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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그리고 찾았던 책을 기회가 되어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상처 입은 영혼의 편지’라는 이 책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은 대강을 알았다. 여러 글들을 통해서, 리뷰를 통해서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했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등은 알았다. 제목을 보아도 대충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 이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가슴 아릿하게 읽은 책이다.
아우슈비츠, 역사의 참혹한 현장 그 속에 있었던 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세인의 관심거리가 됨은 모두가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책은 그 속에서 희생되어간 한 유대인 여의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의 삶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손 중의 한 명에 의해 엮어 나갔다. 저자는 그녀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다. 그가 기존에 있었던 편지글을 모아 정리하고 해설을 곁들여 보기 좋게 엮어 놓은 책이다. 그녀(릴리)의 가족이 이 책을 펴내는 데는 많은 고충과 힘겨움이 있었다고 얘기되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를, 그것도 시대에 희생된 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주변에서 받게 될 눈총과 억눌림을 감내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는, 이미 있었던 많은 내용의 편지가 빛을 보는 일이 늦어지게 된 듯하다.
저자는 편지를 정리하면서 의문을 느끼게 되고 그 의문이 이 책을 엮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는 유대인이고 할아버지는 비유대인이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을 하고 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그 맹위를 떨칠 때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을 하면 유대인인 할머니(릴리)가 어려움을 겪게 됨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왜 나치 독일의 그 치하에서 이혼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느끼게 되고, 많은 편지를 정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가운데 시대의 아픔이 절절히 묻어나는 많은 편지를 더 발견하게 되고 이 책이 엮여지게 되었다.
이 책은 그녀의 젊은 시절 부분에 상당한 면을 할애한다. 남편이 된 사람과 서신 왕래가 잦았고 그것이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용은 결혼 과정과 젊은 지식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합, 그로인한 아픔 등이다. 약간은 이지적이고 냉정한 성품의 남편과 모든 면에 나서길 좋아하고 활달한 그녀의 삶은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의학을 같이 공부하는 입장에서 여자가 먼저 박사가 되고 앞서가는 것도 조금은 문제로 작용한 듯하다. 허나 그런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없다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유럽에서 군국주의의 발호로 인한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다. 그것이 유대인인 그녀와 살고 있는 그 가정에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오고, 남편에게도 위협과 모욕으로 부댓기도록 만드니 남편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집에 주위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흉흉한 분위기까지 마련되고, 안온함을 잃어버린 가정은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이런 힘겨운 상황이 이성적인 남편의 결단을 재촉하여 이혼이 이루어지게 된 듯하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그녀의 가족을 삶의 터에서 몰아내고, 특히 그녀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하여 그녀의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노동교정수용소라는 이름의 수용소에서는 그래도 재생될 수 있는 기대감은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유대인 말살정책을 편 나치들의 뜻에 따라 그녀는 유대인이라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고, 결국 그곳에서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모든 내용이 그녀(릴리)의 편지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벗에게 보낸 편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남편에게 보낸 편지 등을 시간에 맞게 재구성하여 제시하면서 그녀의 삶을 그려내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편지는 곳곳에 시대의 아픔이 묻어나 있고,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안네의 일기’에서 읽었던 내용이나 다시 한 번 기억 속에 재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당시의 불안한 사회, 그리고 인간의 이기 등이 가슴 저미게 사실적인 편지로 전달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공간에 남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은 고통이요, 절망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증언하면서 우리에게 무수히, 이름 없이 사라져간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영웅들이 이끌어간 세상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고난 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통의 글들은 이러한 위기의 인물을 그려나가면 그 위기에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 긍정의 세상을 만나는 내용인데, 이 책은 그렇지가 않다. 많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그 사람들 중의 하나를 제시하면서 그녀가 겪은 생생한 삶의 모습과 심리를 자필로 제시해 나가고 있다. 가슴 가득히 그 쓰린 마음이 감동으로 밀려오는 책이다.
