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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서평쓰는 이)는 군복무시절 극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틈날 때마다 명상책을 끊임없이 보곤 하였다. 명상서적을 끊임없이 읽은 까닭으로 필자 나름대로 마음이 예전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곁에는 사회에서 사소한 사고를 친 경험이 있는 후임병이 있었다. 그 후임병은 제대로 독서를 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필자는 후임병의 언행으로 인하여 필자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비웃던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하여 마음공부를 했다고 자부하였고, 이러한 책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마음이 넓고 생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인간적인 언행을 한 후임병 덕분에 필자는 무언가를 느꼈다. 허무함에 웃음이 나오고 씁쓸하면서도 통쾌한 그 무언가를. 그리고 나름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깨달았다’라는 말보다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선함도 있고 악함도 있다는 것을. 다만, 그것을 인식하며 갈고 닦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는 것을. 내가 명상 서적을 읽으면서 마음속을 다이아몬드처럼 다듬었다고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단지 타인은 그 마음을 예쁘게 가공하지 않은 원석(原石)의 상태로 놓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대부분 다 갖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랑할 필요도 없고, 자랑할 거리도 못 된다. 이 책(불경)은 불경의 원문과 해설로 구성된 책이다. 필자는 불교서적에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만약 해설이 없었다면 이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모든 서적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한국이름 이외에는 한명 한명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 책에서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한국식 이름이 아니어서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내용도 은근히 알듯말듯 어렵게 느껴진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필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남긴다는 것이 다른 책들보다 꺼려진다. 첫째는, 필자가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독파하지 못하였고, 둘째는, 가벼이 얘기함으로써, 힘들게 얻은 지혜가 쉽게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고, 셋째는, 필자의 정신적 수준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평하는 것이 자칫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형태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자랑하기 위하여 읽는다면 언젠가는 앞서 말한 필자의 경험처럼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와 같은 경험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수레가 요란하다고 느껴지면 조용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되지 않는가? 어느 명상가가 말한 것처럼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자라는 것 같다. 책 속으로 빠질 듯 말 듯한 오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 것 같다. 필자가 이 책을 읽고 평점 별(★)을 주는 것이 어찌 보면 우습다. 평점을 주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되는지 안 되는지 필자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책을 거치고자 했던 점은 행운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책에서 찾은 인상적인 문구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p189. 수보리여!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은 법이 실제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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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께서도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을 공부 하고.. 연구를 하시는 학승이셨지요.. 그래서 후학들의 공부를 위해서 경에 대한 연구가 담긴 책들을 많이 써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법정 스님 생각이 나서.. 함 읽어 봐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약칭하여 부르는 경의 이름으로 "반야경"이라고도 합니다. 이 경은 대승경전 가운데 문체가 간결하고 문장의 양이 적어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읽혀져 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경을 많이 읽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전을 많이 읽고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지면 수행이 높아지고.. 그러면 모든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을 깨워 부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 적고 간결한 금강경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온 것입니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열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며 시작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경입니다.. 부처님께서는 "空"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은 없다.. 비우고 비워야 한다.. 비워야 한다는 마음조차도 없어야 한다.
제가 불교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라.. 이 경을 제대로 읽어 냈는지 잘 알 수가 없고.. 조심스럽게 그지 없습니다.. 괜히 이런 글을 써서 불가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구요..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담은 경을 사람들에게 널리 익혀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 글을 읽고 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것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깨달음의 존재를 살펴 보려 노력한다는 것에.. 그 의미를 둬 볼까.. 합니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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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금강경..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약칭하여 부르는 경 이름으로 때로는 <반야경>이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알아본 바 [금강경]은 불경 가운데 가장 지니고 읽기가 쉽다고 하고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학적인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고 하고, 불자들의 필독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교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보아야할 책이라고 한다 1장 부터 32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나에게 어떤 교훈과 깨달음을 전해 줄지 알고 싶었다.
