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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쩌면 매우 사적인 나의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점이 매우 걱정되지만 일단 한 번 시작해보겠다. 한국 나이로 딱 서른이 되던 해 설날이었다. 이유 없이 아파서 연휴가 끝나고 병원에 갔는데, 그 후 3년 동안 병원을 드나드는 생활이 계속됐다.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발병하면 입원했다 괜찮아지면 퇴원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서 검사를 했다.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도 의사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막막함은 당해본 사람만 안다. 삶은 주어졌는데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삶이라는 것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은 살아 있구나.' 뭐 그런 나날이었다. 물론 약의 부작용도 컸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하고 많은 사람 중 왜 내가, 나름 착하고 올곧게 살았는데, 이 무슨 하나님의 악취미란 말인가, 뭐 그런 생각들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미국을 오게 됐다. "저 미국 가야 합니다. 혹시 미국서 재발하면 어떻게 하죠?" "비행기 타고 한국 오세요. 어차피 미국에선 의료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을 겁니다." "만약 비행기 안에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죠? 장시간 비행이잖아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죠." 그때 의사는 심드렁하게 웃었던가? 그 웃는 얼굴을 향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던가? 이젠 기억마저 희미하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녹록치 않았다. 그나마 한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것들마저 누릴 수 없던 그런 하루하루였다. 하나님은 왜 이다지도 나에게 잔인하신가? 하나님은 변태인가? 왜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불 가운데로 밀어 넣으시는가?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즐기는 것인가? 이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인가? 혹시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난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혹독한 벌을 받는단 말인가?
무던히도 울다가, 울다 지쳐 눈물마저 마르다가...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랬던 미국 생활이 만 5년을 넘어 6년째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많이 건강한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광야 같던 그 시간 속에서 침잠하고,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훈련을 하게 된 것 같다. 깊이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와 찬송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했다. 무던히도 많은 신앙서적들을 탐독했다. C. S. 루이스나 헨리 나우웬, 유진 피터슨, A. W. 토저, 필립 얀시 등이 모두 그때 만난 사람들이다(물론 이들은 모두 인간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이다. 성경이 '복음'이다. 그러나 일정 부분, 이들이 감당한 역할도 인정할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들을 통해 삶 속에서 고통이 주는 의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서서히,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신앙이란 지성을 버려야 얻게 된다거나 혹은 이성적이고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만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인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어령씨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성은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지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성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영성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30대에 내가 체험하고 깨달은 바이다.
누가 내게 20대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아니라고 할 것 같다. 나의 20대는 치사량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늘 회의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나름 이성적이었고, 나름 형이상학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나름 공의로웠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돌아보면 '자기 의'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서른 이후 지난한 광야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나에게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도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 과정들을 통해 나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시나요 너무 크고 아름다운 그 사랑
나의 의를 모두 버릴 때, 나의 이성과 지성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나의 죄인됨을 고백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난' 낯선 나라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만 바라 보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찬송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간증이 되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그 일련의 과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그의 고백 속에서 나의 고백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서 이 책의 고백은 그대로 나의 간증이자 나의 찬송이 되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장 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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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메네우스(Idomeneus)는 크레테 왕으로 데우칼리온의 아들이자 미노스의 손자다. 그는 헬레네의 구혼자들 중 한 명으로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하여 노장임에도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무사히 귀향한다. 그러나 호메로스 이후의 신화에 따르면 이도메네우스는 트로이아에서 귀향 도중 심한 풍랑을 만나자 만약 무사히 크레테로 돌아가면 맨 먼저 만나는 생물(生物)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약했는데 그가 맨 먼저 만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를 맨 먼저 마중 나온 그의 아들이었다. 그가 서약에 따라 아들을 제물로 바치자 온 크레테 섬에 역병이 퍼졌고, 그래서 크레테인들이 신들을 달래기 위해 그를 크레테에서 추방하자 그는 남부 이탈리아로 건너가 정착했다고 한다. 「사사 입다는 여호와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치게 하달라고 서원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로 바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입다는 서원한 대로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여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무남독녀로 애지중지하던 바로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맨 먼저 나와 영접합니다. 