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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정우, 혜린, 태일. 그들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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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정우, 혜린, 그리고 태일. 이 네 명의 이야기다. 이 네 명의 책 읽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 넷 중 둘은 소설 속 인물이고, 둘은 실제 인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은 실제 인물이기도 했고, 실제 인물은 또한 소설 속 인물이기도 했다. 모두 한국 현대사 속의 인물들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의 책 읽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게 바로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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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 혜린, 그리고 태일.

이 네 명의 이야기다. 이 네 명의 책 읽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 넷 중 둘은 소설 속 인물이고, 둘은 실제 인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은 실제 인물이기도 했고, 실제 인물은 또한 소설 속 인물이기도 했다. 모두 한국 현대사 속의 인물들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의 책 읽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게 바로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준은 최인훈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이다(독고준). 또한 준은 최인훈의 또 다른 소설 『광장』의 명준이기도 하다. 정우는 김승옥 소설 『환상수첩』의 주인공이다. 마찬가지로 이름은 달리 나오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과도 다를 바 없다. 혜린은 전혜린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1970년대 베스트셀러의 저자다(번역가였던 그녀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고 책은 그녀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태일은 다름아닌 전태일이다. 1970 11 13. “나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한, 전직 미싱사. 그는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에 관한 책은 남았다(『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먼저 나왔던 『전태일 평전』). 모두 살아 남지 못한 자들이다.

 

준은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청년들의 고민을 의미한다. 정우는 4.19 5.16을 관통하면서 청년에게 강요했던 침묵을 상징한다. 혜린은 그 시기 두 개의 언어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여성 문제의 상징이다. 태일은 노동과 국가, 법 사이에서 희생당했던 노동자의 이야기다.

 

이 책이 이들 네 명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1940년대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던 문화(당연히 정치까지 이어지는)의 모순성이다. 월급의 수준을 훨씬 넘는 세계문학전집을 할부로 들여놓는 가정의 모습에서, 가격을 대폭 낮춘 삼중당 문고가 등장하면서 뒷주머니에 책을 넣고 데이트하는 모습에서 읽을거리에 대한 갈구와 함께 지적 허영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 읽는 세계에 대한 환상과 희망(한국이나 외국이나)과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좌절은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인 것이었지만, 우리의 그 시기에는 더욱 절박했고, 더욱 생생했다. 국가는 책을 읽으라 했지만, 또한 책 읽는 사람을 경계했고, 탄압했다. 모순의 시대에 사람들은 책을 읽었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고, 내가 책을 읽기 전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들을 대체로 잘 안다. 나아가 어쩌면 생생하게 기억하는 듯도 하다. 문화적으로 중심부에 비해 지체된 지역에서 나고 자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타당한 이유를 들자면 이 이야기들을 나는 이미 대부분 책으로, 조금은 풍문으로 다 듣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내가 시대와 시대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책에 길이 있다는 말을 사기라고 했다. 맞다. 책 속에 길은 없다. 그러나 길은 만드는 것이다. 그 책에 만약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간다면 길은 금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길은 책에서도 만들고 현실에서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좌절 속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믿는다. 평생 내어야 할 길이다.

 


YES마니아 : 골드 이달의 사락 n*****m 2017.04.24.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