참 가까이 하고 싶었던 책이다. 극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그 삶을 치열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시대가, 이념이 어떻게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아픔을 공유하고, 이러한 상황이 이제는 이 지구상에서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지녀 본다. 그리고 이 책이 널리 읽히면서 1900년대 전반 유럽에서 일어났던 국수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읽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민족간의 화해를 담아나가는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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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대규모 인종 학살이라는 뜻인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대표적인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나치즘이 유럽을 횡행하던 시절, 대략 600만명의 유대인이 이유없이 살해당했다. 도대체 왜. 계몽의 전진기지였던 유럽 본토에서 인류사적 죄악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회현상을 해석해야 할 지식인은 번뇌했다. 과연 지식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어떻게 답했을까. 간단히 몇 명의 예를 보자.
첫째,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는 나치즘 치하에서 대학 총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력은 항상 카인의 표식처럼 그를 따라 다녔다. 이 때문일까.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갸우뚱할 것이다.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이 엄연히 존재하고 대규모 학살을 뒷받침하는 문서와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 그리고 학살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피해자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라니. 하이데거의 망언(?)에 대해 사람들은 격분했다. 그가 노망이라도 났던 걸까. 나름대로 논리는 있었다. 하이데거는 유럽의 역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불렀다. 가치상실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정신은 아우슈비츠 이전이나 이후나 변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의미한 역사가 대문자 역사라는 점에 비춰본다면, 아우슈비츠는 실제로 인류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 및 지인이 엄연히 살아있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굳이 하이데거는 이런 말을 해야 했을까.
둘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끈 둘은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동료를 잃는다. 계몽정신으로 똘똘 뭉친 유럽이 어떤 이유로 야만의 공간으로 전락했을까. 이에 대해 일반인은 도저히 논리 구조를 따라가기 힘든 저서인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나름의 답을 제시했다. 즉, 도구적 이성은 계몽에서 야만으로 변주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인류는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후기 저작들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만 잔뜩 늘어놓는다. 이제 인류는 틀렸다......
셋째, 현상학자 리쾨르이다. 리쾨르는 간단한 명제로 아우슈비츠를 기술한다. 망각하지 않는 용서. 기독교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는 예수의 복음을 받들어 용서, 화해, 사랑을 강조한다. 다만, 과거의 과오를 망각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렇듯 아우슈비츠는 그 자체로 엄청난 담론을 생성했다. '쉰들러 리스트', '25시' 등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다룬 영화와 소설도 쏟아졌다. '안네의 일기'는 아우슈비츠의 비인간성을 알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아우슈비츠가 다뤄진 상황에서 또 한권의 책이 나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존과 다른 의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가족사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아주 은근하게.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중년의 여성이 책의 주인공이다. 릴리 얀.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여성 의사 릴리 얀.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출산. 그녀의 행복은 계속되는 듯했다. 불행히도 유대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이 그녀의 단란하고 화목한 삶을 방해했다. 독일인이었던 남편과 이혼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나치즘 치하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통째로 없어진 셈이다. 경미한 죄로 수용소에 갇힌 그녀는 정해진 구금기간을 넘기고도 출소하지 못하고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다음 사망한다.
책의 서술이 독특하다. 저자인 마르틴 되리는 릴리 얀의 손자이다. 그가 서술을 이끌어 가면서 할머니의 친필로 작성된 편지 내용을 공개한다. 이 책이 더욱 감동적인 이유는, 아우슈비츠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릴리 얀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출생에서부터 결혼, 출산 그리고 수용소 내에서의 모습은 행복했던 한 개인의 삶이 잘못된 사회 구조로 인해 얼마만큼 처참히 파괴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녀는 니체를 읽었다. 그녀는 문학을 좋아했다. 이런 고상한 그녀의 취향과 그녀의 뛰어난 지성도 야만적인 사회 앞에서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녀의 죽음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유럽사회에 동화하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릴리 얀의 편지에도 잘 나타나듯, 당시 유대인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형태로 살아갔다. 릴리 얀처럼 유럽사회에 동화되어 부와 명성을 거머쥐는 중산층 지향의 삶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유대인이다. 토라와 탈무드를 삶의 가치 준거로 선택하고, 율법을 중시하며 전통 복장과 전통 종교를 고수하는 유대인의 정체성. 릴리 얀은 전자의 경우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근대식 교육을 이수하고, 자유연애에 심취했으며, 독일인과 결혼할 만큼 유럽문화를 지향한 릴리 얀.