놀란 입다는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오히려 딸을 원망하면서 외동딸을 번제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리고 이삭처럼 그 딸은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아버지의 말에 복종, 처녀의 몸으로 죽게 됩니다.」-『지성에서 영성으로』172~173쪽 (위의 인용문 첫 줄 ‘과연’이라는 부사의 쓰임과 ‘하달라고’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개정판까지 나왔는데 오타가 많은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필자가 책임교정했다고 했으니 이 책에서 보이는 오타와 오식은 출판사와 저자의 공동책임일 것이다.) 『일리아스』에는 많은 왕들이 나오는데 그 왕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그 시대의 왕은 일종의 부족장 쯤 된다. 보통의 왕국은 약 2만 명 정도로 이루어진 소국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사사란 개념도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갖기 전에 지도자 쯤 되는 사람인데 이런 부족장들의 지위는 왕보다 낮아서 신의 목소리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힘이 부족하면 왕 자신이 참살당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자식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써야 했다. 이는 성경이나 『일리아스』에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화와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은 여기저기에 많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읽으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연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신화와 종교의 경전을 은유로 읽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이런 연상력은 아무 쓸모도 없어지고 결국 자신의 신화와 경전만이 유일하고 다른 가능성은 신성모독에 불과하게 된다.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여호수아가 해를 멈춘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 자전이 잠시나마 멈춘 증거를 찾기 시작하고 노아의 방주를 찾기 위해 아라랏 산을 헤맨다. 그 산이 알프스가 되었든 에베레스트가 되었든 간에... 그런 광신이 종교전쟁을 야기하고 세상의 화평을 방해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 그리고 오로지 성경에 기원하고 있다. 즉 신앙이란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고 신자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에 루터는 모든 형태의 회의에 대해 거부했고 성경의 재해석이나 다른 텍스트와의 비교를 거부했다. 성경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란 회의의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과 신학은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인간은 결국 무신론자가 될 것인가? 결국 세상은 무신론자와 근본주의자로 나뉘어야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철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초월적인 것을 찾는다. 아니 인간이란 생명체는 초월적인 것을 찾게 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학문을 하는 수학자도 새로운 정리를 창조했다기보다 ‘발견’했다고 하지 않는가. 발견이란 말은 이미 있었지만 인간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미분’이나 ‘슈뢰딩거 방정식’ 같은 것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을 단지 뉴턴이나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자들이 ‘발견’했을 뿐이다. 뉴턴도 신자였다.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은 꼭 영적 체험을 통해서만은 아니다. 세상의 초월적인 어떤 것에 대한 경외, 그리고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받아들임, 그리고 삶에 대한 겸손함 같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는 영적 체험을 통해 광신자가 되어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현상일 수도 있다. 이어령은 영적 체험을 통하지 않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믿음이란 신의 은총이다. 그리고 그 신의 은총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기반하고 있다. 즉 온전히 신을 믿는 것은 신의 은총과 자유의지의 결합이며 이것은 그 누구의 강요에도 의하지 않는다. 신앙은 개인의 차원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기도를 다락방에서 올려야만 하는 이유이다.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외식하는 무리라고 예수께서 비판해마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적 체험이란 인간의 강요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은 현세의 물질적 부로 나타나지 않고 치유의 기적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믿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만이 신의 은총이다. 그 외의 것들도 신의 은총이라면 삶의 모든 면이 신의 은총일 것이고 전쟁, 죽음, 거짓 등도 신의 은총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신의 은총은 믿음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사야 제 7장 9절에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라고 나와 있다. 영어로는 “unless you believe, you will not understand”로 나와 있지만... 결국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삶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해서, 혹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모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일 뿐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마태복음 제 22장 21절에 나와 있다. 인간의 일을 신에게 돌리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합리적 관계는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그 어그러진 틈새를 근본주의가 파고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영성의 회복만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일로 본다. 아무리 독일에서 신학을 정통으로 배우고 와도 우리나라에서 교회사역을 성공하려면 소위 ‘영빨’이 통해야 한다. 즉 우리나라의 교회는 지성과 영성의 조화, 교회와 사회의 합리적 교류, 사회적 실천과 비판 같은 것들보다 성경 말씀으로의 회귀, 신적 감응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신앙 간증과 치유 사역, 부흥회 같은 것들이 남한을 강타하고 있다. 결국 이런 기적, 치유, 중보 기도 등을 중요하게 여기면 리차드 도킨스 같은 이들에게 공격당할 뿐이며 영적 체험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영적 체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은 어떠해야 할까? 