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찰 : 하루키의 소설. 매력적이다. 이상적이다. 진지하다. 흥미롭다.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해가 불가능하다. 아이러니다. 하루키 작품속의 인물들은 언제나 진지하고도 이성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언제나 비현실적 또는 이상적인 것이다. 이런 소설 속 인물의 대화에서 독자는 나른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된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타고 올라올 동아줄 하나쯤은 마련하는게 좋을터다. 접근 : 스푸트니크의 연인. 물어보지 않아도 하루키의 소설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명함을 여기저기서 들이민다. 언제나 진지하며 막힘 없는 생각과 언변의 소유자인 `나`와, 정상적이지만 비정상적인, 이성적이지만 이상적인, 그리고 결코 연인이 될 수 없는 여자친구 `스미레`. 거기에 자기 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린 중년의 여성 뮤. 모두가 하루키식 제조법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이다. 접촉 : 스미레는 동성애자다. 뭐 그렇다고 거부감 느낄건 없다. 그녀는 연상의 같은 여자, 동성인 뮤를 사랑한다.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그 사랑에 집착한다. 뮤 역시 스미레를 좋아한다. 단 이성적인 감정은 없다. 당연하다. 일단 그들은 동성이니까. 하지만 뮤는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뒤로,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감정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좀처럼 가지기 힘들다. 그 미묘하고 복잡한 사이 `나`는 파고들 자리가 없다. 이대로 끝나 버리는가 보다. 대화 : 기호와 상징의 차이가 뭐야? 어느날 나에게 문득 던진 스미레의 질문. 새벽 3시. 질문에 화답을 던진뒤 잠으로 기어들어간다. 후에 다시 만나게 된 스미레. 그녀는 스미레지만 겉은 또 다른 스미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열 : 어느날 스미레는 뮤의 반쪽, 또 다른 뮤가 있는 그 이상적인 세계로 떠나 버린다. 그리스의 한 외딴 섬에서, 뮤가 자신의 반을 소리없이 잃어버리듯 스미레도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스미레를 찾아 나선 `나`, `나` 역시 `나`와의 일탈을 경험하며 과연 내가 위치하고 있는 그 자리가 어딘지에 당황하게 된다. 뮤가 자기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 존재하는 완전체인 나. 존재하는 자아와 존재스럽지 못한 자아.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해체 : 모두가 자기자신을 되찾기 위한 궤도에 끊임없이 진입한다. 결국 스미레는 또 다른 뮤와 조우를 했을까.. 마지막의 스미레는 진정 스미레인가.. `나`가 존재하는 이 세상. 이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존재의 의미를 지닐까. 그리고 현실계게의 나도 과연 진정한 나로써의 의미를 지닐까? 소멸 : 사람이 맞으면 피를 흘린다. 당연한 이치, 당연한 논리와 같이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나, 그 당연한 나를 찾기 위한 당연한 세상의 조건들은 비박스럽다. 오로지 한 길은 영원한 꿈을 꾸는 것. 하지만 영원한 꿈을 꾸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현실성과 자아와는 대립의 관계에 있었던가.... 흔적 : 스푸트니크의 연인, 자아를 찾기 위한, 나의 자아와 그들만의 자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스푸트니크처럼 외로이 자기만의 소우주를 떠다니는 우리의 자아들. 그 외로운 행로 속에 잠시 궤도를 같이 하는 다른 스푸트니크의 자아를 우리는 인연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소 어렵다. 그저 흐름의 길모퉁이를 터벅터벅 걸어다니기에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대화 하나하나에 다소 많은 이해의 신경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역시 하루키스럽다. 하루키 팬들에게는 하루키스러움이 가장 큰 요구사항일터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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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우리는 주변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하여 '그는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그의 판단을 영민한 감각으로 오인하여 부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는 그런 일들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나 지적 오만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를 접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기껏해야 단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마치 그 작가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떠벌리는 그런 경우지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위가 아니라 사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직감이나 추론에서 비롯된 작가에 대한 일차 평가를 나는 그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을 읽을 때에도 똑 같이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선입견으로 굳어지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독자가 무심히 내렸던 평가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내 것인 양 그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그 중에는 하루키에 대한 선망이나 경외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경멸이나 근거 없는 부정에서 비롯된 것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 근거를 파고들면 확증할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한 측면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저는 그동안 국내에 번역된 하루키 작품의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는 수필집도 더러 섞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소설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하루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문학적 깊이가 없이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이라던가, 성적인 묘사를 위주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는 선정성이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죠.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 전반에 흐르는 놀라운 상상력과 사고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그에 반비례하여 상상력은 고갈되게 마련인데 예순을 넘긴 그가 아직도 젊은 작가의 상상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읽었던 책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습니다. 소설 전체를 이루는 이야기의 뼈대는 비교적 간결합니다. 스미레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사랑과, 17세 연상인 뮤에 대한 스미레의 일방적인 사랑이 서로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나'와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 작가를 꿈꾸는 스미레,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뮤'가 등장합니다. '나'는 스미레를 이성으로 좋아하지만 스미레는 '나'를 동성 친구처럼 편하게 대합니다. 어느 날 스미레는 한국계 일본인인 '뮤'의 제안을 받고 그녀의 비서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같은 여자인 '뮤'를 사랑하는 스미레는 이제 소설을 쓰지 않고 오직 '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자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을 느낄 수는 없다고 했다. 스미레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성욕도 느끼고 있다.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성욕을 느끼고 있다. 스미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고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익명의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복잡하다. 마치 실존주의 연극의 줄거리 같다. 모든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어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p.169)
