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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철학적 담론’은 무의미하거나 가치 없음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 또는 부족이나 결핍에서 오는 공허함, 영원에 대한 동경이나 열망 등이 가슴에 밀려오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무의미했던 말이나 인식이 간절함으로 변하는 것이다. 영원함에 대한 동경, 진리를 향한 열정이나 강한 욕망이 물밀듯 밀려오는 느낌은 비단 철학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격정적 추종, 광기에 가까운 무아지경에서부터 완전한 이성의 자유 의지에 의한 취함의 탐색을 시도하는 20세기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있어 술의 효능, 또는 기여를 더듬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서양 철학사에서 간과하고 있는 다양한 철학적 동인 중에 ’술과 취함’을 그 연구 대상의 하나로 올려놓기 위한 하나의 모험적 시도라 하겠다. 고대 이집트에서 비롯된 신들의 음료(포도주)는 그리스의 마지막 신 디오니소스에 이르러 그 신성한 상징성으로 재탄생 된다. 현실의 고통을 잊고 신과의 완벽한 일치를 이루도록 인간을 인도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기로 존재하던 술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숨겨진 진리의 빛으로 이끄는 존재로서 철학적 인식의 범위로 편입된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에게도 유기체를 민첩하게 하는 효능을 인정하는 선에서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효능은 무절제와 방종을 낳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스토아적인 엄격함으로 변한다. 그리스 철학을 이은 로마 시대에는 술과 철학자의 완벽한 하모니를 꾀하기도 한다. 그리스 시대와 라틴 문명에서 술은 분석의 대상으로 찬양 또는 처벌이라는 영역으로 그 효능이 집약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던 중세에 이르러 술은 생명과 구원의 상징이자 그리스도의 성혈로서 ’전질 변화’를 이룬다. 즉 토머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적 삶에서 신들의 음료는 사제의 축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성혈로 변하는 것이며, 실존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연관 짓는 중개자의 역할인 것이다. 중세에 있어 포도주는 전례 속에서 엄격하게 자리했음을 의미한다. 구조적으로 신성화 되어 거룩한 나눔의 본질적인 상징물로의 변화를 겪은 신들의 음료는 에라스무스의 등장으로 각 철학자의 개별성으로 넘어간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는 플라톤의 향연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자유 의지의 발현으로 개별화 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박성, 또는 개인적 기호와 성향으로 존재하던 술은 18세기 계몽주의에 이르러 절제되고 급기야 칸트에 이르러 철저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신세를 간신히 모면하게 된다. 피히테나 헤겔,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칼 막스, 니체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의 격정을 이겨낸 신들의 음료는 이제 서서히 철학에서 분리된 과학으로의 통합을 모색하게 된다. 즉 프로이드와 함께 이성을 초월하는 매개체로서의 술,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간자로서의 효능에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취함은 무의식의 발현으로서 관찰되고 실험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질 들뢰즈, 미셀 푸코로 이어지며 실존으로서 존재하는 취함은 관찰의 영역, 연구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이 책은 시대별 철학가의 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사례를 중심으로 철학의 변천사를 훑고 있다. 선과 악, 덕성과 타락이라는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적 실체에 접근하려는 철학의 문제에 있어 술은 동일 시대의 유행을 따랐기보다는 시대의 영향 속에서 개인적 성향이 우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차피 술은 자신의 주량과 기호에 따라 예술적 영감이나 활기를 불어 넣는 유용한 도구일 수도, 타락으로 인도하는 저주의 산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술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우리는 불안한 하루의 일상을 마감하며 외칠 것이다. "술이나 한잔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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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철학도 철학이다.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은 이렇게 시작된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도 남아 있지않지만 나의 젊음은 무교동의 낙지골목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로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 토를 하기도 하고 또 술에 취해 울기도 했다. 술을 마셨던 이유는 송창식의 노래처럼 가슴에 가득 슬픔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앞에 쓰러진 술병을 보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외우며,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전혜린처럼 죽고 싶었던 이유는 디오니소스의 힘이 아니었을까? 언제나 회색빛인 젊음을 두려워하며 혼돈과 쾌락과, 격정적인 감정에 취해 있었다면 나의 젊음은 한 때 디오니소스의 추종자였다. 이때 술에 취해 지껄인 수많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똥철학이었지만 그래도 이 개똥철학 때문에 인생을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다. 