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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역사사극에서 왕왕 김종서와 황보인등을 어린 단종을 끼고 도는 원상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선 수양은 왕권강화라는 천명을 위해 부득이 하게 정변을 감행하는 고도의 의지력의 인물로 비쳐진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계유정난으로 보위에 오른 세조때부터 김종서에 대한 평가나 기록들이 거의 금기시 되어버렸다. 우리는 역사를 흔히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부리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절재 김종서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언급자체는 세조이후 무려 300년간이나 금기되다가 영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신원되기 까지 하나의 공공연한 비밀같은 존재였기도 하다. 단종1년에 발생했던 계유정난을 발판으로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군주라고 일컫는 세종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 태종의 권력욕을 그대로 물려받은 수양대군은 마이키아벨리식의 권력창출과 유지에 온힘을 쏟은 형이다. 이후 세조의 피로 대통을 물려받은 조선의 군주들에게서 김종서의 위치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비록 계유정난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당대나 후대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左윤덕 右종서라는 세종대의 평가 처럼 6진을 개척한 당시 大虎라는 별칭처럼 김종서는 오랜시간을 북방에서 보냈고 북방야인들을 정벌하고 지금의 국경을 이룩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김종서장군이라는 무관으로 각인되어왔다. 하지만 김종서는 엄연한 문관 출신이며 사간원과 좌부대언(좌승지)등의 요직을 거친 앨리트였다. 김종서를 무쪽으로 이끈이는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직접 활과 화살을 내려 항상 소지하도록 하는등 김종서의 상무정신이나 그 기질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적임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의 이러한 선택은 대성공을 거두면서 북방의 안정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김종서는 태종부터 단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충신이었고 특히 문종의 고명대신이기도 하였으나 왕위에 뜻을 둔 수양대군과 권력에 목숨을 건 출세주의자 한명회가 만들어낸 조선 초기 최대의 비극인 계유정난으로 인해 역사뒤로 사라짐과 동시에 시대의 금기로 남게 된 것이다.
저자는 계유정난의 근원적인 뿌리를 문종의 죽음에서 부터 찾고 있다. 저자의 전작에서도 밝혔듯이 문종의 죽음 역시 많은 의문 부호를 가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 대신들과 그 어떠한 협의되 되지 않는 국왕의 치료과정이나 약방제조의 뒤에 수양이 존재했다는 사실등에서 수양의 야욕은 어쩌면 자신의 형 제거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문종 사후 벌어지는 일련의 행보에서 보듯이 마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은 행동을 통해서 단종과 단종을 지지한 신하들을 옥죄여 가면서 결국 계유정난으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게 된다. 계유정난 숙부가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쫒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도덕적인 문제보다는 개국이후 공신들의 나라였던 조선을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루고 왕권강화를 이룩하고 모든 악역을 자처했던 태종과 이후 세종조를 거치면서 확립된 헌정질서를 송두리채 바꿔버리는 역사적 후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수양은 김종서나 황보인등이 어린 임금을 끼고 신권을 강화하기 때문에 왕권강화를 명목으로 쿠테타를 일으켰지만 세조의 등극과 동시에 다시 조선은 공신들이 넘쳐나는 시대로 역행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 원했던 보위였지만 정작 왕권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전에도 공신들의 세상이었고 자신 사후 등극한 예종의 죽음에도 이러한 공신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패해는 계유정난과 상왕복위사건등을 양산된 공신들은 예종과 성종 그리고 연산군을 거치면서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인 훈구파로 사림들을 살해하는 피의 사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시대 당쟁의 출발점은 이미 계유정난을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그다지 모순은 아닐 것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조선 초기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라는 인물을 통해서 재조명된 세종,문종,단종,세조시대를 재고찰함으로서 역사서의 행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비단 승자의 기록을 역사라고 하지만 아무리 승자라도 모든 기록을 왜곡할 수 없듯이 그들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기 마련이고 후대의 우리는 이러한 퍼즐들을 제대로 맞추어 올바른 역사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북방개척의 주인공이자 고려사편수의 수장이었던 역사가 김종서의 대한 평가는 당시 시대의 금기사항으로 남을 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비정상적인 권력창출이 가져오는 후유증은 세조이후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들과 왕실의 비극등도 문제이긴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로인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었다는 점에서 김종서가 죽을때 까지 지키고져 한 것은 똑바로된 역사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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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은 드물지만 그 가치는 세월을 초월해서 빛난다. 