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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독이란 말만큼 내 청춘을 붙들어 맨 폭력 언사가 없었던 것 같다. 책으로 사람을 가르고 무시하는 언사를 많이 들었고 그에 대한 반발은 두 가지 였지 싶다. 더 많이 읽어서 장악하거나 아예 안 읽고 잘 살거나 ㅋ 소설, 요즘 참 안 읽는다. 필수 소설 (예를 들면 며칠 전 한겨레에서 소설가들이 귀환했다는 류의 기사를 봤는데 김애란이나 하루키, 김홍신, 성석제 등등) 도 접은지 오래됐다. 그저 가슴 뛰는 경험이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읽되 아무런 감흥이 없는 상태가 몇 년 내내. 이유는 딱 하나다. 나는 건방져져서다. 학습 삼아 읽었다. 김홍정의 '창천 이야기' 이문구 이후에 '걸출한' 농촌소설은 나오지 않았고 윤정모도 조금 쓰긴 했지만. 대체로 많은 소설가들이 삼는 공간은 서울이거나 신도시로 기울었다. 공간으로만 보면 그렇다. 김홍정의 대표작은 장편 '금강'이다. 요즘 장편을 읽어낼 체력이 없어서 대체로 집어 드는 것은 중편이다. 단편소설의 지나친 미학화 경향에 질려버린지 꽤 되어서 적어도 중편 정도만 읽고 마는데. 2. '창천'이라는 가상의 농촌 공간에서 사람들과 지역개발 문제, 선거 이야기, 농업이슈(FTA나 구제역 등)를 엮어낸 '창천 이야기'는 형식으로 보자면 신선하진 않다. 하지만 나는 문장을 평가할 능력은 없고 그저 작가의 신실성이랄까. 최근에 이런 문제에 관심을 쏟고 관심을 두는 저자들이 많지 않아서 말이다. 창천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금강둑 옆, 공주 정도로 상정하면 맞다. 저자가 공주에서 주로 활동하는 작가이고 나도 공주가 영 낯선 곳만은 아니어서 피식피식 그 사투리를 따라가면서 읽었다. 고향 언저리의 말이란 회귀본능을 자극하니 말이다. 익숙한 지명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미호천' 같은 천변 이야기. 이 소설집의 가장 첫머리이면서 저자가 가장 무게 있게 가져가려던 소설은 '추홍 노인의 하루'다. 구제역으로 소를 살처분할 상황에서 추홍 노인, 정확하게 말하면 추씨 가문의 근현대사가 펼쳐진다.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소작제는 영원했던 식민지와 해방공간에서 몰락한 창천의 추씨 종가의 이야기. 추홍 노인의 조부는 소를 지키며 손자인 추홍을 지켰다. 빨갱이로부터 그리고 거칠게 몰려오는 근대의 폭력으로부터. 구제역으로 상징하는 근대성(아, 이말 말고 없나. 참 지겹고 재미없는)의 폭력을 추홍 노인은 자신과 소를 지켜냈던 고립지(혹은 에덴)에서 지켜내고 기꺼이 죽었다.짧은 중편에 여러 사람의 관계를 얽고, 다루는 시간만 해도 근 100년을 다뤄야 하니 다소 억지스럽고 매끄럽지 않은 서술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움직인다. 그럼 됐지. 뭐. "어차피 이 미물들은 모두 사라질 처지였다. 살만큼 살 수 없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래도 한 배나 두 배 새끼를 낳아 기르는 기쁨을 겪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통속에서 울부짖으며 새끼를 낳고, 혀로 핥아 반지르르한 새끼의 무릎을 세워주고, 감은 눈을 뜨게 하여 새 생명의 신비함을 입증하는 위대한 철자를 이 소들은 경험할 수 없었다." -추홍 노인의 하루. 3. '양자강 이야기'는 배꼽 잡으면서 읽었다. 그 특유의 충청도 특유의 그 무엇. 주제 자체는 얕진 않은데 지역에서 여전히 말석 정도의 힘을 가진 '종친회'의 이야기 읽는 재미. "종친회원 여러분, 지가 종친회를 맡고 있는 회장 이흥락입니다요. 보잘것읎는 농투산이 이 이흥락을 이 자리에 세워 놓은 것은, 오늘 이런 일을 하라는 조상님들의 계시였다 이 말입니다. 무슨 수를, 아니 어쩐 일을 해서라도 이 싸움을 이겨야 허겄습니다. 시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말씀이지요. 오바마를 보세요. 저 아프리카 어디 촌구석, 이름도 읎는 나라의 검둥이지만서두 시방 이 시상에서 젤루 으뜸인 미국땅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딜 함부로, 이 대명천지에, 워따대구 공천에설랑 적서를 따진단 말입니까? 이게 말이 되는 법이냐 이 말씀입니다요." - 양자강 이야기 4. 쓰는 일과 적는 일의 소임을 생각하는 요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