이어령의 신앙은 이런 신앙의 모범이 될 것이며 지성과 영성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교회에 경종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위기는 기독교 신자의 숫자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성과 영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임에도 신자든 비신자든 영적 위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이 비신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비신자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느끼기보다 바리새인이나 레위인 혹은 세리들로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이어령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것을 반기며 이 책이 많이 팔린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어령처럼 똑똑한 사람, 지성으로 충만한 사람이 할 일은 우리나라 교회가 지성과 영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이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기독교를 공격했을 때처럼 그것의 반대논리를 찾아 기독교를 방어하는 것이 아닌 한국교회의 위기를 받아들이고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이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도록 한국교회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일부 교회의 잘못을 전체 교회의 잘못처럼 호도하지 말라는 상투적인 변명 대신에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우리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일부’ 기독교 종파 때문에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머리로 느껴야 한다. 「고르기아스 : “나는 의사들과 함께 약을 안 먹으려는 환자들을 찾아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약을 먹지 않았지만, 내 웅변을 듣고는 약을 먹었다. 의사와 변론가를 군중 앞에 두고 누가 의사인지 찾아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변론가를 의사라고 꼽을 것이다.”」- 플라톤, 『고르기아스』 성경이 약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이 약을 먹게 만드는 것은 신자들의 변론일 것이다. 신자들의 변론은 신자들의 삶으로 나타난다. 신자들의 삶이 우리나라의 병을 고치게 만들려면 신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그 신자들의 삶이 변하려면 신자들이 더 겸손해야 하며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교회들이 비신자들이 느끼기에 충분히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듣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이어령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자신의 삶의 수준은 아직도 낮은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고독과 상처를 안고 살아감에도 그 고독과 상처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 결국 초월자에의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겸손한 자세가 앞으로의 한국교회를 바꿀 단초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은 비신자들에 대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고 신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책으로 읽혀야 한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겸손하고 더욱더 겸손해져야 한다. 자신의 영혼에 상흔(傷痕)이 있지 않으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 오로지 고독함만이 신앙의 기저로 이끌 수 있다. 이어령의 딸 장민아의 신앙 간증은 그래서 조금 불편하다. 이어령의 신앙이 영혼의 스티그마타에 의한 것이라면 장민아의 신앙은 문자 그대로의 스티그마를 드러낸다. 그녀의 보이지 않던 눈이 보인다거나 불치의 암이 완치된다거나 혹은 그녀의 ADHD에 걸린 아들이 정상이 된다거나 하는 것들, 그리고 그의 똑똑한 아들이 갑자기 코마상태가 된 후 죽음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신이 예비한 것이라는 간증은 왠지 불편하다. 이런 식의 치유에 대한 간증은 이중맹검법에 의해 무참히 깨진다. 우리의 신앙이 『퇴마록』이나 『엑소시스트』의 수준이 되지 않으려면 이런 치유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 책에는 이어령의 딸의 성이 왜 ‘장’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장민아와 그의 남편의 이혼에 대해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신앙생활이 현실의 삶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다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개인의 삶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이 책이 신앙생활을 할 때 혹은 믿음의 길로 들어갈 때 일종의 나침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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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관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인사청문회는 후보자 개개인이 장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이나 도덕성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후보자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에 대한 논란보다는 다른 상황에 대한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만약 내가 저런 자리에서 내 과거를 다 드러내고 선다면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떤 느낌이 들까? 우리 국민 모두를 저 자리에 올려놓고 평가해 본다면 과연 비난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사청문회가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삶에 촛점을 두고 있다면 개인의 신앙고백은 자신의 인격적, 정신적 내면세계의 모든 것을 남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기본적으로 내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남들에게 드러내야 하는데 따른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비슷한 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책은 그동안 지성인을 대표하였던 이어령 박사가 그리스도인 이어령으로 변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명해 놓은 신앙고백기라고 하겠다. 고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일기, 강연, 기사와 편지등이 다 소개되어 있다. 개인과 세상과에 존재해 있었던 얇은 막들을 다 걷어낸 내면의 이어령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걸 설명하고,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걸 설명하고,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151쪽) 먹어도 배고프고 노래를 불러도 가슴이 풀리지 않을 때는, 영혼이 목마르다 할 때에는? 식당이나 극장, 그리고 도서관으로도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교회에 갑니다." (208쪽)
지성을 뛰어넘어 영성의 세계로 들어간 이어령 박사가 지성과 영생의 세계간 차이를 정의한 부분이다. 개인의 신앙고백이야말로 듣는 사람 개개인에게 서로 다른 영혼의 울림을 주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선 직접 책을 읽어보고 감동과 은혜를 받는것이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않는 나로서는 이어령의 마음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종교적 경험도 없고 지식이 부족한 내가 보기에도 종교생활 측면에서 이어령과 그의 딸 민아와의 신앙심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어령의 영성에의 회심에는 그의 딸 민아의 영향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소개된다. 이 책에서 이어령의 설명은 아직 과학과 예술의 냄새가 많이 나지만 민아의 설명은 영성의 힘이 강하게 전해진다. 종교적 측면에서의 내공의 차이라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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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통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 책을 읽지 못했다. 몇 주 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연체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너무나 미안해서 갖다주려고 하다가 이것만은 꼭 읽어야 하는데 싶어서 염치 불구하고 하루 더 연체를 하는 쪽으로 결정하고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선생님의 회심의 스토리가 궁금했다.
