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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통독 전후시대의 옛 동독인들의 사랑이 왜 처연하고 비릿한 회상이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비애를 가득 머금은 것이어야 했는지, 더구나 그토록 집요하게 대상을 향해 자신을 결박시켜야 하는지, 마치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려고”한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해준 소설이 있다. 닿지 않는 그 아득한 사랑의 간절함에 깊게 드리워진 정말의 번민을 해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 탓이었을까? ‘카차 랑게 뮐러’의 『차마, 그 사랑을』과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자연스레 읽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지만, 이 기억의 성분과 기록의 목적은‘그’와 ‘나’처럼 다르다. 뮐러가 쓴‘조야’는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 속 노트를 읽고서 비로소 그에게 써내려가는 애틋한 연민의 송사(送辭)임에 비해, 마론이 쓴 ‘나’는 끝없이 막으려 했던 억압된 기억의 해방, 생을 지탱시켜왔던 사랑의 기다림이란 구속에서의 영원한 자유를 향한 자기구원의 회고이다. 그럼에도‘조야’와 ‘나’라는 두 동독 여인들이 하는 사랑은 매우 닮아있다. 장벽 서쪽에 있던 남자들, 그녀들의 연인과 일체화되기 위해 신앙적 몸부림에 가까운 집요한 사랑, 즉 온 마음과 육체에 남자들을 깊이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베를린 장벽, 이 경계의 동쪽 진영, 동독에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네들의 시대를 “기이한 시대”, “갱단 지배의 시대”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속에 붙잡은 사랑을 놓칠 수 없고, 그 사랑과 일체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이 이미 숙명처럼 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는 대척에 놓여있는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짐에 대한 역설, 빼앗긴 인간 본성에 대한 집착, 감성의 저 뒤편으로 망각했던 가치인 사랑의 절실함을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젊음, 사랑, 자유... 모든 것을 앗아간 기이한 시대에서 해방된 여자에게 사랑은“지금 놓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두려움”의 강박이었으리라.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그저 자발적으로 선택한 다른 감금상태와 맞바꾸고자 했을 때만 좋은 것 같았다.”는 그녀의 자유에 대한 패러독스는 사랑이란 “항상 죽음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란 말에 닿을 만큼 절실하고 유일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여자의 사랑은 치열함이고 가히 투쟁적이다. 처절한 갈등의 고통이 연속되는 그녀들의 사랑에서 황폐함과 폭력이 지배하던 파시즘의 세상, 그 기이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이는“모든 것을 내게서 빼앗아갔다. 나는 정말로 기이한 시대에 살았다.”는 ‘나’의 말처럼 다가온 사랑을 움켜쥘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실함과 어떤 최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나’에게 “당신은 뒤늦은 내 청춘의 사랑이야.”라고 남자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 움츠리고 있던 젊음의 거침없음에 맡기는 것,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가소로워할 정도로 알만큼 나이가 든 중년 여자 ‘나’는 사랑의 열망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어찌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사랑했지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즈음에 있는 것 같다. 정작 해방되었지만 다시금 사랑이라는 자기구속에 빠져버렸던 여자가 이제 구십 살인지 백 살인지도 스스로 구별할 수 없는 나이에 그 사랑에 진정한 자유, 해방을 비로소 부여하는 작업 말이다.
