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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난 손톱이 꽃나무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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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손톱이 예쁜 꽃나무로 형상화되어서 밝고 경쾌한 느낌을 가졌드랬다. 손톱이 의미하는게 날카롭고 무기가 될 수 있음에도 저런 꽃나무와 파스텔톤 표지가 주는 화사함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인줄 알았다. 그런 희망은  심연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어서 남들 눈엔 잘 보이지 않는 바램이자 욕망이었다. 이율배반적으로 그 꿈과 희망을 바라는 마음은 깊디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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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손톱이 예쁜 꽃나무로 형상화되어서 밝고 경쾌한 느낌을 가졌드랬다. 손톱이 의미하는게 날카롭고 무기가 될 수 있음에도 저런 꽃나무와 파스텔톤 표지가 주는 화사함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인줄 알았다. 그런 희망은  심연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어서 남들 눈엔 잘 보이지 않는 바램이자 욕망이었다. 이율배반적으로 그 꿈과 희망을 바라는 마음은 깊디 깊은 상처와 광기로 표현되면서 남에게 상처를 내지만, 내출혈은 자신도 모르는새 더 깊어져 파괴되는 자신인 것을. 욕망에 다다르고픈 갈망이 낳는 철저한 단절과 고독감, 나아가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어우러진 안타깝게 몸부림쳐 보는 단계를 그렸다.
<이책은>
책의 날... 이벤트 당첨
아까운 책찾기 3등 10권 책 속에 들어 있었다.
<책 내용 맛보기>
-하얀 벽 : '자기애'에 빠진 나.
-난 네가 되고 : 쌍둥이로 태어나 겪게 되는 애환.
-붉은 곰팡이 :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에서 밑바닥에 닿아 비참을 넘어선 처절한 절규.
-손톱이 자라날때 : 나는 나를 지킬 무기가 필요했다.
-고누다 : 뭘 겨누고 싶었던 걸까. 그 이름하여 고 누 다.
<책 읽은 소감>
고2 아들을 둔지라 청소년소설에 관심이 많다. 일부러 가능하면 읽는편인데 얼마전 '질주하는 검은 혀' 연재글이 끝났다.  비너스에게 연재글도 읽었던 이유는 청소년에 관한 소재라서였다.  전자는 철저히 소외된(태생적으로 부모에게조차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자신도 소속되기를 별로 원치않는)아이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나마 살 길을 찾는 얘기. 그런데 사고로 여동생을 둔 친구가 우연히 보게 된 동영상이 그림자같은 그아이여서 복수가 시작되는데...비틀린 아이들, 못마땅한 아이들, 저마다 학교생활이나 가정 어느곳도 자신이 맘에 들어하지 않는 아이들의 내면을 그렸다. 그 상상도 안되는 세계를 아침마다 글을 통해 접해가는 시간은 매우 불편했다. 질주하는 검은 혀가 만들어내는 눈덩이같은 진실 아닌 진실들 앞에서 경악 그 자체였다. 한 세상을 살아도 알고 싶지 않은 아들이 속해 있는 세계를 영 모르고 싶었다. 후자는 그에 비하면 더 순수하고 그나마 조금은 이해되는 따스한 면도 있었다. 그 세계 역시 낯설었지만 조금은 웃음도 동반하고 성장하는 시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청소년 소설을 읽고 떨렸던(무서웠던) 기억이 이금이의 벼랑이었다. 세상물정 많이도 알 것 같은 사초녀의 입장에서 책을 읽고는 사회의 단면을 알면서 몸서리쳐지는 고통, 싫었다. 행여라도 내 아이가 읽는다면 이런 일이 있음을 알게 될까봐 조바심치는 모정이 그 책을 가능한 깊숙이 꽂아놓았다. 밝고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다해도 적어도 교훈이 되면서 희망적인 책. 그런 책을 만나면 행복해지고 그런 책을 선호하게 된다. 아이에게도 그런 책을 권하게 된다. 뒤집어 사회의 어둡고 습한 일면을 일찌기 알게 해줌도 괜찮다 생각할 수 있으나 굳이 일부러 알게 해주고픈 마음은 없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벼랑과 함께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리라. 어른인 나도 이렇게 소름끼치고 떨려하면서 접한 책이니 말이다. 책이나 드라마, 영화의 장르를 선택할때 선호도와 취향따라 선택하겠지만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것들을 대할때 불편함이 클 수도 있지만 이해도는 떨어지리라. 경험치안에서의 가늠도 차이가 있기에.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같은 상황을 본다면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는 면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살하고픈 사람이라면 그와 관련된 책들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올까?

