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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운명의 인형이 아니다 - 구스타프 마이링크 《골렘》
"우리는 운명의 인형이 아니다 - 구스타프 마이링크 《골렘》" 내용보기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환상소설을 읽었다. 중세 유럽의 카발리스트 랍비가 성서의 문자를 뒤바꾸다가 만들게 되었고 진흙 인형 또는 인조 인간 이야기까지 만들어진 ‘골렘’에서 가져온 기이한 책 제목, 소제목(꿈결-낮-I자-프라하-펀치-밤-깨어나-눈-유령-빛-곤경-불안-충동-여자-간계-번민-5월-달빛-풀려나다-대단원), 첫 문장(“달빛이 내 침대 발치에 떨어져 마치 밝은 색의 납작하고
"우리는 운명의 인형이 아니다 - 구스타프 마이링크 《골렘》" 내용보기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환상소설을 읽었다. 중세 유럽의 카발리스트 랍비가 성서의 문자를 뒤바꾸다가 만들게 되었고 진흙 인형 또는 인조 인간 이야기까지 만들어진 ‘골렘’에서 가져온 기이한 책 제목, 소제목(꿈결-낮-I자-프라하-펀치-밤-깨어나-눈-유령-빛-곤경-불안-충동-여자-간계-번민-5월-달빛-풀려나다-대단원), 첫 문장(“달빛이 내 침대 발치에 떨어져 마치 밝은 색의 납작하고 둥근 돌멩이처럼 놓여 있다”) 등등 환상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시작부터 단번에 매료될 작품이다.

 

첫 문장에서도 느껴지다시피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에 소설의 분위기를 돋워주는 독특함까지 더해 읽는 내내 감탄한 문장이 많았다.

 

 

“집들은 버림받은 늙은 짐승들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건물 중 하나는 반쯤 기울어 이마가 쑥 들어갔으며, 바로 옆에 있는 다른 하나는 송곳니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나는 꿈속에서 자주 이 낡은 집들이 유령처럼 서로 교류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공포심을 느끼면서, 그것들이 이 거리의 은밀한 실제 주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삶과 감정을 포기하고 있다가 다시 제 쪽으로 가져간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삶과 감정을 낮 동안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가 밤이 되면 터무니없이 많은 이자와 함께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저런 문장의 심상, 상징성을 살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오히려 줄거리 소개가 소설의 작품성과 분위기를 훼손할 거 같지만 대략 소개하면 이렇다.

  

이야기의 배경은 20세기 전환기 프라하의 재개발 지역 게토이다. 페르나트는 수상한 손님에게서 어떤 책의 ‘이부르(정신적 자기 실현이라는 뜻)’라는 장 첫 글자인 ‘I’자 수선을 의뢰받는다. 기묘한 느낌 속에 이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가 페르나트는 자신이 정신병을 앓아 과거의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을 우연히 듣는다. 환상과 기억 속에서도 어지러운데 주변인의 사건들에도 복잡하게 얽힌다. 맞은편 이웃인 고물 장수 아론 바스트롬은 의사였던 그의 아들 바소리 박사의 자살에 사비올리 박사의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꿈꾼다. 사연인즉 아론 바스트롬에게 어머니와 함께 버림받은 자식인 의과대학생 이노첸트 차루세크가 사비올리 박사를 통해 의붓 형제 바소리 박사의 범죄적인 의술을 고발해 자살한 거였다. 사비올리 박사도 떳떳한 건 아니어서 유부녀인 안겔리나와 밀회를 가지고 있어 바스트롬의 감시와 추적에 시달린다.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된 페르나트는 안겔리나가 과거 자신의 연인이었던 것을 알게 돼 안겔리나를 도우려고 하나 안겔리나 남편의 실종과 살인 죄목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이런 현실 사건 사이사이에 페르나트의 환상과 초현실 경험들이 끼어드는데, 은둔하는 예언자 같은 유태인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과의 이야기, 골렘이 사라진 곳으로 여겨지는 비밀스러운 공간과 얽힌 이야기, 페르나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해 사형수가 된 라폰더와의 만남 등등 신비하면서도 섬뜩한 이야기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플롯도 아주 흥미롭다. 다 읽고 나면 반전처럼 느껴지는데, 첫 장에 나오는 ‘나’가 주인공인 보석사 ‘아타나시우스 페르나트’라고 생각하며 읽었다가 말미에서 소설 전체가ㅡ유명한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도 그렇지만 효과가 좋아 공포/환상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ㅡ 액자식 구성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페르나트가 화재 속에 골렘의 방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 추락하게 된 다음 장면에서 깨어나는 이는 페르나트가 아니라 이 소설의 화자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가 화자의 꿈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소설을 직접 읽어 보면 이 구성의 효과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페르나트가 나를 찾는 과정이면서 화자나 독자도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게 만든다.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물질세계의 상징 ‘아론 바스트롬’과 구원자적인 정신세계의 상징인 ‘셰마야 힐렐’의 구도가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소설의 풍부함이 그걸 상쇄한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 영적 세계에 대한 탐구 등이 문학에 잘 녹아든 작품이다. 구스타프 마이링크(1868~1932, 독일)는 외부 힘에 의해 조종되거나 현실에서도 환상에서도 제 자리가 없는 ‘골렘’이 되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 같다. 평화주의자였던 작가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제국의 적으로 간주되어 그의 책이 출간금지나 분서되기도 한 면모나, 독일 문화를 비판하며 민족주의보다 개인주의를 더 강조한 그의 신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현실과 꿈과 환상 속에서 깨어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환상소설이라는 장르성을 통해 진부하지 않게 전달되었다. 외형은 장르문학이지만 속알맹이는 순수문학 이상이다.    