유학 시절에 마음에도 없는 성적 체험을 한 '뮤'는 그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 유부녀인 '뮤'는 남편에게도 그렇습니다. 남편은 이미 '뮤'의 그런 사정을 알고 결혼했기 때문이었죠. 성욕이 뭔지도 모르던 스미레는 '뮤'를 만난 이후 그녀에게 급격히 이끌립니다. 스미레는 '뮤'와 동행했던 유럽 여행 도중 그리스의 한 섬에서 '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갑자기 사라집니다. 당황한 '뮤'는 '나'를 그 섬으로 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스미레는 찾지 못하고 나는 돌아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다시 교사의 업무로 복귀하고 어느 날 스미레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혼자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결국 한 명분의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외톨이로 지낸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생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외톨이로 지낸다는 건 비내리는 저녁에 커다란 강 입구에 서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 (p.263 ~ p.264)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다양한 것을 욕망합니다. 사랑도 그 중 하나이겠지요. 그러나 나와 같은 것을 욕망하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우연과 같은 기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우주를 유영하는 인공위성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서 특히 개 한 마리를 태워서 쏘아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지닌 스푸트니크는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생명을 다할 때까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무작정 도는 인공위성. 그렇다고 하여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바다에 이르는 강물처럼. 외롭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타인의 삶을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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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건줄 알고 빌려봤더니, 번역된게 99년일세~ 내용은, 뭐... '노르웨이의 숲'의 변형판 정도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고. 얼마전에 '판타스틱'에 소개된 단카이세대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분석글에 하루끼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약간의 색다른 맛이 좀 있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데카당트한 이 작가에 대해 그다지 호감은 없다. 하지만 집안에 구해진 책들이 꽤 있었기에, 그리고 술술 잘 읽히기에, 또한 스스로가 감상적이 되었을때 이입되기 쉬운 이야기들이기에 기억에는 꽤 강하게 남아있는 작가다. 노르웨이의 숲 뿐만 아니라 판타스틱한 특성을 가지는, 특히 서로다른 시공간의 오버랩이라는 모티브도 약간 살아있는 작품. 그럼에도 은근히 경험우선적인 작가의 세계관이랄까 하는 것이 담겨있다. "모든게 다 그렇지만 결국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움직이고 자기의 돈을 지불해서 배우는 거에요. 책에서 얻는 기성품 같은 지식이 아니라." 등 장인물이 지나치듯 말하는 것이었지만, 관념적인 소설에서 관념적이 고민들만 논의하다가, 결국은 관념의 극단을 치닫는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하는 성장소설, 뭐 그렇게 정의될 수 있을 듯한 이 작품에서 인상깊게 남은 대사다. |
| 하루키는 늘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일상생활에서의 결락감과, 상실, 그리고 회복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또한 그 스미레는 레즈비언으로서 뮤라는 여자의 곁을 맴돈다. 그러나 이들 셋은 결코 어느 방향으로도 합치될 수 없다. 나는 스미레가 없는데서, 또 스미레는 뮤와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절망한다. 또한 뮤는 예전에 잃어버린 자신의 반을 찾지 못하고 표류한다. 셋은 알 수 없는 결락감과 상실감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단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뿐-그토록 원하나 가질 수는 없다. 결국 주변에는 타자들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본질적인 고독이다. 하루키 역시 책 속에서 이러한 고독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혹성은 고독을 자양분으로 회전하는 것인가-하고. 그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늘, 이제부터 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은 파충류가 탈피하듯 예전의 자아에서 또 다른 자아로 변화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하루키의 소설이다. 평소 그가 즐겨 사용하는 비현실의 세계를 싫어했지만, 이 책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현실세계의 가장 효과적인 비유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고독이 완전한 본질까지 다다르지 못한 감은 있지만-인간의 고독과 상실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다. |
|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은 대부분 자전적인 소재를 다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소설들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그의 소설들이 매우 특이한 소재를 다루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으나 1인칭 시점이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3인칭 시점을 시도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이후로 자신의 세계에서 사회에 눈을 돌린 것일까? 그러나 시점이 바뀌었을 뿐, 그 기본적 얽개는 그다지 변함이 없다. 남자 주인공을 '나'로 바꾸면 그전의 소설들과 그렇게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소설들과 같이 남자 주인공은 '스미레'라는 여자 주인공을 찾아 헤멘다. 그 배경은 그리스다. 익숙한 구조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스토리를 즐기려고 그의 책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장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읽는 것이다. |