공신은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을 일컫지만 고려나 조선 초 같은 시기에 역성혁명을 일으키거나 이 떡밥은 붕어용 미끼가 아니라 거액의 현찰+ 프리미엄이 엄청나서 3대에 처가 쪽까지 몽땅 올인할 판이라 여겼는지 명분은 개뿔이고 틈만 나면 들이미는 습성들이 있었고, 굳이 역성혁명이 아니라도 부시 같은 사람들은 ABC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거나 근래의 유사한 사례에 있어서도 이런 떡밥을 뿌리고 완장놀이를 시키기도 한다. Anything But Clinton – 우리나라에서는 ABR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떡밥은 형제를 도륙하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그렇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던 수양대군은 완장들에게 무한한 공로를 인정하여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는데, 문제는 지들끼리 나눠먹든 뜯어먹든 백성은 모른 채로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폐해는 자심하기 짝이 없어서 멀쩡한 사람을 때려죽여도 완장만 보여주면 신고조차 받지 않았고 벼슬을 건 잡리쿠르팅을 허용하고 세금에 프리미엄을 붙여 받도록 하는 세무대행업을 세조가 직접 허용하였으니 참으로 더러운 시대였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왔던 왕방연의 시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하필이면 단종을 (결과적으로) 시해한 금부도사의 시가 어째서 중학교 교과서에 쓰였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왕방연의 시보다는 차라리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왕명을 받들어 고토회복에 나서면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라고 썼던 (그런데 그 때의 선생님이 성삼문의 후손이셨다) 고려사를 편찬한 주역임에도 김종서라는 이름은 빼버리고 역도들의 앞잡이를 한 신숙주가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시피 김종서란 이름은 오래된 시대의 금기였다. 세종께서 마지막까지 믿었던 사람이었고 또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세조가 이탈시킨 궤도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고 그 핏줄들이 장악했기에 영조임금까지 이르는 293년의 긴 기간 동안에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지금 와서 그 역도들의 이름에는 불명예의 상징이 되었지만 김종서와 이징옥을 비롯하여 가치를 지킨 분들에게는 영예가 따른다. 덧붙이는 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에는 세 번에 걸쳐 공신에 대한 포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역도로 지목된 이들의 가족은 대갓집 부인이나 딸에서 관노로, 다시 공신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비를 받으려 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친일파들의 말로에 일어났던 패륜이 떠오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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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이 책은 위의 시조를 지은 김종서의 평전이다. 익히 알듯, 세종 시기의 북방개척을 이루었고, 세종이 친히 가까이 불러 무릎 위에 앉힌 손자 단종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나 끝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철퇴에 맞아 사망한 그 김종서.
그러나 저자는 인물의 일생과 업적을 재현하는 일반적인 전기적 사항만으로 이 김종서 평전을 채우지 않는다. 김종서란 역사 속의 한 인간이 자신의 일생을 통해 추구하려는 가치를 그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묻는다. 김종서가 죽음으로써 지키려한 그 가치가 해당 시대를 통해, 그리고 이후 조선시대와 2011년 현재까지 갖는 의미를. 즉, 이 책에서 김종서는 그저 군주에 대해 충직한 왕조시대의 한 신하로서가 아니라, 헌정수호에 목숨을 걸다가 헌정파괴 세력에 희생당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덕일씨의 저작을 읽는 재미가 바로 이 점이다. 책의 주인공인 김종서가 살던 당시 조선사만 아니라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적용해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는 점! 수양대군-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양산된 수많은 훈구세력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권력과 재산을. 이후 그들은 그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더욱더 부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바로 이 점, 현재 대한민국에도 적용가능하지 않은가. 비록 이 책이 1999년에 간행된 책의 개정판이긴 하지만, 현 정권에도 대입가능하지 않은가.
고구려, 백제사 쪽 서술과 관련해서 이덕일씨의 책에는 좀 문제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강단 주류 사학자들이 정치현실에 대해 발언을 삼가할 때 저자는 발언을 한다. 대중 역사 저술을 통하여, 또 신문 등 여러 매체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이 나는 좋다.
수백년 전 수양대군이 입증해 보인 "이기면 관군이요, 지면 반군"이란 식의 뒤틀린 역사관이 가치관의 혼돈 시대를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양육강식과 사회진화론으로 무장한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긴 것이 곧 정의라는 사고가 무엄하게도 역사에도 침투한 것이다. 그러나 이긴 것이 곧 정의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때로는 진 것이 정의이며 탄압 받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은 패배한 정의와 탄압받는 진실의 편에 섬으로써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버리기도 한다. 짐승의 논리는 그런 사람들을 바보라고 조롱하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는 짐승 집단이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로 존속해 올 수 있었다. - 본책 '책머리에' 부분 인용
그렇다고 책이 지나치게 딱딱하지는 않다.