한자로 된 금강경 옆에는 해석이 되어있다. 초보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뒷 장에는 제목 <금강경 바로 읽기> 처럼 금강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친철히 설명을 해준다. 몇 일만에 무의미하게 읽는 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햇고 천천히 읽으면서 금강경을 보고 이해하며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하지만.. 난 표지 뒤에 있는 글 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금강경은 읽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의 본체로 부처님을 직접 만나는 법신의 자리이다.
"모든 것은 비어 있다. 그리고 비어 있다는 것마저 비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없다. 그리고 없다는 것마저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었을 때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참.. 나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글귀였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읽고 이해하자.'라고 했던 마음에 반성한다. 처음 부터 다시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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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용어정리부터.
아누다라삼먁삼보리 : 범어를 음사한 것으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번역한다.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 곧 부처님을 부처님이 되게 한 깨달은 자체를 말한다. 지혜의 생명으로 영원무궁한 실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보리심 :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
보리심을 내었다는 것은 가장 깊고 큰 마음을 내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최고의 의지를 가졌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수행을 하기 위한 불교 특히 조계종에서는 금강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높이고 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약칭하여 부르는 말로 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전제목의 뜻을 풀이하면 ' 금강과 같이 견고한 지혜로 번뇌를 끊고 피안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 이라는 뜻이다.
그럼 그 진리의 말씀으로 들어가보자.
모든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는 관념과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상은 나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인 색(물질적인 것), 수(외계의 사물을 대할 때의 감각) 상(감각에 따라 일어나는 각), 행(생각이 의지가 되어 움직이는 것), 식(최종적인 인식과 판단)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에도 그것을 모르고 자아에 집착하여 이기적인 고집이 일어난다고 한다.
인상이란 인간 본위의 관념에서 생기는 고집이다. 생명이란 모든 것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만이 최고라고 하여 모든 생명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주의적, 인간 우월에서 오는 반생명적인 행위등이 인상에 속한다.
중생상이란 동물계와 식물계를 대립시켜 생명의 의미를 동물의 범주안에서만 부여하는 것이다.
수자상이란 육체적 생존만이 생명이라고 고집하는 그릇된 생명관으로, 생사가 없는 열반의 경지를 모르고 몸이 살아 있을 때만 생명이고 삶이라고 고집하는 소견이다.
자아에 대한 고집, 인간에 대한 고집, 중생에 대한 고집, 수명에 대한 고집, 이른바 사상(四相)이라는 네 가지 고집이 없다면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디에도 붙들림이 없는 무애자재한 대행(大行)이 될것이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통하는 묘행이다고 금강경은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네 가지 깨달음이 있다는 그런 깨달음조차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자체도 없어야 부처가 될수 있고 그렇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실로 어렵다. 하지만 남을 도와준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러한 도움의 마음자체도 없어야 비로서 남을 도와줄수 있다고 하는 설명에서 공(空)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에 더하여 금강경은 위 깨달음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지대한지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항하의 수가 한없이 많고(갠지스강의 셀수 없을 만큼 많다고 가정하여) 그러한 수 없는 항하의 모래알 만큼 많은 목숨과 재물과 보시도 이 금강경의 말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실로 '모든 것은 공한 것이며, 공한 것 또한 공하다고 하는 ' 말씀을 깨닫되 그러한 깨달음자체도 공하다고 하는 금강같은 말씀은 새길수록 새롭다.
이러한 깨달음을 몸소 수행하고 노력정진하는 스님들은 얼마나 그 공덕이 사해에 사무칠까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런데 금번 봉은사사태로 촉발된 불교계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저 금강경의 말씀이 또 공하다고도 생각된다. 조계종총무원장이라 하면 수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대표이며 깨닮음이 극에 달할것이라고 생각됨에도 정치권력에 줄을 대고 거기에 아부하여 선거활동을 앞장서고 그 정치권력의 압박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같은 무지렁이 중생도 권력의 무상함에 대해 아는데 그 무상한 권력에 몸을 굽힌다는 것은 깨달음이 깊은 불자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행위라고 보인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은 불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웬만한 식견을 가진 사람은 다 아는 진리가 아닌가.