나는 모태신앙이지만, 가끔 나이를 먹고 교회에 첫 발을 내딪는 초신자를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에게는 성경말씀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익숙한 말씀이고, 가치관의 근간이되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학문으로 머리와 가슴이 단단해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믿는 축복을 받지 않았다면 진화론과 대립되는 창조론을 믿을 수 있으며 꿀처럼 달콤한 일요일의 휴식을 교회 봉사로 반납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지성, 세상적 학문을 가치관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하나의 신화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무신론자의 삶을 살았던 석학 이어령선생님의 회심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학자였던 선생님은 비록 성경을 믿지는 않았어도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강의도 하신적이 있으시다. 그러니 모태신앙이라고 뽐내는 나보다도 오히려 성경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계신다.
이어령 선생님이 70세가 넘어서야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계기는 고독함 속에서 찾아오는 인생의 목마름 때문이었다. 수천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학문을 접하고 지성의 대명사로, 교수와 장관과 작가로써의 삶을 살아오셨지만, 영혼의 갈증은 해결받지 못하셨다. 사람들이 왜 교회 가느냐고 비난하면 이렇게 답하신다고 한다.
"배가 고프면 어디에 가지?" "식당에." "뭔가 알고 싶을 때는?" "도서관 가면 되지." "심심하면?" "극장 가서 영화 보면 돼."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그럼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갈증나고 놀아도 심심하고 배워도 답답하면 어디를 가나?" "그게 뭔데?" "그런 때 가는 곳이 교회란 말야."
이어령선생님이 회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따님의 영향력이 크다. 미국에서 검사와 변호사직에 있던 재원이 어느 날 갑상선 암에 걸리고, 그의 아들은 자폐와 과잉행동증상으로 일반학교에 다닐 수 없는 상황을 종교로 이겨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한 딸을 위해 저절로 서원기도를 하게되고, 그 망막분리라는 병이 어느 날 말끔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보며 세례받기를 결심하게 된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말씀을 이어령 선생님도 좋아하시는 거 같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데, 어느 포도원 지기가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하루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 약속하였었기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정당한 댓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늦게 온 사람이 자기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계산법은 사람의 계산법과 다르다.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은 일하기 전에 일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했기에 그 마음까지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앞에 온 자가 뒤에 서고, 뒤에 선 자가 앞에 선다. 나중 된 자가 더 크게 된다는 것은 결국 늦게 믿은 사람이 더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어령 선생님은 늦은 나이에 이제서야 영접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돌아온 인생을 통해 오히려 더 크게 사용하실 것에 감사해 하신다.
