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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책장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철학적이고, 철학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각적이며, 현실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작가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인물이 사실은 작가의 상상 속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읽을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목인 ‘불멸’의 의미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불멸을 대단한 업적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해석을 거부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에게 기억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결코 본인이 의도한 모습 그대로 남지 않는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기억은 끊임없이 왜곡되고 재해석된다. 결국 불멸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끝없이 변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나는 아녜스라는 인물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다. 반면 언니 로라는 끊임없이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갈망한다. 두 자매의 대비는 오늘날의 사회를 떠올리게 했다. SNS가 일상이 된 시대에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로라처럼 살아간다. 사진을 올리고, 반응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기뻐하거나 실망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진정한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30대가 되면서 나는 타인의 시선보다 스스로의 만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직장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결혼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기대 속에서도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아녜스가 보여 주는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욕망에 종속시키지 않으려 한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해서도 독특한 시선을 보여 준다.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이 사랑을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으로 묘사한다면, ‘불멸’은 사랑 속에 숨어 있는 소유욕과 자기애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은 꽤 불편했지만 동시에 솔직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사라진다.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도 수십 년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하기 때문에 현재가 소중해진다. 불멸을 꿈꾸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읽고 난 뒤 오랫동안 마음속에 질문을 남긴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불멸을 원하는가? 책을 덮은 후에도 이러한 질문들은 계속 남아 있었다. 아마 좋은 문학이란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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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불멸>을 읽으며 살아있는 동안 후세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의 옛 속담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멸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그 답을 제시해준다. <불멸>은 아녜스와 로라 자매의 이야기를 쿤데라 자신이 직접 소설을 쓰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둘은 자매이지만 현저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생 로라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사람을에게 인식시켜 그들의 생각 속에서 불멸하려는 인간이다. 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어떤 것을 하는 자신' 이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한다. 책 중간중간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괴테와 베테나의 이야기는 로라로 대표되는 사람들의 욕망을 잘 설명해준다. 베테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괴테에게 접근해 괴테와 교제하며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았다. 이는 나중에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 받은 편지>라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중에 발견된 편지 원본에 따르면 이 책은 상당부분 내용이 각색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베테나가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세계적인 작가 괴테의 연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욕망 아니었을까? 반면 아녜스는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과 딸을 떠나기도 하고 사진을 찍히는 것조차 거부하는 등 진정 자신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지우고 싶어한다. <불멸>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자신을 지우고 싶어하는 아녜스는 보이는 이미지에 매몰되고 싶지 않은 쿤데라의 희망을 오롯이 담은, 즉 산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행복한 인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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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인간은 필멸한다. 그러나 불멸을 꿈꾼다. 인간이 아직 풀지 못한 숙제다. 인간은 불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고대 동굴 석화를 그렸던 원시인처럼 우리는 어떤 몸짓으로든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한다. 그게 불멸을 의도하고 한 행동이든 아니든 간에. 밀란 쿤데라가 거의 60세가 될 즘에 발표된 작품 <불멸>은 그의 상황에 걸맞게 명성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농담>, <삶은 다른 곳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으로 유명세를 떨쳤기에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과 죽음에 대한 사유들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다. 먼저 밀란 쿤데라께 감사한 부분부터 적어볼까 한다. 밀란 쿤데라가 60세 경에 쓴 책이라 그런지, 책을 읽으면서 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책의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62세의 괴테에게 26살의 베티나가 나타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극찬한 그 베티나 말이다. 그녀는 불멸을 위해 괴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괴테는 그녀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불멸을 위해 베티나는 괴테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괴테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베티나라는 욕망과 거리 두기한다. 괴테는 갈수록 기력이 쇠해지고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삶이 피로해졌을 때쯤,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에 베티나를 “귀찮은 쇠파리”라 칭했다. 이를 두고 밀란 쿤데라는 이제껏 자유롭게 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철저히 검열한 것에 대한 해방이 피로에 지친 노인이 되었기에 진정한 자유를 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연세 있으신 어른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말실수나 몸짓의 근원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이해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것은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며, 젊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품어주어야 부분으로 느껴졌다. 