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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인데 왜 못봤을까? 찾아보니 1994년 3월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다. 민간인이 아니였으니 못봤겠구나.
(들어가는 글) 아트 슈피겔만의 "쥐"란 만화가 떠올랐다. 유태인을 '쥐'로 묘사하고, 나치스트를 '고양이'로 묘사하여 유태인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비극을 묘사한 만화다. 아버지의 고통이 아들과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재생산되는 치밀한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4~5년 전에 봤는데도 그 스토리며 그림체가 생생히 기억난다. 작품성을 치중하기에 어려운 장르인 만화를 작품의 경지로 만들었다.
![]() (영화 삐딱하게 보기)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가 유태인을 위장취업(?) 시켜서 1100명의 생명을 구한다. 185분이니까 3시간이 넘는 긴 상영 시간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구성과 내용 모두 탁월하다.
2차 세계 대전 중 유태인 학살의 비극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전쟁도 증오가 단기간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살아남았고, 세계 경제권을 쥐고 있기에 이런 영화와 소설,만화가 계속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하면서 수많은 원주민을 살륙했고,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허울뿐인 주권을 가지고, 울타리에 갖혀서 보호대상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유럽인들이 북미에서 누계로 원주민 5천만명 이상이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태인은 2차 대전 중에 6백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500년대 1500만명으로 추정되는 북미의 원주민은 1900년 인구센서스에서 23만 7천명으로 거의 절멸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 의한 비인륜적인 학살은 거의 반복,재해석되지 않고 그 내용도 잘 알려져있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살아남은 원주민은 관광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경제 기반을 만들 기회조차 빼았겼기에 역사의 교훈을 해석,재생산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 징용의 아픔을 잊지 말고 다양한 장르로 표현하고 공론화해야 함에도 그것에 관련된 목소리가 한정된 특정기념일에만 다루어 진다. 또한 그런 목소리가 계속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한 줄 더해져야 한다. 살아남아서 잊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다양한 장르에 노력을 기록하는 자가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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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이처럼이나 지나고 나서야 그 깊이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이 생긴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무렵엔, 딱히 할 이야기도 없으면서 괜한 무게만 잡으려는 의도 아닌가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스필버그가 그저 젊었고 재능이 많은 죄였을 뿐, 영화 자체는 충분히 늙수구레하고 진중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