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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를 예리하게 분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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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상실의 시대]로 처음 하루키를 만났을 때나 최근에 [1Q84]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을 때나, 하루키는 항상 내게 친근한 작가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왜 하루키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읽은 양보다 하루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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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상실의 시대]로 처음 하루키를 만났을 때나 최근에 [1Q84]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을 때나, 하루키는 항상 내게 친근한 작가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왜 하루키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읽은 양보다 하루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이유를 한 단어로 이야기하라면 '친근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삶에 지친 저녁 날 공원에서 친구와 함께 앉아서 서로 이런저런 지나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같은 편안함이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진다. 마치 내가 겪었던 아픔과 고독, 상실을 친구에 입에서 듣는듯한 묘한 친근감이 그의 소설에서 느껴진다.


 

 

그럼에도 최근에 읽은 [1Q84]에서는 나도 조금  당황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때는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들이나, 결말이 아닌 것 같은 결말로 인해 조금 화가 날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에 대한 친근감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갔었다. 그런데 [1Q84]에서는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공기번데기는 무엇이고, 리틀 피플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특히 끝난 것 같지 않은 결말이란... 혹시 후속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

이런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하루키에 대해서 더 잘 알게 해 주는 책을 만났다. 일본 평론가 가코 노리히로가 쓴 하루키에 대한 평론집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라는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하루키가 등단 때부터 일본 기성 문학으로부터 많은 배척을 당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상실의 시대]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까지 인기를 얻자 그에 대한 비판은 사그러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지식인 층에서는 여전히 하루키를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하루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다섯 시기로 나누지만 주요한 흐름은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는 전기 작품 활동 시기인데, 이 시기를 '개체의 세계'라고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양을 둘러싼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 있다. 저자는 이 시기에 하루키의 문학의 가장 강한 색채를 '부정성'으로 보았다.  한국도 민주화 운동의 시기가 있었지만, 일본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전공투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루키의 이 세대의 출신이었고, 이런 전공투 운동이 우치게바(일본 신좌익 학생운동이 내부 분열로 인해 서로를 죽이면서 몰락해 가는 시기)로 몰락 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민주화 시기 이후 문학을 갈피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화 다음 단계에는 문학의 시련이 온다. 모든 근대 문학은 사회가 풍요로워지는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이 시련에 부딪힌다. 기존 형태의 부정성으로는 문학이 더 이상 생기발랄하게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사회적 전환점이 오고 만다. 이는 어떤 사회에서도 불가피한 것이고, 문학적으로도 보편적인 일이다. 이때 기존의 부정성에 의존하지 않고 또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새로운 - 또는 '진지한'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면 진지한 - 문학을 생성할 것인가 하는, 즉 포스트모던기의 질문이 대두되는 것이다." (P 48)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대한 '부정성'이 하루키 작품 전반에 흐른다. 하루키가 소설을 쓰던 시대는 하루키의 기준에 의하면 이상과 목표도 사라진 자본주의 시대에 의해 삼켜진 시대이다. 그러기에 하루키의 소설에는 시대를 향한 '부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하루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작가로서 일본의 유명한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를 든다. 무라카미 류는 이런 시대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문장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다. 여기 하나의 밤의 퇴장과 아침의 도래가 있다. 무라카미 류는 그것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가득한 아침이 도래로 그렸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겁고 어두운 밤의 퇴장으로 이야기한다." (P 49)

이렇게 작가에 대한 하루키의 '부정성'에 대한 설명을 듣자, 그제야 그의 작품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왜 하루키의 작품에서 세계가 둘로 나누어지는지, 왜 지나간 시대에 대한 상실감이 존재하는지, 왜 물질주의 사회, 조직사회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는지가 이해가 되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기가 절대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자 사람들은 이상이나 꿈 대신 현실을 좇기 시작했다. 이제는 국가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인 성공이 전부인 세상이 되었다. 젊은 시기에 이 두 시기가 교차점을 산 하루키가 이런 괴리감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하루키의 문학에 나타난 상실의 모티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는 '쌍의 세계'라고 불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이나 [태엽 감는 새 (원제 :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같은 작품이 있다. 이 시대에서는 하루키 작품에서 혼자였던 주인공이 아내나 연인이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사라지고, 주인공은 그 여성을 찾아 헤맨다. 특이한 것은 하루키 소설에서 여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주 모호하다는 것이다. 흔히 소설에서는 다른 세계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는 주인공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이다. 혹은 잠시 들어갔다가도 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저승의 세계로 보고 있다.