일체의 번뇌를 끊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번뇌를 앞장서서 만들어내는 고승이라.??? 일체의 나도 없고 나도 없는 관념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고승이 권력에 굽힌다? 아!! 수행의 덧없음이여!!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것은 비어있다. 그리고 비어 있다는 것마저 비어 있는 것이다. 모든것은 없다. 그리고 없다는 것마저 없는 것이다......조계종이라는 것마저 없는거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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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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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이란 무엇인가? 도, 자연, 신, 무소유, 무위, 무념무상, 인생, 허공, 텅빔, 열반, 니힐리즘......어렵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 부처도 해공제일이라는 제자 수보리도 일반인에게 공의 사상을 잘 풀어서 이해가 쏙쏙되게끔 하는 데는 애를 먹었을 것이다. 여러 경전이 공의 진리를 논하지만 금강경이 무엇보다 대표적이라고 한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준말인데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번뇌를 끊고 무명의 어리석음을 부수는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국 선종에서 금강경을 중시했는데, 6조 혜능의 발심은 이 금강경의 한 대목에 의한 것이었다. 금강경은 읽기는 편하지만 난이도가 높아, 수많은 주해서가 나오게 되었는데, 가령 무착의 《금강반야론》, 천친의 《금강반야바라밀경론》 등이 그러하다.
「금강경의 대의를 '집착을 부수고 공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파이집破二執 현삼공現三空'이라 한다.아집과 법집의 두 집착을 부수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그리고 공한 것마저 공한 구공俱空의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이라는 것이다.」 (61쪽)
공이란 말에서 드러나듯, 금강경의 방법론은 절대회의의 철학이다. 금강경은 부정의 논리와 무상법문을 통하여 객체와 주체같은 사물에 대한 이분법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현상의 공적 본질을 간파하라고 설한다. 일본의 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는 금강경의「무엇이 무엇이 아니고, 이름이 무엇이다」라는 부정의 논리에 근거해 이를 즉비사상即非思想이라 표현한 바 있다. 선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논리학과 상상력의 결합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논리적인 변증법은 지안 스님이 책 속에서도 언급한 《대승기신론》의 근본4구와 맞닿아 있다. 근본4구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규정할 때 세우는 네가지 논조로, 있다有, 없다無, 하나다一, 하나가 아닌 여럿이다異를 말한다. 이 4구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순환은 다시 16구로 파생되고 여기에 과거,현재,미래 삼세가 배합되 48구가 되고, 발생과 미발생에 따라 다시 96구가 나온다. 여기에 기본4구를 더해 총 100구가 되는데 이를 백비설百非說이라 한다. 무척 논리적인 연산법 아닌가.
불교의 사상은 디지털적 상상력과 닮은 구석이 많다. 불교가 기본적으로 공과 색으로 천변만화를 이끌어낸다면, 디지털세계는 0과 1로 가상세계를 만들어낸다. 만약 플라톤이 금강경을 읽었다면 공은 이데아로, 색은 표상으로 번역했을 것 같다. 우리는 공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없다. 감각과 정서에 지배받는 우리는 언제나 표상만이 접근가능한 사유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공을, 진공묘유의 도리를 직접 체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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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본 등을 통하여 금강경을 읽어 보았으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읽어나가되 도통 뜻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선택했던 도서가 바로 이 책. 비교적 최근에 간행되었고 적어도 "조계종표준" 이라는 수식어를 의식한 면이 많았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시작으로,
무위법에서 차별이 있다는 것은 실상에 입각한 본래의 무위법이 수행 정도에 따라 유위의 현상으로 차별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금강경"의 상을 여윈다는 법문은 곧 마음이 비워져 관념적인 생각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워지면 트이고 열려지게 된다. 지혜와 자비가 모두 공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가 매우 많다고 대답한 것은 세속제에 의거하여 한 말이고 복덕의 본질이 아니라 한 것은 승의제의 복덕이 아니란 말이다.
