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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나요?
A. 음, 도서관의 햇빛이 문제였어요. 가끔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있다 보면 대책없는 욕망에 불끈 하거든요. 창가의 햇살과 훌륭한 날씨가 제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게 하더군요. 멀쩡히 읽어야 할 책을 조용히 읽고 있다가, 철학이나 역사 혹은 문학, 사회과학 등의 서가들을 방황하다가는 즉흥적으로 책을 몇 권 골라오고 말았지요. 사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고질병 중 하나이긴 해요. 그것이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였어요.
Q. 참, 무계획적이고 무책임하게 독서하는군요. 그래, 그렇게 해서 이 책을 다 읽긴 읽었던 모양이네요. 『중국의 자유전통』이라... 제목이 미묘한 느낌을 주네요. 당신 책 표지에 “신유학사상의 새로운 해석”이란 부제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신유학에 ‘자유’가 담겨있다 혹은 신유학 사상은 이미 ‘개인’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란 함의를 담고 있는 것 같네요. 맞아요?
A. 아, 정말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아요.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핵심을 찌르셨어요. “자유주의적 신유학사상”(151쪽)이란 말이 이 책 저자의 핵심적인 메시지에요.
Q. 흠... 그렇다면 시어도어(theodor)가 그런 논의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이랄까? 뭐, 그런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든가요?
A. 시어도어라... 참 친근하게 부르시네요. 암튼 그의 방식은 저에겐 생경했어요. 비록 용어상의 문제입니다만....‘관념사학’이 그 방법이레요. 미국 철학자인 러브조이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라고 하는데, 복합체인 사상의 독창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단위관념(unit idea)의 배열을 새롭게 하는데서 생겨난다는 전제 하에서, 어떤 복합관념을 단위관념의 수준까지 분석-분해 한 후, 그 단위관념의 용법-용례들이 갖는 함의를 통해 전체상을 그려보는 그런 방식을 말하는 듯 하더군요. 주로 어떤 사상체계에서 사용되는 기본적인 개념들이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의 범주가 어떤 것이었을지를 통해서 그 사상의 대체적인 함의를 드러내 주는 방식? 뭐, 그런 것 같아요. 일종의 사상체계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 및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를테면 시어도어는 각 장별로 몇가지 핵심개념들을 가지고 “신유학=자유주의적 요소”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道統, 爲己之學, 博學, 自任於道, 自得등의 개념이 그런 요소라고 말하고, 향약과 유학자들의 講學에서 특징적인 상호호혜와 부조의 정신이 또한 ‘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하지요.
Q.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방금 전에 말한 것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A. 책의 내용을 대폭 도려내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대강을 말하자면 이런거에요. 음...이를테면 道統관념 같은 경우는 어떤 사상적 조류에서 일가를 이룬 한 ‘개인’에 대한 추존 아니겠어요? 이 개념은 암묵적으로 한 개인이 전통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의 입장을 정리해 그에 대해 일가를 이루어, 세계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는 과정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서 개인은 어떤 전체집단 속에 용해되어 있다고 말하긴 힘들겠죠. 爲己之學도 그래요. 爲人之學(남을 위한 학문 : 보다 정확한 의미로는 타인에 대한 의식과 허영으로서의 학문. 또는 남보다 좋은 위치나 관직을 얻기 위한 학문)과 대립되는 용법으로 주자학에서부터 쓰인 爲己之學이란 개념은 교육에 있어서의 교육받는, 배우는 주체의 자발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또한 신유학에서 博學에 대한 일반적인 강조는 규정된 텍스트, 즉 경전 위주의 수동적인 전통의 주입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할 수 있을테죠. 광범위한 영역과 타인들을 참조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으로, 즉 위기지학의 맥락에서 요구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自得해야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신유학은 그 사유방식에 있어서나 그것과 직결되는 실천에 있어, 도덕적-문화적 개인주의에 바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성인에 대한 추존은 일종의 영웅주의를 내포한다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의 모세의 10계명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같은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도덕적 영웅(이런 영웅이란 개념자체가 개인적인 거죠)으로 스스로를 세우기 위한 일종의 모범으로서 요구되었던 것이겠죠.