그런데 당시 남편이었던 에른스트 얀은 이혼을 함으로써 릴리가 죽음에 이를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아쉬워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남편인 에른스트의 태도는 여러 모로 윤리적 지탄을 받을 짓이었다. 물론 나치즘 치하에서 유대인과 결혼생활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의사 부부로 존경받던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멸시를 받게 되었을 때, 에른스트는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고 한다.
남편의 재혼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은 릴리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딸과 아들들. 하지만 시대가 미성숙하면 아이들이 성장한다고 했던가. 이들은 꿋굿하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다. 엄마를 걱정하고, 엄마의 출소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엄마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생필품을 보낸다. 자신들도 살기 힘든 상황에서 말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노력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면서까지 희망을 놓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게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소설이었다면 릴리 얀은 극적으로 구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인이 규명되지 않은 채 싸늘한 사망진단서 한 장의 서류로 귀환한다.
책의 서사를 구성하는 또다른 흥미로운 축은 그녀의 아들 게르하르트이다. 독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느꼈을 정체성의 문제. 그는 공군에 복무하며 조국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싸우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나라가 자신의 엄마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나치즘의 광기가 극에 다르면서 게르하르트는 모계 쪽 혈통 때문에 군 복무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여러 모로 비극 투성이인 시대정신이었다.
'망각 없는 용서'. 리쾨르가 말한 이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멤돌았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본 영화 '회복'은 홀로코스트를 나치즘의 입장에서 조명한다는 점에서 정말 우려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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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된 한 유대인 여의사의 일대기를 접하면서 종교.이념의 갈등이 결국 한 종족을 절멸이라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보통 나치하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안네의 일기등이 떠오르는데 거기에서는 실제로 유대인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이 표적이 되어 죽음의 공포를 죽음의 순간까지 짚으로 만든 메트리스,나무 토막으로 얽은 비좁은 침상에서 몇 십명이 달라 붙어 먹을 것,입을 것을 인간 이하로 취급 당하면서 병들고 노약하고 노동이 불가된 상태에서 죽음의 공간,가스실로 향해 생을 마감케 하는 잔학하고 가증스러운 행위이며,일본이 731부대 이시이의 지휘하에 자행된 중국,한국인의 생체실험의 공포 현장이 오버랩 된다. 그런데 이 글은 히틀러가 1933년 나치즘을 선포하고 유대인들을 향해 절멸하겠다는 공포 정치에서 비롯되고 그 즈음 희생자 릴리는 반유대인 정책에 의거 게슈타포라는 경찰 조직에 의해 감시.체포되어 노동교정 수용소에서 7개월 남짓 수용소 생활 속에서 주로 자녀들과 편지글로 서로의 안부와 자신의 처지,요구를 주고 받는 게 특이한 점이고 이는 한 인간의 사적 생활의 면모일 뿐만이 아니라 나치즘 아래에서 생생하게 겪은 수난사를 그려낸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릴리는 유대인의 피를 물려 받고 제법 괜찮은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의사 자격증까지 취득,의사로서 탄탄한 생활을 영위해 가면서 에른스트라는 남자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의 뜻을 편지로 전하는데,에른스트는 릴리에게 별로 마음이 없었던 거 같다.어렵사리 릴리의 어머님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는 전갈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고,1935년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어 유대인들을 절멸한다는 내용으로 인종적 광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릴리가 명함을 문패 삼아 끼워 둔 것이 화근이 되었는데(의학 박사 릴리얀이라고 되어 있음),유대인은 박사라는 호칭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 아래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가 되고,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하지만 릴리가 노동교정수용소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자녀들과 서신 왈래로 가족들과 사랑을 확인하고 애틋한 그리움을 전하면서 무사히 돌아와 재회할 날만 고대한다.남편 에른스트는 릴리와 이혼한 데다가 릴리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알고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한 것에 크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큰 딸 엘제의 성화에 못이겨 국가 경찰청에 어머니를 빼낼 수 있도록 청원서를 제출(?)하지만 성사가 되지 못하고 만다. 