나는 예쁘고 집안좋고 공부도 잘하고 그런 아이가 샘들의 사랑도 받고 그런 상황을 질시는 해도 부러움으로 바라봤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노력하여 되는 부분은 혼자서 노력을 했다. 부모의 후광덕에 부유한 아이를 보면 잘난 부모덕이라 좋겠다 라고만 생각되었지 내부모를 원망했다거나 비관하면서 상대를 내리누르는 일 같은건 꿈조차 꾸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부러움으로 바라봤어도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왜냐? 나도 어릴때부터 학교생활까지 귀여움은 많이 받았다는데 동감한다. 이뻐하니까 미운짓을 못했겠지 라고 몰아부치면 할 말이 없다. 미운짓을 안하니까 이쁨 받은거지 라고 생각한다. 미운짓이란 학생으로서 하라는 것만 했다는 이야기니 샘들 입장서는 다루기 쉽고 순한 아이니 안 이쁠 까닭이 있었을까. 그렇게 말썽 안피우고 순했어도 존재감이 없는 아이도 있는데 적어도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질시의 대상이었는데 거기서 원만하게 융화하는 법을 몰랐기에 가만 있는게 상책였다. 그렇다해도 날 해꼬치 한다던가 그런건 없었다. 다가오는 사람은 친해지는데 내가 다가가는건 꿈도 못꿨다. 세월가도 그게 오래이 유지되더라.

이런 생활이 전부였던 나에게 이 책은 괴로움이고 상당히 불편함 그 자체였다. 기승전결이 없는 여학생들의 암투가 그려진 상황, 그 단계만을 그렸을뿐이다. 그렇기에 결말도 없다. 왜 그러한 상황이 생겼는지도 독자의 맘대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조화가 되지 못하는 학생들의 비애가 있다. 몇몇의 친한 아이들 사이에서 끈끈한 우정이란게 진정성이 없다. 그저 '따' 당하지 않으려면 아이들과 함께 해야한다는 것. 그 몇 명 안에서조차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까봐 늘 안테나의 주파수를 점검해야 하는 일상. 상대방의 어떤 면이 이쁘다거나, 매력적인 모습이 남들눈에도 비쳐서 나에게 오던 관심이 상대에게 갈까봐 전전긍긍하는 자기애에 빠진 아이. 그러자니 그 병적인 애착과 집착은 도를 넘어서 벽이 다가오고 자신을 짓누르고 ... 서서히 미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겉은 말짱해도 제 정신인가 싶은 기집애들였다. 하나같이 앞에선 친한척하면서 누구를 '따' 시킬까 궁리하는 눈길이고, 뒤돌아서면 자신이 '따' 될까봐 조마조마한 가시내들. 이것이 한창 꿈많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라면 너무나 비극이다. 이런 아이들을 다루실 샘들의 손길이 너무나 아쉽다. '情'에 굶주린 아이들이라고 해야나. 암담했다. 배려라는건 없다. 자신들안에서의 입지가 흔들릴까봐 걱정되어서 행해지는 계산된 배려와 계산된 친절 그리고 계산되어진 우정만이 존재한다.