이제는 디오니소스를 배반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책을 보면서 아련한 향수에 젖는 것은 아직도 내 삶의 원천에는 디오니소스가 주는 원초적인 삶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너는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는 디오니소스의 멋진 유혹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아직도 내 신성을 믿지 않는 자는 내가 술을 빚었을 때 공짜로 마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물을 마셔야 할 것이다. 포도주 대신 물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철학의 역사는 술의 역사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술에 대한 철학자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술과 철학이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탐색해 나간다. 생각해 보라 기원전 3000년부터 포도나무가 재배 되었고 길가메시의 바빌로니나 서사시에는 이미 포도주를 왕이 신하들과 함께 술을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술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전에 시작이 되었고 그 역사를 한권에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할까?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타-살루테 산 라파엘라 대학 철학부 교수인 저자 마시모 도나는 문명이 탄생되었던 바빌로니아 시대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몽테뉴, 데카르트, 베이컨, 칸트,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하이데거, 푸코등 쟁쟁한 철학자들을 꿰뚫으며 그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술에 대한 생각과 일화를 중심으로 '술과 철학'이라는 담론을 펼친다. 디오니소스 배 야구대회 이 책을 처음 펴 들고는 암담했다. 왜냐하면 읽기는 읽는데 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 50페이지 넘어가니까 조금은 익숙해지는 것 같았고 그 다음에는 흥미진진한 야구를 보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로 야구팀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팀은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철학자 팀이고 한 팀은 디오니소스를 반대하는 철학자 팀이다. 두 팀이 야구 경기를 하는데 먼저 양 팀의 선수를 소개하면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철학자 팀의 4번 타자는 단연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이 쓴 ‘향연’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그가 취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술을 마신다 할지라도 무절제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사랑했지만 디오니소스에게 빠지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이성을 잃지 않았고 자제력을 유지했다. 디오니소스에게 빠져있는 술꾼들은 꼭 소크라테스의 이 주도를 배워야 할 것 같다. 반대로 디오니소스를 반대하는 철학자 팀의 4번 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술에 취한 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전혀 시도할 수 없으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어쨌든 나쁜 생각으로 기운다’라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오직 절제하며 마시는 자만이 ‘양식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에 취해서 범한 우발적 범죄는 가중처벌 해야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술 취함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그러나 그가 술의 사용을 정당하게 여긴 것이 있는데 종교적인 행사에서 진행되는 헌주 의식이다. 그리고 이 게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다 기독교는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와 동일시했고 성스러운 음료로 생각했다. 포도주는 그래서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어거스틴은 ‘신’의 술은 ‘다른, 술이라고 명쾌한 정의를 내렸다. 우리가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기도 하고 죄를 짓는 시발점이 되는 이유는 술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기독교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술이 나에게 구원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마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해설을 들었으니까 다시 게임으로 들어가 보자. 다시 디오니소스를 반대하는 철학자 팀의 5번 타자는 한방이 있는 몽테뉴다. 몽테뉴는 술에 취해 자신에 대해 적절한 자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최악의 상태로 여겼다. 그는 술 취함을 몰상식하고 난폭한 악행으로 보았다. 디오니소스를 지지하는 철학자 팀에는 몽테뉴에 지지 않을 강력한 라이벌이 있는데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스페인 포도주를 지나치게 많이 마셨고 말년에는 구토를 일으키기 위해 포도주에 담배를 우려낸 물을 마셨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많은 선수들이 등장하는데 디오니소스를 반대하는 철학자 팀에는 스피노자, 파스칼, 로크, 피히테가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술은 우리들에게 욕망을 부추기고 이 욕망 때문에 인간에게 타락을 가져 온다고 했다. 반대로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철학자 팀에는 볼테르, 장자크 루소,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커등이 있다. 디오니소스 숭배 팀에는 막강한 지명타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칼 막스다. 종종 취할 때까지 그리고 주머니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마셨다고 한다. 