이 책은 매 오른쪽 페이지 아랫쪽에 플립북 애니매이션의 형태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맨 아래칸에 있던 사람이 책장이 100장, 200장 넘어가는 중에 중반, 꼭데기 근처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면 만화처럼 사람이 걸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책의 차례와 같이 처음에는 교토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와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한국에서 행하며 영성에 다가가는 이어령 선생님이 신앙의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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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랄까? 책을 읽어면서 우선 든 생각이 글로 보자면 역시 이어령 선생님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통찰력이 번뜩이던 이전 글과는 조금 다른 수필형식의 자서전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그의 글 솜씨는 여전하였습니다. 조금은 두꺼워 보여 다 읽는데 며칠 걸리겠다 싶었지만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몇 해전 이어령 선생님이 딸 때문에 신앙에 입문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이어령 선생님이 예수를 믿게 되다니, 기독교가 반지성적이라는 오해는 좀 풀리겠구나 라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도올 김용옥씨가 예수를 믿으면 더 없이 좋을텐데 라는 생각도 함께 해 보았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이어령 선생님의 신앙 간증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의 그의 삶과 예수를 믿게 된 계기, 그리고 현재 그의 모습을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70여년 동안 무신자로 살아왔기에 누구보다도 무신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강한 척하지만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수시로 찾아오는 무기력함과 공허함, 그것은 바로 신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기에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노라. 그리고 예수가 진리임을 이제 믿노라’고 조용히 고백할 뿐입니다. 오래된(?) 신자보다 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성서를 보는 눈이 있음에도 자신은 결코 훌륭한 신앙인이 아니라고 아직 광야에서 헤미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학자적 양심과 통찰력이 그를 기성 교인들보다 더욱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말할 때는 뱀의 혀로 이야기하는 달변이지만 진실을 말할 때는 어눌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느덧 종교적 의식에 익숙해 버린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범벅된 기도보다 어눌한 기도가 더 진솔한 것을..., 어눌한 기도가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글이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아마도 솔직함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종교적인 색채를 조금도 치장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것, 사실 그것이 신앙의 첫걸음이요, 신앙인이 갖추어야할 본 모습인데, 타성에 젖은 신자들은 너무나 자신을 종교적으로 치장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염려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이제 초신자인 이어령 선생님에게 종교적인 껍데기로 치장한 성도들을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그의 날카로운 이성은 분명히 성도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단번에 파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우이겠지요. 우선 그의 딸이 참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땅에 진실하고 순전하게 살아가는 성도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방황하는 무신론자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분, 혹은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해 봅니다. 꼭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한 평생 무신로자로 살아온 지성인이 신앙에 귀의하게 된 여정은 깊은 감동을 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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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어령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딸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최근에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의 제목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였기에 제목만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탓도 있었다. 그만큼 저자가 신앙을 가지고 안가지고의 여부에 대해 큰 의의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그동안의 행보를 고려해 볼 때, 단순하게 치부하고 지나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흔이 넘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 딸의 기도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과 무엇보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써 낸 수많은 글들이 그동안의 내적 영성을 증거 함에도 현재의 중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자의 책을 그다지 많이 읽은 것은 아니기에 신앙에 관한 에세이를 만나게 된 것이 자못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그간의 저자의 행보와 신앙이 일치가 안 되는 낯섦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내 시선 또한 이러할진대, 저자가 당면했을 시선들이 그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현재를 이루고 있는 밑바탕이 과거가 되더라도, 현재가 더 중요한데 왜 그렇게 과거의 행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지식인으로써의 인식되어 있었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그 묵은 감정을 벗겨내고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에 저자의 진심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저자에 대한 인식을 벗기기는 힘들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고 신앙에 대한 경험과 저자의 생각, 농도까지 모두 알아갔다. 교토, 하와이, 한국에서의 일들과 딸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 속에는 신앙이 중심이 되었지만 저자만의 집약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글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독자적인 생각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실재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니 세례를 받는 것부터 이슈가 되었다.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를 받겠다고 말해놓고, 국내에서 받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것 같아 '러브소나타' 도쿄 대회 현장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5천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바람에 더 크게 일을 벌이게 되었노라고 회상했다.
세례를 받는 것부터 그 뒤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들 목도하면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것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도 제안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의 모습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똑같은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데도 저자는 보통 사람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딸의 기도가 육신의 아버지에게 닿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시련이 저자의 딸에게 연속으로 다가왔음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암을 앓는 것도 모자라 재발까지 했고, 아이 중 한명은 자폐증상과 함께 과잉행동증상으로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총명하던 큰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는 일까지 그야말로 시련은 끊이질 않았다.
암을 이겨낸 것만도 힘겨웠을 텐데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와이까지 거처를 옮기는 고난이 안쓰러웠다. 그곳에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식까지 겹쳐 저자는 급히 하와이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런 딸을 보며 딸을 낫게 해준다면 앞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를 드린다. 딸의 눈은 국내에서 진료를 받은 뒤 기적처럼 나았고, 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가 신앙을 가지기 전과 후에 쓴 시들을 읽으면서 변화된 내적 영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가시는 것부터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까지 저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을 낱낱이 보게 되면서 살아계신 그 분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광범위한 지식 때문에 잠시 책의 내용이 혼동되기도 했다. 신앙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낼 때는 장황한 것 같아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된 것 같았으나 개인적으로 신앙에 대한 주제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앙을 사람이 판단할 수 없고, 믿음의 척도를 비교할 수 없듯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겠지만 부족한 나의 눈으로 보여지는 여러 가지 것들에 생각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저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딸의 눈물겨운 기도와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그들의 모습이 있었다. 거기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이 교차됐다.
