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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겐 한개 이상의 가면이 있기 마련이다. 부끄럽고 약한부분을 가리고 순간순간의 분위기에 맞춰 써야할 가면들이 그것이다. 결국 자신을 가려줄뿐임을 알지만,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것도 인간이다. '가면의 고백'역시 자신을 대리할 가면뒤의 진실을 거울속의 자신에게 털어놓듯이 독자들에게 고백하고 있다.
병적으로 심약했던 어린시절, 강한육체에 대한 탐욕 과 욕망, 남성스러운 땀과 화살박힌 왕자의 육체에 대한 동경들, 그리고 그 잔인함에 대한 탐닉. 또래들과 다른 독특한 정신적인 특징에 대해 고백하는 첫 부분은 태어날때의 그 장면조차 기억한다는 화자의 말에 한순간의 환상 또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특징, 그것은 급우들과 어깨동무할때 생기는 성적인 변화들과 욕구에서 느끼는데, '타고난 결함'이라 표현하며 동성적인 특성을 인정하게 된다. 여자에게 느낄수 없는 자신만의 특징에 대해 그는 '정상인'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다.
동성애를 갈구하는 본능적임 삶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정상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그는 내면적으로 많은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그때, 폭탄에 의해 죽음에 이르고 싶다는 충동을 가지게 되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해 비상발령이 떨어지면 누구보다도 빨리 대피소로 도망가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타고난 결함'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자체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자각으로 죽음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어렵다. 세계문학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대체적인 감상이다. 읽는 사람들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를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말이 정해지는 일반 소설들에 비해 주제없는 그림을 던져주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생각할지 그것은 내 몫인것 처럼.. 전무후무한 작가의 최고소설이라고 극찬하는 해설부분에서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라는 의구심만 들뿐.. 다른 사람의 서평에 동감하지 못하면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은 언제부터 생겼는지 무의미한 시간을 독서에 할애한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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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동경을 ‘나’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심리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을 구사한 회심의 미학적 개가(凱歌)이다. 마치 동성애의 고고학적 고찰인양 자신의 성장과정상 성적 발현의 특징들을 성애와 관련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곁들여 당사자인‘나’의 다수와의 다름에 따른 고통에 무심한 듯 동정과 공감을 요구할 만큼 교활하다. 이렇듯 배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성적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의 심리적 갈등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탐색한다. 이처럼 남성에게만 반응하는 소년의, 청년의 육체라는 배반된 자기 인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감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된 외연, 가면을 자기화 시킨다. 그럴수록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혐오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이 가면이 진실과 혼동을 일으키고 일면 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성도착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동류의 인간들에게 고립과 가면의 생활을 강요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형식을 띤 이 치열한 성의 심리학적 폭로는 자기변호에의 안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주류사회에 강력한 설득을 이루어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제아무리 자기 감상에 냉소를 보내지만 육체의 그 실체적 감각을 과연 영구히 배반할 수 있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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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과 풍경>을 쓴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서문에서 개인은 각자 유일한 동시에 수많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남자의 지극정성으로 빚어낸 내밀한 고백으로 읽히는 <가면의 고백>을 읽으며 어째서 나는 그 구절을 떠올렸을까. 마흔 다섯에 할복(割腹), 탐미주의의 끝, 고백문학의 진수, 죽음과 강함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동성애적 성향이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더 알아야 할 만한 것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한 작가가 가진 정치성향이나 지독한 국수주의자로서 할복자살한 일 같은 것 말이다. 작가와 작품을 어느 정도 떼어놓고 읽어야 할지 제대로된 판단이 서지 않은지 오래다. 그것만으로 작품을 멀리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내가 그가 스물 네 살에 발표한 첫 장편을 오래 전 매료되었던 <금각사>의 감동을 기대하며 읽는 일은 다소 고문후유증을 감내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달뜨게 화끈거리는 얼굴로 입으로는 미처 내뱉기 힘든 것들을 엿보는 느낌에 가까운 쾌락과 에로티즘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절반 혹은 전체의 투영이다.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로 시작되는 문장. 이 내밀한 고백은 작품 발표시점인 이십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극우성향의 급진적 민족주의 즉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중년 사내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는 체험한 것과 보고들은 것과 느낀 것으로 말한다. 타고난 퇴폐와 향락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고립의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비극을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이는 결국 비극으로 마감한다. 나는 이 세상에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음을 예감했다. 지저분한 몰골의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 저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p.18) 병약했던 그는 할머니의 과보호 아래 성장한다. 첫 문단의 '그'는 미시마 유키오이지만 이제부터 쓰려는 '그'는 가면을 쓰고 고백하는 자 '나'이다. 여섯 살의 그는 백마에 올라타 검을 높이 치켜든 잔 다르크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매료된다. 이후에 일어날 피의 부름과 살인 그리고 복수는 그를 흥분케 한다. 강함과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이후로도 계속 되는데 유년시절에서 학창시절까지 내내 덴카쓰와 클레오파트라, 동화와 신화 속에서 비극적 운명에 놓인 왕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자신이 전사하거나 살해당하는 장면을 공상하며 몸을 떤다. 이 명료한 모순을 이해하는 자는 많지 않다.
