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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얼룩’이 시대의 상처와 만날 때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1. 1998년 여름, 미국의 소도시에서 일어난 파국 1998년 여름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직원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로 미국 사회는 온통 떠들썩했다. 재선을 하고 성공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클린턴 대통령의 깔끔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날아갔고 온갖 폭로가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는 순식간에 섹스에 관련된 농담이 흘러 넘쳤다. 이슈에 목마른 언론들은 연일 떠들어댔고, 연말까지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모든 이슈를 장악했다. 70년대 초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하여 자신은 무관하다고 거짓말을 한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정도로 거짓에 엄격한 미국 정치판에서 ‘성관계 강요는 없었다’는 클린턴의 변명은 더욱 부풀려져 오해와 억측을 불러왔고 클린턴은 남은 임기 내내 레임덕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여름은 난잡함, 혼란스러움, 지저분함 자체가 부지불식간에 이 사람의 이념이나 저 사람의 도덕성보다 훨씬 더 큰 작용을 하는 요소임이 증명되는 계절이기도 했다. 그해 여름은 대통령의 성기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을 점령하고 있었고, 부끄럼을 모르는 온갖 추잡함으로 얼룩진 인생이 다시 한번 미국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던 계절이었다. (1권, 15쪽)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문학동네, 2009)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미국이 섹스 스캔들로 어수선했던 1998년 여름, 오클라호마의 아테나 대학에서 주인공 콜먼 실크 교수는 학생들에게 그리스 고전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중이다. 71세의 노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젊은 강사 시절에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개론 강좌는 명료하며 강렬하기로 소문났고 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나 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까칠하고 열정적인 강의를 이어가던 콜먼은 개강 6주차 되는 어느 날 출석부를 바라보다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6주차인데도 전혀 출석하지 않은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두 학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인가요?” (1권 20쪽) 어이없게도, 가볍게 내뱉은 “spooks”라는 말로 그는 순식간에 몰락하게 된다. ‘유령’이라는 뜻을 담은 단어 ‘spooks’는 비속어로 ‘검둥이(nigger)’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우연찮게도 계속 결석하던 두 학생 모두 흑인이었던 것이다. 학장에게 호출된 콜먼은 사실을 해명하지만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대학 안에서 그는 쉽게 희생양이 된다. 콜먼이 학장이었던 시절에 시행했던 엄격한 직무평가로 피해를 입은 교수들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고, 콜먼을 지지했던 총장도 인종차별에 관련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린다. 자신은 두 학생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그의 항변은 대학 관계자들과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무시되고, 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명강의도 소용없이 콜먼은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를 존경하던 학생들조차도 풍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외면했고, 사건의 충격으로 인하여 콜먼의 아내 아이리스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실의에 찬 콜먼은 은둔하면서 가끔 이 소설의 화자인 ‘네이선’이라는 작가와 대화하는 것을 유일한 소일거리로 삼는다. 모든 것을 잃은 콜먼은 한 여자를 사귀게 된다. 그녀는 아테나 대학의 청소부인 여자 포니아 팔리였다. 콜먼은 유일한 친구인 작가 ‘네이선’에게 인생의 말년에 시작된 포니아와의 사랑을 털어놓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일흔 한 살 된 노인과 같이한다는 게 자네에겐 어떤 거지?’ 그러면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해. ‘일흔 한 살 된 누군가가 어디가 어때서요. 이제 굳어질 대로 굳어져 변할 일이라곤 없어 좋은데.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잖아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 일도 없고.” “그 여자 분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현명해졌답니까?”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해서겠지. 삼십사 년 동안 무자비할 정도로 놀랄 일만 당하다보니 그런 지혜가 생겼을 거야. (중략) 이 여자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내내 삶이 자신을 짓밟아 뭉개려 드는 경우만 겪고 살아왔어. 이 여자에게 배움이라는 건 모두 그런 삶에서 얻어진 걸세.” (1권 57쪽) 아테나 대학의 교수와 청소부의 연애는 마치 대통령 클린턴과 백악관 직원 르윈스키의 스캔들처럼 세간의 주목을 받기 쉬웠지만 콜먼이 대학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둘은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자비할 정도로 놀랄 일”만 당하면서 살아왔던 포니아의 과거가 둘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무작정 집을 나온 포니아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레스터와 결혼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전쟁 후유증을 앓는 레스터는 끊임없이 그녀를 학대했고 포니아는 다른 남자를 만나 그 생활을 끝내려다가 불이 난 집에 자식들을 방치하고 만다. 