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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상실의 시대]로 처음 하루키를 만났을 때나 최근에 [1Q84]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을 때나, 하루키는 항상 내게 친근한 작가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왜 하루키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읽은 양보다 하루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이유를 한 단어로 이야기하라면 '친근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삶에 지친 저녁 날 공원에서 친구와 함께 앉아서 서로 이런저런 지나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같은 편안함이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진다. 마치 내가 겪었던 아픔과 고독, 상실을 친구에 입에서 듣는듯한 묘한 친근감이 그의 소설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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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최근에 읽은 [1Q84]에서는 나도 조금 당황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때는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들이나, 결말이 아닌 것 같은 결말로 인해 조금 화가 날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에 대한 친근감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갔었다. 그런데 [1Q84]에서는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공기번데기는 무엇이고, 리틀 피플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특히 끝난 것 같지 않은 결말이란... 혹시 후속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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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다섯 시기로 나누지만 주요한 흐름은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는 전기 작품 활동 시기인데, 이 시기를 '개체의 세계'라고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양을 둘러싼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 있다. 저자는 이 시기에 하루키의 문학의 가장 강한 색채를 '부정성'으로 보았다. 한국도 민주화 운동의 시기가 있었지만, 일본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전공투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루키의 이 세대의 출신이었고, 이런 전공투 운동이 우치게바(일본 신좌익 학생운동이 내부 분열로 인해 서로를 죽이면서 몰락해 가는 시기)로 몰락 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민주화 시기 이후 문학을 갈피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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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는 '쌍의 세계'라고 불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이나 [태엽 감는 새 (원제 :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같은 작품이 있다. 이 시대에서는 하루키 작품에서 혼자였던 주인공이 아내나 연인이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사라지고, 주인공은 그 여성을 찾아 헤맨다. 특이한 것은 하루키 소설에서 여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주 모호하다는 것이다. 흔히 소설에서는 다른 세계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는 주인공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이다. 혹은 잠시 들어갔다가도 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저승의 세계로 보고 있다. ![]()
후기는 '아버지와의 대치'시기로 불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해변의 카프카]등과 같은 작품이 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주인공의 자신이 사귀는 여성의 아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와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주인공이 구원을 받는 형식들이 등장한다. 하루키가 말년에 아버지와 화해했듯이 작품 속에서도 나이 든 남성과 어린아이가 만남과 갈등, 화해가 등장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아픔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
이 책은 단지 하루키뿐만 아니라, 일본 문학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하루키가 차지하는 위치 등을 알게 해 주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키의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면서, 그동안 구입만 하고 읽지 않았던 하루키의 책에 대한 독서 욕구가 다시금 강렬히 자극해 주기도 한다. 하루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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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이라는 부사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아무튼'으로 바뀌었던 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그 이전에 한글 철자를 배웠던 세대이니만큼 '아뭏든'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 채 번번이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쓰곤 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뭏든'을 '아무튼'으로 잘못 썼다가 호되게 손바닥을 맞았던 어렸을 적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철자부터 다시 배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나의 기억이 맞다면 나는 '아무튼'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던 시기에 하루키를 만났을 것이다. '전혀'라고 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당시에는 상실의 시대)>이었다. 그동안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일부러 멀리 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1톤쯤 밀려오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 족족 죄다 구해 읽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기존 작가들과 구별되는 '뭔가'가 있었다.