구이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러니까 <가면의 고백>은 태어날 때부터 보았다는 그의 기억에 의존해 남달리 예민하고 까칠하며 도도하고 시크한 소년과 청년을 묘사해가는 소설이다. 초기의 기억은 열세 살의 그를 찾아온 호기심이자 사랑 아니면 욕구였다. 그에게 세 가지는 모두 동일한 현상으로 여겨졌는데 훗날까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동성애와 나르시시즘 성향의 탐미주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피투성이 장면이나 배를 가른 사무라이, 가슴팍으로 피를 흘리는 군인, 탄탄한 근육의 스모 선수를 다룬 그림이나 사진 속에서 느끼는 윤락의 감각과 희열, 동경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느 날 구이도 레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도를 본 후 더 팽팽한 고통과 환희를 느낀다. 그의 고백은 점차 처음의 수치를 잊는다. 가면을 쓴 소년은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을 듯한 남자가 가면 뒤에서 속삭인 어린시절의 고백이 강렬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열광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살아있음의 궁극적 고통. 실존의 극단적 탐미와 웅숭깊은 자기애. 그리고 반란과 파멸의 충동을 오가는 극도의 불안. 이 모든 것이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한때를 불러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을 송곳처럼 찔러대는 유일한 시련은 자기 자신이었다. 조금 더 큰 어른이 되어서 읽는 탐미주의는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바늘에 찔린 듯한 통증과 역한 피비린내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확실히 나는 처음 미시마 유키오를 만났을 때 그를 제대로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내 안의 악마적 충동을 부추기고 자극을 활성화시키며 공포스런 공상을 요구한다. 싫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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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본명 하라오카 기미타케. '금각사'의 저자. 극우파 민족주의자. 원자폭탄 두 방에 가까스로 제 정신을 차린 일본을 다시금 폭력의 핏물 속에 빠뜨리기 위해 안달하다 스스로 배를 갈라 새빨간 선혈로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신병자. 난 이 사람이 싫다. 우파를 증오하니까. 그냥 우파만해도 치가 떨리는데, 극우파라니. 이런 남자가 쓰는 소설은 그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아무런 의미없는 구둣점조차 심기를 거스를게 분명하다. 세상에, 극우파의 소설이라니! 그럼 왜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펼쳐 들었나? 싫어하려면 그 만큼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유치한 집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미시마 유키오, 고작 31세에 문학 인생의 절정을 맞은 천재, 당대 최고의 소설가. '금각사'라는 이름은, 그래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보았지.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정치적 견해 때문에 하나의 기념비가 될 수도 있는 문학을 놓쳐 버릴 수는 없어. 나는 그 정도로 참을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 궁금해 미칠 지경,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사람들은 이 정신병자에게 그토록 환호하는가. 나는 이런 호기심에 걸려든 평범한 독자인거야. 그리하여 펼쳐든 작품이 바로 이 '가면의 고백'. 첫 장을 읽는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의외였다. 이 소설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자전에 가깝도록 써낸 소설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묘사되는 소년은 미시마 유키오 자신일 것이다. 그런데 글 속에 근육질의 일본도를 든 극우 꼴통의 중년 아저씨는 없었다. 허약하고 창백한, 말라 비틀어진 소년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가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소년의 옆을 지키는 빚쟁이였던 것 같다.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허무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찬미를, 이 병약한 소년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죽음을 사랑했다. 총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지는 병사를, 뜨거운 장작 위에서 갈기 갈기 태워져버리고 마는 잔다르크를, 소년은 사랑했다. 죽음에 대한 찬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과 비례한다. 무서운건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주머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다. 더럽고 무례하고 혐오스러운건 고통이다. 소년은 고통이라는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고 죽음을 찾아 떠나는 탐험가다. 끝없이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긱이다. 고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에겐 죽음이 황홀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은 끝내 고통의 열매를 얻지는 못했다. 삶이 지속되자 그는 남성을 욕망했다. 그것은 아마 강함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허약한 자신에 대한 증오가 커질수록 덩달아 커지는 생명력에의 갈망. 그것은 사춘기 소년에게 남성을 사랑할 기회를 안겨줬다. 또래의 친구들이 나체의 여자를 떠올리며 은밀한 습관을 문지를 때, 소년은 벌거벗은 남성의 육체를 상상하며 자위했다. 죽음과 비정상적 사랑의 근처에서 우물쭈물하다 소년은 성인이 되었다. 