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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대가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의 창신보다는 기존 이론의 정리와 종합에 강한 학자다. 그의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현대성과 현대성이 야기한 부작용과 관련된 사회현상이다. 특히 푸코의 미시권력론과 몸철학에 기대어 근대산업사회의 규율적 성격과 역사적 패러다임 변환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연구담론이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아쉽게도 제자리 걸음에 머무르는 측면이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2004)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신빈곤층의 맥락에 대해 진단하기 위해 근대초기의 노동과 산업사회적 특성에 대해 고찰한다. 키워드는 빈곤이지만 우리 모두 빈천과 부귀가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인 표현임을 잘 알고 있다. 가령 내가 동네 찜질방에서 누리는 호사는 조선시대의 왕들도 누리지 못한 호사인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빈곤의 의미도 달라졌다. 예를 들면, 굴뚝에서 검은 매연을 뿜어대던 근대의 가난이 일자리가 없는 실업상태에서 비롯된다면, 오늘날 소비지상주의 시대의 가난은 소비할 수 없는 무능력 그자체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근대 산업사회 형성의 촉매제로 노동윤리에 주목한다. 노동윤리의 기원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노동윤리가 주로 유럽적 맥락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근대초기의 노동윤리는 농민과 수공업 장인들을 정규 공장 노동으로 유인하는 일종의 정신규율이었고 새로운 형식의 노예선언의 뉘앙스마저 지니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당시의 노동윤리가 노동자를 통제하고 종속시키기 위한 규율훈련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푸코의 근대적 규율권력과 체제 재생산의 담론에 기대어 노동윤리의 사회경제적 생산효과를 설명한다. 근대 사회 산업화 단계에서 일터는 대부분의 남자 성인들의 사회적 인격이 형성되는 장소이자 사회통합의 일차적 공간이 되었다. 즉 일터는 규범에 복종하고 훈련된 행동을 하는 습관이 교육되고 흡수되는 환경이자 사회적 인격이 형성되는 장소였다. 흥미롭게도 미국인 사회역사학자들은 노동윤리를 유럽의 발명품으로 간주하고, 미국의 산업화는 노동윤리가 아닌 기업정신과 신분상승의 욕망으로 추동되었다고 설명한다.
"노동은 사회적 위치를 결정짓는 주요 요소이자 자기 평가의 주요 요소였다. 상속을 받거나 축적한 부가 있어서 먹고 살면서 여가까지 즐길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고용되어 있는 회사나 그 회사에서 하는 일로 대답했다. 분류와 구분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회에서, 노동의 유형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과 관계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파생되는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분류 기준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자신보다 뛰어나서 우러러보아야 할 사람들, 자신보다 낮아서 복종을 요구하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의해 주었다. 노동의 유형은 한 사람이 맞추어 살아야 할 생활수준, 그의 '분수',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넘보지 말아야 할 수준을 결정했다. 노동 이력은 삶의 여정이고, 한 사람이 삶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기록이었다. 그 이력은 자신감과 자신 없음, 자기 만족과 자기 질책, 긍지와 수치의 주요 원천이었다. "(35-6쪽)
근대 사회의 산업 노동 패러다임은 초기의 생산자 사회에서 후기의 소비자 사회로 이행했다. 달리 말한다면 노동윤리가 주도하는 사회에서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했다. 소비자 사회에서 지난날 산업예비군이었던 빈곤층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재정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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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노동절(May Day)’은 19세기 후반부터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제정되었고, 그로부터 매년 이를 기념하는 노동자들의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노동절’이 제정되었으나, 1963년에 5월이 아닌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어 기념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 이후 1994년 범이 개정되면서 다시 기념일을 5월 1일로 바꾸면서 그 명칭은 그대로 ‘근로자의 날’로 남겨두었으나, 금년(2026년)에 다시 법이 개정되면서 비로소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부지런히 일한다는 의미를 지닌 '근로(勤勞)'가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는 '노동(勞動)'이라는 단어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절'이라는 명칭을 되찾은 것은 노동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며,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경제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근대 이후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농사를 지을 땅이 없던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에 투입되어 노동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일상을 꾸려가는 빈곤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산 공정에 투입되었던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노동절’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저자는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더욱 빈곤해지는 현상에 대해 조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근대가 어떤 동력에 의해 진행되어 왔으며, 그것이 단계마다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이 어떤 흐름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갈수록 빈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빈곤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근대적 빈곤의 이야기 속에서 자주 간과되고, 윤색되고, 또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던 부분’을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과거의 가난이 직장에서 이탈된 ‘실업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무엇보다 결함 있는 소비자의 처지에서 그 의미가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산업의 고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력의 가치가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근래 ‘안공지능(A.I.)’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지식 분야 전문가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멀지 않은 시기에 산업 현장에 로봇이 투입되면 생산 과정에 투입되었던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노동윤리가 이끌어가는 사회에서 소비의 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이행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소비자 사회에서 대량 생산은 더 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빈곤층이 늘어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지에 대한 관심과 정책이 시행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는 현상이 전개되는 이유에 대해서 진단하기도 한다. 소비로 인해 자본가들이 자신의 경제력을 충분히 누리게 되는 조건에서, 빈약한 경제력으로 인해 소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빈곤층이 ‘최하층계급’으로 전락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있다.
경제력을 지닌 이들은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부의 축적을 더욱 늘려 나가고, ‘그 반대편에서 빈곤의 심화가 가속화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절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구성원들을 포용하기는커녕 배제할 수 있는 부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러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역할을 떠맡은 건 상당 부분 빈곤층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의 내용은 ‘근대 생산자들의 사회가 20세기 후반기에 소비자들의 사회로 변화했음을 포착’하여 그 현상과 함께 빈곤층의 문제를 탐구한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과정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불확실할 수밖에 없지만, 현재 상황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 ( https://cafe.daum.net/Allwithbooks )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