부모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살던 가장이 현실대처능력이 떨어져 가게 보증금마저 까먹고 알거지가 되었다. 미루고 미루다 쫓겨날 상황이 되자 그나마 엄마가 나서서 지하방으로 이사를 한다. 그것도 감지덕지 이사한 지하방은 곰팡이가 피어나고...그걸 닦아내는 엄마의 얼굴과 마음에도 곰팡이는 자라기 시작한다. 남동생에게 돌아가는 엄마의 음성은 타인 것이요, 그럴수록 남동생은 더 보채다가 얻어 터지기도 한다. 닦아도 닦아도 세력을 확장하는 곰팡이들은 그림을 형성하고, 온 가족의 마음까지 갉아먹으면서 자리를 잡아가는데...이렇게 사는 인생도 분명 있을진대...참으로 음습하고 우울하고, 상대적 행복감마저 죄스럽고 기분나빴다. 남동생을 데리고 간 병원. 농가진입니다. 뭐 곰팡이... 왜 하나같이 우리 가족은 가난이 덕지덕지 붙은 모습일까. 냄새가 시큼 풍길 것 같은 모습일까. 누가 봐도 곰팡이 핀 지하방에 산다는걸 다 알아볼 것 같음이 못 견디게 싫은 나. 서서히 미쳐간다 싶은 듯한 엄마. 드디어 살길은 곰팡이가 더 점령하기 전에 탈출하는길. 앞전에 살던 사람들이 오늘이라도 방을 비워줄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요. 그 말을 그대로 시행하게 되는 나와 가족들은 이 문제에서만은 똘똘 뭉치고 합심이 된다. 이런 희한한 구조의 지하방은 들어본 적도 없고 더더구나 본 적도 없다.

손이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어린젊은날이 있다. 그런 소릴 많이 들었기에 손이 예쁘다며 직장 상사가 내 손을 만지작 거렸던 적이 있었어도 큰 거부감을 안 느꼈던건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 내 순진무구함이 한몫이었고, 그때만 해도 성추행이란 말이 거의 전무후무하던 시절이었으니...한번은 버스 뒷자석에 앉았는데 옆에 아주머니가 손을 만지면서 어찌 그리 이쁘냐고 손이 이쁘면 고생을 안한다며...육체적 고생은 덜했지만 정신적은 만만치 않은 적도 있었나니. 이쁜 손에 손톱을 길러서 매니큐어를 바른 적이 있었다. 좀 뽀얀 피부에 화장은 거의 안했고 아주 가끔 손톱에 꽃분홍색 매니큐어를 바르면 다들 한마디씩 꼭 했었다. 이렇듯 네일아트도 등장하는 요즈음 손톱은 미의 표현이자 에로시즘의 상징이기도 하거늘 여기서의 손톱은 무기 그 자체다. 자신을 방어하는 방패막이 역할도 하지만 과시용이다. 남에게 겁을 줄 수 있는 한 방편인 것이다. 그 누구도 손톱을 기른 아이가 없기에 말이다. 그건 꿈이나 희망을 상징하는 꽃나무가 자라는 손톱이 아니다. 철저하게 외면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요, 소외시킬까봐 몸부림치는 처절함의 발로일 뿐이다. 손톱이 자라나 온 신경이 모아진 것처럼 아픔이 전해오자 누군가를 할퀴고픈 욕망에 참아내느라 몸서리친다. 그건 죽기살기의 버팀이다.