야구경기가 점점 인기가 늘고 관중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후대에 올수록 술도 대중화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디오니소스 숭배 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다 준 사람들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파리에서 디오니소스적 무아지경에 빠졌는데 사르트르, 시몬느 보부아르, 그리고 알베르 까뮈였다. 그들은 파리에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뒤범벅이 되어 위대한 알코올 축제의 밤을 만들어 갔다. 미셸 푸코는 그의 책 ‘강제수용자’에서 술로 지독하게 방탕을 일삼은 사람들을 등장 시키며 술의 악습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이기는 것만이 승리는 아니다.(양의성) 경기는 디오니소스 숭배 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우리가 이 경기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의 핵심단어는 양의성이다. 양의성의 정의는 ‘적당한 양이였을 때는 그 효과에 대해 찬양받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에 초래되는 혼란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20대 시절에 이대 학생들이 쓴 수필집을 읽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구절은 생생이 기억되고 있다. 바로 “아름다움이 추함으로 변하기 전까지”라는 문장이다. 술은 우리들에게 대화의 통로가 되고, 아름다운 감성을 만들어 주며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 잔의 술에 상기된 여인의 미소와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 술이 과함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얼굴이 추함으로 변한다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은 추락하고 말 것이다. 술은 절제했을 때 그 아름다움이 있다. 똑같은 술을 먹어도 그 삶이 더 아름답게 승화되어 찬양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반대로 추함 때문에 비난받고 삶이 망가지기도 한다. 술은 디오니소스의 철학을 가지고 먹어야 한다. 그 철학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아름다움, 그리고 함께 사는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그 삶은 우리의 영혼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 자신의 영혼을 성찰할 수 있다면 술은 나에게 구원의 의미로 다가 올 것이다. 술을 통해서 내 영혼까지 건강해진다면 디오니소스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눈크 에스트 비벤둠 Nunc est bibendum....... 자 한잔 합시다. 이것이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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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술과는 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술'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 술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캬~~! 시원하다", 라고 외치는 친구 녀석들을 볼 때면 나도 그 '시원함'을 간절히 느껴보고 싶어진다. 여태 나의 자그마한 소망은 실패의 연속이었으며 아마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다. ![]()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시대부터 현대철학까지의 '술'에 대한 접근, 술과 철학의 이항식에 대해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주름잡던 시대에는 "술"의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시켰다고 한다. 한계를 넘어가 본 사람이야말로 진정 한계를 규정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음주의 한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술고래, 소크라테스는 술이 사상과 철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규정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도 스승과 같은 의견이라는 사실에 나는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보편적인 우리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어떤 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생활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음주가무"이지 않던가! 물론 사상과 철학을 논하는 것이 현대인의 목표와 그 범주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중이 요구되는 것이 같다는 가정 하에서 '술'은 집중을 쏟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당시 고대 철학자들은 술을 철학에 다다르며 습득하는 길에 긍정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그 후 중용의 대명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에 따라서는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적정선을 넘었을 때는 술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에 들어와서는 철학과 술의 이항식에 대한 판도는 그 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술'은 긍정적 시선보다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철학자들은 각자 '술'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다양한 시점을 내보인다. 하지만 결국 이 책에 등장한 모든 철학가들의 주장은 하나로 모아진다. 술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은 크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술을 즐겨야 하되 술이 인간을 즐기면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적절할 듯싶다.