기억을 막으려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친 순간이 되어 그녀는 연인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는 것이다. 차마 사랑을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었던, 더 이상 사랑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멈추어있던 사랑, 그 초월의 시간을 비로소 흐르게 하는 것이다. 두 동독 여자의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는 작업일 것이다. 아니 그녀들이 기억하려 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시 꾸며내려 한 것이었을 게다. 그리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인생의 이해를 확인 하는 것, 사랑했던 자신과 남자의 삶과 죽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내게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내게서 활기와 의욕의 힘을 사라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도시의 문명과 규칙들이 점점 거추장스럽고 두려워짐에 따라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사랑만이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연”이며,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질서 전체는 그저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이 비록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일지언정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기이한 시대, 베를린 동쪽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과 갑자기 그들과 함께 살게 된 서쪽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몰이해, 그래서 우리의 자연성에 대한 모든 고백은 믿음의 문제임에 불과함을 함께 생각게 하는 이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는 파시즘의 과도함과 기이함에 대한 혐오와 조롱과 함께 인생의 가치와 이유를 반추케 하고, 불치의 병이 될지언정 바이러스처럼 침입해 올 사랑앓이를 하게 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정말 사랑밖에 없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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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왜 사랑을 갈망하는 것일까. 미국의 정치학자였던 반필드는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해보면 사랑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들에게 즐거움만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평가되는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사랑의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 이 모든 요소가 혼합된 작품이다. 이론바 ‘기이한 시대’에도 사랑은 존재했었다. 『슬픈 짐승』은 약 190쪽 정도의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상에 대한 관심은 고사하고 자신의 나이조차 정확히 모르는, 그러면서도 오래전에 떠난 연인을 기억하고 있는 주인공 ‘나’를 필두로 작은 담회색 눈을 소유했었던 그녀(나)의 정인 프란츠(그의 진짜 이름은 잊어버렸다.), 배우가 되기를 원했던 아테 등등……. 여러 사람들이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과 서로 분단되었다가 이제 막 통일을 맞이한 독일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단순한 사랑 소설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평범하지 않다. 물론 갑작스런 발작 이후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대답을 얻은 ‘나’가 프란츠를 만나 본능에 충실한 격정적 사랑을 나누고 그 기억을 죽기 직전까지 회상하는, 어쩌면 태생적으로 슬픈 짐승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중심적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 배후에는 독일의 역사가 자리한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이유(거의 모든 소설들이 다 그렇지만)는 이런 복합적인 면들이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니카 마론은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거장이다. 책 제목과 저자소개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연상되는 또 하나의 도서와 소설가가 있었다. 그건 바로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작품 <마음짐승>. 이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마론은 동독의 내무장관을 역임한 양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반면 뮐러는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이렇게 그들의 주변 환경은 차이가 있었지만 두 여성 작가에게서는 중요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된 입장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론과 뮐러는 자신들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명분 아래 독단을 자행했던 구동독, 그리고 차우셰스쿠에 의해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루마니아, 그야말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형편에서 문학작품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이하고 불편했던 시대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짧은 사랑 후 그 달콤함의 기억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또한 불안과 공포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슬픈 존재가 사람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작품은 다르면서도 미묘하게 닮아 있다. 흔히들 사랑을 감옥에 비유하곤 한다. 이는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것이 쾌락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까지 동시에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 소설은 사랑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을까.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대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p. 24~25) ‘나‘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바이러스이고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옥에 살고 있는 죄수이다. 프란츠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녀의 죄수는 감옥에서 나온다. 자유를 얻게 된 사랑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사랑에 저항하려고도 했지만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어느샌가 남편과 딸은 그녀의 인생 밖으로 밀려났고 ’나‘는 사랑이 시키는 대로 공항의 공중전화부스 옆에 서서 프란츠가 그의 금발의 아내와 함께 하드리아누스 방벽(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쌓았다고 하는 고대 방위시설)으로 가는 과정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녀는 격한 마음을 애써 참는다. 두 사람을 동과 서로 나누었던 베를린 장벽이 없었다면, 자유를 억압했던 기이한 세월이 없었다면 자신이 그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하며……. 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난 집착은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세상도, 시간도, 가족도, 그리고 결국에는 프란츠까지……. 이쯤 되면 사랑을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악마로 변해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 후에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수많은 짐승들 가운데 한 마리일 뿐이야.”