| 내가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게된건 아마 村上春樹라는 작가의 작품이기에 큰 어드벤티지를 줬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면서 읽어온 책들은 꽤 되지만 그의 작품만큼 매력적인 존재들을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나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워주는 마력적인 힘에 근거하는 것 같다. 그는 말한다. “소설이란 큰 돌이 높은 데서 툭 하고 떨어지듯 힘이 있어야 하고, 독자를 어딘가 다른 장소로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의 작품들은 새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천둥을 맞은 것처럼 강렬하고, 한낮의 siesta처럼 편안하며, 둔기로 머리를 맞아 내가아닌 타인이 된 듯 여러 가지 간접체험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는 특이하다. 그는 남들이 4년만에 졸업하는 대학을 7년만에 졸업했으며, 자신이 경영하던 jass bar(Peter cat)를 그만두고 야구관전을 하던중 외야로 시원스레 뻗어나가는 야구공을 보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등..일일이 열거할수 없는 예들로 보통의 비범을 넘어서고 있다. 비범을 넘어선 그의 사고는 그가 작품속에서 추구하는 허무주의, 레종데뜨르의 지향점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그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까지 그의 팬이게 하는 원천이다. 지금에와서 村上에 대해 새삼 말할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한두번쯤은 읽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책에 주석처럼 나열된 그의 약력을 당연한 수순처럼 읽어 나갔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어! 이사람 작품 맘에 드는걸’혹은‘뭐야~ 이 작가 미친 것 아냐’...등등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나는 그 전자에 속하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후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들의 비난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의 작품을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村上는 자신의 글과 교감하는 자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자들을 염두해 두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조물주가 남·녀라는 상반된 인류를 염두해 두고 천지를 창조 했듯이 범위의 차는 있지만 그도 그런 것이다. 여기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그렇게 염두되고 상반된 존재들의 자아상실과 발견을 큰 화두로 삼고있으며 우리를 3차원, 4차원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리고 난 후 나와 스푸트니크 위성의 상관관계는 항상 equal 임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그가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한 목적이다.그렇다면 그 초대에 한번 응해보는 것은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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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sputnik)는 러시아 말로 traveling companion이라는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이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쏘아 올린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지구의 인력만을 의지해 지구 주위를 빙빙 도는 금속 덩어리..
스미레는 22세의 봄 폭풍같은 , 회오리 바람 같은, 기념비적인 사랑를 하게 된다. 17년 연상의 , 동성인 여성을...
17년 연상의 유부녀 뮤를 사랑하게 된 스미레 스미레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우연히 어느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나게 된 뮤와 스미레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떤 타입의 소설을 좋아하냐는 뮤의 질문에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최근에는 잭 케루악을 자주 읽는 다고 대답하자 "케루악, 케루악...... 그 사람 스푸트니크로 불린 사람 아니가요?" 이렇게 그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그후 뮤의 일을 도와 같이 일을 하게 된 스미레 업무차 간 유럽출장 도중 그리스의 한 섬에서 스미레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급히 연락을 받고 뛰어간 화자인 나 거기서 스미레의 일기장와 글이 담긴 디스크 한장을 발견한다.
스미레와 뮤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나 뮤는 자기와 스미레를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에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하루키의 소설중 익숙하지 않는 책의 제목이었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에서 여자에게 걸려올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추전하고 싶다고 했다. 최근의 책은 아닌 듯 하고 인터넷 서점에도 일시 절판이었고 우연히 동네 서점에 외로히 꽂혀있는 책을 발견했다 시험공부 하면서 공부하는 아들래미에게 "엄마도 책 읽으면서 안 잘 테니, 너도 좀 더 공부하거라" 하면서 시작했는데 아들래미는 먼저 잠들고 나는 책을 중간에 덮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의 화자인 '나'가 스미레의 시도 때도 없이 아무때나 걸려오던 전화를 그녀가 사라진 후 계속해서 기다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하루키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 원인과 결과. 육체와 정신, 선과 악 대립되는 것들이지만 하나의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우리의 내면.. 그것들중 무엇이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많은 모습으로 우리를 비춰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에은 안과밖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우리가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냐의 문제이다.
스미레는 이런 우리의 내면을 샴쌍동이에 비유한다. 그녀들은 항상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항상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오른손은 왼손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고 왼손은 오른손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충돌한다. 쿵!!
이야기의 시작인 동성애의 사랑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들의 각각의 이야기가 모여, 그것을 모티브로 한 우리 내면의 이야기다.
하루키의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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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수많은 단편소설 이외에 처음으로 접해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도쿄기담집이 전부이긴 하지만 근 10년의 차이가 나는 시간동안 문체가 많이 완성된 거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와의 연애에 관심이 없는 스미레가 어떻게 뮤(중년의 한국인 여성)에게 사랑에 빠졌는가, 그리고 스미레를 사랑하고 지켜보는 주인공의 전혀 이어질 수 없는 무한의 마라톤은 안타깝기도 하고 몽환적이다. 대충의 줄거리만 훑어봐도 아 일본문학이구나 란 느낌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입맛에 딱 들어맞는 책은 아니었지만 풋풋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1999년 이후로 재판되지 않은 것 보면 우리나라 정서에선 꽤나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