그 때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너는 20세에 죽을거야'라는 말에 당혹감보다는 우쭐한 쾌감에 젖었던 청년은 막상 그것과 마주하고 나자 공포에 몸을 떤다. 공습 경보가 울리면 누구보다도 빨리 방공호로 대피했던 것이다. 모든게 정상이 되가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청년에겐 사랑하는 '것 같은 여자'까지 생겼다. 청년은 여자와 함께 잔디밭에 앉아 키스를 나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청년에 따르면, 임시로 고용해 몸에 달고 있었던 '정상성'이 키스 후에 찾아온 무감각과 서글픔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던 것이다. 여자는 결혼을 원했다. 청년은 정중히 거절했다.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말에서도 드러나듯 이것은 엄연히 소설이다. 가면의 고백에 쏟아지는 모든 고백들이 미시마 유키오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생각해선 안되는 것이다. 소설은 허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각한다면 소설은 허구이기에 그 속에 과감한 고백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대부분의 소설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 고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257p, 해설 중) 나는 이 소설을 미시마 유키오의 고해성사로 받아 들이고자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구하려 했던 것 같다.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그래 그 새로운 출발을 위해 미시마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가 단단히 뿌리 내리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없다. 그러니 작가라는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그가 행할 수 있는 일은 과감히 자기를 고백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p.s - 미시마 유키오의 예술 세계는 이후의 작품을 더 탐독하고 나서야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문장 만큼은 아니다. 그 위력은 '가면의 고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눈 앞의 글자가 그대로 향기가 되어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것처럼 황홀한 언어의 춤. 굳이 소설로 묶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문장 하나하나가 각각의 문학 작품이 될 수도 있을 정도다. 이 정도의 경지를 24살에 보여줬다니. 천재적 예술성이란, 어쩌면 죽음을 껴안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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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가면의 고백이다. 다른 번역에 어쩌다보니 3권째 읽은 가면의 고백. 매번 소설이라기 보다는 주인공이 작가님인 것 같은 생각으로 읽은 것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매번 그런 느낌을 받는 소설이다. 금각사보다 가면의 고백을 먼저 읽은 것이 행운이었던 것같다. 금각사를 먼저 읽었다면 가면의 고백을 읽지 않았을 테니.. 소설은 커피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것같다. 대다수의 독자들이 좋아하는 혹은 선호하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혹은 그 반대도 존재 할 테니.. 리뷰는 참고만 하시고 개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마치 내가 가면의 고백은 좋아하지만 금각사는 안 좋아하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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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번째, “가면의 고백”은 일본의 심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전업작가로써 처음 발행한 책으로, 일본이 패전하고 약 4년후인 1949에 발간된 책이다. “가면의 고백”은 반자전적인 소설이며 소설내의 서사가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다는 것을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책이 발간된 해와 그의 연보 드리고 동양적인 정서를 생각해보면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자기파괴적인 심리묘사와 자가 정신분석에 가까울 정도의 치밀한 서사들이 당대의 일본 문학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거짓말 같은 사실을 사실이 아닌 듯 거짓말 같이 쓴 소설이라고 할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모호하지만 픽션인지 사실인지는 소설의 중반부가 넘어가면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혹은 이미 무너진 것 같은 주인공의 자아가 모순에 모순을 낳는 연상 그리고 부정을 부정하는 모순의 반복으로 끊임없이 그를 따라가 보려는 독자를 괴롭힌다.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추리소설 같은 집요한 두뇌 회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요하는 집요함이 묻어 나는 소설인데, 이는 그처럼 집요한 사람들을 겨냥한 치밀한 플롯에서 나온 것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감춰진 비극이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여러 개씩 가질 수 있는데 대부분 그 비극 앞에 자기만의 가면을 내세우고 가면 뒤에 꼭꼭 숨겨두어 생채기를 내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생채기로 인해 가면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이고 어느 것이 가면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는 체 말이다. 