독일 문학비평계의 황제라고 하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에게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쓰인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보기 드문 강렬함을 지닌 너무나 에로틱한 소설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의 평가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약간의 견해를 덧붙여보고자 한다. 이 소설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강렬함에 눈멀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들을 조각보처럼 짜 맞추는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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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개인의 가치관이나 연애관 등에 미치는 영향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독일의 분단 상황은 남북한의 현실과 맞닿고, 동서독 통일 직후의 상황은 언제 실현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남북한)가 처하게 될 시뮬레이션과도 같다. 양아버지를 따라 1951년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작가 모니카 마론이 겪어내야 했을 혼란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불투명한 선망을 뛰어넘는 안타까운 시선과 동정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나치와 구동독의 사회주의 하의 분단과 통일, 그 어느 것 하나 결코 만만치 않다할 그 모든 격동을 순차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와 개인의 무력함이란 해일과 같은 충격일 것이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개인은 종종 자기 자신에게 분풀이하기도 한다. 처음에 그들은 사회와의 물리적 거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진즉에 간파한다. 그리곤 차선책을 물색한다. 짓밟고 억누르고 망가뜨리기 좋은, 사회 대신 총알받이를 해 줄 누군가를. 그렇게 찾은 대안은 타인이었다. 하지만 곧 타인을 제압하는데도 그들은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때 ‘자기 자신’은 그들이 꺼내든 최후의 히든 카드였다.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90쪽)
동독의 자연사박물관의 고생물학자인 화자는 연인 프란츠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브라키오사우루스 뼈를 자신과 자신이 처한 세계와 동일시하며 지내왔다. 프란츠와의 첫 만남도 근무지였던 박물관에서였는데, 통일 직후였고 그날도 경배하듯 브라키오사우르스를 보고 있는 그녀에게 프란츠는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라고 말한다.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 이심전심, 텔레파시 지지직~, 서독의 개미연구가와 동독의 고생물학자는 그렇게 만났다.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108쪽)
프란츠를 만난 이후 화자의 삶과 가치관은 360도 바뀌게 된다. 이제 그녀의 모든 생활패턴과 일정은 그와 함께하는데 맞춰진다. 심지어는 통일조차도 자신과 그를 만나게 해주려는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여겼던 그녀는 그에게 점점 더 집착하게 되면서 그의 아내를 질투하고 증오하기에 이르러, 급기야는 부부의 여행을 미행한다. 그리고 둘의 행동, 표정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자신과 나눴던 섹스를 아내와도 재현할 거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전형적인 의부증적인 증세를 보인다.
내 아버지가 옳았어. 사람은 인생의 것이지. (191쪽)
전후戰後 산송장으로 가정으로 복귀한 아버지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프란츠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신을 버리고 동료 교사와 살림을 차린다. 어머니는 그에 대한 복수로 재가조차 하지 않고 아들이 남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 교육에 초지일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츠는 연인(화자)에게 아버지가 진 빚을 보상하듯 살아왔던 그동안의 굴레에서 탈출할 거라는 얘기를 흘리고, 그녀는 드디어 그를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지만 동시에 영원한 이별 통보에 다름 아님을 직감한다.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 거야. (96쪽)
남편(아버지)의 부재와 그나마 살아 돌아온 가장 이래봐야 전쟁의 트라우마로 제 구실을 못했던 상황에서 어머니들은 온갖 교태를 부리며 경쟁적으로 자신의 페로몬을 발산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미를 과시하며 그간 누렸던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빌미가 되어준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변화를 조롱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말살한다. 그녀는 염세주의자에 허무주의자, 이상주의자였고, 프란츠는 그녀와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반대성향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 손을 잡아 나를 이끌어주오. 내가 세상 떠날 때까지 영원히.”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는 오직 한 사람 프란츠에게만은 영원히 사랑받고 기억될 여인이길 바란다. 이별을 예감한 순간까지도.