<몽유도원도>에는 모두 23편의 찬문이 곁들여 있는데 그중 김종서의 찬시도 들어 있다. 대부분의 찬문은 현실의 덧없음과 무릉도원에의 그리움을 읊는 내용이었다. 그런 찬문을 쓴 20여 명의 선비들 중 정인지, 신숙주, 최항, 윤자운 등은 불과 5년 후 수양대군의 편에 서고, 김종서를 비롯해 이개, 박팽년, 성삼문, 이현로 등은 그 반대편에 서서 생사의 기로를 달리 하니 도원과 현실의 거리는 이처럼 아득히 먼것이었다. - 본책 243쪽
이런 멋진 부분도 많다.
우리가 아는 김종서 장군과 달리, 그는 세종과 경연을 할 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였었고, 대호(큰호랑이)라는 별명과 달리 작은 체구의 문신이었다. <고려사>를 편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세력에 의해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 이런 소소한 점을 새롭게 아는 맛도 어른이 된 후에 새삼스레 전기를 읽는 보람이다.
(참, 예전판으로 읽었기에 인용 쪽의 숫자가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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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흥의 불꽃을 꺼트린 '계유정난'... 저자는 세조의 등장과 이를 전후로 한 조선의 역사를 이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다.
저자의 책들을 볼때마다 감탄하고 흥미로움이 더해가는것은 우리가 배워왔고 또 그렇게 배워갈 역사교육에서는 또는 개인적 공부를 통해서도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특정시기의 특정사건, 특정인물의 행적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독서의 흥미와 집중력을 배가 시켜 독서의 즐거움을 더욱 만끽할수 있는 요인이 되었는데 이 책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군 김종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배웠는가... 문신출신의 정치인이자 대호장군이라 불리며 북방의 6진을 개척한 인물묘사 몇줄이 다가 아닐까...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유학의 대가, 세종, 문종과의 사이에 형성된 두터운 신뢰와 그게 바탕이 되어 조선의 큰 기둥이 되어가는 모습들을 새로이 배울수 있다.
흔히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야심차면서도 대담하고 용맹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수양대군... 역사에서 집권과정의 유사성으로 이방원과 비교되던 그의 모습이, 태종 이방원과는 너무나 다름을 볼수 있다. 교활함과 무인으로서도 완성되지 못한 모습... 또한, 쿠데타 당시 그가 소유했던 무력이 어설펐음에 안타까움이 든다. 이러한 어설픔에 역사의 전환점이 되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데자뷰가 떠오른다. 5.16 쿠데타전 정가에서는 공공연히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 동원된 500여 명의 군인들에 의해 나라가 장악되고 말았다. 무능한 장면의 단호한 출동명령든, 당시 1,2군 체제하에서 전방 전력의 90%를 보유하고 있던 1군의 사령관 이한림의 단호한 결행의지 둘중의 하나만 있었어도 어설픈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2.12 또한 어영부영 하는 사이 반란군의 수중에 나라가 통째로 들어가 버리고 말아,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을 민초들이 몸으로 받아내고 있음이라.
계유정난! 이미 왕위에 욕심을 내고 있는 수양의 야심이 공공연히 알려진 상황에서 김종서의 방심이, 확고한 무력과 세력도 없이 우와좌왕 하는 사이 반란이 성공하고 말았다. 만일, 그러한 소문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의심하고 주도면밀하게 감시하고 매의 눈으로 살펴왔다면 정난 당일 집앞에서 5명에게 철퇴를 마고 쓰러지진 않았으리라...그 순간 반란은 90% 성공하고 말았다.
또하나, 철퇴에 다행히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나서 북방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했더라면 그렇게 쉽사리 세조체제가 이어지진 못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후의 집권과정 및 권력과 부의 분배 과정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더욱 금할길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야비하고 교활한 류의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세상의 정점에 서서 흔든다는 것. 이미 권력이 기울었다 판단한 이징옥의 수하들이 그를 암살하고, 한솥밥을 먹던 동료의 처자들을 분배 받아 농락하는 조선위에 군림하는 지도층. 이들에 의해 이끌려 나가는 나라가 미래가 있고 비전이 있었겠는가... 12.12반란 성공후 반란군들이 모여 샴페인을 터트리며 기념사진을 찍던 모습과 중첩된다.