이런 영웅주의는 단순히 士계층의 엘리트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해요. 명대 양명계열의 철저한 토론위주의 강학, 구어식 학습이라든지 황종희의 민중을 위한 교육개혁에 대한 문제제기는 바로 이런 영웅주의가 사회전체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가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신유학에 의한 계몽으로 기획된 향약의 윤리규준으로 삼강오륜 따위가 단순히 특정 법질서에의 복종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중요해요. 부자유친이라고 했을 때, 그건 물론 비대칭적인 두 사람을 상정해 놓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명령-복종의 일방성이 아니죠. 상호호혜를 둘의 내재적인 관계 속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라”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 있어서의 상호적인 인격존중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보았을 때, 이 방식은 어떤 주체의 윤리적인 결단을 스스로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서양식 개인주의와는 다르게 상호성의 맥락에서 항시적으로 관계를 생각한다는데 중국적(동양적) 특성을 갖는 것이죠. 중국적 자유주의?
Q. 그렇군요.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그런데, 계속 ‘신유학’이라고 말하는데, 저의 이해로는 신유학은 보통 二程子에서 매개되고 朱子로 집대성된 경향, 즉 주자학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흔히 중국 사상사에 있어 개인의 등장, 즉 근대의 출현을 말하는 논자들은 흔히 ‘마음’을 강조하는 명대의 양명학적 조류에서 찾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논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A. 사실 ‘신유학’(neo-confucianism)의 범주란 매우 논쟁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객관주의 주자학 - 주관주의 양명학이란 대립과 단절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그 둘의 공통성 속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이 개념이 포함시키는 내용은 달라질 테니까요. 저자는 송대 이후 출현한 사상적 운동의 근본적인 정신과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주자학은 주지적/이론적이고 양명학은 주정적/실천적이란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학파들의 전체적인 면모를 은폐시켜 버리는 폐단이 없지는 않죠. 왕양명 이후의 흐름이 배움을 도외시한 것이 절대 아니고 주자가 실천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죠. 그런 점에서 이렇게 일단은 통합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도 의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차이의 도식을 강조하다 놓치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면, 먼저 거시적인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파악한 이후 차이를 말하는 것이 보다 낫죠.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도식을 전제하고 양명부터 개인과 근대를 말하는 방식은 별로 마음에 안들어요. 그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주자학에서의 내면에 대한 응시는 가히 편집증적일 정도인데 왜 여기서부터는 도대체 개인일 수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게 되거든요.
시어도어는 송대부터 명말청초의 황종희까지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 속에서 파악합니다.
Q. 책의 내용에 대한 얘기는 이쯤으로 하고 전 당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군요. 당신은 서양인의 중국사상에 대한 몇 가지 저술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던 것으로 압니다. 대체적으로 외부인의 필요에 따라 지들 관념에 따라 멋대로 상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은 어때요? 시어도어가 마음에 들었나요?
A. 아, 그들이 ‘멋대로’ 해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들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 대해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고, 모두 근거를 가지고 해석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단지 저는 그들(서양인-백인-교수)의 입장을 다른 관점(한국인-유색인종-학생)에서 그들의 논의에 느껴지는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고, 따라서 만일 중국사상을 바라본다면 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갈 것이다란 생각을 막연히 해볼 따름이죠. 그리고 시어도어도 제가 읽었던 그들과 별로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책 읽으면서 그저 그랬죠. 새로운 듯하지만, 딱히 뭐 별 다른 것 없는 싱거운 얘기 같거든요. 서문을 읽으면서 이 사람의 전개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고, 따라서 독서도 한 반나절 정도 지나서 그냥 그렇게 끝나버렸죠.