"1987년에서 1999년에 이르는 시기로, 디태치먼트 공간에서 추방당한 주인공이 있을 곳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연애소설이 생겼고(노르웨이의 숲), 그것이 마침내 실종된 아내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역사적 관심의 부상(태엽 감는 새 연대기)으로 이어진다. 지표는 주인공이 '쌍의 세계'에 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주인공 '나'는 전기와 전혀 다르게 기본적으로 커플을 구성한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했으며, 연인이 먼저 죽거나 실종되어 잃어버린 상대를 찾아 떠난다." (P 128)

또한 한신 이와지 대지진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등을 계기로 사회성이 있는 작품과 역사성이 있는 작품을 많이 등장하고, 초기 작품에 등장했던 중국에 대한 모티브도 다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태엽 감는 새]이다. 이 작품에서는 중일전쟁에 대한 언급과 함께 인간의 폭력성까지 언급된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하루키 소설의 중기적인  특징이 전기와 마찬가지로 하루키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에서는 마치 평행이론처럼 두 세계가 나누어지고, 아내나 연인이 다른 세계로 사라지며, 그 상대를 찾아 헤매는 것이 하루키 소설 전체에 나타나는 흐름으로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향이 하루키의 젊은 시절에 경험이 강력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젊은 시절 그가 경험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별과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하루키 내부의 시각이, 하루키의 소설의 세계관을 형성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 본다.

 

후기는 '아버지와의 대치'시기로 불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해변의 카프카]등과 같은 작품이 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주인공의 자신이 사귀는 여성의 아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와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주인공이 구원을 받는 형식들이 등장한다. 하루키가 말년에 아버지와 화해했듯이 작품 속에서도 나이 든 남성과 어린아이가 만남과 갈등, 화해가 등장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아픔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 책은 단지 하루키뿐만 아니라, 일본 문학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하루키가 차지하는 위치 등을 알게 해 주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키의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면서, 그동안 구입만 하고 읽지 않았던 하루키의 책에 대한 독서 욕구가 다시금 강렬히 자극해 주기도 한다. 하루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i*******3 2017.05.11.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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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을 아무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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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이라는 부사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아무튼'으로 바뀌었던 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한글 철자를 배웠던 세대이니만큼 '아뭏든'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 채 번번이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쓰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뭏든'을 '아무튼'으로 잘못 썼다가 호되게 손바닥을 맞았던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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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이라는 부사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아무튼'으로 바뀌었던 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한글 철자를 배웠던 세대이니만큼 '아뭏든'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 채 번번이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쓰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뭏든'을 '아무튼'으로 잘못 썼다가 호되게 손바닥을 맞았던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철자부터 다시 배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나의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아무튼'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던 시기에 하루키를 만났을 것이다. '전혀'라고 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당시에는 상실의 시대)>이었다. 그동안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일부러 멀리 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1톤쯤 밀려오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 족족 죄다 구해 읽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기존 작가들과 구별되는 '뭔가'가 있었다.

 

"애당초 일본의 근대에서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분류하는 기준은 이 부정성의 유무, 문학이 부정성에 의해 구동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예고했던 것이 2, 3년 지나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p.93)

 

문예평론가이자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인 가토 노리히로의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를 읽으면서 나는 하루키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뭔가'를 이제서야 찾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음직한 공통의 경험이 있다. 소위 교양과 격식을 중시하는 모임에서는 자신이 하루키의 팬이라는 사실을 숨기게 된다거나 대화의 주제로 하루키의 작품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대중에게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어느 소설가보다 인기가 있다는 것도, 다른 어느 소설보다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다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루키는 그저 대중에 영합한 젊은이 취향의 문학, 대중의 기호를 반영한 상업적인 소설만 쓰는 인기영합주의 작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음은 물론 정작 하루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결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문학을 이분하는 문학관, 거기에 돌을 던져주자."는 모티프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루키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현대 지식인과 문학가에게도 하루키가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행동의 기준을 통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모럴의 부정성이 가사 상태에 있는 시대에 그나마 그 부정성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저항의 디태치먼트,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맥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p.116)

 

저자는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했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시기별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로서 때로는 깊고 전문적인 설명과 상징물에 빗댄 표현들이 많지만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라면 이런 비유들이 오히려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썼던 많은 소설들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비교하고 분석하며 서로를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각각의 소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하루키 자신은 소설가로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는 카탈루냐에서 앞선 내용과 같이 말한 후 '손상된 윤리와 규범의 재생'은 우리 모두의 일이지만, 언어에 관련된 자들도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윤리와 규범을 새로운 언어와 연결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생기에 찬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워 키워가는 것이 자신들의 일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55)

 

오늘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이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봉하마을의 추도식 현장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었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라면,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 말하자면 전체주의와도 같은 구시대적 유물 속에서 살았다. 자포자기의 니힐리즘에 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규칙을 만들고 소중히 지켜왔던 게 아닐까. '아뭏든'을 온전히 '아무튼'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우리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들, 결코 지워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너무 많다. 지금의 대통령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크다. 아무튼.  