모든 것을 잃은 노교수와 자식을 잃고 전쟁 후유증을 앓는 전남편에게 쫓기는 여자의 사랑은 위태롭기만 하다. 2. 개인의 얼룩과 강요된 재앙 콜먼과 포니아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대화를 나눴고, 콜먼은 네이선에게 그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소설은 두 사람의 과거(동시에 미국의 과거)로 진입한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콜먼은 이스트오렌지 고교의 권투 유망주이면서 수재였다. 부모님은 그런 콜먼을 만류하지만 콜먼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에 염증을 느끼면서 생긴 분노를 권투로 달래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의대 공부를 하길 바라는 부모의 뜻대로 콜먼은 흑인들이 주로 진학하는 하워드 대학에 진학하지만 뿌리 깊은 열등감을 달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워드 대학의 대다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흑인이었다. (콜먼 역시 ‘spooks’였던 것이다!) 콜먼은 흑인이었지만 부모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피부색이 그리 검지 않았고, 유대인이나 혼혈 백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1944년, 막바지에 이른 전쟁에 참전하려고 자원입대하는 과정에서 콜먼은 입대서류의 인종란에 자신을 백인으로 기입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콜먼은 ‘제대 군인 원호법’을 이용해서 뉴욕대에 등록하고 백인행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인정받은 경력을 활용해서 콜먼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한다. 뉴욕대에 재학하는 동안 늘 가서 죽치던 카페에서 자신이 알고 지내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처음부터 유태인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콜먼은 몇 해째 유태인으로 살아가는 걸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있었다. (1권, 241쪽) 모든 강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쾌활한 콜먼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서서히 흑인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멀어진다. 대학 시절 콜먼은 덴마크 이주민 출신의 아름다운 백인 여성 스티나와 절실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콜먼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떠나고 만다. 스티나와의 이별 이후 콜먼은 더욱 자신의 출신을 감추며 가족들과의 인연도 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형과 누이동생은 그를 부르지 않았고, 콜먼 역시 자신의 출신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고향을 찾지 않았다. 질펀한 섹스가 끝난 침대 위에서, 그리고 친구 네이선과의 술자리에서 콜먼은 ‘spooks’임을 감추고 지냈던 자신의 과거 -‘얼룩(stain)’-를 고백한다. 포니아 역시 계부와 남편의 학대, 그리고 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벌인 외도를 고백하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각자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음을 열어갈수록 그들은 고립되었다. 포니아의 남편 레스터는 베트남전 참전병사를 홀대하며 정신병자 취급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포니아에 대한 증오를 떨치지 못한다. 레스터는 계속 포니아와 콜먼의 주변을 맴돌고, 콜먼의 후배 여교수인 델핀 루는 콜먼에 대한 병리적인 열정에 휩싸인 채 콜먼에 대한 음해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콜먼과 포니아는 레스터에 의해서 교통사고로 위장된 채 살해당한다. 콜먼과 포니아는 죽어서도 자신들에게 찍힌 낙인을 끝내 벗지 못했다. 속물 교양으로 무장된 콜먼의 후배교수 델핀 루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장례식에서도 자신들이 오해와 억측, 과장된 소문이 두 사람을 벼랑으로 몰아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꼬리표가 곧 동기다. 꼬리표가 곧 증거다. 꼬리표가 곧 논리다. 왜 콜먼 실크가 이런 행동을 했나? 그는 x이기 때문에, 그는 y이기 때문에, 그는 두 가지 모두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인종차별주의자, 이제는 여성 혐오자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을 처리할 때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리는 게 예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이지만, 이 세기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상처받기 쉬운 한 학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악의적인 인종차별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이미 스스로 증명한 남자가 저지른 여성 혐오 행위. 그거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것과 광증을 들이대기만 하면 말이다. (2권, 163쪽) 자신이 인종만 밝혔더라도 대부분의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콜먼은 자신의 오점(흑인)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콜먼의 친구이자 소설의 화자인 네이선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레스터와 마주하지만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쓸 소설의 제목을 말하고 돌아선다. 네이선이 말한 소설의 제목은 바로 ‘인간의 오점(Human Stain)’이다. 3.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닮는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기 조상들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닮는다. 