각종 병의 증상을 읽다보면 마치 모든 병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아는가. 범인이라  생각하고 수사하다보면 그사람이 범인이 될만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게 되는 오류가 생긴다. 몰고 가고 싶은 생각도 있겠지만 한쪽만으로의 치우친 생각은 그럴것이라는 고정된 신념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리라. 믿는만큼 믿어지고 안믿는만큼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타블로의 사건에서 알 수 있다. 못믿는게 아니라 안믿는거잖아요 라고 울먹이던 타블로. 항간엔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상황들의 반복이 각인시켰을게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믿음을 주는 행동을 못하고 남이 믿음을 줘도 일단은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는 형국. 슬픈일이다. 항상 말에 따른 확답을 요하거나 다시 한번 다짐을 요하는 '정말이에요' ,'사실이야' . 매체가 더 부채질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누구든지간에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들어주는걸 다들 원한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픈 욕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고 친구들과의 진정한 우정을 바란다면 좀더 솔직해질 수 없을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든지 부딪쳐 깨져서라도 감정을 해소시킨다든지 하는. 그저 전전긍긍이 최고조에 달해 정립되지 않은 내적 자아들이 불일치로 인해 정신착란을 일으키기 일보직전인 단계를 매양 그린다. 그걸 읽는 독자인 나는 괴로웠고 불편했다. 작가는 기승전결에 기인하지 않고 글을 보여준다. 여러 형태의 아이들중에서 배배 꼬인 아이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외로운 아이들, 화합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냈다. 따스한 시선으로 비난하고 힐책하는 것과 애당초 냉소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의 출발은 너무나 다름을. 난 이 소설이 무서웠다. 호러 소설로 등단한 작가라는데 선호도와 취향은 천차만별. 한번이야  어찌해서 읽게 되었고, 세상엔 이러한 아이들도 있구나를 알았음에 되었다. 거리의 교복입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난 무서운 경험(?)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세월의 뒤쳐짐이래도 순수하고 해맑은 여학생들이 대부분이라고 믿고 싶다.



k******5 2011.03.13. 신고 공감 11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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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또래집단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손톱이 자라날 땐』
"청소년 또래집단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손톱이 자라날 땐』" 내용보기
섬뜩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겁이 워낙 많은 편이라 어두워지면 혼자 어딜 가는 것이 두렵고 심지어 달빛 가득한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그런 밤에 귀신이 더 잘 나올 것 같은 으쓱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술 먹으러 나가는 밤길은 무섭지 않더이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성장소설이겠거니, 성장 소설인 만큼 발랄하고 유
"청소년 또래집단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손톱이 자라날 땐』" 내용보기
 

  섬뜩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겁이 워낙 많은 편이라 어두워지면 혼자 어딜 가는 것이 두렵고 심지어 달빛 가득한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그런 밤에 귀신이 더 잘 나올 것 같은 으쓱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술 먹으러 나가는 밤길은 무섭지 않더이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성장소설이겠거니, 성장 소설인 만큼 발랄하고 유쾌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겠 거니 했는데 책의 첫 장부터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의성어부터 등장해주신다.

[똑.똑.똑.]

벽 두드리는 소리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5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이다. 거기가지 보면 소녀을 위한 흔한 현대판 성장소설로 생각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르는 모두 호러, 공포물이다. 그리고 장르가 장르인 만큼 초현실적인 구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단순히 성장소설이라고 이 책을 소개하기엔 소개받는 사람에겐 정확한 설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수식어를 좀 길게 붙여 요즘식으로 표현해본다면

“미스터리 호러 환타지 성장 소설?!”

피식....내 폐어서 허무한 날숨소리가 절로 나는 수식 문구이긴 하다. 표현의 한계에 쓴 웃음만 날 뿐이구나.


  5개의 이야기모두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을 현실 모습과 잘 결부시켜 학창시절 친구관계의 미묘함을 공포스럽게 그려낸다.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더 강한 척, 더 멋있는 척 하려다가 그것이 더 화를 불러 온다는 것을 자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나의 지나온 학창시절, 여학생들의 묘한 또래집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훈련해왔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 의사소통의 장애로 또는 당하는 자의 피신처로, 어디로도 도망갈 수없는 감옥으로 표현된 “벽”이라는 소재를 이용, 온몸을 소름 돋게 한 『하얀 벽』

 

○ 다른 사람에게 늘 사랑만 받았던 쌍둥이 언니가 미워 갑자기 죽어버린 언니를 대신 행세하며 자기 자신을 버려버렸던 지영이의 모습을 그린 『난 네가 되고』

 

○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 가족을 붉은 곰팡이가 삼켜버리는 묘사가 압권인 『붉은 곰팡이』

 

○ 너무 예쁜 손톱을 가진 그녀가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아이러니하게 손톱을 무기화하는 모습을 담은 『손톱이 자라날 때』

 

