먹여줘야 한다. 먹지 않으면 인간은 죽는다. 먹는다는 건 인간에게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 젖을 먹는 아기를 생각해 보라. 인간의 삶은 먹는 데서 시작한다. 헨미 요가 지은 『먹는 인간』(메멘토, 2017)은 이러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지은이에게 먹는 일은 곧 사는 일이다. 먹는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알 수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다양한 식(食) 문화를 통해 지은이는 사람살이의 밑바탕에 ‘먹는 인간’이 스며들어 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누군가는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는다. 누군가는 배가 불러 남은 음식을 버린다. 먹는 일에 드리워진 ‘차별’은 이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차별을 직접적으로 예시한다. 저자는 “도쿄에서는 매일 50만 명의 하루치 식사량에 버금가는 음식 찌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고 있다.”(30쪽)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오늘도 밥 한 끼조차 먹지 못해 굶어죽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한쪽은 입맛에 따라 음식을 골라 먹고, 다른 한쪽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도 먹지 못해 쓸쓸히 죽어가고 있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삶의 진리가 무색할 만큼 먹을거리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지고 있다. 먹이를 먹는 짐승 앞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쥔 인간의 모습이 그리 신기해 보이지만은 않은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에는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식과 생은 일상의 근원이다. 먹고 사는 일로 우리는 일상을 영위한다. 지은이는 세계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그 지역의 먹을거리에 숨어 있는 삶의 비애를 이끌어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는 일을 반복한다. 에이즈에 걸렸다고 생을 버릴 수는 없다. 폭격에 남편이 죽었다고 생을 버릴 수는 없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난 지 1년 만에 체르노빌로 돌아와 음식을 먹는 귀향민들처럼 사람들은 목숨이 붙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밥을 먹고, 빵을 먹는다.
지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 인간들의 원초적 상황에서 생의 숭고함을 본다. 신을 믿어야만 숭고해지는 건 아니다. 숭고함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근원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오롯이 피어오른다. ‘먹는 인간’만큼 숭고한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 인간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먹는다(적군이 지키는 성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은 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막는다. 먹는 길을 막는 것이다. 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 반대로 행동한다). 그래야 희망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정신적인 동물이 빚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이 일로 하여 인간은 그 어떤 동물도 흉내 낼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훌륭한 자선이지만 좀 잔혹하다. 바로 음식을 나눠 주면 안 될까 11세기 기독교회의 동서 분리, 반목, 슬라브족의 분열. 식전 의식이 이런 분쟁의 깊은 뿌리에 얽혀 쓸데없는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까? 신앙이 없는 나로서는 조금은 지나친 걱정을 한다 싶은 사이에 찬송가가 끝났다. 아아, 그 뒤에 이어지는 남자들의 식욕은 대단했다. 다양한 민족의 피를 받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똑같이 맹렬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종파든 뭐든 소용이 없었다. 정직하구나. 왠지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빵이 왔다. 받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손이 창밖에서 뻗쳐 왔기 때문이다. (155~6쪽) 식욕은 정직하다. 식욕에는 분쟁이 없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는 본능이 있을 뿐이다. 다양한 민족의 피를 받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여 종파에 상관없이 음식을 먹는다. 이념은 추상이고 먹을거리는 구체이다. 추상은 구체 속에서 피어난다. 먹지 못한 인간이 자신이 옹호하는 종파를 위해 싸울 수는 없다. 싸우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먹어야 한다. ‘맹렬하게’ 먹어야 한다. 지은이는 종파를 넘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성스러움을 느낀다. 수녀들이 수행하는 사원 밖에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거지나 저소득층 사람들로 넘쳐난다. 지은이는 자기 몫의 빵을 받지 않는다. 알량한 연민이 아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에 담긴 그 의미를 지은이는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살기 위해 이쪽으로 손을 내뻗는 저들에게 음식은 과연 무엇일까? 