s*****l 2017.05.23. 신고 공감 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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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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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는 요즘인데, 반갑게도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신간을 두 권이나 발견하고 얼른 주문한 후 참지 못하고 이 책부터 펴 들었다. 저자는 하루키 작품에 부당하게 덧씌워져온 '인기 대중소설'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한중일 지식인들이 무시 및 폄하해온 역사를 지적하며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어렵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초, 중, 후기로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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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는 요즘인데, 반갑게도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신간을 두 권이나 발견하고 얼른 주문한 후 참지 못하고 이 책부터 펴 들었다. 저자는 하루키 작품에 부당하게 덧씌워져온 '인기 대중소설'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한중일 지식인들이 무시 및 폄하해온 역사를 지적하며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어렵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초, 중, 후기로 나누어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문제의식에 공감하다보니 책장 넘어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상 하루키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때문에 정작 독자들이 제대로 읽지 못했을 장편 "태엽감는새 연대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빵가게 습격'과 '빵가게 재습격' 등 단편 등 하루키 작품세계 전반을 꿰뚫어 다루고 있는데 저자와 내가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비슷해서 더욱 즐거운 독서였다. 게다가 하루키와 동시대인으로서 일본 사회상과 문학계 풍토를 잘 이해하고 있는 저자가,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디태치먼트, 커미트먼트와 조합하여 분석해 읽어주고 있어서 앞으로 하루키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를 연상 시키는 "태엽감는새 연대기"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가해자는 비교적 쉽게 잊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오래 오래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등 저자는 평론가로서의 전문성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루키 작품 전반을 깊이 이해하고 전문가 답게 날카롭게 분석한 책이기에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특히 하루키 초기 3부작 등 전기 작품이 왜 혁신적이었으면서도 일본 문단의 외면을 받았는지 드러내는 부분이 꽤나 흥미로웠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키는 '부정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루키가 근대 문학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가 매끈매끈한 긍정성, 부정과 감추는 점 없는 투명함을 지향한다는 미학을 저작에서 계속 드러내고 있는 한병철 교수님을 이 저자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둘의 관점이 일치하고 있다. 하루키는 전공투처럼 진지한 이념 싸움 이후 다가온 '상실 내지는 공동화' 현상이 불러오는 허무감을 배경으로 전기 소설 속 주인공들을 긍정적인 자폐 세계로 보냈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사람들은 반대하고 싶은 이념과 그에 따른 행동 목표가 명확했고 그에 대해 희생을 불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한 목표를 잃는 동시에 자본에 포섭되면서 '즐거운 게 뭐가 나빠'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선호하다가 급기야는 자신을 허무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격률로 가득한 자폐 세계로 숨어든다. 이제 전투는 내면에서 이어진다. 다소 길지만 관련 내용들을 옮겨둔다.

"부정성에 귀 기울이다


... 그러나 이 작품('뉴욕 탄광의 비극'~ 일본 전공투 이후 '우치게바'의 비극- 작성자 주)에서도 무라카미의  반시대적인 시대는 명백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의 고독한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부정성이 이미 헛돌다 스스로 무너지고 의미를 잃은 가운데, 그 몰락의 나락까지 함께하는 것, 거의 들리지 않는 부정성의 절망에 찬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커미트먼트이다. 커미트먼트를 시도하려면 전투 자체가 디태치먼트(격리)된 양상하에 소위 간접화법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아무도 모르는 채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다." 87쪽.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이 비밀번호에 해당하는 '스토리'가 패러렐 월드로 전개되는 다른 한편, 즉 '세계의 끝'에 있는 '나'의 이야기다. 이쪽은 서구의 중세적인 촌락을 연상케 하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사람은 그곳에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한다. 어느 날, 그 도시를 찾은 '나'는 문지기에게 그림자를 떼어놓고 도시에 들어가 '꿈 읽기'라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그 세계는 리얼한 세계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나'의 뇌 속에서 전개되는 버추얼한 가공 현실, 안으로 닫힌 뇌내 세계다.
'세계의 끝'은 부정성이 없는 정상적인 세계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끝내 자신의 일을 통해 이 세계의 구조를 깨닫는다. 떼어낸 '그림자'의 작용도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모순과 부정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에 들어올 때 그것은 '그림자'로 떼어냈다. 생의 갈등으로부터 단절된 부정성, 즉 '그림자'는 독방에 갇혀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죽어간다. 일상에서 생성되는 갈등과 모순은 한데 모여 벽 밖에 떼 지어 서식하는 일각수의 뇌에 버려진다. 일각수는 세계의 모순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순종적으로 죽어간다. 그 두개골에 유기된 모순, 꿈, 부정성을 '꿈 읽기'라는 일을 담당하는 자가 전기를 대지에 방출하듯이 '읽어내' 대지로 돌려보낸다
...'나'는 망설인 끝에 결국 자신은 여기에 남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자'의 근대적 부정성에 입각한 주장- 세계의 부정한 구조에 가담하지 마라-에 대해 '나'가 자신은 자신의 내폐적 세계에 가담하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반대 주장으로 대치한다는 점이다." 106-108쪽.