Q. 아니, 자꾸 ‘그들’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요? 당신이 읽었던 서양인 동양학자라면 기껏해야 핑가레트, 크릴, 앤거스 그래이엄 정도 밖에 안 되잖아요. 그 세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A. 음 일단 앤거스 그래이엄은 일단 제외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를 딱히 반박할 만한 점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시사를 주는 곳도 있고, 일단 서구학계에서 중국고문에 있어 최고권위자 중에 한 사람이며, 그의 글을 읽으면서는 그런 실제를 확인할 수도 있었거든요. 무엇보다도 그의 경우는 자신의 현실적인 의도를 다른 사람보다는 노골적으로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노련한 것 같아요.
Q. 그래요? 그러면 이번 독서에서 시어도어에 대한 당신의 볼멘소리를 들어보고 싶군요.
A. 현실적인 의식(어쩌면 정치적인)을 가지고, 문헌을 해석해 내는데 “근대-개인”이란 연결고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이들에 대한 불만의 요점이에요. 물론 저는 정치적인 의식을 괄호치고, 순수히 학문적이어야 한다는 그런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불가피하고 어쩌면 공부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저의 회의와 의심은 “근대-개인”이라는 현실과 문헌을 연결하는 고리자체에 있어요.
예를 들자면, 크릴은 『공자 ― 인간과 신화』란 책에서 ‘민주주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개인의 책임’, 교조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경험적 지식관’, ‘민주주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외침’ 으로 ‘Confucius’의 이미지를 덕지덕지 칠해 놓았죠. 이 사람의 문헌적 고증능력과 그 문헌인용의 방대한 분석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습니다만, 그는 한 인물의 전기를 구성하면서 단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현실에서의 가치적인 모범을 공자에게서 재발견하겠다는 의도로 접근한 것처럼 보일 정도에요. 서양에 사는 중국학 전공자로서 그의 지식은 자기 문화의 정당화의 일례로 한명의 이방인(타자)을 흡수시켜 버린 것이죠.
핑가레트의 『공자의 철학』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 같았어요. 이 사람의 경우는 참으로 철학적 해석의 탁월함을 보여주었죠. 그 눈부신 능력은 저에게도 참 많은 가르침을 주었어요. 그런데 그는 공자를 크릴과는 다르게 “근대-개인”의 안티테제로 만들었죠. 기독교적인 내면, 즉 개인이 부재한, 공동체적이며 그 관계들을 통해 외화된 인간이 그의 공자였어요. 그는 근대-개인을 비판하기 위한 위치에서 철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일정정도 그의 논의는 서구인들 사이에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논쟁의 맥락에 위치하는 산물일 것 같아요.
두 인물 모두 ‘근대-개인’이 자기현실 (가치)의식에 어떻게 접속되느냐에 따라 문헌해석의 방향을 결정짓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시어도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국수적인 서양인들이나, 그들을 추종하는 동양인 교양속물의 세계주의처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방식의 무식한 언설과는 거리가 멀어요. 중국 또는 동양의 성격자체를 보수적인 것, 정체된 것으로 단정 짓고, 서양의 근대화를 추종하는(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노골적인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을 비판하죠.(이건 크릴이나 핑가레트에게도 마찬가지죠.)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에서 긍정적인 차원을 갖는 ‘자유주의적’ 요소의 공통점을 발견하려 노력합니다. 동양, 중국의 시스템이 갖는 자체적인 역동성을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논의가 전혀 새로울 것도 없고 밍숭맹숭한 맛을 주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하나의 전통으로서의 유학=보수”라는 등식은 국수적인 서양인들이나, 근대적인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자라온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정서일는지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유학에서 근대성 또는 개인을 발견하려는 시도 역시 한국, 일본, 중국 등의 유학전통을 갖고 있는 국가들의 학계에서는 이미 마치 당연한 공식처럼 진척되어 왔던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시어도어의 입론이 서양인 학계에서 나름의 참신성을 가질 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읽혔을 때는 뻔한 논리의 반복인 셈이죠. 물론 그의 시각과 준거로 내미는 개념이 동양학계에서 주장하던 구체적 준거점들을 확장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문제는 ‘근대=개인’ 또는 시어도어에게는 자유주의로 표현되는 고리가 왜 중요한가에요. 동양인 학자들의 그런 노력은 서양과의 동등성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주체의 정립과정이었죠. 유감스럽게도 그런 방식으론 타자와 같아지기 위한 종속적인 주체형성이란 혐의나 굴레를 그것은 벗어날 수 없어요. 시어도어의 서양과 동양의 보편성을 찾기 위한 존경스러운 노력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지극히 존중하는 서양인이란 점에 있죠. 그의 말을 읽어드릴까요? 다음처럼 말하고 있어요.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민주적 제도가 아시아에서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고 부적당하다는 견해는, 우파든 좌파든 아시아의 모든 독재적인 통치자들에 의해 악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런 몰이해로 인해 야기되는 위험들(서로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차이점과 유사점들을 면밀히 분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야기되는 위험들)은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발전상에 의해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9쪽)