"애당초 일본의 근대에서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분류하는 기준은 이 부정성의 유무, 문학이 부정성에 의해 구동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예고했던 것이 2, 3년 지나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p.93)
문예평론가이자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인 가토 노리히로의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를 읽으면서 나는 하루키 소설에서 내가 느꼈던 '뭔가'를 이제서야 찾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음직한 공통의 경험이 있다. 소위 교양과 격식을 중시하는 모임에서는 자신이 하루키의 팬이라는 사실을 숨기게 된다거나 대화의 주제로 하루키의 작품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대중에게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어느 소설가보다 인기가 있다는 것도, 다른 어느 소설보다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다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루키는 그저 대중에 영합한 젊은이 취향의 문학, 대중의 기호를 반영한 상업적인 소설만 쓰는 인기영합주의 작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음은 물론 정작 하루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결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문학을 이분하는 문학관, 거기에 돌을 던져주자."는 모티프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루키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현대 지식인과 문학가에게도 하루키가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행동의 기준을 통해 사회 풍조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모럴의 부정성이 가사 상태에 있는 시대에 그나마 그 부정성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저항의 디태치먼트,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맥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p.116)
저자는 하루키가 소설가로 등단했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시기별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로서 때로는 깊고 전문적인 설명과 상징물에 빗댄 표현들이 많지만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라면 이런 비유들이 오히려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썼던 많은 소설들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비교하고 분석하며 서로를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각각의 소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하루키 자신은 소설가로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라카미는 카탈루냐에서 앞선 내용과 같이 말한 후 '손상된 윤리와 규범의 재생'은 우리 모두의 일이지만, 언어에 관련된 자들도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윤리와 규범을 새로운 언어와 연결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생기에 찬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워 키워가는 것이 자신들의 일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p.255)
오늘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날이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봉하마을의 추도식 현장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었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고 이상을 잃지 않으며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라면, 최소한 자신의 개인용 규칙을 만들고 엄수하는 것이 세상의 니힐리즘에 물들지 않기 위한 저항의 요새가 된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불합리한 것에는 노라고 하는 것이 효력을 잃은 시대', 말하자면 전체주의와도 같은 구시대적 유물 속에서 살았다. 자포자기의 니힐리즘에 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규칙을 만들고 소중히 지켜왔던 게 아닐까. '아뭏든'을 온전히 '아무튼'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우리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들, 결코 지워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너무 많다. 지금의 대통령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크다. 아무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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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는 요즘인데, 반갑게도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신간을 두 권이나 발견하고 얼른 주문한 후 참지 못하고 이 책부터 펴 들었다. 저자는 하루키 작품에 부당하게 덧씌워져온 '인기 대중소설'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한중일 지식인들이 무시 및 폄하해온 역사를 지적하며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어렵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초, 중, 후기로 나누어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문제의식에 공감하다보니 책장 넘어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상 하루키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때문에 정작 독자들이 제대로 읽지 못했을 장편 "태엽감는새 연대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빵가게 습격'과 '빵가게 재습격' 등 단편 등 하루키 작품세계 전반을 꿰뚫어 다루고 있는데 저자와 내가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비슷해서 더욱 즐거운 독서였다. 게다가 하루키와 동시대인으로서 일본 사회상과 문학계 풍토를 잘 이해하고 있는 저자가,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디태치먼트, 커미트먼트와 조합하여 분석해 읽어주고 있어서 앞으로 하루키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를 연상 시키는 "태엽감는새 연대기"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가해자는 비교적 쉽게 잊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오래 오래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등 저자는 평론가로서의 전문성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루키 작품 전반을 깊이 이해하고 전문가 답게 날카롭게 분석한 책이기에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특히 하루키 초기 3부작 등 전기 작품이 왜 혁신적이었으면서도 일본 문단의 외면을 받았는지 드러내는 부분이 꽤나 흥미로웠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키는 '부정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루키가 근대 문학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가 매끈매끈한 긍정성, 부정과 감추는 점 없는 투명함을 지향한다는 미학을 저작에서 계속 드러내고 있는 한병철 교수님을 이 저자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둘의 관점이 일치하고 있다. 하루키는 전공투처럼 진지한 이념 싸움 이후 다가온 '상실 내지는 공동화' 현상이 불러오는 허무감을 배경으로 전기 소설 속 주인공들을 긍정적인 자폐 세계로 보냈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사람들은 반대하고 싶은 이념과 그에 따른 행동 목표가 명확했고 그에 대해 희생을 불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한 목표를 잃는 동시에 자본에 포섭되면서 '즐거운 게 뭐가 나빠'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선호하다가 급기야는 자신을 허무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격률로 가득한 자폐 세계로 숨어든다. 이제 전투는 내면에서 이어진다. 다소 길지만 관련 내용들을 옮겨둔다.
