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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yes24.com/document/7212626>을 읽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작했던 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문학작품들을 따로 읽어 인용구절을 포함해서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기 덧붙여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프루스트의 화가들>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작에 비하여 뒤늦게 읽기에 나선 것은 아무래도 미술에 대한 저의 앎이 부족한 탓에 이유가 있습니다.
유예진교수님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목적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화가들 중 비중의 중요도에 따라 선정된 15명과 그들의 특정한 그림들을 대하는 마르셀의 시선을 분석함으로써 프루스트의 소설을 새로운 방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4쪽)”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 속의 마르셀의 성장과정에 따라 구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단순하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미술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의 작품세계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같이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모두 100여 명의 실제 예술가와 200여 점의 실제 작품이 언급된다는 것도 출판사의 소개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프루스트가 창조한 화가 엘스티르를 포함한 15명의 작품세계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화가와 그들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악, 문학, 건축, 연극 등의 나머지 예술분야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화가 엘스티르를 주인공 마르셀을 예술의 세계로 안내하는 스승으로 선택한 것은 프루스트가 ‘보는 것’과 ‘시선’의 중요성을 일찍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나는 작가는 <나사의 회전>과 <여인의 초상>의 작가 헨리 제임스가 생각납니다. 오르한 파묵에 따르면 프루스트가 ‘나의 소설은 그림이다’라고 했다면 헨리 제임스는 ‘내 이야기를 본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프루스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20여권에 달하는 의학서적을 출간한 아버지가 프루스트에게 지적 자극을 주었다면 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어머니는 프루스트의 문학적 취향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의 소년시절을 담은 「스완네 쪽으로」를 보면 어린 마르셀이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본 할머니가 밖에 나가 산책을 하도록 했던 것처럼 프루스트의 어머니 역시 오랜 시간 독서를 하는 아들을 억지로 방에서 내보내거나 서재의 램프 불을 끄곤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프루스트는 평생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자전소설 <장 상퇴유>와 비평서 <생트 뵈브에 반박하여>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예진교수님은 <프루스트의 화가들>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5명의 화가의 작품세계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해당 작품들을 컬러로 싣고 있어 설명한 내용을 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해당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을 밝혀놓고 있어 뒷날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감상해보려 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나 <프루스트의 화가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많고, 소개되었더라도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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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더 이상은 프루스트를 읽지 말아야겠다고... 아니, 읽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빙허를 볼 수 없음에 애통하였던 근원의 마음과같아...터져 나오는 슬픔을 꾹꾹 눌러담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마지막 글을...아주 짧게 하지만 비장하게 써내려간 후, 나는 무언가를 다짐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향기도 없었겠지. 한 권을 마치고, 이 책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 이 책을 알았더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은 더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전의 독서가 오로지 어떤 책을 읽었다,는 자체에 목적을 두는 맹목적 행위였다 생각함으로, 한 권 한 권에 깨알같은 재미를 느끼는 바로 지금이 이 책을 읽기 최적의 순간이 아닐까.
이 책은 예전부터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카트에 담아두기만 했었다. 골치 아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책을 읽거나 그림을 좋아하는 내마음이 그게 과연 내 마음인지, 다른 사람의 마음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마저도 그 즈음의 혼란이 아니였을까.
책장을 열면 화가들의 이야기만 나오는게 아니라, 그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전반적으로 요약하는 듯하여...예전에 읽었던 그 느낌을 되살릴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책속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의 묘사에 대해서, '아..바로 이 그림이였구나'하는 즐거움...또, 등장인물들이 이러이러하게 묘사되었었구나 하는 생각들...독서하면서 참 즐거웠다. 거기에다 예술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프루스트의 어떤 면모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고나서도 뭘 읽었는지 잘 모르겠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종합정리본(?) 같은 책을 통해서 정리가 잘 되니, 이 무슨 신기한 경험이람...)
또, 책 뒷부분에 삽입되어 있는 앙드레지드와 푸르스트가 주고받은 편지글들 보는 재미도 쏠쏠했던 것 같고.