문무를 겸비한 재능으로 세종 르네상스 시대의 큰 축을 지탱했던 거인 김종서. 계유정난으로 그의 집안은 산산조각이 나고 가족과 친족들의 이후의 세세한 삶이 어찌 됬는지... 그 후손의 출사길이 겨우 열린것이 정난 266년 후이고, 정식으로 신원이 회복된것이 293년이 지난 영조 때의 일이니, 그 후손들이 어떠한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반란으로 들어선 세조 정권은 반란 지지자들과 공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권모술수와 탐욕은 성공의 미덕이 되어버린다. 현대에서도 우리가 목격하고 지금 천민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직접 살아가는 현 상황에 역사는 되풀이 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기록하며 직접 부대끼며 배우고, 그 과정에서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에 주목해 하는 것이 아닌가. 계유정난이후 어두운 정치현실은 시대를 뛰어넘어 되풀이되며 오늘날에도 걷히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정조때에 이르러 단종의 능인 장릉에 배식단을 만들어 단종에게 충성한 신하들을 제향한다. 이후 김종서를 비롯,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기도 및 이후에 수양대군에게 죽어간 사람들까지 같이 제향하게 된다. 저자는 이를 (수양의 반란에 맞섰던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패자였지만 역사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명회, 권람 등을 제향하는 곳이 조선천지에 하나도 없음을 비유하며... 그리고, 역사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현실적 이해가 아니라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한 삶이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걸었던 인생들이 성공한 인생임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고 역설한다. 지금 현실에 우리가 진정으로 희망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걸었던 인생들이 성공한 인생임을 훗날 역사가 증명해 주길 바라고 희망하며 오늘의 암담한 정치상황과 고단한 삶을 견뎌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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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김종서는 키가 크고 북방의 여진족을 호령한 무골. 그래서 어린나이로 임금에 오른 단종의 보호자 역할을 해서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이 드높은 것으로 알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문신이었고, 당대 제일의 성리학자 였으며, '고려사'를 저술할 만큼의 역사에 정통한 인물이며, 무에도 능통하며, 세종을 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6진을 개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사대부는 문무를 겸비해야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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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과 김종서, 이 둘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너무 뚜렷하게 대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고, 최근에는 ‘공주의 남자’라는 논픽션 드라마를 통해서 다뤄지기도 했다. 사실 김종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세종 시대에 6진을 개척한 인물로서 어린 단종 곁을 지키다가 수양대군에 의해서 제거된 비운의 인물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이라는 책을 통해서 김종서라는 인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그의 죽음이 조선에게 있어서 얼마나 크나큰 아픔인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김종서를 무인으로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문인으로서 당대에 전국의 유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유학자였다. 그리고 ‘대호’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실제로는 굉장히 몸이 왜소했다고 한다. 태종 때부터 벼슬을 시작한 김종서였지만 그 시작은 보잘 것이 없었다. 공신들과 외척들을 강하게 짓눌렀던 태종인지라 김종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김종서는 임금의 강력한 신임을 받게 된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다가 일을 맡겼고, 김종서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강직하게 일을 수행함으로서 세종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은 김종서에게 활을 내려주며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에게 6진의 개척을 맡기려 한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김종서가 임금의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 쫓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종서는 세종의 뜻을 의심하지 않았고, 북방개척에 대한 명확한 사명감을 인식하고 있었다.
김종서가 넓힌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김종서가 개척한 지역은 두만강 이남이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한 곳이라고 한다. 이것은 명나라 태조가 내린 조서에서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이다.’라고 한 것에 근거한 것이고, 세종을 이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김종서를 보내 북방개척을 명한 것이었다.