결국 릴리는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1944년 3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지게 되고 동년 6월 쇠약증으로 죽음을 맞이한 거 같다.죽음 직전에도 릴리는 가족들과 삶이라는 희망과 가족과의 재회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전남편,자녀들,친척들과 자신의 처해진 상황과 안부를 주고 받는다.독일이 나치즘을 선언하면서 릴리라는 한 인간이 겪었던 전쟁.이념의 비극을 기록하고 전해 준 감동적이며 트라우마를 느끼게 하는 소중한 역사 자료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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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면,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생각할 때처럼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지 그들만의 아픔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수 만명의 사람들의 고귀하고 사연많은 목숨을 가볍게 묻어버린 히틀러를 증오하고, 나치들을 증오한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출신의 한 여성, 릴리 얀의 죽음으로 향하는 기록이다. 그녀의 아이들과 주고받은 실제 편지가 발견되어 릴리 얀의 손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릴리 얀은 독일인 유대인으로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비유대인과 결혼한다. 상대는 의학공부 시절의 동료로 정말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 주고 싶지않은 인물이다. 릴리 얀은 그를 너무 사랑한 죄를 지었다. 불우하고도 상처있는 그를 보듬으며 그가 원하는 독일의 어느 시골 소도시에서 결혼 후 부부의사로 개업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의 핍받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악랄해진다.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났지만 그녀는 그곳에 머물렀다. 영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남편의 의기소침함으로 그 기회마저 보내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되고 더 이상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결국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노동수용소에 갖히게 된다. 그녀의 막내 딸은 두 살이였다.
첫 째 아들, 둘째 딸이자 장녀 일제, 그리고 나머지 세 여동생들을 어른의 보호도 없이 남겨두고 어느 날, 갑자기 갇히게 된 릴리 얀.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다. 아들은 15살이 되어 입대하게 되고 집에는 네 명의 아이들만이 남게 된다. 가끔 애들 아빠, 에른스트가 돌봐주고, 에른스트의 새부인 리타도 돌봐주지만 아이들과 리타와의 갈등은 심해지기만 한다.
편지에서 나타나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 엄마없이 살게되는 처참한 전쟁 중의 일상들. 표현할 수 없는, 다 표현해서도 안되는 검열되는 편지들이 마음을, 마음을..자주 울컥하게 했다. 책으로 엮으면서 들춰내야했던 아들, 딸, 그녀의 손자, 손녀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누더기를 걸친 엄마의 모습을 숨어보았던 일제.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릴리 얀도 그녀의 아이들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게 눈에 밟혔을까.. 난 단 하루도 내 딸들과 떨어져 지낼 수가 없는데... (혹, 병원에 입원해서 하룻 밤이라도 못보게 되어도 이미 내 가슴엔 무거운 돌덩이가 차버리는데...)
이 책은 2차 대전의 독일계 유대인 여성의 깊은 상처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치의 횡포와 엄마없이 방치되는 아이들의 삶. (그럼에도 정부의 배급으로 외관상으로는 그럭저럭 꾸려지지만)이 원본의 편지로 가감없이 알 수 있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자 단 하나의 기쁨이였던 아이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단, 하나도 지켜주지 못했던 남편 에른스트. 릴리 얀은 끝내 아우슈비츠로 이송 된 후 거기서 삶을 마감했다. 이 절망적인 결말이 전쟁이 남길 수 있는 최종 결과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자이기에, 엄마이기에 더 가슴이 아팠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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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테두리를 통해 본 <전쟁>과 자잘하고 세심하게 바라본 <전쟁>은 참으로 다른 면을 보인다. <참혹과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점이 없지만서도 멀리서 본 핵폭발의 엄청나고 장엄한 모습과 바로 코 앞에서 터진 핵폭발의 위력은 그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히틀러의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 특히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이쯤에서도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를 느낄 수 있지만 더 가까이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안네의 일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안네, 시시각각 죄어오는 발각의 두려움, 발각되었을 경우 주검과 마주할 입맞춤.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의 주인공은 '릴리'다. 순수한 유대인으로서 여의사로 개업하길 꿈꿨고, 같은 의사인 남편은 아리아인으로서 릴리와 사랑하였고 슬하에 다섯 아이를 낳았다. 비록 유대인과 혼인하였다는 이유로 눈에 보이는 탄압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릴리와 이혼하고 아리안 여자와 재혼을 했지만 자식 사랑만큼은 끔찍했다고 한다.