이와 같이 하루키 전기 소설들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가 자신을 지키는 방식은 철저한 자기 규칙 따르기였다. 이는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칸트의 맥심을 연상시킨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기 규율을 세우는 '나'는 건전하고 성실하면서 쏘쿨해보여서 매력 있는 남자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매사에 '쓸고퀄을 추구하는 오덕'이나 다름 없다. 이들은 타인의 인정에 별로 집착하지 않고, 세인이 별로 관심 갖지 않는 비주류 분야를 깊이 파고들고 자기 만족하면서 의미를 찾고 생존한다. 칸트 미학을 공부해 석사 논문을 쓰기도 했고, 동료샘이 내 생활 방식을 보며 '칸티안'이라고 불러주시곤 했기에 저자가 칸트의 맥심을 가져와 하루키 소설 속 '나'의 특성을 분석해주니 그가 왜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수영할 때마다 생각한다. 칸트도 그 시대에 철인 3종 경기가 있었더라면 하루키처럼 빠져들었으리라고. 달리기, 자전거, 수영 모두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 소극적인 자세는 부정성이라는 '소금'이 맛을 내지 못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가 한껏 내보인 저항의 자세이기도 하다. ("양을 둘러싼 모험"과- 작성자 주) 같은 시기에 쓴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1982년)의 '나' 역시 여자 친구를 떠나보내지만, 자기 나름의 주장을 관철함으로써 마음의 댐이 붕괴되지 않도록 버티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잔디 깎기라는 아르바이트 일을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꼼꼼하게 깎는 것을 자기 규칙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고 누가 인정해주는 것도, 보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일대일 규칙이며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은밀한 저항과 행동 원리다.
개인적인 규칙을 엄수하는 것이 어떻게 근대적 부정성이 효력을 잃은 시대에 저항이 될 수 있는지는 앞서 잠깐 언급한 칸트의 논리를 도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든 적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정언명제를 모럴(도덕), 한 사람의 개인에게만 부과되는 규칙을 맥심(격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신에게 맥심을 과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게 되지만, 맥심은 나아가 만인용 규칙, 즉 모럴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에 이렇게 썼다. "당신의 맥심이 늘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도 타당하다는 것을 유념하고 행동하라."
모두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되는 모럴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거에는 신에게서 온다고들 생각했지만 칸트는 인간에게서 온다고 했다. 칸트는 우선 개인용 규칙이 있고, 그다음 그것이 만인용 선의 기준으로 성장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라카미는 이를 역전시키나. 만인용 선의 기준인 모럴-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등의 부정성의 원천-이 효력을 잃고 사람들에게 버려진 시대에는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행동의 기준을 통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모럴의 부정성이 가사 상태에 있는 시대에 그나마 그 부정성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저항의 디태치먼트,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맥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115-116쪽.


이렇게 쏘쿨하게 자기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나'가 주인공이었던 전기에서 중기로 이행할 때, 하루키 자신이 그 유명한 95년 두 사건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살포 사건' 이후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밝혔듯 디태치먼트에서 벗어나 커미트먼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책 저자는 전기가 '나'를 주인공을 설정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로 없어진 지인을 찾다가 상실한 채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중기부터는 부부나 연인 등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사라진 파트너를 찾아 다니는데 이 평범한 주인공의 투쟁은 '우물로 깊이 내려갈 수록 역사와 만나는' 등 사회적인 투쟁이기도 하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해변의 카프카" 이후 후기에는 3인칭으로 변화한 문체를 구사하며 주인공도 성인 남자가 아니라 소년, 여성, 노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더불어 요즘 쓴 소설들은 사회적 관심도 놓지 않으면서 스토리 전개를 작가 무의식에 기대어 흘러가게 둔다는 느낌이 든다는 식으로 저자는 표현한다.

"맥심과의 작별
...('패밀리 어페어'에서 여동생, 여동생의 약혼자와 '나'의 관계 언급하며- 작성자 주) '나'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자기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는 약혼자이지만 가족 중에 그런 남자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겠다는 관용 또는 타협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낀다. 삶의 방식도 화폐와 같아서 병에 담아놓고만 있으면 썩는다. 그는 자신의 맥심에 따른 삶이 완벽한 디태치먼트의 공간을 꽉 채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기도 모르게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여동생 약혼자의 침입에 의해 깨닫게 된다.
이후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나'는 자기 행동 원리가 없는 무방비한 존재로 돌아간다. 그리고 고독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존재가 된다. 한편 디태치먼트를 관철한 맥심의 사도는 바깥 세계와 생기 넘치는 대화를 잃은 망가진 괴물 같은 존재로서 무라카미의 작품 세계에 다시금 등장한다. 다음 작품 "노르웨이의 숲"의 '나'인 와타나베가 그렇고 나가사와가 그렇다." 119-120쪽.




특히 은유에서 환유로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다음 내용은, "1Q84"와 같은 근작들이 구사하는 각종 비유 덕분에 소설을 가볍게 읽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어렵게' 느껴지는, 즉 하루키 작품 세계가 점점 문학적으로 깊어져간다는 저자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된다. 이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대중소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분리된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무라카미의 소설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은유적인 세계에서 환유적인 세계로의 이행이다. 은유적, 환유적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비유의 대표적인 방식이라는 정도로 인식해주기를 바란다. 은유는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이 연관성이 있는 경우이고, 환유는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이 연관성이 없는 경우다..
고도자본주의 사회, 고도정보화 사회가 도래했다는 말이 회자될 즈음부터 우리의 경험은 머리와 마음과 몸이 따로따로 세계와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 기존의 세계, 머리와 마음과 몸이 하나인 세계를 은유적이라고 하고, 따로따로가 된 세계를 환유적이라고 하겠다." 222-223쪽.


