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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대녕의 단편집 '대설주의보'가 출간됐다. 이와 함께 '은어낚시통신','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가 개정판으로 함께 선보였다. 이름만 알고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이번기회에 책을 접해보고 싶어 별 생각없이 주문을 하게 됐다. 그런데 분명 대설주의보를 주문한것 같은데 도착한 책은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였고 한동안은 이 책이 윤대녕의 신간인지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단편소설보단 장편소설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신간'과 '장편'의 단어조각이 제맘대로 합성이 되버렸나 보다.
어이없게 손에 들게된 이 책은 인간의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 트라우마는 아마 모든사람에게 존재하고 있을것이다. 그것의 강도차이가 날뿐,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이하 호외바>의 등장인물 역시 트라우마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이다. 주인공 영빈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대변하는 '호랑이'에 삶이 깊숙하게 침투당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호랑이를 잡기위한 몸부림이 제주도에서의 바다낚시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트라우마의 극복을 위한 목숨건 영빈의 낚시 이야기와 함께 해연, 히데코등 다른 등장인물도 트라우마장애에 고통받는 사람들로, 각각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모두 다른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트라우마에 붙잡혀 폐쇄되어 버린 삶의 자각, 넘어서지 못한채 자살로 끝나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가진 트라우마는 어떤것이 있을까 고민해 본다. 호외바엔 공통적인 트라우마 치료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부분에서 생겨난 트라우마를 인식하고 해결해야하는 방법은 정신과 치료나 책에서 찾을 수 없다. 지금도 트라우마에게 침식당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치료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가 싶다. 점차 커져가는 내면의 호랑이에게 점령당해 버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호외바는 트라우마라는 딱딱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내부적으론 로맨스적인 요소가 크다. 영빈과 해연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지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됨에 따라 그 사랑도 조개속의 진주처럼 빛을 발하게 된다. 트라우마의 극복을 통해 내면의 장벽을 허물어내고 가질수 있었던 따뜻한 사랑이야기로 책은 마무리 되고있다. 리뷰의 촛점에 따라 재미없고 건조한 책이 될수도 있겠으나, 영빈과 해연의 러브스토리역시 주요 포커스로써 어느 로맨스소설 못지않은 남녀의 속내를 그려내고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
책속의 읽을거리 1.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아름다운 섬으로 인식된 제주도의 인식을 깨버리고, 4.3사건의 잔인한 학살사건을 설명하며 백조일손의 혼백들을 등장시킨다. 2. 낚시꾼의 삶을 이야기 한다. 좀더 큰 고기를 잡기위한 욕심에 대한 바다의 도전과 죽음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3. 요리책에 들어있지 않은 낚시꾼들만의 비밀 요리법이 공개된다. 모두 받아 적으면 나도 이젠 요리사? 독특한 요리 레시피를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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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장편소설 "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한동안 머리에 쥐가 나게 많은 양의 정보를 꾸역 꾸역 넣었더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을 집에 들어도 활자를 읽을 뿐이지 의미가 해석되지 않는 무의미한 읽음이 반복 되었다. 그래서 읽던 책을 다 덮고 쉬었다. 이책은 2005년도에 구입한 책이다. 올해로 나와 함께 한지 10년이 되었다. 그사이에 이책은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고 표지가 바뀌기도 했으며 안에 등장하던 사진작가는 이세상사람이 아니게 되기도 했다. 물론 나역시 10년이란 시간 앞에서 두아이의 엄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변한것을 탓할 수는 없겠다. 이 책은 붕괴 현장 (삼풍백화점 붕괴를 떠올리게 한다.)에서 살아남은 두 남녀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지독한 외롬과 고독을 만나며 살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서 아픔과 상처를 풀어 내는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지 알수 없는 우울감 무력감이 찾아들면 나는 이 소설이 생각이 난다. 책속에 빠져서 내가 주인공 인냥 그렇게 내안에 있는 호랑이 (고독 트라마의 원인이라고 할수 있는 것을 책속에선 호랑이로 표현한다.)를 잡기위해 바다로 떠난다. 늘 그렇지만 그다지 좋은 상태로 읽는 책이 아니여서 그런지 참 어둡다. 어둡고 외롭고 느린 책이다. 알 수 없는 낚시이야기가 끊임 없이 나온다. 읽으면 읽을 수록 한없이 가라앉지만 침몰하지는 않고 점차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삶이 너무 우울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인생을 잡아먹는 느낌이 들때 한 번 만나보면 좋을 책이다. 