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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의 말미에는 문학평론가 강지희의 해설이 붙어 있는데 그 글의 제목이 '네 마리의 고양이의 몽타주'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리뷰의 제목에 등장하는 포의 고양이와 앨리스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그 해설의 소제목들이다. 강지희는 도시의 밤의 세계를 포착하기 위해서 고양이만한 오브제가 없다고 하면서, 이 밤의 세계에서 네 마리 고양이의 몽타주를 포착한다. 포의 고양이 포의 검은 고양이는 에드거 알랜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일컫는것이다. 고양이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목매달아 죽이는 남자, 그리고 그 후 남자가 아내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만들고 그 현장을 결정적인 순간 경관에게 발각되게 하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통해 평론가가 끄집어낸 건 인간 내면의 강박과 공포의 근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는 강진의 「캐비닛, 0913」, 태기수의 「모르모트 인간」, 김이은의 김이은 「고양이 소설엔 고양이가 없다」를 이 부류에 넣어 설명하고 있는데, 태기수의 소설의 경우 포의 「검은 고양이」의 전복전 버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 세 작품 중에서는 태기수의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앨리스의 고양이 앨리스의 고양이는 당연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셰 고양이를 일컫는다.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는 꼬리 끝에서 시작해서 얼굴까지 서서히 사라지다가 마지막에는 웃는 표정만 남는다. 고양이의 육체는 이미 사라졌으나 고양이의 웃는 표정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은 매우 그로테스크한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 이곳이 '이상한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들이 말을 하고, 앨리스의 몸이 수시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변실과 분열 역시 부조리가 아니라, 그저 이상한 나라의 일상일 따름이다. 평론가는 김설아 「고양이 대왕」과 박형서의 「갈라파고스」를 이 카테고리에 넣어 설명한다. 박형서의 「갈라파고스」같은 경우는 2011년에 출간된 자신의 소설집『핸드메이드 픽션』에도 재수록되었다. 나같은 경우는 거기 수록된 작품으로 먼저 읽고, 이 작품집에서 다시 재회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박형서의 소설이 가진 아우라에 대한 것이다. 이런 기획 소설집이 가진 최대의 위험 요소는 작품의 퀄리티에 대한 것이다. 대개 문예지를 통해 발표되는 작품들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깐 기획자로서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지면에 발표한 소설을 자기 소설집에 재수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소설이 작가 자신도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이자, 그 책을 편집한 편집자의 기준에도 부합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이런 식으로 기획된 테마소설집이나 'OO문학상 수상작품집'에 공히 적용되는 문제인데, 작가의 소설집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작품들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똑 떨어뜨려 이렇게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 사이에 배치해두면 왜소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작가로서의 작가관이나 작품관, 가치관이 있기 마련이고 작가의 작품집에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고스란히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그 소설집은 그 작가의 '월드'인 셈이니, 그 세계 안에서 작가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작품이더라도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서로 다른 작품들 사이에 넣어두면 그 작품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종의 '후광효과'라는 건 전혀 누릴 수가 없는데, 박형서의 작품은 함께 읽으나, 하나만 읽으나 그 자체로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뿜어낸다. 이 테마 소설집에 실린 「갈라파고스」도 그랬는데,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테마와도 잘 부합되면서 완성도도 높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물리학을 전공자가 아니라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모를 가능성이 크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뭔지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이참에 공부하세요. ^^), 하나만 말하자면 슈뢰딩거는 매우 자유분방한 바람둥이였다는 거. 암튼, 평론가가 지적하는 건 슈뢰딩거가 왜 하필 수많은 동물들 중 콕 짚어 고양이를 실험의 예로 들었을까 하는 지점인데, 슈뢰딩거가 실험 대상으로 고양이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SF 장르 소설에서도 개보다는 고양이를 선호한다는 게 평론가가 하고 싶은 말이다 (흑흑, 이 말을 하려고 슈뢰딩거의 고양이까지 차용하다니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가장 마음에 든다) . 양유정의 「묘심猫心」, 최은미 「수요일의 아이」, 명지현 「흙, 일곱 마리」를 이 범주로 설명한다. 세 작품 다 뭔가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테, 그 자체로 묘하게 아름답다. 작가들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일까? 최은미의 「수요일의 아이」는 2013년에 출간된 작가의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에도 수록되었다. 박형서의 경우처럼 작가 자신도, 그 책을 편집한 편집자도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 이 작품 자체의 퀄리티를 입증한 건데, 개인적으로는 처음 읽었을 때도 이번에도 괜찮았다. '좋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작품이 가진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아름답다. 어찌 보면 인간이란 존재나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천사와 악마의 이분법처럼 간단하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고양이를 볼 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양가감정 같은 걸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할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들 중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악성 비염인'이라는 소재나 그들이 고양이와 말이 통한다는 설정 등등도 독특하고, 마지막 장면은 <델마와 루이스> 같기도 하다. 악성 비염인이 코가 뻥 뚫릴 때의 기분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희열이 느껴지는 결말이다. 사실 평론가는 마지막으로 '낭만 고양이'를 언급했는데, 『캣 캣 캣』이라는 이 책의 제목과 운율을 맞추고 싶어서, 나는 세 마리의 고양이만 언급했다. 그렇다고 '낭만 고양이'에서 언급한 작품들을 빠뜨릴 수는 없다. 염승숙의 「자작나무를 흔드는 고양이」, 김서령 「캣츠아이 소셜 클럽」, 정용준 「토미타미」를 이 카테고리에 넣어 설명하는데, 염승숙과 정용준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 정용준을 아끼는 독자라면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읽어보시길. 진지하고 묵직하고 심도 깊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소품처럼 느껴지는 상대적으로 발랄하고 경쾌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봄날의 고양이를 뒤따라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인데, 정용준이 이런 스타일의 소설도 쓸 수 있구나를 느끼다 보면 고양이가 준 선물처럼 반가워진다. 단숨에 열한 작품에 대한 설명과 평을 끝마쳤다. 캣, 캣, 캣. 소리내어 읽다 보면 그루밍하는 고양이나 나비를 보고 호기심에 점프하는 고양이가 연상된다. 발랄하고 경쾌한 리듬이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고양이 이야기들은 '고양이에 관한 열한 가지 특별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어둡거나 기괴하거나 환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마도 고양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인상이라는 게 이런 부분이 지배적인 듯하다. 언제부턴가 강아지만큼이나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 '반려동물'이라 불리게 된 게 바로 고양이다. 따라서 고양이를 키우는 애묘인들이라면 고양이를 테마로 한 소설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11편의 소설. 어떤 건 고양이가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고 어떤 소설은 카메오나 엑스트라 정도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존재를 꿰뚫는 듯한 눈으로 인간을 응시하는 고양이들, 그들이 본 인간 세상은 어떨지 생각해보면서 소설들을 읽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그 인간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고양이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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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한 얘기를 쓰려니 많은 상상들이 나온 것은 이해하겠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상상의 수준도 조악했거니와 풀어나가는 방식도 그다지 좋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대문학에서 집필을 의뢰한 젊은 작가들에 대해 많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실망스러웠다. 최악은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쓰려니 막막하고 곤란했다...로 시작해 고양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작가였다. 최소한 프로페셔널 작가로서 책이 출판돼 독자들이 읽는다는 것을 아는 작가라면 내놓지 말았어야 할 원고였다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에 관심과 애정이 있는 독자로서 불쾌해지는 소설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