『휴먼 스테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얼룩을 지닌 채 허덕이지만 개인의 얼룩(오점)들은 미국 사회가 앓았던 상처를 반영한다. 콜먼이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은 아직도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잠재된 폭탄’인 인종차별을 겨냥하고 있다. 광기에 휩싸인 채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레스터의 모습은 ‘애국’과 ‘자유’라는 명목으로 지금도 계속되는 미국의 전쟁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폭로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과 대비되는 콜먼과 포니아의 모습, 그리고 어이없는 콜먼의 몰락은, 타인을 낙인찍으며 즐기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미국인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콜먼의 몰락과 함께 각 인물들의 과거로 진입하면서 미국의 민낯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다. 타인의 오점을 가십거리로 소비하고 낙인찍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득한 이 소설은 1998년의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2013년의 대한민국에 더 들어맞지 않은가. 매카시즘이 팽배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필립 로스의 다른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13) 역시 2013년의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고 창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우익 사이트에서 맹목적인 증오를 표출하며 낄낄거리는 자들의 행태와 국가정보기관이 앞장서서 벌이는 ‘종북’ 낙인찍기가 그러하며 각 진영으로 분열된 채 비난과 자기 합리화에 몰두하는 자들은 필립 로스의 소설이 국경을 넘게 만든다. 지금 그들 중 몇 명을 지목하여 각자의 삶과 거기에 내재된 ‘얼룩’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수많은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니까 대한민국 버전의 ‘휴먼스테인’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숱한 논쟁들과 낙인찍기는 개인의 오점과 시대의 균열을 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비참과 대결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는 지금도 타인의 상처를 즐기면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사랑과 증오는 천박한 호기심을 매개로 교묘하게 착종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을 즐기면서 섹스에 얽힌 농담을 내뱉으면서도 자신들은 도덕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1998년의 미국인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은 까뮈의 전언과도 겹쳐진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중략) 오직 자기 자신만을 관조할 뿐인 인간은 그 자신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을 의식한다. 인간은 혼자서 그 자유 속에 감금되어 있다”(샤르트르의 「벽」에 대한 서문) 부기) 한 순간의 실수로 파국을 맞이하는 콜먼 교수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그의 장례식에서조차 자신을 합리화하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델피 루 교수의 내면을 마주하면서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상황과 언어를 바꾸면 콜먼의 몰락은 소설이 아니라 내게 닥친 현실과 조금 닮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글을 적는 도중 자본론을 강의하는 어느 대학의 강사를, 학생이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기시감은 더욱 짙어졌다) 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오점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시대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제어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http://www.youtube.com/watch?v=3svtbFSvZvA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2003년 로버트 벤슨 감독에 의해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앤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이 각각 콜먼 교수와 포니아로 열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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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의 행동,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누군가를 감히 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누군가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이고, 남들이 모르는 것을 그와 단둘이서만 공유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타자는 타자일 뿐이다. 관찰자라는 이름의 제3자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 단순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표현을 조금 바꿔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정답은 없겠지만,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해본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이지만, 아쉽게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마치 그 누군가의 행동 하나를 보고, 그의 모든 것이 그러하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결론지어버리는 것이 나이고, 당신이고,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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