책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구로 이 책의 설명을 마무리한다. "누구나 그저 조금씩 외로운 것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때로 불안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젠 스스로 불안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그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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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바다로 간 것 만큼이나 호랑이가 바다로 갔다는 사실이 궁금점을 유발한다. 고래가 있을 곳은 바다이고, 호랑이가 있을 곳은 산이라는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각 바꾸면 억겁의 시간 속에 바닷속 산과 들이 뭍이 되고, 하늘과 함께 호흡하던 산과 계곡들이 바닷물과 어우러 져 지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바다로 가는 것은 아마도 그 조상들의 DNA가 자 극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그에 따른 노동이 필요하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독 자를 바다로 유혹한다.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바다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 들어 그 속살을 봤다고 해서 바다를 그릴 수가 없다. 바다의 얼굴은 변화무쌍하다. 산과 계곡을 돌풍이 핧고 지나가듯 바닷속도 그리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 '나' 영빈은 지금 제주도에 있다. 원래는 물 위를 걷고 싶었으나, 그것 이 여의치않아 우선 바다를 바닷속을 좀 더 알고 싶어 아예 당분간 제주에 머무를 생각이다. 굳 이 고교 동창 산부인과 의사가 '양수와 바닷물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안해줬어도 그는 물이 참 좋다. 바다가 좋다.
영빈은 어느 날 실로 9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해연과 아파트 이웃에서 친구처럼 애인처럼 때 로는 부부처럼(남들 보기에)지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쿨하다. 오래 전 그녀를 만났던 그 때 사실 그에겐 '상실의 시대'였다. 해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9년전 그녀를 만난 곳은 성수대교위를 지나던 택시 안에서였다. 그가 먼저 타고 나중에 그녀가 합승을 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그날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었다. 다행히 살아 났기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도 그 때부터였을것이다. 붕괴되어가는 그의 삶과 무늬만 다리였는지 맥없이 강물로 떨어져 내린 성수대교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 그는 해연에게 호랑이를 잡으러간다고 했다. 그는 종종 호랑이와 조우하곤 했다. 컴퓨터 내부에서 만난 적도 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짐승을 한 마리 씩 키우고 있지..평소에 잠든 척 얌전히 있다가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돌연 거칠게 반응하지. 참고, 또 참고, 또 참다가 말이야. 그때부터 주인을 괴롭히는거야..."
경계인 또는 또 하나의 디아스포라
소설에는 일본인이 두 사람 등장한다. 두 여인이다. 그가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지만, 알고보니 두 사람이 여고 동창지간이다. 한 사람은 등단하고 한 사람은 아직이지만, 두 사람은 글을 쓴다 .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국계 여성이다. 히데코라는 이름인 줄 알았지만, 아사카와 유미코라고 알게 된 여인과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여인이다. 메구무라는 여인 역시 영빈은 우연히 스친 적이 있다. 한국계 여성으로서 일본에 살아간다는 깊은 어려움이 표현된다. 아, 그리고 나중에 두 여인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타깝다. 작가는 이 두사람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가 여전히 현재와 미래의 진행형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일입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 지죠.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계인의 입장에 서면 흔히 회색분 자나 기회주의자로 몰리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좌와 우가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좌가 옳고 우는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또 어느 면에서는 우가 옳고 좌는 옳지 않습니다.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좌우의 장점을 택해 문제 해결에 적용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간단하 지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경계인이라 부르지 않고 양쪽에서 모두 기회주의자로 간주하니까요 . 말하자면 양쪽에서 흔들어대는 거죠."
잡느냐, 벗어나느냐
낚시 소설은 아니지만, 제주도로 낚시를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참고서적으로도 훌륭할 정도 다. 꼭지에 이런 메모도 종종 붙는다. "물때 4물. 음력 2월 28일. 양력 4월 17일. 오전 간조시 각 새벽 3시 29분. 만조시각 9시 52분. 더 없이 맑은 토요일 아침." 제주도는 물론 주변 섬들의 이곳 저곳 낚시 포인트와 물고기 이야기가 어류도감처럼 펼쳐진다.