○ 알고 보니 모두 가짜였던 주변 사람들, 정작 자신을 가짜로 만들면 간단한 해결

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고누다』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반전적 묘사를 사용하긴 하나 대체적으로 설정이 강렬하진 않다. 안팎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여러 면 중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훌쩍 자라는 시기인 만큼 혼란과 불투명한 시간을 걸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그것을 작가 방미진은 오싹하게 풀어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작가의 말을 읽다보니 “학교”라는 곳 자체에 부정적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같았다. 그래서 학교를 배경으로 택하고 억압적이면서 폐쇄적인 무대에서 주인공들이 우울한 모습으로 춤을 춘다.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나도 그렇게 지나오지 않았는가, 되새겨보는 계기도 된다. (나는 학교에 순응, 복종 잘하는 학생이어서 그랬는지 큰 불만은 없었던 것 같다. 실은 그 당시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일지도)

 

  여학생들의 심리와 또래 관계 묘사가 탁월하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장단을 맞추느라 다들 지쳐버려서인 것 같기도 하다.



YES마니아 : 로얄 g********s 2010.10.13. 신고 공감 9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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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상황과 연출은 삶의 은유이자 표현이다.
"기이한 상황과 연출은 삶의 은유이자 표현이다." 내용보기
누구나 자라면서 표지의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취하고 있는 표정과 행동은 우리 혹은 우리네가 타인에게 보이지 않은 내밀하게 숨겨온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상처가 나서 아파서 우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상처가 나서 아픈데 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었다. 고등학교 때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굉장히 성숙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기이한 상황과 연출은 삶의 은유이자 표현이다." 내용보기



누구나 자라면서 표지의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취하고 있는 표정과 행동은 우리 혹은 우리네가 타인에게 보이지 않은 내밀하게 숨겨온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상처가 나서 아파서 우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상처가 나서 아픈데 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었다. 고등학교 때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굉장히 성숙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창틀 난간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걸 아이들이 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한 눈에 보아도 고양이가 안전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많이 기르지 않을 때라서 고양이의 습성을 아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고양이는 저런 곳에서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학년에서 가장 예쁜 그 친구가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울면서 고양이가 너무 불쌍하다며 119를 불러달라고 칭얼대었다. 순간 그 정적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정적 후에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 친구를 어르고 달래었다. 역시 마음이 따뜻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보이지 않은 저 뒤편에서는 미친 거 아니냐는 굉장히 심한 말까지 오고갔었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은 청소년기에 아이들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두려움을 햇빛에 들어 내놓여 보여주는 것처럼 긴박한 템포를 가진 이야기들이었다. 혼란이라는 것이 ‘누구나’ 겪는 혼란이지만 혼란의 모습은 각기 다르게 다가오고 그 누구도 쉬이 그것에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만이 주목받은 주인공이고 타인은 관객이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와 그 아이를 떠받들며 자신도 주목받기를 바라는 소녀무리들과 외적으로 주목받을 것을 타고나지 못해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리들의 어색하고 기묘한 동거가 바로 청소년기가 아니었나는 생각이 든다. 자기현시욕에 빠져서 자신만이 특별히 주목받고자 하는 <하얀 벽>의 ‘민희’의 욕망은 뒤틀려있다. 민희는 자신만이 주목받는 주인공이고 다른 아이들은 관객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민희에게 있어, 관객이라는 배역을 맡아야하는 친구들은 그들 자신이 관객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저주의 편지를 몰래 써서 민희에게 복수하는 베스트프랜드 희진에게서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열망이 그득하다. 호시탐탐 자기 자리를 노리는 가장 친함을 가장한 희진의 짓임을 알고도 민희는 홀로 되는 것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모른 척을 해야 한다. 교실 안에 존재하는 하얀 벽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라든지, 어느 순간 벽이 텅 비어 보이는 것들은 스스로 보지 않으려고 진실을 외면하는 대가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젊은 청춘들의 부조리한 연극은 하얀 벽을 둘러싸인 관객이 없는 연극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극의 내용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공포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 연극에서 배제된 아이는 무대에 오른 소품이 되어버렸다. 교실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책상이나 의자 같이 관객들조차 보지 않아버리는 기묘한 존재 말이다. 비극이야 운명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담을 수라도 있지, 이래서야 공포정치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 모두가 자로 잰 듯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모양으로 재단된 공간에서의 집단생활은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임을 인정받지 못하기에, 내가 아닌 남에게 빛나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어리고 무모한 욕망들이 정말이지 무서운 공포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가장 강렬했던 열망은 나는 나인데, 네가 되는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네가 가진 ‘멋진 환경’을 가지고 싶다는, 그래서 TV 드라마에 나오는 ‘신데렐라’스토리들을 동경했고 그 유리구두가 분명 ‘네가 되는’ 통로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투명한 유리 안에 있는 수많은 구두들은 분명히 내가 원하는 ‘나는 가지지 못했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그곳으로 인도하리라고 믿었었다. 세상에는 유리구두가 흔치 않다는 것도, 유리구두를 신고서는 한 걸음 떼는 것이 피가 흐르는 고통이라는 것도 알지 못해 바랄 수 있는 어린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가 되고>의 지영이의 욕망을 비난할 수가 없다. 아니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쌍둥이 자매를 질투를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람을 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던 지영이는 ‘자신’이라는 쓸모없는 껍질을 버리고 ‘워너비’인 주영이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나랑 똑같이 생긴 존재가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면 분명 주영이는 수 만 번 같은 종류의 애정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고민했을 것이고 노력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피나는 노력에 비해 상대는 너무 쉽게 사랑을 받아 버린다. 그런 좌절을 겪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다. 사랑을 받을 때까지 노력하는 건 노력이 아니라 구걸로 느껴 져버리니, 오로지 그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 ‘지영이라는 껍데기’가 껍데기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였음을, 그리고 너무나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소녀였음을 알게 되지만 가슴 아픈 후회만 남고 만다. 좋아해줄걸. ‘한 번이라도 나를 좋아해 줄걸. 이렇게 사라져 버릴 지영이라는 이름을.’