사리불과 대조적인 햄릿의 경우,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육조혜능선사의 출가동기,
용악 스님 일화에 등장하는 통도사 자장암 금개구리,
"저들은 중생이 아니요,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참으로 묘하다. 야도보천 선사는 이 대목에 대하여 착어를 붙이기를 "불은 뜨겁고 바람은 흔들리며 물은 젖고 땅은 단단하다"하였다. 다분히 반의적으로 중생이 중생이 아니란 말을 뒤집어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다"라는 식으로 말해 붙인 것이다.
관념의 집착으로 인해 차별을 의식하면서 불평등의 상에 빠져버리는 것이 중생들의 미혹이다. 때문에 상을 벗어나 본평등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적지 않은 이해와 도움이 된 "금강경바로읽기"였다. 하지만 더러 읽어도 읽어도 머리에 와 닿지않는 부분에 표를 해두었다. 거듭 읽다보면 둔한 머리에도 깨우침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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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지인은 내게 [금강경]을 읽으라고 말했다. 난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인은 자신의 종교도 불교가 아니라며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금강경]을 꼭 한 번 읽어보라는 말했다. [금강경]이 주변에 있었다면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어려울 거라는 편견 때문에 일부러 선택해서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안스님이 강설하신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를 만났다. [금강경]은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약칭이다. 제자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삶의 자세를 묻고 부처님은 대답하신다. 그런데 수보리의 마음엔 의심이 인다. 의심을 질문하면 부처님은 의심을 해소하는 답을 들려주시는 구성이다. 범어로 된 원래 이름에 담긴 뜻을 풀이하면 ‘금강과 같이 견고한 지혜로 번뇌는 끊고 피안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번뇌를 끊는 견고한 지혜는 무엇일까. 번뇌는 한 마디의 마음의 갈등이다. 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날까.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인 ‘집착’ 때문이다. 집착은 어떤 곳에 마음이 쏠리고 매달리는 것이다. 집착은 ‘어떤 곳’, 집착할 대상이 존재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집착을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상을 없애면 된다. [금강경]은 상(相), 관념적 대의를 없애고 경, 깨달음을 지니라고 말한다. 즉비사상,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이지만 눈을 감아도 자꾸 떠오르는 상을 부수는 일은 미풍에도 흔들리는 범인(凡人)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이어트는 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비움이다. 비움이 있기에 채움도 가능하다. 무에서 유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야 말로 존재하는 것,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는 금강경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이 실려 있다. 그리고 지안스님의 강설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수보리가 일으킨 스물일곱 번의 의심인 ‘천친의 27단의’와 무착의 18주가 실려 있다. [금강경]은 쉬우면서 어려운 책이고 어렵지만 쉬운 책이다.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와 실천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도 반복해서 읽다보면 지혜를 얻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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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읽기 / 지안스님 강설 / 조계종출판사 刊
며칠전에 무소유로 일관하다 입적하시며 이승과의 모든 연의 흔적조차 끊어버리신 법정 불교의 법전은 막연하게나마 해인사 팔만대장경 뿐이 모르는 일반인에겐 금강경은 귀에 경전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 득도하고 성불하라는 것일진대, 금강경은 다이아몬드의 또 다 금강경은 부처님이 세존世尊으로 불리우며 그의 제자 수보리須菩提의 대화양식을 담은 불 자주 서두에 나오는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이며, 아라한은 성문의 마지막 근래에 여당 원내대표가 조계종 총무원장을 호텔에서 만나 봉은사 직활 사찰 문제에 껍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