『디오니소스의 철학』, 이 작품은 나에게 꽤 난해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이 작품을 수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읽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나아가다보니 막막한 심정은 금세 날아가 버렸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금방 몰입이 되어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철학과 술에 대해 논하는 『디오니소스의 철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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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나 자신에서부터 가족, 친구, 지인, 동료 낯선사람들을 생각한다. 저마다 꼭 같은 술을 마셔도 다른식의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를 우린 그저 술 습관, 주사라 일컫는다. 이 단순한 생각이 <디오니소스의 철학>을 만나게 되면서 심오하게 되어진다. (책을 덮은 후 아주 단순명료하게 되어진다지^^) 이렇듯 같은 술을 마셔도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는 다중성, 양의성, 중의성처럼 술의 신이라고 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고 생명의 신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신 디오니소스는 인간에게 신들의 넥타인 포도주를 만나게 한다. 저자는 이 술을 철학자와 문학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시대순으로 철학자, 문학가 그들의 남겨진 문헌을 토대로 이야기 한다. 우리에게 엄청나게 익숙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기술한 <향연>을 빌어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절제하면서 단 한번도 술로 인해 이성을 잃지 않고 술취함을 진리탐구의 매개로 이야기 한다. 플라톤은 술의 힘을 빌어 말하는 것은 진실(취중진담)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이고 합법적인 태도로 술취함을 경멸한다. 책은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해 그리스도교의 포도주의 상징성과 신성을 거쳐 현대사회의 무아지경을 제법 많이 알려진 철학자들을 토대로 서술되어진다.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것중에 하나가 술일것이다. 철학자들을 빌어 때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음날 기억하지 못하는 이 술취함을 무아지경, 혹은 광기라 말하기도 타락이라 말하기도 하고 신의 경지에 가장 적합한 상태라고도 말한다. 디오니소스처럼 포도주 역시 인간에게 적당한 양으로 취하면 선물인 동시에 그 이상을 말하면 인간품위를 손상시키는 ’악’이다. 우리 주변의 술 마심의 형태를 들여다 보면 이 책은 고스란히 녹아든다. 망각의 강을 건너고 싶어 술을 취하는 이. 이는 삶의 고단함과 술을 빌어 기억못하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술로 이용된다. 술은 이들에게 위로제일 수 있고 고단한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게 하는 작용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술에 취해서 범한 우발적인 범죄를 가중처벌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공감과 함께 지지한다. 술이 깨어났을때 자신이 뭔짓을 해도 모르는 인간들이라면 술은 마땅히 마시지 말아야 한다. )취중진담의 사람들. 이들에게 술은 진실이나 진리탐구에 한층 더 가까이 갈수록 용기를 주는 작용을 한다. 또한 이들은 취한척, 취하지 않은척, 적당히 가면을 빌어쓰는 행태이기도 하다. 술에 취하지 않는 자. 이들은 경계선을 절제와 이성으로 통제하는 인간들이다. 정말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가 나인가. ?! 술에 의해 인지하는 또 다른 나와 전혀 인지못하고 활보하는 또, 나, 타자에 의해 말해짐으로써 내가 되는 나를 생각해보면 오롯이 나자신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것은 없다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결론이다. 잡설)자칭 애주가라 생각하고 한번도 술이 주는 무아지경을 넘어보지 못한 내게 인류 중 철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술을 고찰해보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신선했다. 이런 사고로 하니 나의 술마심이 철학자들이 고찰하고자 했던 철학의 대상이자 나의 삶이고 이런 것을 인지하니 나역시 철학자의 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로 술을 마시는 우리 모두는 철학의 대상이자 철학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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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디오니소스와 술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짐작은 빗나갔지만 어찌되었든 최근 고전철학서를 읽고 있는 나에겐 오아시스같은 너무나 재미있는 책일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의 철학과 영혼은 단순히 술(포도주)와 디오니소스의 관계를 논한다던지, 철학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술의 위상만을 살펴본 것이 아니였다. 시대순으로 살펴 보는 걸출한 철학자들의 술과 함께한 진리를 향한 열정. 그리고 술이 주는 매력을 받아들이는 것도 각기 다른 철학자들. (나는 특히 소크라테스와 니체, 푸코, 바타이유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포도주의 탄생과 역사. 그리스도교에서 차지하는 술에 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몇 년후에 이어서 나온 소책자인 [디오니소스의 영혼]은 이 시리즈의 철학적 면모를 굳혀주고 있다. 술 취함 속의 진리. 뭇 술 마시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그 진리를 헤매였던 사상가들 옆엔 술이 있었다.