 

 

가난과 부의 차이가 지하와 지상일지도 모른다. 곰팡이랑 것이 본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눅눅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지하에서 보는 곰팡이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곰팡이는 참으로 기묘하게 다르다. 바로 코앞에서 보면 기분 나쁘게 진화하는 생물처럼 보일 테고 먼 곳에서 내려다보면 독특한 꽃으로 보일 테니까.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지하방에 살게 된 친구와 나는 방에 핀 작은 곰팡이를 보고서는 신기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처음에는 웃었다. 비록 허름할 지언정 모든 집이 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자리 잡은 시골의 집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설고 새로운 곰팡이마저도 그래, 서울에서니까 볼 수 있는 전유물인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웃었었다. 그리고 일 년 후 그 집을 나왔을 때, 친구와 나는 어느 것을 보고서도, 어떤 일이 생겼어도 웃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각자 달리 살고 있는 친구와 나는 웃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가난이라는 녀석이 생긴 모양새가 이러하다. <붉은 곰팡이>는 모든 것을 잃고서 지하방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가족들을 통해 환경과 가난이 사람들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는 곰팡이가 아니라 괴물로 진화한 가난이다. 아버지는 오로지 이 말만 할 뿐이다. “도망칠 수 없으면…….곰팡이처럼 살아.” 이 작품 전반을 가로막고 있는 청소년기의 벽을 깨부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곰팡이처럼 불안과 불행의 숙주처럼 벽에 붙어 기생하고 살란다. 이러하니 쌍둥이처럼 언제나 곰팡이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삶이 파괴당하는 것은 정신적인 피폐함이다. 사실은 그게 쥐덫이니, 곰팡이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걸 청소년기에 알아버린 다는 사실이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소녀의 광기가 아프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이 우쭐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고 한 아이를 지목해서 그 아이에게 시비를 걸고 손톱을 할큄으로써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가진 사람과의 관계와 사회에서의 자아로서의 공포감이었을까. 청소년기의 공포가 어떤 모습이기에 이토록 잔인하단 말인가. 폭력이 우월감을 표현하는 서툰 방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감의 방어라는 든든한 보험을 동반한다하더라도 폭력을 수단으로 우월성을 과시하는 아이들의 행동은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저자는 이 단편을 통해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모두 상처로 인한 같은 고통임을 말해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손톱이 자라날 때> 소녀는 자신의 손톱으로 할큄을 당한 아이들이 어떤 아픔을 겪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에 긴 손톱은 그녀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결국은 한 아이가 전학을 가 버리고 더 이상 손톱이 공포가 되지 않게 되자 그녀는 진정으로 알게 된다. 손톱이 길어지면 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작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은 덜 익어서 새파란 그녀들의 광기들이 소녀들의 심장을 모두 파먹기 전에 아이들의 손톱을 직접 깎아주는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건 아닐까. 아이들 스스로 손톱을 깎기를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이상주의처럼 들려온다.