저자도 저자지만 딸의 절절한 편지와 간증, 기도가 마음을 더 애달프게 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떠한 시선으로 쳐다보는지와 신앙의 여부를 떠나 삶에 대한 시각이 보통 사람과 좀 더 다를 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녀를 보면서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저자는 일흔이 넘어 세례를 받는 것과 시집을 낸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망령 났다고 수군댔다 했지만 오히려 그 나이에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글로 표현하고, 감사해 할 수 있는 모습 속에는 아픔, 절망, 환희, 성스러움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날로 날로 깊어지고 짙어지는 믿음을 보면서 그 믿음을 닮아가야겠다고, 감사할 수 있을 때 맘껏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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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그는 누구인가? 시대의 문호이자 큰 학자다.
그가 말하는 '복음' 이라면 아무도 섣불리 비웃지 못할 것이다. 아니 많은 이들이 귀 기울일 것이다. 애써 외면하며 "그 분의 견해일 뿐이야" 라며 일축하는 이들 조차 깊은 마음 한 켠의 거룩한 부담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영향력이다. 반전의 힘이다. 그 분이 일하시는 놀라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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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자루를 지고 오르면서 영혼의 무게를..." 라는 사색의 과정을 통해 영성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영성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광야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을 인도사하시는 그분의 섭리는 알고 있는 듯하다. 영성으로 내려가기까지 저자가 보아온 것은 딸 민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다.저자는 먼저 지성으로 성경을 읽었고, 지성을 성경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비판의 글을 쓰기도 했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무신론자였던 저자도 하늘이 별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말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심으로써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지 않으신것 이다. 그러고보니, 불어오는 바람과 흘러가는 구름,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의 나무까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질서있고, 아름답고, 과학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가 무릎꿇고 세례를 받았을때 울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저자는 철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분앞에 우리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저자는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저자가 내딛인것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그분의 딸 민아에게 그리고 기도한것처럼 가족들에게 다가가셔서 이끌어 들이셨다. 저자는 지성과 영성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길을 건너오기 위해 걸린시간은 70년이었다. 가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맞는지 궁금해 지고,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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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 교수의 ‘신앙 고백’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현대 기독교의 변증서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C. S. 루이스의 저작들에 견줄 만큼 의미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령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마지막 수업』을 통해서였다. 이미 고인이 된 이후였기에 그의 삶을 직접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 책을 통해 한 인간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유하고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삶의 궤적을 조금씩 들여다보면서, 이토록 깊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특히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것은 ‘죽음’이었다. 삶을 깊이 통찰한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최근 들어 나 역시 죽음이라는 문제를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어떤 방향성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본질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남다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죽음의 해답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래된 경구—를 넘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한 인간의 내면적 여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어령 교수는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신앙이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이 책의 중요한 축이다. 모태신앙인 나에게조차 신앙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인데, 평생을 이성으로 세계를 탐구해 온 지성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검사이자 변호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던 딸이 목사의 길을 선택하고, 그 딸이 자신을 전도하려 했을 때에도 그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딸이 실명을 앞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이후 시력을 잃지 않게 되는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에는 변화가 찾아온다. 겉으로 보면 흔히 말하는 ‘고통을 통한 신앙의 시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단순히 극적인 사건 하나가 그의 신앙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어령 교수 자신도 그 사건만을 결정적 계기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동안 치열하게 사유하며 신앙을 배척했던 그 지성의 과정 자체가, 결국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손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깊은 상실 속에서도 신앙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근본적 깨달음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이번 개정판에는 딸 이민아 목사의 글도 함께 실려 있다. 그녀 역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신앙의 깊이는 이어령 교수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 고백이었고, 결국 아버지의 고백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를 떠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 삶의 마지막에 도달하여 무엇을 붙들었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계기가 된다. 