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유언』에 이어 세 번째로 읽는 산도르 마라이의 작품이다. 2001년, 2002년에 한권씩을 읽었고, 지금이 2003년이니 1년에 한 권씩 읽은 셈이다. 모두 솔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작가의 다른 책 한 권이 이미 더 나와 있고, 두 권이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지금의 행보대로라면 2006년까지 이 작가의 작품을 일년에 한 편씩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사랑이지만 원제는 ‘Le conversation de Bolzano'로 볼자노의 대담, 쯤이 되지 않을까. 소설의 중반부 이후에 펼쳐지는 장중하고 유려하며 신랄하고 감상적인 독백이 압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베니스의 감옥에서 탈출한 소설의 주인공 쟈코모는 희대의 바람둥이다.
“이기심은 모든 것을 원하고, 사랑하는 남자나 여자를 위해 시간과 돈과 정열과 애정을 바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준 것처럼 믿게 만들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고, 아무 대가 없이 남에게 자신의 영혼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줄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 바람둥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거칠 것 없이 여자들을 희롱했고, 가는 곳마다 염문의 주인공이었으며, 단검 하나만을 몸에 지닌 채 도박판을 전전하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런 남자다. 그가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둥지를 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봉꾼 수사인 발비, 열여섯의 여관종업원 테레자, 이발사인 기우세페와 소통하며 보다 넓은 세상으로의 탈출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쟈코모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여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지. 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행복한 자들이지. 하지만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사는 거야... 그들의 삶은 불행하지만 작가로서는 행복한 자들이어서 오직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갈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점심엔 명사로 식사를 하고, 잠잘 땐 아름답고 통통한 형용사를 품에 안고 자지... 그들은 항상 황홀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형용사와 명사들을 가지고 더듬거나 혹은 더듬대지 않거나, 신음을 하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어찌 되었든, 신이 단 한 번밖에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을 매일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눈먼 열성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이런 자들이 바로 행복한 작가들이야...”
그런데 여관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인 사랑 카운슬링 하고 있을 무렵 그 지역의 영주라고 할 수 있는 프롬므 백작이 그를 방문한다. 쟈코모와 프롬므 백작은 지금은 백작 부인이 된 프란체스카를 사이에 두고 결투를 한 바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백작이 ‘나는 너를 보아야 해’라는 딱 한 줄의 문장, 딱 네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프란체스카의 편지를 가지고 쟈코모를 방문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프란체스카가 쟈코모를 사랑하고 있으며, 이 편지가 바로 그 증거이고, 자신 또한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오늘 아내를 만나 그 사랑의 시작과 끝을 완전히 보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를 죽일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을 곁들여서.
“...나는 질서를 믿고 있기 때문에 반항을 꺾어 버리는 것일세. 질서가 없다면 기쁨도 없고, 질서가 없다면 진정한 감정도 있을 수 없네. 나는 평생토록 사물의 내적인 질서에 위해를 가하는 모든 불평들과 당돌한 반항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리며 살아왔네. 진정한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화도 진보도 없네. 그래, 질서가 없다면 진정한 혁명도 있을 수 없지. 자네와 백작부인 사이의 사랑은, 자코모, 처형에 처할 수도, 성문밖에 거꾸로 매달 수도, 눈 내린 밤에 알몸으로 쫓아낼 수도 없는 반항이어서, 지금 나는 그것을 돈으로 사고 있는 중일세...”
“...작가란 자들은 정말 뻔뻔하게 주저 없이 그리고 때로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순결한 실체를, 단어들을 종이 위에 적어나가지. 입맞춤 그 자체는 언제나 순결한 것이지만, 입맞춤에 대해 말하는 단어는 언제나 불순한 법일세...”
책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당받고 있는 이 부분에서 늙은 프롬므 백작은 연적이기도 한 쟈코모를 때로는 어르고 달래며 때로는 위협하고 때때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사랑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사회경제정치적 권력을 지닌 프롬므 백작과 유일한 사랑의 권력을 지닌 쟈코모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통해 폭발직전의 긴장감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한다.
“...끝까지 가보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밧줄을 타고 감옥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일세...”
“...그녀에게 알려주게, 쟈코모. 그녀에게는 운명이 정해준 바로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네는 한순간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라는 것을. 자네와 함께할 수 있는 삼이란 불가능한 것이고, 자네는 삶의 풍경 위를 스쳐가는 밤이면 폭풍이며 질병이란 것을... 몇 시간의 짧은 순간 동안 백작부인에게 자네의 모든 비밀을 전해주어 아침이 되면 그 비밀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는 추억으로 남도록 만들라는 말일세...”
프롬므 백작이 떠나고 쟈코모는 준비를 한다. 성에서 있는 가면무도회에 참가할 복장을 선택하고 프란체스카를 만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여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프란체스카. 그녀는 성에서 그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직접 쟈코모를 방문한다. 그리고 길고 긴 사랑의 고백을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만족해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는 쟈코모. 결국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쟈코모가 대답하는 순간 프란체스카는 뒤돌아선다.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 프란체스카는 그것으로 됐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자코모에게서 떠나간다.
(난 이 부분에서 책읽기를 잠시 멈추었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만 소설과 연결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여관문을 나선 프란체스카는 칼을 맞고 죽어간다. 그리고 쟈코모로 분한 나는 그녀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또한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 또한 프롬므 백작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게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난 깨어났다. 제길 너무 통속적인 꿈에 통속적인 스토리 아닌가.)
하지만 다행히도(?) 소설의 결말은 나의 꿈과는 다르다. 프란체스카는 무사히 성으로 돌아갔을 터이고, 쟈코모 또한 사랑에 대해 넓어진 식견을 가지고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롬므 백작에게 긴 편지를 남긴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흰색은 피의 검붉은 색으로부터 장례의 검은색까지 모든 색깔들을 포함한 색이라고 합니다... 연애는 눈처럼 흰 것입니다. 각하, 하지만 연애는 이 세상 남자들에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의미하는 모든 색깔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각하는 평화와 치유를 원하셨고, 프란체스카가 사랑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고결한 남편 곁에서, 어떤 추억이나 그리움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소원은 이제 이루어졌고, 저는 제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존재는, 욕망과 번민의 은밀한 시트와 신비스러움의 베일에 쌓여 있는 동안에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요절하지 않으려면 독약 같은 현실을 견뎌낼 수 있도록,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해독약을 복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무관심입니다...”
조금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몰두하면 사랑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