 

구스타프 마이링크 인터뷰를 보면'골렘'은 '정체 모를 어떤 존재에 대한 집단의식(공포)'이자 '우리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자아 혹은 도플갱어'라는 상징성이 있다고 한다. 나는 다른 상징성도 읽을 수 있었다. 바스트롬이 자식을 교육하는 대목에서는 '인간 심리에 깔린 권력 의지', 살인자 바빈스키가 아무리 회심해도 그의 밀랍인형이 만들어져 조롱당하는 세계의 냉혹함에서 '인간성 상실' 상징성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들을 위해, 동물들은 감정이 없으며 그들의 고통의 표현은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견해를 대변하는 한 저명한 학자를 이용했어요.

모든 피조물로부터 자기한테 필요한 기쁨과 즐거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낸 다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빈 껍질을 내동댕이쳐버리는 것, 그것이 그의 자식 교육 방침의 근본이었어요."

 

"'어떤 인간에게 그의 젊은 시절의 과오를 자꾸만 눈앞에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일이며 마음이 메말라 있음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바빈스키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 '그러한 공공연한 폭력을 보고서도 당국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도 이와 유사한 얘기를 했다고 해.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당국은 그로부터 얼마 뒤 언짢음을 주는 바빈스키 인형의 판매를 금지시켰거든."

 

포, 카프카, 윌리엄 블레이크, E.T.A. 호프만, 노발리스, 보르헤스 같은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면 무척 좋아할 필독서다. 절판된 채 묻혀버리는 게 어쩌면 진흙 인형 ‘골렘’을 비롯 잊힐 전설 같은 이 책 이야기와 어울리게 느껴지지만 재출간이 안 된다면 아까울 작품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공포 소설에 국한할 수 없이 많은 걸 다루고 있어 소설 쓰기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g******i 2017.11.30.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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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꾸는 나비의 꿈
"프라하에서 꾸는 나비의 꿈" 내용보기
‘골렘’이라는 개념은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의 <골렘; http://blog.yes24.com/document/2326136>과 <닥터 골렘; http://blog.yes24.com/document/2236334>에서 과학 혹은 의학이라는 학문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골렘은 유대인의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진흙과 물을 섞은 뒤 마법과 주문을
"프라하에서 꾸는 나비의 꿈" 내용보기

‘골렘’이라는 개념은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의 <골렘; http://blog.yes24.com/document/2326136>과 <닥터 골렘; http://blog.yes24.com/document/2236334>에서 과학 혹은 의학이라는 학문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골렘은 유대인의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진흙과 물을 섞은 뒤 마법과 주문을 가해 사람들이 만든, 인간을 닮은 자동인형이다. 골렘은 강력하며, 또 날마다 조금씩 강력해진다. 골렘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 할 일을 대신해주고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지만, 반면 다루기가 힘들며 위험하다. 제대로 통제를 못 하면 골렘은 엄청난 힘을 마구 휘둘러 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소개하면서 “과학이란 바로 골렘(Golem)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성서(시편 139:16, 형상)와 <탈무드>에 나오는 골렘의 개념은 태아 상태거나 완성되지 못한 물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중세 무렵부터 오늘날 사용하는 골렘의 의미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6세기에는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인식된 것은 프라하의 랍비인 유다 뢰브 벤 베주렐이 만든 골렘의 전설때문이라고 합니다. 1915년에 발표된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소설 <골렘 Der Golem>은 이 전설을 토대로 쓴 것으로 유명하다고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골렘>의 말미에 옮긴이가 재구성한 작가와의 인터뷰에는 작가가 차용한 골렘의 개념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골렘은 중세 밀교신앙자가 창안해낸 존재인데 프라하의 랍비 뢰브가 게토지역의 유대인을 수호할 인물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골렘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는 어둡고 미로 같은 게토지역에 감도는 집단적인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골렘>에서 이렇게 표현된 부분입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하나의 정신적인 전염병이 번개처럼 이 게토 지역을 훑고 지나가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영혼을 습격한다. 그때 어떤 독특한 존재의 윤곽을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 수백년을 살았을 그 존재가 이제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59쪽)”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골렘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골렘>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아타나시우스 페르나트는 배를 타고 블타바강을 건너 조그만 비탈길 위에 있는 성으로 갑니다. 그리고 성안의 대리석 건물 계단에 서 있는 또 다른 아타나시우스와 그가 사랑하는 미리암이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아타나시우스는 거울 속의 나를 보듯 나와 너무나 흡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연 누가 골렘이고 누가 아타나시우스인지 알 수가 없는 듯합니다. 어쩌면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고 해석하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같은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프라하에 갔을 때는 단체관광이라서 게토지역에는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게토지역을 보았더라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실비 제르멩의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http://blog.yes24.com/document/8993400>에 등장하는 여인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골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토에서 보석세공사로 명성을 떨치는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이웃 셰마야 힐렐과 고물장수 아론 바서트룸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이 복잡하게 엮여 은원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가 정리되면서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는데,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초반 분위기는 쉽게 몰입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골렘의 존재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y*****2 2016.10.25.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