얼마 남지 않은 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묽은 우유를 마시는 에이즈 환자에게 음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돌려 말하면 우리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이 지금 이 세상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먹는 인간’은 ‘먹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인간으로서 삶을 더 이상 살지 못한다. 그 와중에 민족 분쟁은 더 거세지고, 종교 분쟁도 더 거세진다. 수많은 난민들이 생기고, 그들은 또 다시 ‘먹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끊임없는 고통을 바탕을 받고 있다. 신이 주는 ‘성스러운 빵’을 먹기 위해 ‘권총’으로 무장한 수도사들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음식을 먹는다. 참으로 모순의 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왜 인간에게 총을 들라고 명한 것일까? 이웃에게 총을 겨누지 말고 빵을 주라는 얘기는 왜 못하는 것일까? 신을 믿는 인간 이전에 먹는 인간이 있다. 이웃에 빵을 주지 않으면 신 또한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다. 먹는 인간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지은이는 체르노빌 숲의 침묵에 묻혀 있는 관람차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 먹는 인간이 없는 곳에서 관람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먹는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의 5장에서 ‘가깝지만 낯선 한국의 맛’을 다루고 있다. 청학동 얘기도 나오지만,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가 이 장의 중심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1994년에 발간된 이 책에서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맺힌 통분을 구체적으로 느꼈다. 그만큼 이 책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꾸밈없이 나온다. 지은이는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직접 기록한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한을 인간의 마음으로 쓰다듬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지은이는 ‘먹는 인간’의 품성을 발견한다.
할머니들은 일본 천황이 자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길 원한다. 물론 그 소망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은이는 그 할머니들과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한 맺힌 인생 이야기를 들어준다. 먹는 인간은 오로지 ‘생명’이라는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 위안부 할머니와 지은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민족 문제는 ‘먹는 인간’ 앞에서 소멸되어 버린다.
지은이는 ‘먹는 인간’과 ‘사는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가 타자들과 벌이는 음식 얘기가 그대로 삶의 이야기가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일본 대사관에서 자살을 시도한 할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한 그날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지은이는 주목하고 있다. 먹는 것은 곧 다시 사는 것이다. 여전히 권력자들은 민족과 종교라는 이념에 집착한다. 지은이는 죽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이 할머니들을 통해 ‘먹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생명의 도리를 권력에 맛을 들인 바로 그 권력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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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는 인간 - 식과 생. 의식주 중에 가장 중요한 식. 아픈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모두 먿는다. 먹지 않으면 죽기에. 헨미 요 기자가 먹는 것을 보기 위해 전세계를 여행하며 써내려간 글. 먹는 것의 의미와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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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먹하다. 책장을 덮으면서 먹먹함이 나를 짓눌러 스산함이 되었다. ? ? “저널리즘과 문학이 아름답게 결합한 명저” 책 뒷표지에 써져 있는 말 그대로다. 기자인 헨미 요가 먹는다는 행위를 보기 위해 전세계로 떠난 기행기. 그래서 르포 같은 느낌이려나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이 사람 문학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아서 밑줄, 먹먹해지는 현실이 많아서 밑줄. 책이 온통 밑줄이다. ? ? 먹는다는 행위를 쫓는 이 책에는 유쾌하면서 적나라하고 무겁고 즐겁고 만라만상의 인간들이 나온다. 먹는다는 건 무얼까. 나는 먹는 걸 좋아한다. 밥을 먹으면서 다음 끼니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끔찍해 하기도 한다. 다양한 음식이 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면서 먹방을 보면서 맛집을 찾고 배달앱을 뒤지면서도 캡슐로 음식을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 ?