죽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어령 #지성에서영성으로 #책리뷰 #기독교변증서 #신앙고백 #종교서적 #독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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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습니다. 바로 오지 않고 70여년을 딴 생활을 하고 왔으니 참 멀리도 돌아온 것이죠. 그가 돌아오기까지 그의 딸이 참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암이며, 실명, 그리고 자폐를 가진 아들까지...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생겼다고 하니 남인 내가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마는 정말 인간적인 마음으로 안됐었습니다.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우는 이어령 교수 이야기입니다. 그가 주께 돌아와서 처음 쓴 신앙고백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지성이란 것을 저자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니 저같이 일천한 자가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식으로 말해 많이 아는 분이라는 뜻이겠죠. 그래서 저도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아는 분이 믿으면 무엇이 다를까? 우리 같이 금방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그러드는 냄비같은 신앙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책을 읽어보니 정말 달랐습니다. 그 동안에 쌓아왔던 철학과 과학 종교를 망라하는 지식도 놀랐지만 그것을 머릿속에서 잘 버무려 우민들을 위해 친절하게 알려주는 지성에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그가 우리와 별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된 동기였습니다. 사랑하는 그의 딸,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죠. 지식의 거성인 그도 결국 핏줄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은 우리 인간이 이 땅을 밟고 서 있는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믿는다고 하자, 사회 곳곳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이 땅에서 가장 똑똑한 분이 실존조차 불분명한 하나님을 믿겠다고 했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물었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말이죠. 그런데 그 질문이란 것이 다들 어감이 다르더랍니다. 기독교에 비판적 입장에 있던 지식인들은 '쯧 쯧, 어쩌다 예수를 믿게 됐어?' 이런 말투였고, 다른 종교에 있던 사람들은 굉장히 안타까워 하면서 '이왕이면 우리쪽으로 오지.'이런 식이었다는 거죠. 살아왔던 동네가 그쪽이니 날선 공격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대답이 참 명답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고, 심심하면 영화관 가면 되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면되는데 우리의 영혼이 굶주려 있을 때는 갈 곳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가 부패한 곳이 있다고는 그렇다고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의사가 오진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병원에 가지 말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초신자의 입에서 이런 숙성된 답이 나오다니 참으로 지성인은 지성인입니다.
그동안도 많은 일을 해오신 분이시지만 책에서 말하는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우리 인생에 대한 탁월한 관점은 과연 지성 중에 지성이라는 생각입니다. 비로소 그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지식들이 잘 버무려져 맛있는 음식이 된 것이죠. 그래서 그는 깨닫습니다. 지성을 넘어서려면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 지성의 단계에서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신을 비판하거나 자살한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지성의 막바지에 다달아서 이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디로 갈까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다. 결국 허무주의로 돌아서 버린다는 것이죠. 바로 약한 인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 또한 그런 삶을 살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지성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 만개한 꽃을 피운 이교수님은 참으로 복된 분입니다.
초신자인 그가 오늘날 기독교에 던진 메세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경을 보고 그의 지성과 성령님의 합작품 같은 그런 해석들은 이제 갓 돌아온 탕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기이할 정도이죠. 그리고 그의 해석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성경의 타당성에 관한 증거들을 그동안 자신이 읽어왔던 동서고금의 문헌들과 연결시켜 새로운 지식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그의 그런 문장과 고견들을 듣는 기분은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식과 지식이 만나 새로운 창조적 지식이 탄생할 때 짜릿한 희열같은 것들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에 던지는 간결한 메세지는 어떤 설교보다도 강렬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리더십을 새롭게 배울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좇아가면 될 텐데 안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성경에 다 나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죽는 그날까지 버리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삶의 하일라이트라는 것이죠. 우리의 말이 자꾸 어려워지고 많아지는 것은 이 단순한 삶을 회피하고픈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부른 것을 보고 내 가족 내 민족 내 국가를 뛰어 넘는 이웃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발견하는 그는 지성에서 영성에 다다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는 사도바울과 닮았습니다. 자신도 사도바울과 견주는 것을 가히 싫지 않은듯 합니다. 아니 오히려 사도 중에 바울과 지성인이 있어서 위로를 받는 분위기입니다. 당대의 훌륭한 지성이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지켜보면 앞으로 그가 이 시대에 어떻게 쓰임 받을 지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강제로 끌려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목도하고 평생을 주를 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것은 아마 자신의 삶에 대한 예언일 것입니다. 평생을 자신과 민족, 국가를 위한 지성으로 살다가 비로소 글로벌한 주님을 만나 영성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겠죠. 우리가 목표로 삼는 이 땅 어디에도 그 끝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끝에서 주님을 만날 때만이 우리에겐 새로운 삶의 시작,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질 파문은 작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쓰시려고 계획하셨던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