이와 같이 하루키 전기 소설들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가 자신을 지키는 방식은 철저한 자기 규칙 따르기였다. 이는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칸트의 맥심을 연상시킨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기 규율을 세우는 '나'는 건전하고 성실하면서 쏘쿨해보여서 매력 있는 남자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매사에 '쓸고퀄을 추구하는 오덕'이나 다름 없다. 이들은 타인의 인정에 별로 집착하지 않고, 세인이 별로 관심 갖지 않는 비주류 분야를 깊이 파고들고 자기 만족하면서 의미를 찾고 생존한다. 칸트 미학을 공부해 석사 논문을 쓰기도 했고, 동료샘이 내 생활 방식을 보며 '칸티안'이라고 불러주시곤 했기에 저자가 칸트의 맥심을 가져와 하루키 소설 속 '나'의 특성을 분석해주니 그가 왜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수영할 때마다 생각한다. 칸트도 그 시대에 철인 3종 경기가 있었더라면 하루키처럼 빠져들었으리라고. 달리기, 자전거, 수영 모두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렇게 쏘쿨하게 자기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나'가 주인공이었던 전기에서 중기로 이행할 때, 하루키 자신이 그 유명한 95년 두 사건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살포 사건' 이후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밝혔듯 디태치먼트에서 벗어나 커미트먼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책 저자는 전기가 '나'를 주인공을 설정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로 없어진 지인을 찾다가 상실한 채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중기부터는 부부나 연인 등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사라진 파트너를 찾아 다니는데 이 평범한 주인공의 투쟁은 '우물로 깊이 내려갈 수록 역사와 만나는' 등 사회적인 투쟁이기도 하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해변의 카프카" 이후 후기에는 3인칭으로 변화한 문체를 구사하며 주인공도 성인 남자가 아니라 소년, 여성, 노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더불어 요즘 쓴 소설들은 사회적 관심도 놓지 않으면서 스토리 전개를 작가 무의식에 기대어 흘러가게 둔다는 느낌이 든다는 식으로 저자는 표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론 전문가인 저자는 하루키가 7년 주기로 장편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면서 2017년 즈음 또 소설이 한 편 나오지 않겠느냐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지난 2월 말 일본에서 무려 그림을 소재로 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출간했기에 예언이 들어맞아 소오름이 돋았다. 우리나라에도 어서 번역 출간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론이 참 재미있었다. 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는 오랜만에 김난주님 번역으로 출간했는데 나는 하루키 관련 서적 번역은 김난주님 번역이 가장 잘 맞는 듯 이번 책이 술술 잘 읽혀서 좋았다. 하루키 수필은 김난주님 번역으로 많이 읽어와서 그런지 문체가 익숙하다. 앞으로도 하루키 서적을 자주 번역해주시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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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0대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뭔가, 일본의 대표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진 인물인 것 같았다. 나도 일본 소설 작가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접했으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그의 '상실의 시대'를 읽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상실의 시대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굉장한 베스트셀러였지만 (그의 작품 중 최초의 연애소설이었고 또 상실의 시대, 라는 책의 제목 때문에 더욱 멋졌던) 사실 그 책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다. 처음에 흥미진진하게 시작되지만 끝으로 갈 수록 소설이 해체되는 느낌이랄까? 지금에야 개인주의가 많이 발달하고, 정신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소설 속에 대거 등장하지만 그 때만 해도 전쟁 이후의 아픔을 극복하고 젊은이들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실패와 좌절, 성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었다. 그런 문학계의 트렌드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정말 - 몽환적이고 환상을 떠도는 느낌이랄까, 주인공들의 내적인 갈등이 평범하고 인간적이진 않았다. 매우 특이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때에 그런 문학을 창조해냈기 때문에 향후의 문학계에 하루키는 상당한 영향을 끼게 된다. 처음에 일본의 문단에서 외면받고, 한국과 중국의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최근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이 책엔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 준다. 그의 작품이 어려운만큼 (책 제목을 보라 !) 책의 해석본을 읽는 것 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상실의 시대와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10대 시절 읽었고, 최근 작품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다. 