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한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의 말에 헨미 요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이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 ? 헨미 요는 부자들이 먹다 남은 밥을 돈을 주고 사먹는 방글라데시, 패전한 줄 모르고 숨어있던 일본 병사들에게 사람이 먹힌 역사가 있는 필리핀 등 아시아를 시작으로 갈등하는 유럽을 지나 기아로, 에이즈로 사람이 죽어가는 아프리카를 거쳐 방사능이 있어도 사람이 먹고 살고 있는 체르노빌을 간다. 그리고 한국을 온다. 위안부 할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한다. 90년대에 쓴 이 책과 지금과 그리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세세한 지난 역사는 지금도 그 분들 기억 속에 계속 흐르고 있다. ? 읽는 내내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이 떠올랐다. 헨미 요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는데 국내에는 이 책 한편이라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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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아내와 함께 경포로 휴가를 다녀왔다. 두 권의 책을 들고 갔는데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과 헨미 요의 《먹는 인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먹는 인간이었다. 선배 내외와 함께 강릉 시내의 생선구이 집에서 먹은 자작자작한 된장과 양념장의 맛이 혀에 오래 오래 남았다. 그 전날 물갈이 탓인지 포식 탓인지 밤새 배앓이에 시달리고 난 다음 날인데도 그 정도였다. “나는 내 혀와 위가 못마땅해졌다. 오랫동안 포식에 익숙해져 버릇이 없어진 데다 무엇을 먹었는지 곧 잊어버리기 일쑤며 매사에 아무 감동도 받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는 내 혀와 위. 이 녀석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극한의 상황에서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이 기묘한 여행의 동기라고 할 수 있다...” (p.22) ‘먹는 인간’이느라 바빠 ‘읽는 인간’에 소홀했다. 물론 최대한 자주 호텔 수영장에 들락거렸고 두 차례 동해안 자전거 길을 달렸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향하는 위쪽 길은 좋았고, 경포에서 정동진을 향하는 아래쪽 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내와 나의 여행은 이제 일종의 체력 단련을 겸하기 일쑤이다. 경포 해변에 사는 선배 내외와 함께 시루봉에 올랐고, 내려와 경포호를 반 바퀴 걸었고, 종이로 만든 것 같은 연꽃을 보았다. “통일은 되었지만 표면적으로 제도가 바뀌었을 뿐 내용은 아직 미숙하다, 200명 정도 되는 교도관 중 해고된 사람은 몇 명뿐이다. 그들의 의식은 대체로 동독 시절과 같다. 수감자와 교도관이 여전히 서로 증오하고 있다. 담장 밖에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담장 안에서는 바깥 변화의 실태를 모르는 수감자와 교도관 대부분이 서로 구악(舊惡)을 헐뜯는 것이다.” (p.108) 사실 헨미 요의 《먹는 인간》은 한가한 우리의 여행과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다. 제목은 ‘먹는 인간’이지만 ‘먹는’이 아니라 ‘인간’에 집중한다.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치열한 지점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저자는 얼마 전 통일이 된 나라의 행복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이제 막 통일이 된 나라의 아직 기워지지 않은 분열의 장소에서 먹을거리를 찾는 식이다. 미식으로 점철된 식도락 여행기를 짐작해서는 안 된다. “인도양의 밀물과 썰물 때문인지, 이 부근에는 우윳빛 커튼처럼 아지랑이가 자주 낀다. 바람이 불면 커튼이 슬슬 걷히면서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는 송충이처럼 너무나 허술한 피난민 막사와 갈색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p.37) 저자의 문장 또한 이러한 글쓰기에 어울리는 서글픈 아름다움과 그에 버금가는 박력을 지니고 있다. 어렴풋이 일본의 여행 작가인 후지와라 신야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러한 문장으로 작가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 방글라데시, 필리핀, 타이, 베트남,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대한민국 ? 떠돈다. “이상하게 보여도 이상한 음식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꼬,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오로지 그 인간극의 핵심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유별나게 먹고 마시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그 주인에게서 기억을 나눠 받아먹었다.” (p.346) 그리고 디카의 음식 찌꺼기, 피타빵, 고양이 통조림, 솜탐, 카사바, 듀공의 이빨 가루, 참새, 쌀국수, 바인자이, 독일 감옥의 식사, 되네르 케밥, 사츠카부르마, 보그라치, 옛 유고 난민용 구호 식품, 아드리아 해의 정어리, 코소보의 수도원 음식, 성수, 유엔 소말리아 활동단 각 국 부대의 후대식, 낙타 고기와 젖, 인제라, 소금 커피, 버터 커피, 우간다 에이즈 마을의 마토케, 러시아 해군 급식, 체르노빌의 방사능 오염 식품, 로푸흐, 이투루프 섬 유치장의 카샤, 우하 수프 등을 먹는다. 헨미 요 / 박성민 역 / 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もの食う人びと) / 메멘토 / 362쪽 / 2017 (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