기억이란 진주의 내부에 들어 있는 이물질과도 같다. 그것은 처음에는 조개의 살을 파고든 성가신 침입자일 뿐이다. 조개는 그것을 외투막으로 감싸고 그것을 둘러싸고 진주질층이 하나씩 자라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둥근 형상이 생기게 된다. (88쪽)
이별 후, 프란츠와 함께했던 과거의 시간을 되씹는 생활 속에서도 시간은 아무리 행복한 기억이라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화자에게 상기시킨다. 그녀가 의지할 거라곤 이제 망각밖에는 없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좌절과 상실, 실패감에 녹초가 돼버린 육신은 마지막으로 짐승들의 환영을 본다. 번잡한 뉴욕에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자신의 기다림이 마침내 휴지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야 저 기이한 시대의 사랑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처럼...
사랑보다 더 잔인한 것은 기다림이 아닐까. 흔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되면 서로의 몸이나 사랑에 대한 관심을 거두게 된다. 한창 사랑에 들떴을 때 느꼈던 모든 신비로움과 행복, 열정 같은 것들은 익숙할수록 사멸해버린다는 함정이 있다.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한 몸이 되는 기적이 너무 빨리 해체되어버리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그럴싸한 거짓이 아닐까. 한바탕의 일장춘몽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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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테스트를 했었는데, 나와 잘 맞는 책 중 하나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짐승’이라는 결과가 나왔었다. 그때부터 호기심이 생겨 읽어볼까 하다가 이번에 읽게 되었다. 얇은 두께와 흡입력 있는 문체로 출퇴근길에 호로록 금방 읽은 책이다. 단순하게만 보면 중년의 불륜 스토리이고, 좀 더 생각해보면 독일 통일 직후서독, 동독 출신의 두 남녀가 겪는 격정적인 사랑과 집착을 통해 전쟁, 분단, 그리고 화합의 시대 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과 사회를 온 몸으로 맞아낸 이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나 또한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화자의 이유와는 조금 달랐지만 내 안에 너무 많은 가능성을 쏟아낸 뒤에는 죽음만이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백 살 혹은 구십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나’의 옛 연인에 대한 회상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구 동독 출신인 나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고생물학자로 근무한다. 서독 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를 만나 사랑에 빠져 남은 생을 이 사랑에 모두 바친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사랑의 기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평균적인 삶을 살았던 ‘나’는 어느날 거리에서 발작 후 죽을 뻔 했다. 이후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청춘의 사랑이라 일컫는 프란츠를 만나 사랑에 몰두한다. 나중엔 사랑 그 자체에 집착하는 ‘나’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과정이 너무 버거웠다. 프란츠를 사랑했던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진 나를 잃지 않으려는 것인지, 내 삶의 목표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프란츠가 떠난 뒤로 ‘나’의 시간은 멈춘다. 외부세계와의 교류도 차단한 체, 과거에 머문다. 그녀의 사랑은 과거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다. 사랑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했으나 그 사랑이 족쇄가 된 ‘나’가 바로 슬픈 짐승인가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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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서 어떤 책을 넣어갈까, 책들을 훑어보다가 앞부분만 읽고 덮어둔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눈에 띄었다. 여행가면서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좀 슬플 것 같았다. 근데 이상하게 땡겼다. 그건 두껍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지만 얼마 전에 읽은 신형철 평론가의 서평 때문이기도 했다. 이젠 완독을 해줘야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책을 읽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에 마음이 빼앗기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에 온갖 일들을 추억하거나 상상할 것이고 그러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고 말테니까. 책을 읽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은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책이나 읽는 일밖에 없다거나, 졸음도 풍경도 지겨워졌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가지고 간 책은 거의 대부분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져올 게 뻔했다. 그렇다면 슬픈 내용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책 한 권 선택하는데도 이런 이유와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면서 고르다뉘;;). 그리하여 배낭에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들어가게 되었다. 