이 책의 한 축에 남편 에른스트가 왜 릴리와 이혼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닌지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긴 병에 효자 없듯이. 심약한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끝까지 사랑할 사람 또한 많지 않음을 알기에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만약에 혼인만 유지하고 있었더라도 릴리가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하는 논란엔 크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냥 개인적으론 별볼일 없는 남자였다고 평할 뿐이다. 그녀를 충분히 사랑했지만 변치않을 사랑을 하기엔 2% 조금 넘게 부족한 그. 이상 끝.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고, 감금 끝에 죽임을 당하는...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멸시 받고, 땅도 빼앗기고, 조국의 품을 강제로 떠나 먼 타국 땅에서 끝없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던 우리와 너무도 닮지 않는가? 내가 유대인에 대한 기록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와 닮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보상은 물론 온누리 사람들에게 눈물과 동정을 아낌없이 받고 위로 받는데 비해 우리는 어떤가? 왠지 몰라도 한국인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어? 라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고 오히려 <한국전쟁>으로 비춰진 가난한 나라, 독재의 몸살에서 벗어나 이제사 비로소 민주화에 성공한 신흥국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독일은 철저한 반성을 하였고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은 잘난 서양인의 나라이자 부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고, 대한민국은 못한 동양인의 나라이자 쬐금 덜 부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유대인은 가난한 사람까지도 <자국 문자>를 향유한 똑똑한 민족이기 때문에 끔찍한 시대를 생생히 기록으로 남겼고, 조선인은 <훌륭한 문자>를 지녔는데도 지식인들은 애써 외면하여서, 가난한 이들은 입에 풀칠하기 바빠 공부를 게을리 한 덕분(?)에 아픈 시대를 기록하는데 게을러서 인가...
요즘엔 세 번째 이유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왜 우리는 아픈 시절을 철저히 기록하지 못했나?> 유대인들은 이렇게 <일기나 편지>라는 '기록'을 남겨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였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 무식해서? 아니다. 우리는 똑똑한 것으로 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다. 가난해서 배울 여력이 없어서? 이건 그럴 듯한 이유지만 <문자학적 사치>를 누릴 정도로 쉬운 문자를 가진 우리가 댈 핑계로는 좀 구차하다. 그렇담, 우리가 기록하는데 정말 게을러서? 요즘 학생들도 수업시간에 메모하고 필기하는 학생이 드물다보니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블로거>들을 보라 찍고 쓰고 올리는 그들의 무한반복적인 행위는 가히 <기록하는 사람>을 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으로 보인다. 그것도 엄청 예쁘게 말이다...