무라카미 하루키론 전문가인 저자는 하루키가 7년 주기로 장편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면서 2017년 즈음 또 소설이 한 편 나오지 않겠느냐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지난 2월 말 일본에서 무려 그림을 소재로 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출간했기에 예언이 들어맞아 소오름이 돋았다. 우리나라에도 어서 번역 출간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론이 참 재미있었다. 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는 오랜만에 김난주님 번역으로 출간했는데 나는 하루키 관련 서적 번역은 김난주님 번역이 가장 잘 맞는 듯 이번 책이 술술 잘 읽혀서 좋았다. 하루키 수필은 김난주님 번역으로 많이 읽어와서 그런지 문체가 익숙하다. 앞으로도 하루키 서적을 자주 번역해주시길 기대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7.05.03. 신고 공감 4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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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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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대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뭔가, 일본의 대표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진 인물인 것 같았다. 나도 일본 소설 작가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접했으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그의 '상실의 시대'를 읽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상실의 시대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굉장한 베스트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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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대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뭔가, 일본의 대표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진 인물인 것 같았다. 나도 일본 소설 작가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접했으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그의 '상실의 시대'를 읽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상실의 시대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굉장한 베스트셀러였지만 (그의 작품 중 최초의 연애소설이었고 또 상실의 시대, 라는 책의 제목 때문에 더욱 멋졌던) 사실 그 책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다. 처음에 흥미진진하게 시작되지만 끝으로 갈 수록 소설이 해체되는 느낌이랄까?  


지금에야 개인주의가 많이 발달하고, 정신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소설 속에 대거 등장하지만 그 때만 해도 전쟁 이후의 아픔을 극복하고 젊은이들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실패와 좌절, 성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었다. 그런 문학계의 트렌드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정말 - 몽환적이고 환상을 떠도는 느낌이랄까, 주인공들의 내적인 갈등이 평범하고 인간적이진 않았다. 매우 특이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때에 그런 문학을 창조해냈기 때문에 향후의 문학계에 하루키는 상당한 영향을 끼게 된다. 처음에 일본의 문단에서 외면받고, 한국과 중국의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최근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이 책엔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 준다. 그의 작품이 어려운만큼 (책 제목을 보라 !) 책의 해석본을 읽는 것 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상실의 시대와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10대 시절 읽었고, 최근 작품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다. 최근 작품을 읽으면서 어릴 때 그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혼돈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내가 머리가 커서 그런 줄 알았더니 (분명 그 영향도 있겠지만) 그의 작품이 초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많이 달라지고 표현법에도 많은 차이가 남을 알게 되었다. 한 시기마다 작가가 관심있어 했던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저자의 시선이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를 일반인으로서는 잘 모르다가 이 책을 통해 비교 분석하면서 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수확이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느낌이고, 각 시기별로 작가가 어떻게 고민에 대한 정답을 찾아갔는지 짚어볼 수 있었다. 저자는 각 시기별로 하루키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해당 작품을 년도별로 도표를 통해 보기 쉽게 정리해 주었는데 그래서 더욱 이해가 잘 되었다.


최근에 읽게된 다자키 쓰쿠루나 여자없는 남자들같은 경우에는 텅 비어버려 사랑하는 법을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 같다고 느끼는 두 명의 남자가 나오는데, 현대인의 공허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주제에 골몰하며 해답을 찾아가는 하루키의 스타일을 생각해보건대, 다음 작품에서는 더욱 발전된 시각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c*****1 2017.04.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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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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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그의 에세이를 정말 사랑하는만큼 그의 소설은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내가 착각한 부분이 있을까봐 다시 소설 읽기를 시작하였는데,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았다.그래서 기어이 이 책까지 읽었다.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연구한 책.다양한 책들이 나와있었지만,이 책의 제목이 참 와닿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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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그의 에세이를 정말 사랑하는만큼 그의 소설은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가 착각한 부분이 있을까봐 다시 소설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이 이 책까지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연구한 책.

다양한 책들이 나와있었지만,

이 책의 제목이 참 와닿아서, 읽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대답은 찾지 못 했다.

그게 좀 아쉬웠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고,

일본에서 그의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 수 있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YES마니아 : 로얄 y*******n 2018.02.2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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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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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정도면 기분은 괜찮고, 날도 좋다. 드라이빙을 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운전 중 조금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다시 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길은 제대로 든 게 분명하다. 아니, 맞다. 생각해보니, 길가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높이가 일 미터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날이 좋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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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정도면 기분은 괜찮고, 날도 좋다. 드라이빙을 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운전 중 조금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다시 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길은 제대로 든 게 분명하다. 아니, 맞다. 생각해보니, 길가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높이가 일 미터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날이 좋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미세먼지는 - 지난주보다는 덜하지만 - 여전한데 말이다.

2. 나름 잘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기록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븐 레이스 40은 아직도 먼 것 같다. 나이키 러닝은 오늘도 엉터리다. 며칠 전부터 GPS가 말썽인 것 같다. 중반부터 목표지점까지는 순간이동을 했는지, 구간별 기록조차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참아보겠지만, 계속 말썽이면 S 헬스나 다른 어플로 갈아타야겠다. 그래도 메달이 예뻐서, 또 바나나가 나와서 좋다. 이제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인터벌 훈련을 해야 할 듯.