역시나 떠나는 날 버스 안에선 창밖만 바라봤다. 연둣빛 나무들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책이나(!) 보는 행위는 왠지 그 풍경을 배신하는 일 같았다. 여행을 가서도 그랬다. 종일 돌아다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을 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괜한 짐만 되어 읽지도 않고 그대로 되돌아가게 생겼던 <슬픈 짐승>을 꺼낸 것은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였다. 여행이 끝나고 있었다. 푸르른 나무와 하늘과 구름도 실컷 보았다. 너무나 피곤해서 버스를 타자마자 잠에 취해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의외로 잠은 오지 않았고 풍경도 지루해졌으며 상상력도 바닥이 났다. 그때 생각이 났다. 아, 내게 책이 있었지. 하지만 슬픈 내용일 것 같은데 읽어도 될까? 아, 이제 집에 가는 길이니까 괜찮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책을 꺼냈다. 그래, 읽어보자. 터미널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만약 차가 밀리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책의 두께로 봐서는 도착할 때쯤이면 책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읽었던 부분은 무시했다.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자, 이름도 알 수 없는 구십 세인지 백 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한 여자의 독백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책이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었다.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그 이유는 한 남자에게 빠진 여자가 화자였고 공통점은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용 역시 그로 인해 여자가 겪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질투였다. 물론 그것(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만 제외하면 문체나 내용은 전혀 달랐다. 다만 아니 에르노의 소설 속 여자와 모니카 마론의 소설 속 여자의 감정은 심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여자의 감정 부분만 나오면 마치 아니 에르노를 보는 것 같았다. 책을 펼치자 첫 문장부터 내 맘을 사로잡았다. 밑줄의 양으로 책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나로서는 첫 문장부터 밑줄을 그으면서 이 책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역시 그랬다. 읽어내려가는 순간순간마다 그녀의 고해성사와 같은 독백을 읽으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 궁금증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해졌다. 동독에 살던 그녀와 서독에 살던 그 남자, 프란츠. 그리고 그녀가 사이마다 회상하고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 통일된 독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문제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궁금증을 해결해줄 듯 말듯 그렇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소릴 지르고 말았다. 아악, 말도 안 돼! 난 어떤 결말을 원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이니 어느 소설에서나 마찬가지로 응당한 전개 후에 비슷한 결말이 생길 거라고 앞서 짐작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니카 마론의 결말에 아악, 소릴 지를만큼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부분에 다가서면서 어쩐지, 이거 이상해. 설마, 혹시? 그건 아니...겠...지..하는 찰나에! 작품 속에서 아테는 말한다.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나도 잘 모르겠다. 비극적인 것이 나은지 진부한 결말이 나은 건지. 하지만 이 소설 <슬픈 짐승>은 둘다였다. 진부하면서 비극적. 닫힌 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기구한 인생은 '기이한 시대'라고 일컫는 구동독과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채 살아가던 많은 동독인(!) 들을 대변해준다. 결국 통일 독일이라는 변화된 사회에서 어느 것하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마는 슬픈, 사랑 그리고 열정을 모니카 마론은 덤덤하게, 때론 비판적으로 들려줬다.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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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 세계문학전집 029 : 모니카 마론 : 슬픈 짐승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섞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프란츠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내 사랑이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같다. 내가 그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한 이후로,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내 사랑은 탈출로를 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프란츠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
화자인 '나'가 스스로에게 한 질문.. 이 문장이 처음부터 내 맘을 사로잡았다. 동독출신의 여성 고생물학자인 '나'는 어느날 길 위에서 발작을 일으켜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다시 정신을 차린 후 그녀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대답한다.