트라우마 그리고 힐링, 다시 일어서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서적으로 근거리는 영빈과 해연의 가족 그리고 시간적으로 멀게는 일제시대부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이어진다. 영빈이 낚시 나선 길에 들르는 단골 국수집 아주머니는 제주 4.3 사태 피해자의 가족이다. 그녀는 외부 사람에게 매우 배타적이다. 그 상처는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 그것에 잡혀 있다보면 한발도 못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나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해연은 영빈이 잡아온 꽤 많은 고기를 욕조에 담가놓자 그 안에 들어가서 힐링 타임을 갖는다. 영빈은제주도에서 호랑이를 몇 번 만났다. 소설 끝무렵 영빈은 자신의 낚싯중에 걸린 꽤 큰 참돔과 돌돔을 그냥 바다로 다시 보내줬다. 잘한 일이었다. 해연의 뱃속에는 새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제주에 있던 영빈을 보러 내려왔던 해연과 최초로 신호교환(?)을 나눈 뒤 일어난 일이었다. 소우 쿨한 커플이 핫해질 것이다.
그리고 호랑이는 산으로 보내야 별일 없다. 무엇이든 있을 곳에 있으면 그 자체로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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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도록 긴꼬리벵에돔 회를 먹고 싶어요." 해연이 무심코 했던 말을 생각하고, 영빈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이른 새벽에 긴꼬리벵에돔을 한아름 낚아 온다. "알다시피 바다는 계속 순환하며 변하고 있어. 해와 달의 기울기를 따라 보름씩 주기적으로 변하지. 거기다 미묘한 다른 변화까지 합쳐서 말이야. 놀라운 사실이지만 바다는 계속 성장하고 있는 거야." 해연과 영빈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다. 형태는 다르지만 결핍과 상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거친 바다에서 상실의 밑바닥을 보고서야 그들은 비로소 서로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해연의 이름의 해는 바다 해(海), 제비 연(燕)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규정할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그래서 무작정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영빈이 제주도에 머물며 만났던 호랑이는 그 규정할 수 없는 그리움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영빈은 추자도에서 긴꼬리 벵에돔을 낚았고, 나는 긴꼬리 벵에돔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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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윤대녕 지음 문학동네
장마가 시작된다더니, 어제 저녁부터 질척거리며 비가 오고 있다. 미수기는 엄청 좋아하겠다. 습기가 치솟아 꿉꿉한 날이 될 듯 싶다. 세탁기도 돌려서 빨래도 해 널어야 하는데, 잘 안마르겠지? 소설가 윤대녕이 2003년, 『눈의 여행자』 이후 2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2005년에 생각의나무 출판사에서 학꽁치 먹는 법, 전갱이 새끼 먹는 법, 조기 회 먹는 법, 숭어 먹는 법, 부사리 먹는 법 등 특별한 생선 요리법도 소개하고 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물고기의 이름도 만나게 된다. 먹방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속내가 복잡하고 행동이 극단적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된다~ 2016.6.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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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바다가 있다. 쓸쓸해, 고독해, 행복해, 불행해, 미안해, 우울해, 용서해…… 이쯤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그만해, 라는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그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바다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잘 알려진 속담은, 그래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된다. 사람 마음 속에 바다가 있으니, 더군다나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있고 보면, 누군가의 마음 속에 지금 출렁거리고 있는 바다의 이름과 깊이를 어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마음이 숨기고 있는 바다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섬들이 떠있기 마련이어서 그 섬들의 크기와 형태와 생태계를 살펴봄으로써 그런대로 얼추 짐작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바다는 드러나 있는 섬이 단 하나뿐이고, 그나마도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수시로 바닷물에 잠기곤 하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해서 섬들에 의지하는 우리 삶의 항로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윤대녕의 장편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바다가 바로 그런 바다인데, 그 바다의 이름은 불안해이다. 그 바다에서 드러났다 잠겼다를 반복하는 작은 바위섬이란 언뜻 보기에 우리 삶의 항로에 큰 위험 요소가 되지 못하는 사소한 장애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방심하는 순간 우리 삶을 좌초시키는 치명적인 암초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소설에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여럿 나온다. 자살(영빈의 형과 히데코의 첫 애인)이든 사고사(해연의 아버지)이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사회적 폭력과 실존적 우울 그리고 훼손된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 속 세 주인공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토록 가까운 근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 속,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아래 격렬한 조류가 흐르고 있는 바다에도 역시 우뚝한 바위섬(트라우마) 하나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 바위섬에 좌초되지 않고 휘돌아 나갈 것인가? 