연륜이 있는 작가가 글을 썼으므로, 독자는 운 좋게 알 수 있게 된 점이라 생각되었다. 연세가 있으셔도 계속해서 글을 써주셨던 밀란 쿤데라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작가는 불멸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설 속의 소설 인물을 얘기하자면, 아녜스와 그의 남편 폴, 아녜스의 여동생 로라, 아녜스의 내연남 루벤스가 등장한다. (작가 밀란 쿤데라도 소설 속에 등장한다.) p82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과 큰 불멸,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베티나는 큰 불멸을 이뤘고, 로라는 작은 불멸을 이뤘다. 작가는 이 두 여인의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한다. (둘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나는 베티나의 큰 불멸이 불멸의 명성에 걸맞은 것이었는지, 로라의 작은 불멸을 향한 몸짓이 그녀에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자문해 본다. 베티나는 괴테를 향한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남았으나 실상은 불멸의 욕망을 가득 품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생은 온통 괴테를 이용해 불멸하기 위해, 불멸에 헌신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베티나가 그리는 큰 불멸은 책에 나오는 예술가들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책에서 아녜스의 내연남 루벤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p449 엉터리 그림들, 엉터리 시들 대부분은 바로 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어떤 사명, 어떤 의무(그들 자신을 향한, 즉 인류를 향한)를 보기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닌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면서부터 그는 예술가와 작가들을 재능보다는 야심 많은 작자들로 보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그들을 피했다. 베티나의 불멸은 그녀가 가진 어떠한 뛰어난 면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실력보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라의 결말은 어떠한가? 그녀는 형부 폴과의 관계가 들통나서 언니는 급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조카 브리지트와 폴을 두고 매번 다투다가 브리지트는 밖에서 딸을 임신해 돌아오게 되고, 폴은 두 여인의 성화에 급격히 노쇠해 간다. 그녀들이 불멸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잃거나 혹은 결론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다면 괴테와 베토벤이 산책하던 도중 황녀를 보고 모자를 벗어 길을 비키던 괴테와는 달리 귀족 신분을 신경 쓰지 않고 모른 척 자신의 길을 걸어간 베토벤의 일화를 듣고도 우리는 그의 음악을 음악 자체로 평가 내릴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가 만든 단어 ‘이마 골로기’가 등장한다.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의 합성어로 뜻은 논리 체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세상을 가르킨다. 오늘날 이마골로기를 가능하게 하는 기능은 여론조사 때문이다. p189 오늘날 파리에서, 같은 층에 사는 나의 이웃은 낮에는 사무실에서 다른 동료 직원을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낸 뒤, 집에 돌아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최근 여론조사를 해설하면서, 대다수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생각한다는 정보를 알려주면 그는 매우 기뻐하며 샴페인 병을 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자신이 사는 골목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 세 건과 살인 사건 두 건을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여론 조사는 이마골로기 권력의 완벽한 도구다. 이 권력이 대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론조사 덕분이다. … 이마골로그들의 권력은 이 진실의 국회와 대립 상황에 처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기에, 영원히 진실 안에서 살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과연 어떤 힘이 이 권력을 깨뜨릴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마골로기의 문제는 실체와 이미지와의 간극이다. 괴테가 베티나로 인해 부인 외의 다른 여자를 두고 있다는 이미지가 생겨버리고, 베토벤과의 만남에서 모자를 벗고 귀족에서 길을 내어주면서 (베토벤과 비교되어) 비굴한 이미지를 가져버린 것처럼 자신의 이미지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며, 만들어진 이미지는 실체와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미지에 지배하에 이미지 뒤에 숨을 수도 있고, 이미지로부터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불멸 또한 이마골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불멸 속에 잠든 괴테와 헤밍웨이를 만나러 간 밀란 쿤데라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헤밍웨이는 쿤데라를 보며 투덜댄다. 그리고 한마디로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라 단정한다. 그의 죽음 앞에 떠들어 대던 사람들과 논문들과 책들, 근거 없는 소문들이 그의 불멸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괴테 또한 그가 꿨던 괴상한 꿈으로 불멸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저승에 있는 그들은 불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불멸에 대한 허망함은 아녜스의 말로 더욱 힘을 실어준다. 남편 폴과 여동생 로라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나서 그녀는 스위스 시골에서 산책을 하던 중 기이한 경험을 한다. 풀밭에 누워 시냇물 소리를 듣다가 자아를 잃고,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즉, 존재의 기쁨을 느낀다. 나는 이것이 살아있음,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고 본연의 실체를 만끽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아무리 불멸했다 할지라도 저승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이며, 그들에게 남겨진 불멸은 이미지이며 그것은 죽은 것이다. 존재는 현실에 실제로 있는 것을 의미하며, 살아있는 생명체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불멸의 이미지는 그리 위대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하찮다고 말한다. 괴테가 한평생을 바쳐 만든 ‘파우스트’,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9번 교향곡‘도 처 부셔야 할 것들이라는 말이다. 대중이 그들의 삶이 궁금해서 그들의 작품을 보고 듣지만, 그것은 위장된 그들의 삶일 뿐이기에. 또한 그들의 삶만큼 우리의 삶도 그들 못지않다. 오히려 불멸을 향한 몸부림이 천박한 것이요. 불멸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허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란 쿤데라는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을까? p550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1부에서도 등장했던 물망초. 추한 세상 앞에서 마지막 이미지로 보고자 한 것. 어쩌면 아녜스가 하는 몸짓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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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9"우리 이미지란 단순한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이야. ...(중략)... 너무나 포착하기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라는 걸 말이야." P342"그녀를 자극한 것은 괴테가 아니라 늙은 시인을 사랑하는 베티나라는 아이의 매혹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P399"땅속이나 불 속으로 사라질 그 얼굴은 이미 머지않아 죽을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을 먹어 치우고자 하는 굶주린 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P547"진짜 선택을 할 땐 장담컨대 하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사랑의 밤보다는 광장 산책을 원할 거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찬사지 관능이 아니기 때문이야. 겉모양이지 실재가 아니라고. 