문종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 문종은 세종을 뒤이을 성군으로 기대되는 임금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사망했고, 그 죽음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잦은 격무로 인해 몸이 약해져 있던 문종은 등에 종기가 나게 된다. 그런데 병을 돌보는 어의 전순의가 심상치 않다. 본래 대신들과 의논 하에 치료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신들을 배제하고서 처방을 감행했고, 종기에는 상극이라는 냉수와 꿩고기를 자주 진상했다.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즉위하면서 전순의는 공신에 올랐다는 점에서 문종의 죽음에는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양대군의 쿠데타에는 아예 명분이 없었다. 완전 억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왕권을 강화한 호방한 군주로 미화된 것은 그가 책봉한 수많은 공신들과 그들의 후손들 덕분일 것이다. 명분이 없었기에 불필요하게 많은 인명들을 살상했다.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하면 적이었던 것이다. 정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어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공신의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그 공신들은 장차 왕권을 위협하는 무법자들이 되어갔다. 읽는 내내 수양과 그 무리들의 후안무치함과 잔혹함에 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특히 세조는 자신의 아들 예종에게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 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자신의 일으킨 정변으로 인해 신하들에게 휘둘린 후대 임금은 물론 그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음모를 막아냈다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할수록 씁쓸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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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를 단지 세종때 북방 여진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한 무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책을 통하여 김종서는 당대의 유능한 문인이고 역사학자 라는걸 알게되었다 또한 만고의 충신이라는것도.... 김종서는 태종대부터 단종까지 4대에 걸쳐 조선의 신하로 충성하였다 원칙과 소신으로 세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김종서는 문인으로서의 내직에 있을때보다 험난한 북방에서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개척에 힘을 쏟아 이민족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친다 국가를 위해 한 몸 아끼지 않은 김종서는 모친의 와병과 처의 사망시에도 가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임금의 명령에 의해 북방 야인들로부터 우리의 영토, 우리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의 능력과 충성심으로 좌의정까지 오른 김종서는 조선의 불행한 운명과 함께 수양대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명분없는 왕위 쟁탈 쿠데타, 계유정난이다 정권 찬탈에 눈이 먼 수양대군은 만고의 충신이던 김종서를 제일 먼저 죽임으로써 피바람을 일으키며 태종이 피의 숙청으로 없앴던 공신시대를 다시 열어 역사를 후퇴시킨다.
이책을 통해 나는 김종서라는 인물과 세종대왕, 수양대군, 계유정난의 공신들의 실체를 좀더 알게되었다.그러면서 안타까운건 김종서의 허망한 죽음이다. 당시 분위기가 이미 수양대군의 야심을 한 껏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미리 발빠르게 대처할 수 도 있었을 텐데.. 단종은 죽지않았을테고 조선의 역사는 세종대의 중흥을 지속할 수도 있었을텐데... 칠순 노인의 한계였던가 수양의 철퇴에 찰나에 무너지고 만 김종서의 삶과 함께 조선은 출세에 눈이 먼 난신적자들의 조정이 되어 역사를 후퇴시키는 상황이되고 이에 나는 엄청난 분노마저 느꼈다.
다행인건 그후 오랫동안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 계유정난은 뭇 임금과 신하들의 공론의 화두가 되어 논의 되었고, 결국 위대한 임금 정조때 김종서는 338년만에 충신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역사의 인물로 기록되어 책을 덮을때는 조금은 후련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있었다. 철퇴에 맞아 죽은 김종서가 나와 같은 후손들이 그의 충정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드라마틱한 소설 같은 문체로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이덕일 선생님의 맛깔스러운 문장을 통해 나는 앞으로도 우리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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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균형추가 필요하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므로 후대의 우리는, 그리고 더 후대의 우리 후손들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역사를 배울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기록은 여러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승되어야 한다. 역사기록의 독점은 역사발전을 가로막을 뿐이다.
이덕일 선생의 신작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은 그런 사실을 일깨워준다. 세조의 입장에서 보면 계유정난은 역적을 평정한 정난이지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무수히 많은 관료와 선비들, 누구보다 김종서의 입장에서 보면 계유정난은 반역일 뿐이다.
이 사건에 대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개인적인 지식과 사상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숭자가 기록한 실록에 의해서만 그 시대를 바라봤다면 이제 그 반대의 입장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게 역사를 보고 배우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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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삶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쭉 살펴보는 방법도 있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전태일열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 수 없었던 일개 노동자의 삶이 반추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그 이타적 죽음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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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종서 역시나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정에 나아가 육진을 개척했고 공평 무사한 일처리로 젊은 사대부들에게도 신망을 얻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지만, 어린 왕 단종을 지키기 위해,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에 맞서 고군분투하다 결국 수양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정승으로서 위엄을 잊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죽음으로 증명해주었다.