아~ 소크라테스처럼 술을 들이마셔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챙겨줄 수 있도록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다음 날 숙취만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 더 우선인 나는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마시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눈지도 몇 년전 일인지 까마득하다. 송이송이 빼곡히 열린 포도알은 그 하나하나가 진리가 될 수 있고, 철학을 논할 수 있다니... 신이 주신 음식 중 물 다음으로 귀중한 음료가 확실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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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술, 이 두 가지가 참 잘 어울리는 궁합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1편을 보고 나서이다. 영화 장면 중 김두한의 여인이었던 “화자”(방은희)에게 두꺼운 안경을 쓰고 유약한 남편이 술이 취해 찾아오고 화자가 남편에게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철학 - 솔직히 그때는 이 세 명이 철학자인지도 제대로 몰랐었다 - 우리의 근대를 망치고 있다고 쏘아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고뇌하는 지식인(철학자)과 술”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받아져서 철학자들과 술은 절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그런데 마시모 도나의 “디오니소스의 철학(시그마북스, 2010년 3월)”을 보면 모든 철학자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수많은 철학자의 저술과 사상을 통해 “철학”과 “술”의 오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필연적인 무절제를 동반하는 술, 그 술의 즐거움에 건전하게 빠져드는 현상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체험 속에서 고찰해볼 만한 주제”이며 “술이라는 담론이 그 장벽을 넘어서고, 협소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도록 도울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인식과 결합된 술이 그 너머의 철학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수많은 철학자들, 즉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몽테뉴, 칸트, 피히테 등의 근세 철학자들과 미셀 푸코, 이름도 생소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까지 총 망라하여 그들이 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들의 삶과 저술, 사상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저 이름 한번 정도 들어봤을 정도로 철학에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도 인상깊었던 몇몇 철학자들이 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야기해본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소개해보자. 둘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던 두 사람은 역시 술에서도 전혀 상반된 견해를 나타낸다. 플라톤이 술은 숨겨진 “진리의 빛”으로 이끄는 존재로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을 마시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에 불과하며, 술에 흠뻑 취한 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전혀 시도할 수 없으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어쨌든 나쁜 생각으로 기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술에 대해 제기했다는 의문은 몇 천년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재미있는데,
"술은 뜨거운 성질인데 술을 마신 자는 냉기를 느끼는가? 그리고 늑막염과 그에 유사한 병에 쉽게 걸리는가? 어째서 약간 희석된 술을 마신 자는 진한 술을 마신 사람보다 머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뜨거운 기운을 가진 아이들은 술을 즐기지 않는데, 어째서 시아파 사람들과 용맹한 남자들은 술을 찾는가? 그들 역시 뜨거운 열기를 내뿜지 않던가? 왜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짠맛과 물의 나쁜 맛을 더 잘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덜 느끼는가? 어째서 완전히 술에 취한 자는 그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술기운이 돌면 멀리 있는 사물들이 잘 보이지 않는가? 왜 취한 자는 이따금 하나의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가?"
라는 의문은 딱 우리가 술에 만취해서 겪게 되는 그 상황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에 안취하게 마시는 방법으로 위에 떠 있는 독한 술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큰 컵을 사용하고 알코올을 증발시키기 위해 술을 끓여 마시라고 충고하기도 했다는 데 이 점 또한 재미있다.
그 외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은 자기 가치관과 사상에 입각해 술을 예찬하기도 하고 또는 술을 부정하기도 하는 등 모두가 술을 좋아하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모두 다 소개할 수 없고 그저 내 멋대로 몇몇 철학자들의 생각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읽어본다면,
Q: 여성들은 왜 남성보다 덜 취할까? A: 칸트의 말을 빌자면 “왜냐하면 여성들은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자제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않으며 술 마시는 일은 남성들의 전형적인 악습이다. 여성들은 품위에 있어서는 남성을 능가하며 남성은 '무분별하다'. 그렇기 때문에 술의 악습에 더 잘 빠진다.