높이 12미터에 길이가 23미터나 되는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가 마치 자신을 여사제처럼 내려다 보듯이 내려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의식을 치르듯 그 앞에서 삼십초에서 일분 정도 서 있는 그녀.. 그리고 그 뼈대 앞에서 프란츠를 만나고 그와의 거침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지금의 나는 내가 몇 살인지도 , 연인의 이름이 정확히 프란츠 였는지도 그와 만났던 일들을 시간의 흐름대로 정리할 수도 없다. 그저 아직 죽지 않은 구십살의 아니면 백살의 노인일 것이고 그의 이름은 그냥 프란츠이고 간간히 떠오르는 그와의 시간들 그리고 그의 회색눈이 떠 오르고 어린 시절의 단편들과 친구들이 불쑥 불쑥 떠 오른다. 그가 돌아오겠다고 잡아 주었던 손, 그리고 그의 눈을 보며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었던 그 순간을 떠 올린다. 프란츠가 그 공룡의 뼈대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동물이라고 말했던 그 아침 그에게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예감했고 죽기 전에 놓쳐서 아쉬운 것이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처럼 거침 없는 사랑을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도 있었고 딸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과 딸은 프란츠와의 만남 이후 그녀의 삶에서는 사라진 듯 보였다. 남편은 그 전에 멀리 그녀를 떠나 있는 상황이었고 딸고 독립을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속에는 그들의 기억보다는 프란츠와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각인이 되어있었다.프란츠도 교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아내가 있었다. 그는 그녀와의 시간을 보낸 후 열두시 반이 되면 몇 시냐고 물었고 항상 1시전까지 집으로 돌아갔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절절한 표현이 너무도 맘에 와 닿았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서서히 침입을 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라는 생각이 들게도 하지만 대부분 사랑은 갑자기 회로가 끊어지듯 그렇게 순식간에 잠입을 해 마치 감옥을 탈옥한 죄수가 짧은 자유의 순간을 누리듯이 그렇게 미친듯이 행복과 불행을 맛보게 해 준다는.. 그 속성에 동감을 한다.
이 소설은 이렇듯 화자가 느낀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속에는 오로지 그들의 사랑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녀도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들이 살아낸 시간은 기이한 시대였다. 전쟁 이후의 유연의 시절을 보냈고 ,동독과 서독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화합이라는 명복하에 불합리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을 감내해야했던 시절이었다. 전쟁중에 아이들과 함께 남겨졌던 엄마, 그리고 전쟁후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아버지들..장벽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지만 그런 후에 느끼게 되는 감정의 혼란들.. 어찌보면 화자 시간의 흐름을 잃은 채 기억나는 장면만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러한 기이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단편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리 길지 않은 195쪽의 소설이다.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녀만의 독백이기 때문에 프란츠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짧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점 내 감정의 흐름에 내맡기게 되는..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흐름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기에 흐름은 구비구비 흘러갈 수도 있음을 알게 한다. 문장이 강렬하거나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무척 가슴에 와 닿는다.. 새롭게 알게 된 작가 모니카 마론.. 그녀의 삶이 이 주인공의 살았던 그 시대와 맞물려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 듯 그렇게 이야기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인상적이고 매혹적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멋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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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의 유용성 유년시절 개울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거기서 물장구도 치고 흙탕물에 뒹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태어난 곳은 울산인데 어디서 그런 산골마을의 추억이 생겨 났는지 엄마에게 물었고 우리집 앞에서 당시 하수관 공사를 했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쩐지 가재 잡고 개구리 잡던 기억은 없더라니. 서번트 증후군, 일명 뇌의 보상이라고 불리는 이 증상은 지적발달장애를 겪는 자폐아들에게서 드물게 발견된다. 