이 구절에 대한 음미에서 그리고 그가 <제5장 에필로그="" :="" 현대="" 중국과="" 자유주의의="" 한계="">에서 밝힌 견해들을 음미해 보면,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어도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신봉자에요. 휴머니즘이란 말을 붙인 이유는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의 논리보다는 인간화된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죠. 어쨌든 이것이 그의 가치와 시각을 결정하는 근본구조이죠. 그리고 그의 분석에서 떨떠름한 느낌을 쉽게 지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중국의 사상전통 속에서의 자유주의의 ‘발굴’이란 그의 작업이 서양과 동양을 하나의 보편성 속에 묶는 동시에 그것이 서양적 가치의식의 진작을 위한 서양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말해지고 있다는 혐의가 들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독재”라는 방식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시도를 평가 절하하는 그의 논의를 들으면서 별로 유쾌한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중국의 실패는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여 왔던 자유주의적 신유학사상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던 때문이란 식이 되니까요.
연구자들의 특유의 사회적인 각인(또는 취향)을 근거로 외부로부터 텍스트 해석에 근시안적인 가치평가와 이상을 부과하는 식으로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서는 약간의 학자적 양심으로 자기관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조정을 시도하죠. 역시 약간의, 꼬리말을 단서로 논문에 달아놓는 식으로요. 주먹구구식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거기에서 느낀 이미지들을 비교적 일관된 논리로 꿰어 맞추는 작업이 논문쓰기가 되는 셈이죠.
Q. 오호. 과격해졌군요. 그렇다면 그런 비판을 하는 당신께서는 어떤 다른 방식에 대한 가안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비판은 자신의 원근법적인 위치나 그 한정된 위치로부터 파생되는 가치평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정당하지 않을까요?
A. 흐흐. 아픈 곳을 찔러 버리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면서 조금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였죠. 그러나 아무런 해답도 안나오더군요. 그런데 일단 저는 학생이고, 초보 실험자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비겁한 상황논리로 약간의 변명을 하고 싶구요. 대충 저의 앞으로의 사고방향에 대해서만 말씀드릴께요.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가치판단을 괄호치고 텍스트 자체에 대한 꼼꼼한 천착을 통해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가치판단은 행위하기 위해서 인식한다고 믿는 저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성이란 것을 저는 믿지 않아요. 흔히 기만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죠. 문제는 그런 가치판단을 제약해 줄 구조나 조건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란 것입니다. 시어도어의 경우, 자신의 방법을 관념사학이라고 밝혔습니다만, 이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단위관념들을 자기가 해석하는 차원에서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개념으로 번역하여 조립한다는 것. 결국 자기 가치를 텍스트에서 재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텍스트를 해석해 내는 과정에서 텍스트가 깔려져 있는 전제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 제약 위에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어떤 사상적인 발화가 일어나는(하나의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조건자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근거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Q. 당신의 말은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그럴 듯하고 당연하게 들려요. 그런데 당채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 텍스트가 깔려져 있는 전제조건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거죠?
A. 식은 땀이 흐르는군요. 이제 그만 당신께 “난 아무것도 모르겠소”라고 솔직히 손들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네요. 그것에 대한 답변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할께요. 지금까지 이렇게 횡설수설한 것도 저에겐 무리한, 무례한 짓거리였어요.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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