3. 며칠 전 들린 삿포로 내 지하 서점에서,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봤다. 기념으로 살까 했지만, 읽지도 못할 거 같아 기념으로 사진만 찍어 두었다. 문득, 한 선배가 나는 일본어를 배워서 하루키의 소설을 원서로 읽어보겠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난 그냥 - 곧 출간될 - 번역본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4. 하루키의 소설은 전통적인 문학계로부터 외면받아 왔다고 한다.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중국,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등단해야 소설가라 불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OOO라는 말까지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폄하되어온 건 사실이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뒤에서 조종하여 찬사와 칭찬을 비아냥과 험담으로 전락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하루키도 그런 작태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의 저자이자 평론가인 가토 노리히로도 이 점을 지적한다. 하루키의 문학은 그런 냉소를 넘어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말이다.

5. 저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등단 시점부터, 현재까지를 시기별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 다운 심층적인 설명과 상징물에 빗댄 표현들이 많긴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비유들이다. 오히려, 이 자그마한 책에 하루키의 모든 문학적 산물들이 집대성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고.

6. 십 년 전에 읽었던 소설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생각해보니 직전 러닝 대회보다는 1분 이상 기록을 단축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저자는 하루키가 더 세상 속으로, 또 일본 문단계 속으로도 더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밖으로도, 또 안으로도 더 들어가고,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상처받으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 그는 개인을 매몰시키는 일본 사회, 공동체 특유의 담합적인 분위기를 아주 싫어했다.
○ 모럴이 만인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라면 맥심은 한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자기 규칙이라고 알아두면 되겠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라면,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

k****1 2017.05.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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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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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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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택이 쉽지 않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쪽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쉽게(왜곡되든 말든) 풀어 주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해 줘야 할 판에, "가뜩이나 쉽고 재미있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꼬고 든다면, 그런 작업이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책 제목이 더군다나 <...는 어렵다>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1) 하루키의 작품 중 알쏭달쏭했던(그런 게 뭐가 있었을까 싶어도 이 책을 읽고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싶더군요) 대목들에 대한 작가론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든가, 2) 독자들은 엄청 환영해도 동료 작가(물론 까마득한 선배들을 포함)나 평론가로부터는 "버터 바른 상업적 치장"이라며 홀대, 폄하되었던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그들이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심각하고 본격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내용이더군요.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저 감성적으로 상쾌해질(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감을 해 주고 지나칠) 내용에다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려울 텐데, 하루키의 작품에다 하루키스럽지 않은 심각한 비평 용어로 옷을 입힌 걸 보니(사실은 벗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당혹스럽다가도 재미있어집니다. 당혹스럽다는 건 "내가 예전에 끌렸던 하루키가 정말 그런 모습 그런 의도였을까" 하는 생경함이 아마도 그 이유일 텐데, 하긴 끌리는 걸 언제까지나 미지의 영역에 남겨 두는 것보다 한번쯤은 정색하고 "분석"해 보는 작업도, 차라리 독자(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이런 번거로운 생각도 (하루키의 독자답게?) 떨쳐 내고 나면, 저자(비평가) 가토 노리히로 선생이 하루키의 개인사를 짚어 가며 그 숨은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대목이 그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비평 용어를 몰라도, 정말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 느낌이 딱딱한 외피를 깨고 바로 접수되는 "텔레파시"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독자 하기 달렸습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저자께서 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고, 하루키 말고도 여러 당대의 일본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분이지만, 하루키에 대한 든든하고도 순도 높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정의 방향을 공유하고 밀도까지 비슷하다면, 한 마디를 던져도 그 말이 품은 의미 열 개가 얼마든지 접수 가능합니다.

저자는 하루키의 활동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1979~ 87, 1987~99, 1999~2010이며, 하루키의 팬이라면 저 연도의 구획이 대강 무엇을 기준으로 이뤄졌는지 책을 펴 읽기 전부터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각 시기는 "부정성의 행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 등의 제목이 붙었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저 거창한 세 개의 어구보다, 각론(저자는 각 시기를 다시 2, 3개의 구간으로 나눕니다)에서 등장하는 "디태치먼트", "내폐성", "맥심(칸트식 개념입니다)", "폴리티컬" 같은 개념어들이, 하루키 문학의 핵심 개성과 은밀한 무의식 등을 속속 잘 짚어낸다 싶었습니다.