난 책을 읽다가 <망상과 공상 사이>를 헤엄치길 좋아한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을 무척 좋아한다. 제목 그대로 <상처입은 영혼> 앞에서 망상이나 공상을 운운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이런 독자도 있구나 하고 양해해 주었으면, 망상에 빠져드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픈 역사를 릴리와 그녀의 가족들을 통해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 생생함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쓴 수많은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게 <사랑>일진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을 더 이상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엉뚱할 수도 있지만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남겨둘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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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홀로코스트는 사람이 얼마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지를 보여주는 단편인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마음 아픈 동정심으로 혹은 분노로 바라보는 역사의 자락에는 아우슈비츠와 많은 희생이 가져온 그리고 마음 아픈 인류의 역사의 뒷자락을 보는 듯하다. 사실 왜 나치스라 불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은 유대인을 지목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현 시대를 보면 유대인은 세계 각국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평가 받는 사람들이 많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상처 입은 영혼의 편지]는 이런 혼란의 역사 속에서 한 여인과 그의 가족이 주고받은 편지를 근거로 하여 글이 전개되어 나간다. 전쟁이라는 그리고 정치적인 큰 흐름을 주로 하지 않고 그 흐름 속에서 한 여인과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이해하기 힘든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통과 따뜻한 가족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대인인 엄마와 독일인인 아빠 사이에서 정치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며 죽어가는 엄마를 바라보았어야 했을 가족들의 일상은 검열과 배급이라는 통제된 상황 속에서 절제되고 축약적인 문구로 그들만의 소통을 가져온다. 결국 이 글의 주인공인 릴리는 죽음으로 마무리 되지만 그의 후손은 그의 기록을 이렇게 세상에 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인과의 결혼을 갈망하고 이루어낸 릴리 얀의 인생은 지금으로 본다면 선구자적 역할과 사회적 명성도 있는 그런 위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은 정쟁의 그리고 집단의 착각 속에서는 하나의 유대인으로서 그의 모습은 근본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거 돼야 할 운명을 지고 태어난 사람에 불과하지 않는다. 남편이 독일군 이었음에도, 그를 구해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은 그녀의 족쇄에 따라 독일 군에서도 배척 당하는 그런 가족이 되고 만다. 나는 나의 핏줄을 선택 할 수 없다. 그 것은 누구나 똑같은 현실이다. 최근에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스킨헤드의 공포는 세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국가와 민족간의 갈등을 유발 시키는 소수의 무리가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면 다시 한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수반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배척 하는 일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강력한 생존의 모습이겠지만, 남을 희생시켜서 얻은 그의 행복은 오래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인의 삶은 그렇게 행복 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기에 말이다. 많은 희생과 고통을 당하였던 유대인도 결국 현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지는 않다. 중동의 화약고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보면 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어떤 일이라도 정당화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어떤 민족도 어떤 사람도 우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전반적인 생각이었으면 한다. 이념과 종교의 갈등이 없는 세상, 그리고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 그 것이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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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받은 편지 1943년 9월 12일에 릴리는 처음으로 가족에게 편지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앞장에는 검열을 실시한 여성 감시인의 메모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모두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는 확실히 잘 지내고 있고 건강해. 너희들도 알잖아, 엄마는 항상 끄떡없이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너희들이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워진단다. 아빠는 어떻게 지내시니? 어디 계셔? 