최근 작품을 읽으면서 어릴 때 그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혼돈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내가 머리가 커서 그런 줄 알았더니 (분명 그 영향도 있겠지만) 그의 작품이 초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많이 달라지고 표현법에도 많은 차이가 남을 알게 되었다. 한 시기마다 작가가 관심있어 했던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저자의 시선이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를 일반인으로서는 잘 모르다가 이 책을 통해 비교 분석하면서 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수확이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느낌이고, 각 시기별로 작가가 어떻게 고민에 대한 정답을 찾아갔는지 짚어볼 수 있었다. 저자는 각 시기별로 하루키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해당 작품을 년도별로 도표를 통해 보기 쉽게 정리해 주었는데 그래서 더욱 이해가 잘 되었다. 최근에 읽게된 다자키 쓰쿠루나 여자없는 남자들같은 경우에는 텅 비어버려 사랑하는 법을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 같다고 느끼는 두 명의 남자가 나오는데, 현대인의 공허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주제에 골몰하며 해답을 찾아가는 하루키의 스타일을 생각해보건대, 다음 작품에서는 더욱 발전된 시각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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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그의 에세이를 정말 사랑하는만큼 그의 소설은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가 착각한 부분이 있을까봐 다시 소설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이 이 책까지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연구한 책. 다양한 책들이 나와있었지만, 이 책의 제목이 참 와닿아서, 읽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대답은 찾지 못 했다. 그게 좀 아쉬웠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고, 일본에서 그의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 수 있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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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정도면 기분은 괜찮고, 날도 좋다. 드라이빙을 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운전 중 조금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다시 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길은 제대로 든 게 분명하다. 아니, 맞다. 생각해보니, 길가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높이가 일 미터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날이 좋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미세먼지는 - 지난주보다는 덜하지만 - 여전한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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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택이 쉽지 않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쪽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쉽게(왜곡되든 말든) 풀어 주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해 줘야 할 판에, "가뜩이나 쉽고 재미있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꼬고 든다면, 그런 작업이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책 제목이 더군다나 <...는 어렵다>라면 더욱 그렇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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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잘못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은 건. 그의 작품을 전혀 안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몇몇 대표 작품만, 그것도 제대로 집중해서 읽었다기보다는 남들이 읽는 베스트셀러니까 읽는 흉내만 낸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어려웠는지.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작품의 흐름이나 가독성은 상당히 좋은데 작가의 의도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하루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일본 순수 문학계의 계보를 잇는 하루키가 일본 내에서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등지에서도 문학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하루키의 문학적 위상을 제대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시간 순으로 분석해서 부정성의 해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라는 꼭지 아래 각 작품들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비록 저자가 분석한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하루키의 데뷔작이 ‘긍정적인 것을 긍정하는 최초의 작품’이면서 ‘부정성에 대한 부정이 작품 속에서 비애를 띄고 있었다’는 점이 하루키를 세계적인 문학가로 세운 이유라고 말한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었다.