암기나 계산, 음악, 미술 등의 특정한 분야에서 비약적인 능력을 발휘하는데 예를 들면 도심의 경관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대로 옮겨 그릴 수 있다든지, 복잡한 계산식을 단번에 풀이한다든지. 이러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좌뇌의 손상과 그에 따른 우뇌의 발달이 현재로서는 가장 신빙성을 갖는 이론이라 한다. 말하자면, 손상된 뇌의 능력을 다른 쪽 뇌에서 보상받게 되는 셈이다. 간혹 이런 경우가 생긴다. 특별히 안 가도 되는 술자리에 끼었다가 일전에 한 번 소개 받은 적 있던, 이름도 가물가물한 사람과 데면데면하게 서로 술이나 권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말도 통하고 동갑에다가 집에 가는 방향도 같아서 야간할증 택시비를 얼마쯤 아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제법 흥이 났다. 본래 소박하고 비좁은 인맥을 고수하였음에도 그날따라 자리도 괜찮고, 취기도 올라 호기롭게 그래 얘랑 너랑 친구고 나도 얘랑 친구니까, 우리는 다 친구다. 뭐 이런 소리나 주정대신 지껄였다. 그러다 빠르면 서너 달, 아니면 한 해를 훌쩍 넘겨 비슷한 술자리에서 만난, 일전에 한두 번 소개 받은 적 있던 그 사람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짜게 된다. 아, 내가 이 낯선 사내와 말을 놓았던가, 아니었던가. 또 다른 경우, 분명 이불 위에 던져놓았던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이유없이 냉장고 문이 열려 있고, 검색창에, 아 그 뭐더라, 라고 썼을 뿐인데 연관검색어가 뜨는 놀라운 현상들을 목격하게 될 때, 혹은 일요일 오후 거실에서 가구가 되는 수련 중에 문득 아, 내가 변기 물을 내렸던가, 아니었던가 홀로 물을 때. 그때, 자신의 좌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다, 그런 거라도 튼튼하다니.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말. 아무래도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을 잊는 쪽을 상상하는 게 더 낯설다. 망각은 선택항목이 아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을 산정하는 순간, 되려 주목받게 된다. 반면에 왜곡의 문제라면 아직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헤어진 애인을 잊을 수는 없지만, 썅년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고, 차마 밝힐 수 없는 치명적인 나만의 실수를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시킬 수도 있다. 한 달을 벼르고 산 레어아이템을 분실한 당신, 그래 나한테 그런 건 과분했던 거야. 신포도의 유용성을 잊지 말라. 특별히 지나간 연애를 재구성할 때, 이 왜곡의 방식은 과연 적합하다. 그러니까 모든 우연과 평범한 자연현상들이 강력한 징후와 예견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이별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쉬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별점 만점을 줄 수밖에 없는 문장과 세목. 모두 읽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뼈를 맞추어 지구의 먼 조상을 상상하는 것과 지나간 연애를 추억하는 것이 아주 기막힌 비유라고 평하는 바임. 바람피는 여성 입장에서 본처를 어떻게 썅년으로 만들 수 있는지, 질투는 연애의 윤활제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 중년의 외도를 <사랑과 전쟁>으로만 접한 당신께, 강력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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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브라키오사우르스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인생에는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 모으면 내 인생은 상당히 짧은 생이 되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직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사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에는 망각이 죄악시되었다. 나는 그것을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은 그것을 생명을 위협하는 횡포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큰 신체적 고통을 겪을 때는 기절만이 치명적인 쇼크나 평생 지속되는 충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망각을 금지했듯이 사람들에게 기절을 금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신과 세상은 브라키오사우르스를 잊었었다. 야넨시 교수가 텐다구루에서 그것의 뼈 몇개를 발견할 때까지 1억 5천만 년 동안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상의 기억에서, 어쩌면 심지어 우주의 기억에서조차도 사라졌었다. 야넨시 교수가 그를 발견한 후에 우리는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다시 꾸며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작은 뇌, 그의 먹이, 습관, 동시대 동물들, 그의 오랜 종족 생활 전부와 그의 죽음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존재하며 모든 아이가 그를 알고 있다. 사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그날 저녁, 내 연인이 곧게 편 등을 벽에 기대고 식육식물들에 둘러싸여 내 침대에 앉아 있던 그 저녁을 나는 그가 떠나간 이후로 꾸며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p,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