무슨 일을 하시니?" - 마르틴 되리의《상처입은 영혼의 편지》중에서 - *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검열 때문에 '잘 지내고 건강하다'고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적어 보냈지만, 그 자녀들은 '행간'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서로의 행간을 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 잘 지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만 들으면 그의 아픔과 슬픔을 놓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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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가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그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가장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가장 순수한 소녀의 "진실"을 담은 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만의 생활을 만끽하고 재미를 찾아내었던 소녀의 진실한 내면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소녀는 살아남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그 애절함이 짙게 느껴지는가 보다. <안네의 일기>를 제외하고는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많은 영화나 소설 속의 제 2차 세계 대전 이야기는 대부분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볼 때... <<상처 입은 영혼의 편지>>는 무척이나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게슈타포에게 잡혀가 브라이테나우 수용소로 끌려가버린 어머니와 뒤에 남은 다섯 자녀들. 이들은 "가족"으로 남기 위해 500통이 넘는 서신 교환을 했고 그 편지들이 어머니와 자식들을 깊게 이어주고 있다. 책은 릴리의 탄생에서부터 그녀가 처음 사랑에 빠지고 열렬하면서도 전적인, 그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남자 친구 에른스트와의 관계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비유대인이면서 순수 독일 혈통인 에른스트와 결혼함으로서 나치스의 쓰레기 소거 작전에 휘말리지 않을 확률이 높았음에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에른스트의 성향과 릴리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릴리는 엄마 같은 여자친구였고, 에른스트는 가엾은 불운아처럼 굴었던 것이다."...41p "아마데, 사랑하는 착한 아마데,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 돼? 나는 나를 바꿀 수 없고 당신도 나를 바꾸지 못해. 당신은 나를 이를테면 한나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 나 자신은 침착함과 명료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고자 하고, 내 안의 여성스럽고 모성적인 부분을 전부 존중하고 나의 가장 멋지고 좋은 점으로 가꾸고 있어."...57p 많은 교육을 받고 의사 면허 시험에까지 합격한 박사학위 의사로서, 또 그렇게 되기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릴리는 무척이나 명랑하고 진취적인 삶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에른스트의 계속된 불만이나 고집에도 불구하고 나치스 정당의 횡포가 본격화되고 마을에서 이들 부부가 고립되기 전까지는 확실히 멋진 여성으로서의 릴리를 상상할 수 있다. 릴리의 편지는 남자 친구 에른스트에게 그리고 결혼 후에는 만하임의 친구들이나 조카이면서 절친했던 로테에게, 수용소로 잡혀간 후에는 자신의 다섯 아이들에게 보냈던 것들이다. 똑똑하고 책과 음악, 연극 등을 사랑하는 이 진취적인 여성이 어떤 식으로, 어떤 사건들로 조금씩 움츠러들고 겁에 질리고 상처받아가는지를 .... 너무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에서 사회적 보이콧을 당하고, 아이들도 학교에서 쫓겨날까...남편의 사회적 지휘가 낮아질까 노심초사하는 릴리의 마음이 아주 잘 이해된다. 이 모든 것들은 릴리의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모든 것은 진실이며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 그 당시 독일인들의 심리를 아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하는 짧은 질문과 소식 전달에만 국한되었던 편지들이 곧 점점 일기문의 특성을 띠게 되었고, 릴리는 편지들을 읽고 아이들의 일상과 걱정거리, 작은 기쁨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9p 어머니로서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버려둔 꼴이 된 릴리는, 수용소에서 아이들의 편지를 위로 삼아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아이들은 어머니와의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이틀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에게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을 편지에 담음으로서 이 편지들 또한 생생한 증언이 되고 있다. 영화나 상상으로만 겪은 전쟁의 참상이 아닌, 아이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책은, 릴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옮겨가며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끝으로 맺고 그 이후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릴리의 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남겨진 아이들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편지"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역사이다. 그리고 전쟁이 남긴 참혹한 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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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피딜리오를 보러 갔다니 멋지구나! 너희가 모두 음악과 미술, 문학을 사랑해서 매우 기쁘고 감사하단다! 내면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힘들었던 이 몇 달 동안 온갖 추하고 낙담시키는 것을 이겨내는 힘을 주곤했어. -릴리의 편지 중 일부(p351~352)"
이 책은 '릴리 얀' 이라는 여성의 출생부터 학창시절,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 강제수용소 생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550여 통의 편지글을 인용하여 손자인 마르틴 되리가 역은 책이다.
릴리 얀은 1900년대의 인텔리전트 가정에서 많은 교육을 받고 물질적인 여유를 향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핍박에는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 시대를 이겨낸 사람들처럼 이민을 가거나 아리아계인 남편을 끝까지 붙잡았어야 하지만, 남편의 배신과 한치 앞을 알수 없게 변해가는 정치적 상황은 유능한 의사이자 다섯아이의 존경받는 엄마를 'J'라는 낙인찍힌 삶으로 내동댕이 친다.
비록 수용소에 있었지만 릴리 얀이 얼마나 강직하고 훌륭한 엄마였는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언제 공습이 울리고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책을 손에서 놓지 말것과 음악과 미술, 연극을 사랑하라고 전한다. 또한 본인도 고된 노동가운데서도 신문과 책과 편지 읽기를 갈망하고 부탁한다. 그것이 그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추한 상황을 이겨낼 힘이라 여긴다. 그에 따라 아이들도 책을 읽고 싯구를 편지에 적어 힘을 실어준다.