제가 특히 공감한 건 제1기, 2기(이 책 저자의 기준)를 향한 분석입니다. 이념의 대립이 청춘기 지성을 족쇄처럼 억압할 때 이미 역사의 향방이 다른 쪽으로 고비를 틀었음을 알고 초연한 듯 쿨한 듯 개인의 내면으로 시선을 집중하면서도 감각의 쾌락("청춘이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건 죄가 아님")에 몰입하는 듯,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한 원칙은 지키는 내향성(책에서는 "내폐성"이란, 보다 강도 높은 용어를 씁니다) 따위가, 특히 그런 조류가 자신의 청춘기를 휩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어필을 했을 거란 분석이죠. 여기서 저자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은근 그의 작품에 깔린 "역사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공감을 얻는 비결이 있다면,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이나 초국적성의 청춘적 방황 같은 게 도처에 향수처럼 뿌려져 있다는 건데, 저자가 서문에서 특히 최근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긴장된 정세를 언급하는 것도 깊은 사려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하루키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 모든 작품이 읽기에 말쑥하고 똑떨어지는 경쾌한 내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일부 건방진 독자들이, 그의 작품세계라면 아주 익숙하고, 마땅히 이러겠거니 여기는) 어떤 경로로부터 크게 이탈합니다. 한국에서는 당시 알 수 없었으나, 이 점 관련 "대체 뭐냐", "쓰다 만 것 아니냐" 같은 항의를 적잖게 듣고, 편집진도 (벌써 거물이 된 그에게) 문의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때 하루키는 "(그런 점들을 혹은 의도를) 이해하려면 (나의 시대에는) 오래 걸릴 것" 같은, 어찌 보면 정말 그답지 않은 고답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물론 아닙니다만). 저자는 "왜 우리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별도의 이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시론(프레임)을 제시하는 거죠. 이 시도들이 정말 작가 하루키의 내심과 일치한다면, 이제 (책 제목대로) "하루키는 (알고보니 정말로) 어려웠다"가 되는 겁니다. 물론 모르고 지나친 게 알고 보니 어려웠음을 깨달았다면, 깨달은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어려운 게 아니죠.

저자는 평단과 작가들이 모두 하루키를 폄하할 때 거의 혼자서 그를 옹호하던 스탠스를 보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역시 버터바른 치장형 평론가군" 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이제는 하루키의 작가적 위상을 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된 후인) 최근 몇 년 동안엔 오히려 하루키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시도하다 매체 편집자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할 때 노를 외치기는 어느 조직, 직역에 속한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데, 그만큼 확고한 신뢰와 분명한 공감에 이르렀기에, 소신 있으면서도 분명한 개성이 깃든 보편타당한 패러다임(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지요. 이 책, 한 번만 더 읽고 나서, 지금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책장에 꽂힌 모든 그의 책을 다시 만나는 여행을 떠나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정신은, 즐겁고 예사로운 말투 속에 진짜 진리를 심어 주는 게 그의 진짜 성취가 아닐까 합니다.

v*****7 2017.04.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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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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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잘못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은 건. 그의 작품을 전혀 안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몇몇 대표 작품만, 그것도 제대로 집중해서 읽었다기보다는 남들이 읽는 베스트셀러니까 읽는 흉내만 낸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어려웠는지.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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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잘못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은 건. 그의 작품을 전혀 안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몇몇 대표 작품만, 그것도 제대로 집중해서 읽었다기보다는 남들이 읽는 베스트셀러니까 읽는 흉내만 낸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어려웠는지.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작품의 흐름이나 가독성은 상당히 좋은데 작가의 의도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일본 순수 문학계의 계보를 잇는 하루키가 일본 내에서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등지에서도 문학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하루키의 문학적 위상을 제대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시간 순으로 분석해서 부정성의 해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라는 꼭지 아래 각 작품들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비록 저자가 분석한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하루키의 데뷔작이 ‘긍정적인 것을 긍정하는 최초의 작품’이면서 ‘부정성에 대한 부정이 작품 속에서 비애를 띄고 있었다’는 점이 하루키를 세계적인 문학가로 세운 이유라고 말한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었다.

 

하루키의 작품은 그 후 개체, 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후 하루키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쓰다 보통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키 작품을 읽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이정표 같다. 데뷔작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그 흐름을 짚어볼 수 있었고,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읽어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저자의 평가대로 하루키가 일본 문학 아니 세계 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새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평가해보고 싶은 마음은 든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만을 끌어내는 그저 그런 소설가인지, 세상의 이면을 속속들이 그려낸 위대한 문호인지를.

r******3 2017.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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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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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다가서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고 결코 가볍게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들을 한다.그의 작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에 과연 그러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지는 그의작품을 읽어 보지 않는다면 알수도 없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와 일본 문학계에서 매겨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위상에 대해 폄훼된 일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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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다가서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고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의 작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에 과연 그러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지는 그의
작품을 읽어 보지 않는다면 알수도 없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와 일본 문학계에서 매겨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상에 대해 폄훼된 일련의 과정들을 속속들이 밝히고 있으며 신인에게만 주어지는
'아쿠타가와상'의 응모와 심사에 관련된 전통적 가치관에 기반을 둔 심사위원들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문학에서 소설의 위상이라는것도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되기 마련이고 그에
걸맞든 걸맞지 않든 평가될 뿐이다.
시대적으로든 문학사적으로든 새로움에 대한 기대치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기반을 둔 기대치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은
어느 분야이건 있기 마련임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좀더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부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무라카미 류의 초강력 태풍 뒤에
찾아 온 작은 태풍으로 지칭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순문학의 대표작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과연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 아닌 하루키의 작품이 순문학의 대표적으로 자리한 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긍정의 긍정을 자각하고 부정의 부정에 비애감을 녹여 넣은
작품으로 기존 전통적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에 반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신분제의
타파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해 초월적 의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 곧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의
작품이 순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라는 사실을 새삼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루키의 작품 개체, 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등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여전히 긍정의
긍정 인식과 부정의 부정에 대한 비애감은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농밀한 조명을
선독 한 후 맞이하는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인상은 월등히 수월하고 작가의 의도하는
바를 쉽게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n********1 2017.04.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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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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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말 그대로, 아니 책제목 그대로다.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란 생각에 통쾌해진다.솔직히 어렵다. 라기 보단 소설의 경우 너무 묵직해서 쉬이 읽기엔 좀 부담스러운게 없지 않다.앞뒤가 촘촘하고 몰입도가 높기에 쉴 타이밍이 없다.라는 뜻도 된다.반면 에세이집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한다.그의 말투며 행동을 보고 웃으며 동감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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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말 그대로, 아니 책제목 그대로다.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란 생각에 통쾌해진다.

