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왕릉에도 홍살문이 있었구나. 표지에 있는 사진을 보고 떠올려본 내 기억 속 왕릉에는 홍살문이 없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다. 내눈에 조선왕릉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릉 이름을 모른다면 다 같은 곳이라고 착각할 정도인데, 그렇게 보였던 것이 이유가 있었다. 왕릉을 조성하는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은 1966년 마지막 왕릉이 조성될 때까지 쭉 지켜졌다. 그 원칙에 의거해 조선왕실에서 42기의 능과 13기의 원(園),64기의 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중 이방원 생모인 태조 비 신의왕후 한씨 능인 제릉과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 이렇게 두 능은 개성에 있다.
조선왕릉은 서울 시내에도 여러군데가 있는데, 요즘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근엄한 유적지인 동시에 자연공간으로 휴식공간으로도 역할을 해내고 있다. 선릉이나 태릉같이 넓은 녹색공간이 없었다면,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삭막하고 건조한 도시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신들의 정원이라는 조선왕릉은 이제 현대인에게도 정원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이것은 조선시대 내내 준수됐던 왕릉의 조성 원칙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왕릉은 첫째 '도성 10리 밖 100리 이내'에 만들어졌다. 임금의 능행길에 갑작스러운 변고가 발생했을 경우 빠르게 환궁할 수 있도록 감안한 거리였고, 두번째 배산임수 즉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곳을 선호했다.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번째는 상설제도인데 세종때 집대성한 오례의(五禮儀)를 충실히 따랐다는 점이고, 이로써 진입공간과 제향공간, 능침공간으로 나뉘어 '죽은자와 산자가 만나는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는 자연주의에 기반해서 언덕을 깎지 않고 완만한 곡선으로 왕의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왕릉은 내부 공간도 일정한 질서에 의해 조성됐는데, 홍살문은 능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표시인 것이다. 봉분 주위의 석조물이나 건조물은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목적에 맞게 배치된 것이었다.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켜졌던 왕릉의 조성원칙 덕분에 급속하게 개발됐던 서울과 그 근교의 도시인에게 쉼터 역할을 하는 유적지로 보전될 수 있었다. 6백여년동안 만들어진 왕릉. 이제 왕의 무덤은 왕조의 위엄과 함께 자연의 향기 또한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릉하면 봉긋하게 솟아있는 봉분만 떠올랐는데, 그래서 왕릉 안에 홍살문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스쳐지나버릴 정도로 왕릉안에 존재하고 있던 조성물들을 무심하게 넘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릉 전체를 머리 속으로 그려보게 됐다. 그리고 어슬렁 어슬렁 여유로운 걸음으로 선릉이나 태릉을 둘러보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