이러한 가면을 모두 벗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자각이 우리의 맨 얼굴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노력을 꾸려가는 것이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사는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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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라고는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나는 ‘거짓말’을 방목했다. 원하는 곳에서 그 거짓말들이 풀을 먹게끔 했다. 그러면 거짓말들은 만복이 되어 ‘진실’의 밭을 헤집지 않게 된다. 같은 의미로,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 살집이 달린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다.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실격'을 상당히 재미나게, 감명깊게 읽은 터라 인간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를 알아보던중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되었다. 유미주의적 작품세계와 더불어 할복 자살로 마무리된 미시마의 최후. 내가 읽은 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를 말하는데 있어서 빼놓으면 안될 작품이라 하겠다. 제목만 보고 예상한 내용은 자기 혐오와 비하로 점철된 내용이었는데 오히려 다르다. 어떻게 보면 광기어리다고 할 수 있을정도의 자기 긍정과 자기애. 확실히 '보편적인 일반인'과는 다른 작가의 모습을 알게 한다.
작중내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성향은 미시마 유키오의 생애 전체로 미루어보건데 오히려 '강한 남성성'에의 동경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당히 일그러진채로 묘사됬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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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야 유키오의 작품은 선배가 권해서 읽어준 금각사 이후에 두번째군요. 미학에 대한 집착이 느껴지는 문체의 시작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사물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느낌 혹은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보면서 과연 '뛰어남'이 무엇인가를 확인시켜주는 듯 합니다. 책의 만듦새도 매우 훌륭합니다. 포토샵으로 그린 듯한 앞표지의 그림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활자나 제본 상태 모두 훌륭합니다. 내용에 빠져들고 내용 또한 길지 않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오랜만의 문화적 충격을 경험합니다. 작가가 살아간 길이 그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천재의 길이란 범인의 눈으로 볼 때는 안타까움이 더 많은 것일까요. 전공투나 자위대, 극우파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접해도 좋을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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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금각사>로 유명한 작가다. 일본 근대문학에서 꽤 비중있는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가면의 고백>이 출간되어서 망설일 것도 없이 읽게 되었다. (그 전집에 참 좋은 작품이 많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나벨 리 싸늘하게 죽다> 등, 일본문학의 중요한 작품들을 꽤 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주인공인 '나'는 다름아닌 미시마 유키오 자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연보에 등장한 여러 사건들이 소설 안에도 등장하며, 그가 어린 시절부터 어떠한 생각을 했고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나이를 먹어서는 어땠는지, 20대 초중반까지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성애적 성향을 성장과정 및 주변환경과 결부시켜 논리적으로 피력한 것 자체가 당시의 일본 문단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는 라틴어 단어 역시 흥미롭다. 일본어로 썼으면 추잡하게 보일수도 있는 단어들인데, 라틴어로 적으니 학술적인 느낌이 든다.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에의 매혹이나 연상의 동급생의 육체를 보고 느낀 것, 그리고 살해당하는 왕자나 미소년 등의 잔혹한 공상 등 꽤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를 그는 담담하게 적어나가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생활이 적혀 있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완전한 고백의 픽션을 만들려 했다.'라는, 노트에서의 미시마의 말은 <가면의 고백>에서의 괴로운 묘사들을 통하여 완성된다. <금각사>와는 또 다른, 비유적인 레토릭이 인상깊었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슬픔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또한 이 작품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1970년 45세의 나이로 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하며 자위대 총감실에서 할복자살을 한 것이 씁쓸하고 착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미시마 유키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약간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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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책장에 꽂혀있던 책 <가면의 고백> ![]() 책은 비교적 얇은 편인데, 선뜻 읽으려는 마음이 들지 않던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