실재는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 내 생각: 책이 주는 여러 메세지 중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은 '이미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베티나는 괴테에게 사랑받았던 여인의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루벤스는 아녜스와 오랜 기간 후 다시 만났을 때 조금 늙긴 했지만 예전에 자기에게 보여준 아녜스의 수줍은, 사랑스러운 이미지 속으로 그녀를 넣었고 예전처럼 사랑을 만끽했다. 아베나리우스는 쿤데라에게 모든 사람들이 두가지의 선택지가 놓였을 때 매력적인 여성과의 하룻밤보다는 그녀를 데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으스대며 잘 나간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지라는 것은 고통이다. 이미지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조작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또, 이미지는 삶에서 나타나는, 존재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숲길을 걸으면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고 감탄을 내지르지만 길이 도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어느 한곳에서 어느 한곳으로 이동하는 것만 고려하기 때문에 길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미지라는 사진 몇 장이 우리의 생각과 과거를 사로잡아 머릿 속에 남는다면 우리는 그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사이 사이 존재했던 것들을 잊게 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사람들로부터, 이미지로부터 벗어난 삶을 꿈꿨고 그의 동생 로라는 반대로 언니의 이미지(로라가 만들어낸, 로라가 얻고 싶었던)를 구현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느 것이 옳다기보다는 어느 것도 제대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수도원'같은 도피처가 없는 현대에 아녜스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로부터,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로라가 원하듯 어떠한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끊임없는 욕망과 질투를 동반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미지는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왜 아녜스가 육체를 덧없다고 생각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육체라는 것은 영혼이나 사상과는 달리 실재하는 것이고 늙어 가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 같은 것으로 영원히 젊게 잡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내가 욕망하는 것들. 환희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사라질 존재이다. 우리가 피가 거꾸로 솟아 열중하는 것들, 정신이 나가있는 것들이 사실은 덧없는 것들이 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의미를 조금은 더 깨닫게 된 것 같다. 쿤데라가 글에서 죽은 헤밍웨이, 괴테의 이미지를 그들이 죽은지 한참이 되어도 논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죽어도 끝나지 않을 이미지의 불멸, 끔찍함, 반대로 생각하면 모두 의미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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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작가의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두 번째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크게 어려운 소설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많은 책이라서 읽을 때 천천히 읽게 되는 것 같다. |
|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으로 접했었다. 읽으면 재밌을까? 라는 생각으로 한참을 망설였었는데 줄거리를 듣고선 도전해봤었던 것 같다. 읽자마자 후루룩 읽히는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뒤로는 밀란 쿤데라의 책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었다.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전집이 개정판으로 나왔다길래 <불멸>도 포함되어있어 개정판으로 사려다 세문전으로 구입하고 싶어 세문전 버전으로 구입했다 :) 양장본도 좋지만 세문전도 좋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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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불멸이란 사람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각인되는 것. 괴테와 베티나, 아녜스와 로라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p.201 "사실 비사유를 합화하려는 논증보다 더 사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도 없지... 자넨 자네 무덤을 파는 자들의 총명한 동맹자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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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이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좀 불친절한 책을 읽을때는 해설의 도움을 받는 편인데 하물며 이책에는 해설편도 없다. 왜지?? 그러다 책의 끝부분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을 읽게 되었다. ...케네디가 모든 사진들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 그의 입이 한 번도 다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루벤스는 한참 동안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앞에서서 그는 그 대리석상의 얼굴이 케네디 얼굴처럼 웃고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남성미의 전형 다비드가 문득 멍청이처럼 보였다! p514 ... 웃음은 얼굴의 발작이며, 이 발작이 일어날 때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p516 웃음이 얼굴의 발작이라 기발하다. 생각해 보니 다비드상은 웃고있지 않은 모습이 아름답기는 하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웃음이 피식하고 났다. 역시 밀란 쿤데라, 역시 재미있단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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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흔히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제목의 임팩트는 좀 더 약하지만 좀 더 다채로운 쿤데라의 철학을 담고 있는 이 '불멸'을 나는 추천하고 싶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엇갈리면서 그와 동시에 쿤데라가 묘사하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또한 쿤데라는 이 작품에서 '이마골로그'라는 용어를 창작했는데 이는 이미지의 시대가 되어버린 당시 시대상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현대에 와서도 상당히 유효하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뭐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다. 문학은 하나의 골로 향하는 사이클 경주가 아닌, 다채로운 음식의 향연이어야 한다는 쿤데라의 주장대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비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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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뭔가를 하나 읽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볍지 않은 책이라 좀 주저했고 '불멸'은 도입부가 흥미로워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페이지를 넘긴 후부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책의 내용 자체가 너무 방만한 느낌이라 그다지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작가의 지적 방대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아녜스와 그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괴테와 베토벤이, 히틀러와 루벤스와 피카소와 나폴레옹과 랭보가 느닷없이 등장하고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들이 맥락없이 나열되는 느낌이다.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져 결국 절반까지만 숙독하고 나머지는 휘리릭 넘겨 마무리했다. 친구에게 추천하기는 좀 어려운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