아무리 일흔이 넘은 노구라해도 생사에 초연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종서가 마지막 갔던 길은 어린 왕 단종의 신하로서 지조와 명예를 훼절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인간이란 그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루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서 목숨을 구걸하거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자신이 섬기던, 옳다고 생각하던 신조를 헌신짝 처럼 내버리고 변절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그동안 내가 읽었던 필자의 글 스타일과는 달리 글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덕일은 상당히 논쟁을 많이 일으킨 저술가인데 조선 여러 왕의 독살설을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이 책에서도 여전히 문종이나 예종에 대해서 독살을 암시하는 듯한데 전처럼 노골적이지 않고 은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다 보통 이덕일하면 상당히 극적으로 내용을 풀어가는 편이라 한편의 사극을 보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책에서는 비교적 차분하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김종서, 조선의 눈물'이란 제목에서도 감이 오지만, 김종서의 죽음은 비단 한 개인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적 가치, 유교적 가치가 붕괴되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비장하기까지 했다.
김종서의 고통은 권력 찬탈자, 수양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역적으로 몰려 가솔들은 죽거나 관비로 전락하는 현실에서는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멸문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 그는 충분히 예견했을텐데.. 아무리 죽음 앞에서 의연한 척해도 그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단종의 운명도 걱정됐을테고, 세종과 문종에게 단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송구한 마음과 회한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종서는 그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패자로서 달리 그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 반면 수양대군은 끝내 어린 조카를 내쫓고 보위에 오르면 승자가 됐다. 동생과 조카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렇게라도 권력을 거머쥐고 싶었고, 그렇게 얻은 권력은 마냥 달콤하고, 보위가 편안했을까. 내 자식에게 왕관을 씌워줄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으려나. 그 심정이 궁금했다. 권력욕에 취해 있을 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잊을 수 있었겠지만, 죽음을 앞두고는 절대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승에서 형 문종을 만나고, 부왕인 세종을 만나고, 조카인 단종과 김종서, 사육신을 비롯한 자신의 손으로 사지로 몰아넣은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단종의 어미가 꿈속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였으니, 네 아들을 죽일거라는 꿈을 꿨고, 그 뒤 아들 효경세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세조의 공포심과 함께, 그가 죄값을 치루길 바라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세조는 실제로 악몽에 시달린 적도 많았을 것이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 업보라는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좀처럼 낫지 않아 그를 괴롭혔던 종기조차도 그는 죄값이라고 은연중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불교에 심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 불경을 간행하는 것으로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한 사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부처님앞에서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고 용서를 구했겠지.
이렇게 김종서는 현실에서 패배자로 죽음을 당했고, 세조는 승자로서 만인지상이 됐다. 하지만 그 재위기간이 불과 13년의 영광이었으니.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지만, 예술 못지 않게 긴 것이 역사이다. 그의사후 평가를 생각해보면 누가 승자가 됐는지는 자명하다.
세조의 정권 찬탈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도 있지만, 하지만 그가 공신들에게 나눠준 엄청난 특권이나, 골육상쟁의 패륜을 생각하면 그런 평가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세조는 특권층을 양산했고, 그것은 공신들의 제어되지 않은 권력형 부패와 횡포, 그리고 경제적 특권도 그렇고, 더욱이 사회의 도덕관이 무너짐으로써, 두고두고 조선에게는 무거운 짐이 됐다. 한번 무너진 도덕적 가치와 왜곡된 정치구도는 그 파열음이 당장은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겉으로 봐서 멀쩡하다고 해도 그 사회가 온전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세대, 두세대 이상은 그 후유증과 폐단에 고생을 하게 된다.
![]() 더욱이 세조는 태종과 달리 자신이 죽이거나 자신이 보위에 앉는 것에 반대한 단종의 신하들, 그 당사자 뿐 아니라 그 후손들마저도 죽이거나 신분을 낮춰버렸으니, 죽은 이에게 뿐 아니라 산자들에게도 대대손손 고통을 가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아무리 승자로서 기록을 미화해놓는다해도 사후까지 그 승자로서의 영광을 누리지는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김종서는 후대의 사대부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들의 사표가 됐다. 반면 세조나 그의 책사 한명회는 그러질 못했다 현실에서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누렸지만, 사대부들의 존경은 상실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김종서를 기리는 서당은 있지만 한명회를 위한 서당은 없다는 것, 권불십년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권력으로 채웠던 영광은 권력이 사라지고 나면 애써 권력으로 감춰놓았던 몰골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종서의 죽음을 보고는 묻게 된다. 나는, 아니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그것은 동시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를 따져 묻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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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 책의 주인공인 김종서의 어이없는 죽음보다 문종의 짧은 재위기간에 너무 속이 상하다 못해.....또 있지도 않을 만약에를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