Q: 최근 술 취하고 저지르는 범죄를 감형하는 판결이 나왔는데 과연 이는 합당할까? A: 몽테뉴는 술 취함은 '몰상식하고 난폭한 악행'으로서 그 안에는 정신적인 면이 없으며 관대함도 없으며 '다른 이들에게 해를 덜 끼치고 덜 위험하다 할지라도 시민사회를 보다 직접적으로 송두리째 동요시키며 분별하고 경박스러운 음주는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피히테는 '분노 또는 취기로 자신의 이성을 컨트롤하지 못한 범법자는 고의적으로 사악한 의지를 가지고 저지른 죄악‘이며 이는 오히려 가중사유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신을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취하는 것이 습관화된 자는 동물로 변하는 것을 정식으로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 안에서 이성적인 존재로 살 수 있는 단계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음주에 대한 처벌을 아주 단호하게 하여야 한다고 한다. 미셀 푸코는 광기에 의해 타락된 의지는 '순수한 상태일 수 없으며, 비이성적인 일탈 행위는 결정적으로 사악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배척되어야 하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Q: 젊은이들이 흥청망청 취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쇼펜하우어는 윤리의 중요한 규율은 '삼가하고 조절하는 것', 즉 '우리의 욕망에 제한을 두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알코올의 혼미상태는 젊은 시절 순전히 환각적인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무의식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의 표식일 뿐이고 청춘이 웃음을 잃고 '의기소침한' 시기, 하지만 지혜로움을 갖추었을 때에, 비로소 보다 참되고 각성된 시각으로 세상에 대해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해 너그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술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위에서 소개한 몇몇 철학자들이 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책에서는 술에 대해 관대하고 찬미하는 철학자들을 더 많이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 또한 술에 대한 일방적인 찬미나 또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취함과 절제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동일성의 원칙은 취함이 적절하고 참되게 표출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적절한 절제 속에서 이뤄지는 취함이 신들의 넥타라고까지 불리웠던 술의 진정한 가치를 이끌어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는 참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던 “철학과 술”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멋들어진 술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할라치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면박을 당하기 일수일 것 같다. 결국은 세상 사는 이야기하면서 두서없이 횡설수설 늘어놓는 “개똥철학”이나 늘어놓게 될 것 같다. 술에 대한 진지하고 철학적인 해석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눈크 에스트 비벤둠 (Nunc est bibendum, 자 한잔 합시다!)" 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처럼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한 잔 하는 것이 그 어떤 철학적 해석보다도 더 값질 것이다. 이런이런 술에 대해 잔뜩 늘어놓으니 오늘 저녁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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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이전부터 현대철학까지와 술과의 이항식에 대한 글 ^^ 몰입하게 되면 눈을 뗄 수 없는 글. 한줄 한줄 곱씹으면서 읽어야 하는 글.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디오니소스의 철학』, 이 작품은 나에게 꽤 난해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이 작품을 수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읽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나아가다보니 막막한 심정은 금세 날아가 버렸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금방 몰입이 되어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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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술은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성분이다. 어떠한 대상에서 그 반대의 것을 끌어내고 그 상황과 상태를 전복시켜 버린다."는 말처럼 술에는 독특한 뭔가가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철학의 모든 질문은 끝이 없는 답변을 요구한다 하더니, 이 책도 다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컴퓨터관련 서적 등에 경영경제책 마저도 대부분은 즐겁고 때론 심각하게 비판하며 책을 읽었지만, 철학이라는 단어가 붙은 책들은 맨밥을 먹듯 잘 안 넘어가 그냥 꾸역꾸역 삼켜버린다. 한달 전에도 철학책 하나를 집어들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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