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온 뒤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서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숨쉬는 것처럼 물마시는 것처럼 별 의식없이 지내왔는데, 서울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본격적으로 조선 역사책을 읽으면서였다.
종로와 광화문에서 궁궐과 종묘 등의 유적과 조선의 흔적을 보면서 새삼 서울의 역사와 숨결에 눈을 뜨게 됐다. 그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서울의 위상, 조선이 건국한 이래 600년이상 수도였다는 그 매력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양 이야기'는 바로 이런, 조선의 도읍지 한양, 그 600년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고지도 '한양도성도'가 새겨져 있는 표지가 눈에 쏙 들어왔다. 위쪽 산은 북한산, 아니 인왕산인가? 지금의 서울 모습의 떠올리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몇 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서 앙증맞게만 느껴졌다.
예상하기를, 시기 별로 한양에 대한 이야기가 풀어놓지 않을까 했는데, 조선왕조 이전, 조선왕조 시대, 개화기 이렇게 크게 세 시기로 나눈 뒤 각 시기 별로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니까, 요즘 모습하고 비교하는 재미는 덤이었고, 개화기 이후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마치 화질 좋지 않은 무성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게했다. 등에 짐을 잔뜩 실은 소를 몰고가는 소년이나 1890년 당시 최고의 번화가였을 운종가(현재의 종로)나 충무로의 모습이나 고종과 왕족, 조선 침략에 나선 일제 관료들 사진을 통해서 단순히 한양 이야기가 아닌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버린 한양의 씁쓸한 단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나와 관련있는 지역이야기가 나오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와 함께 그 시절 기억을 더듬게 됐다. 기 센 여인 문정왕후가 영면하고 있는 태릉 이야기에서는 초등학생때에는 누구 능인지도 모르고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살았던 마포 공덕 쪽에는 대원군 별장이 있었던 곳이었다니. 지금은 해체된 조선총독부, 중학생 때에는 그 건물 앞을 매일 지나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대지 안에다 세운 것이었다. 조선의 기운을 짓밟으려고.
괜히 한양의 역사에 내 개인사를 투영해보기도 했는데, 그러다 몰랐던 가슴 아픈 수난사를 접하게 되면 괜히 기운이 저하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태원이야기인데, 지금은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동네로 알려진 이태원(梨泰院)이지만 조선시대 때에는 다를 이(異), 밸 태(胎) 자를 쓰는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에게 겁탈당해 임신한 여인들이 모여 거주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렇다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성장하게 되면 관가에서 노비로 노역에 종사하며 살아야했으니 참으로 가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양 이야기'는 내용이 잘 정돈된 편은 아니었다. 뭔가 어수선했고, 작가가 선택한 자료도 역사적으로 정설이 아닌 경우도 눈에 띄였다. 아무래도 필자가 역사가가 아닌 드라마 작가다보니 시대를 정해 분류했으면서도 시대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고, 일화를 자유롭게 담아낸 느낌이었다. 고도 서울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보다는 서울 지역에 대한 일화가 분절적으로 기억에 남았다고 할까.
|
| 서울은 꽤나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비록 지금은 고층 빌딩과 셀 수 없이 많은 차들로 붐비는 서울이지만, 우리는 서울 곳곳에서 지난 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인 것이다. 암사동 일대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부터 시작해서 500년 간 지속된 조선 왕조의 유적까지. 우리의 일상과는 괴리된 듯한, 하지만 지금의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살펴보아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도시가 바로 서울인 것이다.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했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은 삼국 시대에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이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려가 멸망하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로서는 기존 개경 세력을 누르고, 왕으로서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많은 곳이 새로운 수도로 물망에 올랐지만 조선 건국 세력이 수도로 선정한 곳은 바로 서울이었다. 이 책은 서울의 역사에 대해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한 편의 여행 가이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 곳곳에 존재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의 지난 날 모습에 대해 수록하고 있다.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참조해 쓰여진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커다란 서울 지도를 펴놓고는 이미 사라진 서울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일제에 의해 양 날개를 잘린 남대문의 모습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훈장을 달고 있는 친일 인사들의 모습이 극한 대조감을 불러 일으킨다. 근엄한 근정전 앞 일장기가 나부끼는 모습, 일본의 한 도시를 옮겨놓은 듯해 보이는 1930년대 명동 한 복판의 사진까지. 사진들은 비록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빛 바랜 흑백 사진들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서울의 모습은 낯설기 보다는 정겹게 느껴졌다. 지금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울 한복판의 한가로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절로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감정일 수 없었다. 점점 몰락해가는 조선 왕조, 그 퇴락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일제 제국주의. 사진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왕이 거처하던 궁이 한낱 동물원으로 변모하고, 일본인들을 위한 연회장이 되어가는 그 과정은 눈으로 읽는 내내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약육강식, 무한 경쟁의 질서 속에서 지난 날 우리가 경험했던 비정상적인 역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사대주의와 끊임없이 고취되는 위기의식,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해방감을 맛보지 못했던 건 아닐지 싶다. 서울의 역사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차가 다니고, 연극 공연이 행해지고, 서양식 커피를 파는 호텔이 들어섰던 예전의 모습은 결코 우리 스스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팠지만 아프다는 그 말 한마디조차 마음껏 뱉어내지 못했던, 그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가슴은 실로 저릴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