회사다니면서 애들키우느라 여념이 없는 누나가 요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다. 일단 열화당에서 나온 만화책을 가져다 주기로 했는데, 무엇보다도...글로 따라잡기 어려운 줄거리들이나, 그 즈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도 줘야겠다. 프루스트를 사랑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 같다. 덧붙여, 그리고, 올해 상반기에 읽은 책의 Top3안에 이 책을 꼽겠다.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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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대체 이러한 묘사와 비유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많은 부분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예술역량을 쌓아갔는지, 특히나 프루스트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까지 그리곤 마침내 완성하기까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회화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조차 명화(名畵)속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라든가, 많은 소재들 또한 그림에서 차용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호하게 여겨졌던 많은 구절들이 절로 선명해진다. 더구나 화자(話者)인‘마르셀’에게 예술적 영감은 물론 작가로서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 인상파 화가 ‘엘스티르’가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마네’등의 이론이 혼합되어 구축된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마르셀의 예술론에 대한 지향점을 보다 명료하게 확인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무엇보다 제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를 펼치면 뒤죽박죽의 기억이 두서없이 전개되고 지루하게 긴 문장과 일관된 서사도 없어 아예 2권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질려버릴 정도로 곤혹스러운 독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 이 작품의 출간을 모든 출판사들이 거절하여 자비로 출판한 것이나, 출간되자마자 ‘개인적 인상의 나열이자 고작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예술과는 동떨어진 아무것도 아닌 시간 남아도는 사람들이 정말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 혹독한 비평처럼 낭패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권 「게르망트 쪽으로」,제4권「소돔과 고모라」등으로 이어지면 제법 사건같은 것이 발생해서 흥미를 만들기는 하지만 역시 여느 기성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과 내용 탓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제1권을 출간한 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머리로 사고해서 쓴 것이 아니라 책에 언급되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저의 감수성에 의해 느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오감에 의해 촉발된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어느 하나 극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기억들이 아닌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 1권의 제목이기도 한‘스완’은 어린‘마르셀’에게 최초로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는 인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바로 인상파 화가‘르누아르’의 잘 알려진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유별나게 검은 정장을 하고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 당시 유명 미술잡지인 <가제트 데 보자르>의 편집장이자 미술수집가인‘샤를 에르퓌시’로, 르누아르가 자신의 후원자인 그에 대한 예의로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실존인물과 소설 속 허구인물은 이름만 다를 뿐, 유대인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것 하고, 그 자신은 단지 예술의 감상자로서 진정한 예술가가 되지못한‘예술 미혼자’로 남는 것은 소설 그대로이다. 또한 스완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엉뚱하게도 ‘보티첼리’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인 <모세의 삶>에 그려진 양치기의 딸‘시포라’의 표정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오데트’의 이미지나, 그녀의 동성애나 창부로서의 기질 등이‘바토’가 그린 한 쌍의 그림인 <무관심>과 <소녀>에서 차용되는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나 회화작품이 인물의 성격과 창조에만 차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진정한 주제와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의 외형적인 측면인 서사적 주제는 진정한 소설가로서 신을 갖기까지의‘마르셀’에 대한 성장기로서 예술적 자기 능력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그리곤 사랑과 예술의 열정 사이에서의 갈등, 마침내 일상적 소박함과 평범함에서조차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적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은 바로 무수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은유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거대한 예술의 도시 베네치아는 도시 자체가 회화가 되어 예술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특히 “샤르댕, 베르메르, 램브란트”는 거의 절대적인 이상이 된다. 이들은 바로 “사물에서 초시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 낸”사람들이며, 내재적 측면으로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이 “시간의 공간화, 즉 소설이라는 정해진 틀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한다. 즉 소설 속 인상주의 화가 ‘엘스티르’로 대변되는 프루스트의 인상주의적 시선으로 “영혼의 안식처”는 ‘잃어버린 시간’이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삶이 모험으로 가득 차 있지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극적인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지향은 항상 의기소침하고 회의적인 것과의 갈등이었기에 마침내 하찮은 소재인 정물들을 그린 ‘샤르댕’의 그림은 소재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며, ‘베르메르’의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덧칠에 덧칠을 하고 여러 겹을 입혀 완성한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자신의 소설이 “다양한 원고 조각을 이어서 만든 수정에 수정을 가하여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해야 하는 작품”이 되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비의도적인 기억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회화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해는 실로 상당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프루스트가 소설가,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궁극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되는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작가가 있다.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인데, 그의 저술 중 『아미앵의 성서』와 『참께와 백합』이라는 두 권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추를 이루는 화가, 소설가들과 그들의 그림과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소설의 흐름과 인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례가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루스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적취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 회화에 녹아있는지도 발견하게 된다. ‘프루스트와 회화’에 대한 이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저술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해하는데 더 할 수 없는 긴요한 참고가 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 권의 책이 프루스트를 해설하는 여느 백 권의 책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덮어두었던 제5권 「갇힌 여인」을 다시 펴들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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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프루스트의 화가들'을 읽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상당히 많은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언급된다. 때때로 그 작품들은 여러 작품들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고 실체가 아닌 상상 속의 것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대다수의 언급들은 실제로 구체적인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작품들과 화가들을 소개하고 그 내용들을 통해 마르셀의 감정, 그리고 그의 예술에 대한 사고들을 풀이한 책이다. 지오토, 벨리니, 휘슬러, 바토, 모로, 마네, 러스킨, 베로네제, 카르파초, 샤르댕, 베르메르, 렘브란트, 그리고 가상의 인물 엘스티르까지 많은 화가들과 그 작품들을 소설의 전개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극 속 화자인 마르셀의 사고와 느낌, 예술관의 변천등을 빼놓지 않는다.
솔직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는 내내 저자의 박학한 예술 관련 지식으로 인해 가끔 이미지의 충돌이 일어나는 책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작품의 이미지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리고 그 작품 속에서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연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흐릿한 이미지 속에서 책을 읽으며 과연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이 내가 떠올린 작품이 맞는가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었고 내 짧은 미술관련 지식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 덕에 책을 읽는 것은 수없는 이미지와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에서 나는 아주 흐릿하거나 모호함, 손에 잡힐듯 하나 잡히지 않는 것들만을 얻곤 했었다. 솔직히 말해 계속해서 등장하는 화가들과 작품들은 인상파의 그림이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식으로 표현되듯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읽을 때마다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을 때로는 아주 다른 것들을 선사했었다.
가장 최근에 시도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첫 두 권만 읽고 그 후속편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앞으로 계속 출간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면 가끔씩 이 책의 그림들을 찾아보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부족한 예술적 소양으로 인해 책장을 넘기면서 그것들을 잘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도 한계는 있다. 그것은 책의 한계이다. 인쇄된 그림은 전시된 실물을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으로 덧입히기도 힘든 것이 인쇄된 그림과 실재하는 그림의 차이이기에 그저 그림들을 통해 전개되는 주인공의 예술적 사고와 분석, 그리고 주인공 자아의 발견과 그 내면의 의식흐름을 비슷하게나마 따라가 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책이 없다면 책을 읽다가 일일이 도록을 뒤지거나 검색을 해야하니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매우 반가운 안내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