과연 트라우마를 원만하게 극복하고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신출내기 소설가인 영빈의 경우, 대학 학생처 소속의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의 죽음이 남긴 은밀한 트라우마는 가끔씩 호랑이라는 환영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그 환영이 거듭 반복해서 나타나자 영빈은 결연히 그에 맞서는 적극적인 방식을 택한다. 그건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제주도로 떠나 낚시에 몰두하는 것. 제주도가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아름답기만 하지만 이른바 4∙3 사태 당시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점, 즉 트라우마를 간직한 섬이라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었다. 프리랜서 동화 삽화가인 해연의 경우에는 소극적 방어에 머무른다.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을 사 모아 비좁은 아파트를 채우는, 그것도 쌍으로 마련해 채우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인간 관계의 공백에서 오는 외로움을 채울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소설가 지망생인 히데코가 취하는 선택은 회피. 그러나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도피해 왔어도 죽기 전 애인이 그녀의 등에 새긴 문신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선명하다. 그래서 히데코는 우연히 알게 된 영빈과 해연 사이에 끼어들어, 해연에게는 상처를 입히는 한편 영빈을 유혹하는 위험한 곡예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유혹이 영빈으로부터 무참하게 거부당하자 히데코는 결국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친구로 머물게 된다. 이 소설은 이렇게 이들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우정이라고도 연애라고도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만남과 그로부터 조금씩 누설되는 세 사람의 은밀한 트라우마를 서사의 한 축으로 삼으면서 또 한 축으로는 영빈이 제주도에서 몰입하는 갯바위 낚시의 조황기(釣況記)와 그 사이 틈틈이 그가 만나는 사람들(그 중에는 사진작가 김영갑도 있다)에 대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후반부를 한참 지났는데도 별다른 진전이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러한 국면은 어느 비 내리는 여름날 밤 송악산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든 영빈이 4∙3 사태 당시 학살당한 원혼들의 유령 무리를 목격하고 나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때맞춰 서울에서 해연이 찾아와 사흘간 함께 지낸다. 그리고 서울로 떠나기 몇 시간 전 마침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망설여왔던 사실을 마침내 인정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바다 하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바다는 오직 서로를 위해 지금껏 존재해 왔다는 것을. 어쩌면 10년 전 합승한 택시를 함께 타고 가다가 성수대교 붕괴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 순간부터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시 두 사람이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는 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빗겨간 것처럼, 이후 9년 가까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살아오다가 우연히 해후한 것도 단순한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노을빛 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그때 그 바다가 그들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랑해, 라는 바다가. 이렇게 두 사람의 마음 속에서 마침내 확인된 사랑해는 고요하고 강인한 바다이다. 그래서 뒤이어 들은 히데코의 자살 소식이 가져다 준 충격도 그들의 사랑을 좌초시키는 암초가 되지 못한다. 영빈도 해연도 그들의 삶에 닥친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다만 한 차례의 높은 파도로 여기며 거뜬히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고립된 바다 불안해에서 함께 나누는 바다 사랑해로 그들의 가슴 속 바다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상처와 불안, 용서와 구원,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뭐든지 간에 각자 혼자서 알아서 처리하고 해결해야만 한다고 떠들어댔던 영빈이 제주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낚시를 하러 향하는 곳이 북제주군에 속한 추자도의 절명여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외롭지만 또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곳은 바로 해연의 아버지가 전설 속의 괴물 물고기 돗돔을 낚다가 빠져 죽은 자리이니까. 영빈은 바로 그 자리에서 70센티미터쯤 되는 돌돔을 낚는다. 아니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호랑이를 잡는다. 아니 그가 사랑하는 여인 해연을 그토록 오래 괴롭혔던 깊은 슬픔을 포획한다. 그러나 그는 그 돌돔을 죽이지 않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의 마음 속 바다가 이미 사랑해로 바뀌었으니 그의 마음에는 이제 더 이상 호랑이가 깃들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해연도 마찬가지 생각이어서, 아주 잘한 일이라고 영빈을 칭찬한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온전히 영빈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지난 여름 영빈이 그녀의 바다에 풀어준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이제 더 이상 바다로 낚시를 하러 다닐 이유가 없어진 영빈은 한 달 정도 더 제주도에 머물면서 쓰고 있던 장편소설을 마무리해서 서울로 향한다. 호랑이를 잡으러 제주도에 내려온 지 열 달 만이었고 이제 몇 달 후에는 열 달을 채운 그의 첫 자식도 태어날 것이었다. 작품이든 자식이든 사랑해는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바다인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 참으로 통속적인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은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그 바다를 부러워하고 있나 보다. 사랑해. 그 바다에 나도 가고 싶다. 그 바다를 나도 내 가슴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