아, 글의 힘이란...
비록 가장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엄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붙잡아 줄수 있었던건 그런 엄마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940년대, 전쟁중이고 물자도 귀하고,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시급한 상황에서도 책을 구하려고 하고 모차르트와 바흐를 듣는 아이들. 당연히 편지속에서는 엄마의 부재를 힘들어 하고 어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이들이지만, 매일같이 적는 편지와 한달에 한번씩 오는 포장지나 서류 뒷장에 씌여진 엄마의 편지는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소통의 공간이 된다. 안타깝게도 릴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죽게 되는 아픈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유산과도 같은 엄마의 흔적이 편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픔의 흔적일지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주제로 씌여진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생각났다. 책도둑은 위의 책과 같은 시대적, 지리적 배경에서 유대인의 학살을 지켜본 어느 소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리젤이 혼혈 유대계였는지 독일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전쟁중 부모님과 동생을 잃고 입양되어 나치당원이 되길 원치 않는 양부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돕는 것을 지켜본다. 낯선 양부모를 거부하면서도 리젤이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었던건 바로 책이다. 글자를 몰라서 읽을줄도 몰랐던 리젤이 처음으로 소유하고 싶었던게 바로 책이고, 도둑의 모습으로 까지 찾아가서 마음의 평안을 누렸던게 바로 어느 시장집의 서재에 빽빽히 자리잡은 책꽂이에 꽂힌 책을 쓰다듬는 행동이었다. 그로인해 나중에는 글을 읽고 숨겨준 유대인이 지은 책 선물을 받았다. 또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시대는 같고, 배경은 영국의 건지섬. 이들 또한 동일한 전쟁 속에서 이들을 지켜준건 문학이라고 말한다.
책도둑과 건지 북클럽은 소설이다. 하지만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는 릴리 얀이라는 실존 여인의 불우한 삶을 담은 기록이다. 후손들이 이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되풀이 하는 우를 범치 않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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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즐기는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역시 의사인 독일인 남자와 집안의 반대를 겨우 설득하여 결혼을 하고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나치가 정권을 잡고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시대에 살지만 않았더라면 혹은 독일에서 살지만 않았더라면 의사로 일하면서 삶을 즐기고 가족과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 여인 릴리.
이 책은 어느 날 릴리가 나치에 끌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고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몇 달 동안 릴리와 릴리의 아이들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한 아픈 기록이다.
어린 아이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어느 날 엄마가 끌려간 후 아무에게도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큰 딸이 엄마가 되어 동생을 키워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더구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폭격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극적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한다.
이혼 해 따로 사는 아빠와 새 엄마는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친척들도 남을 돕기에는 너무 어려운 시절이다.
어린 딸들과 아들은 그들이 겪은 일들, 고통, 슬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모두 담아 매일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엄마는 한달에 한번 허용되는 편지에 모아두었던 답장을 한꺼번에 쓴다.
서로를 향한 걱정, 먹을 것을 아껴서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소포를 더 보내려 애 쓰는 아이들의 모습, 수용소의 실상을 아이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는 엄마...
나도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편지 구절을 읽을 때 마다 릴리와 릴리의 아이들이 입었을 상처와 고통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이런 일이 나와 내 아이들에게 일어난다면 나도 릴리처럼 우리 아이들도 이 아이들처럼 이렇게 서로 사랑을 전하며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한 민족에 대해 이렇듯 철저하게 탄압을 하는 일이 가능한 지 독일 국민들이 어떻게 그렇게 나치에 동조를 했는 지 그렇게 이유 없이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 지, 정말 너무나 무섭고 섬뜩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치보다 더 미웠던 사람이 릴리의 남편이었다. 사실 그도 그러한 시대만 아니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가정이라고 왕따를 시키고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릴리가 수용소로 끌려갈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결정적 계기인 이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미친 시대에 살았던 한 명의 독일인이었을 뿐인데도 나는 적극적으로 릴리를 사랑하고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가 나치의 대표인 양 분노의 감정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이런 비이성적인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절대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으니 특히 요즘은 더 착잡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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