하루키의 작품은 그 후 개체, 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후 하루키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쓰다 보통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키 작품을 읽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이정표 같다. 데뷔작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그 흐름을 짚어볼 수 있었고,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읽어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저자의 평가대로 하루키가 일본 문학 아니 세계 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새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평가해보고 싶은 마음은 든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만을 끌어내는 그저 그런 소설가인지, 세상의 이면을 속속들이 그려낸 위대한 문호인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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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다가서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고 결코 가볍게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와 일본 문학계에서 매겨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무라카미 류의 초강력 태풍 뒤에 하루키의 작품 개체, 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등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여전히 긍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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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말 그대로, 아니 책제목 그대로다.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란 생각에 통쾌해진다. 솔직히 어렵다. 라기 보단 소설의 경우 너무 묵직해서 쉬이 읽기엔 좀 부담스러운게 없지 않다. 앞뒤가 촘촘하고 몰입도가 높기에 쉴 타이밍이 없다.라는 뜻도 된다. 반면 에세이집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의 말투며 행동을 보고 웃으며 동감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한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진 않다. 어떻게 소설과 에세이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이 면에서 에세이는 광팬이라 해도 된다. ㅎㅎ 다시 돌아가서, 가토 노리히로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한중일의 문학관련 사람들을 만났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독자들의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을 하며,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샐러가 되어 많은 판매량을 올리지만, 그들의 세계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이 거의 읽히지 않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자 책을 냈다고 한다. 음.. 우선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라기 보단, 지식인들을 겨냥한 작품이라는 것에서 약간의 자격지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렵다는건 매한가지이기에 그 해석이 듣고 싶었다. 어차피 해석 혹은 설명을 해 줄 것이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 판단에서였다. 책의 초반에는 하루키의 문학에 반감을 가진 구시대의 일본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의 문학과는 맞지 않고, 엉망이라는 이유로 내팽개쳐지지만 다른쪽(일반독자들)에선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게 또 구시대의 일본작가들에게 더 더욱 하루키의 작품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시대의 작가들과 인기가 있는 책들에 관해 나오게 되는데 눈이 핑핑돌았다. 나열되는 이름들이 전부 모르는 이름의 작가들 뿐이라 읽으면서도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 딱 이 부분만 본다면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작가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물론 일본에서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구시대의 작가들의 성향도 잘 모를뿐더러 문학에 있어서의 업적들을 모르기에 단순히 하루키의 작품들을 싫어한다해서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읽어가던 중 책의 1/3 이 지나서는 내가 알고 있는 책들에 대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난 그냥 읽었을 뿐인데, 그걸 분석하고 그 시대의 흐름에 접목시킨 설명에. 단순히 1차적인 글로써만 본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화도 났다. 책 한권 읽는데 이런 세부적인 보이지 않는 것들도 같이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야?!!! 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난 이런점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눈에 보인는 1차원적인 내용이 아닌 그 뒤에 품고 있는 속뜻을 읽고 내 생각을 깨우치게 되는 것 말이다. 만약 배울 수 있다면 학원이라도 등록하고 싶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그런 중요한 것의 의미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금 그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의 시작은 '빵가게 재습격'과 '상실의 시대'일 것이다. 빵가게는 예~전에 읽었고(그러나 책에서 설명 해 준 내용에 대해선 백지였던 상태라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이 솟구침), 상실의 시대는 사놓고 읽지 않은지 몇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이번에는 꼭 상실의 시대를 읽고 말리라. 다짐을 한다. 참, 빵가게 습격은 이번에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다. (그냥 소지한 하루키 작가의 책을 모두 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럼 올해 다 갈듯..;;;) 책의 초반부에는 내가 읽지 않았던 하루키의 초반에 출간 된 책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나마 내가 읽었던 책들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냥 읽기만 했었던 입장으로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신기하면서도 읽고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전문적으로 문학이란 것에 대해 공부 해 보고 싶어졌을정도다. 나처럼 1차적으로 책을 읽고 마는게 아닌, 2차 적으로 숨은 뜻까지 찾아낼 수 있는 책읽기를 공부 해 보고 싶은데.. 이건 공부한다고 해서 알 수 없는거겠지..? 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솔직한 심정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은 어렵다.지만 그래서인지 해석(?), 설명(?) 을 한 이책 역시 가볍지 않다는거.. 오히려 일본의 문학인사들의 이름과 도서들이 나오는 초반에는 눈앞이 핑핑거렸다. 마치 하나의 논문을 읽는 듯 한 느낌이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 란 작가의 문학성에 대해 한 사람의 논문을 읽은 것 같다. 논문이란 단어 자체가 쉽게 다가오진 않드시.. ^^;;; 책을 적은 작가의 경우에는 하루키의 책들을 모두 다 섭렵하고, 내용을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된 것은, 하루키의 책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겹치거나 최신작들의 전신이 되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책들의 등장인물중 조연에 해당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전의 출간 된 책들을 찾아보면 그 책에선 주인공이었다는 것. 모든 책들이 다들 알게 모르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연결을 해 주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역시 별개의 책들이 아니라는 점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고, 다시 읽게 되면 새롭게 다가 올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자신만의 생각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독파하고 분석한 사람의 관점에 대해 비교 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 원문 출처 : 예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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