솔직히 어렵다. 라기 보단 소설의 경우 너무 묵직해서 쉬이 읽기엔 좀 부담스러운게 없지 않다.

앞뒤가 촘촘하고 몰입도가 높기에 쉴 타이밍이 없다.라는 뜻도 된다.

반면 에세이집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의 말투며 행동을 보고 웃으며 동감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한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진 않다.

어떻게 소설과 에세이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이 면에서 에세이는 광팬이라 해도 된다. ㅎㅎ


다시 돌아가서, 가토 노리히로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한중일의 문학관련 사람들을 만났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독자들의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을 하며,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샐러가 되어 많은 판매량을 올리지만,

그들의 세계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이 거의 읽히지 않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자 책을 냈다고 한다.


음.. 우선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라기 보단, 지식인들을 겨냥한 작품이라는 것에서 약간의 자격지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렵다는건 매한가지이기에 그 해석이 듣고 싶었다.

어차피 해석 혹은 설명을 해 줄 것이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 판단에서였다.


책의 초반에는 하루키의 문학에 반감을 가진 구시대의 일본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의 문학과는 맞지 않고, 엉망이라는 이유로 내팽개쳐지지만 다른쪽(일반독자들)에선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게 또 구시대의 일본작가들에게 더 더욱 하루키의 작품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시대의 작가들과 인기가 있는 책들에 관해 나오게 되는데 눈이 핑핑돌았다.

나열되는 이름들이 전부 모르는 이름의 작가들 뿐이라 읽으면서도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

딱 이 부분만 본다면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작가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물론 일본에서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구시대의 작가들의 성향도 잘 모를뿐더러 문학에 있어서의 업적들을 모르기에 단순히 하루키의 작품들을 싫어한다해서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읽어가던 중 책의 1/3 이 지나서는 내가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난 그냥 읽었을 뿐인데, 그걸 분석하고 그 시대의 흐름에 접목시킨 설명에.

단순히 1차적인 글로써만 본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화도 났다.

책 한권 읽는데 이런 세부적인 보이지 않는 것들도 같이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야?!!! 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난 이런점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눈에 보인는 1차원적인 내용이 아닌 그 뒤에 품고 있는 속뜻을 읽고 내 생각을 깨우치게 되는 것 말이다.

만약 배울 수 있다면 학원이라도 등록하고 싶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그런 중요한 것의 의미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금 그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의 시작은 '빵가게 재습격'과 '상실의 시대'일 것이다.

빵가게는 예~전에 읽었고(그러나 책에서 설명 해 준 내용에 대해선 백지였던 상태라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이 솟구침),

상실의 시대는 사놓고 읽지 않은지 몇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이번에는 꼭 상실의 시대를 읽고 말리라. 다짐을 한다.

참, 빵가게 습격은 이번에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다.

(그냥 소지한 하루키 작가의 책을 모두 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럼 올해 다 갈듯..;;;)


책의 초반부에는 내가 읽지 않았던 하루키의 초반에 출간 된 책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나마 내가 읽었던 책들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냥 읽기만 했었던 입장으로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신기하면서도 읽고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전문적으로 문학이란 것에 대해 공부 해 보고 싶어졌을정도다.

나처럼 1차적으로 책을 읽고 마는게 아닌, 2차 적으로 숨은 뜻까지 찾아낼 수 있는 책읽기를 공부 해 보고 싶은데..

이건 공부한다고 해서 알 수 없는거겠지..? 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솔직한 심정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은 어렵다.지만 그래서인지 해석(?), 설명(?) 을 한 이책 역시 가볍지 않다는거..

오히려 일본의 문학인사들의 이름과 도서들이 나오는 초반에는 눈앞이 핑핑거렸다.

마치 하나의 논문을 읽는 듯 한 느낌이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 란 작가의 문학성에 대해 한 사람의 논문을 읽은 것 같다.

논문이란 단어 자체가 쉽게 다가오진 않드시.. ^^;;;


책을 적은 작가의 경우에는 하루키의 책들을 모두 다 섭렵하고, 내용을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된 것은,

하루키의 책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겹치거나 최신작들의 전신이 되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책들의 등장인물중 조연에 해당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전의 출간 된 책들을 찾아보면 그 책에선 주인공이었다는 것.

모든 책들이 다들 알게 모르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연결을 해 주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역시 별개의 책들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고,

다시 읽게 되면 새롭게 다가 올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자신만의 생각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독파하고 분석한 사람의 관점에 대해 비교 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 원문 출처 : 예스블로그
* 이 리뷰는 책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로얄 a***4 2017.05.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