 

 

기이한 상황과 연출은 삶의 은유이자 표현이다. <고누다>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둘로 만들 수 있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왜 아이는 사람을 둘로 만들고 싶어 할까. 그건 바로 외로움 때문이다. 진짜와는 우정을 쌓을 줄을 몰라서 아이는 둘로 만든 가짜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능력에는 하나의 단점이 존재하는 데 무언가를 둘로 만들면 가짜가 진짜를 잡아먹어버린 다는 것이다. 결국은 소년 주위에 가짜 가족, 가짜 친구, 가짜 이웃, 가짜만이 남게 되었던 것. 사람들은 모두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사람을 사귀려들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터놓고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라며 탓할지도 모른다. 외롭긴 하지만 솔직히 편리하긴 하지 않는가. 능률성과 효율성이란 개념이 경제에서 벗어나 인간관계에도 훌륭한 ‘이익’을 양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묻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은 정말 무지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은 가짜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가짜를 만들어 놓고는 진짜처럼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 관계들은 얽히고설킨 단단하고 복잡한 실 덩이를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 옷을 만드는 데 적당하게 필요한 실이 있으면 되는데 엄청나게 크게 뭉친 실 덩어리에서 실을 푸느라 정작 필요한 옷은 만들 여력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옷을 걸칠 수 없으니 추워서 오들오들 떨 수 밖에.

 

 

까닥 잘못하면 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벼랑에는 늘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난간처럼 진정한 사람들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보호받고 있는 안도감과 안정감을 준다. 물론 그것들이 어려움과 괴로움을 이기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준다는 건 사실이다. 헌데 그 난간이 스스로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어떻게 친하게 지내는지를 모르는 아이들, 닦아도 닦아내지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휘감는 곰팡이로 대변되는 가난에 노출된 아이들, 사랑받고 싶은 아이가 되고 싶은데, 이미 사랑받는 아이가 너무 많아서 자신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지극히 외로운 아이들, 마음을 터놓고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자꾸만 허상에 의존하는 아이들. 이 책에 나온 글귀처럼 <보여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네가 보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이 책의 아이들은 모두 벽 안에 갇혀 있다. 큐브처럼 생긴 청소년기라는 공간에서, 사랑을 받고자 조작하고 있지만 결국은 더욱더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가 되어버린다. 미로라는 어둠속에 갇힌 아이들은 지금도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워하고 있다. 심장이 요동치듯 세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누군가가 정확하게 큐브를 맞춰 자신들을 꺼내주기를 기도하면서. 허나 큐브를 맞추려하지 말고 차라리 깨어버리고 아이들을 꺼내는 것은 어떨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

 

l*****2 2011.03.20. 신고 공감 8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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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동화? [수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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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을 보는듯한 기분?     호러동화라는 애칭을 가진 방미진의 작품!! 삼총사를 졸라대어 선물을 받은 책인데 이정도로 독특하고 음습할줄은 몰랐다. 정말 여고괴담을 보는 기분이랄까? 존재감이 없던 친구가 벽이되어 나를 흡수해버리고, 벽에서 피어난 곰팡이는 집안을 삼켜버리고, 할퀴고 싶어 미치겠는 손톱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수많은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함속에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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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을 보는듯한 기분?

 

 

호러동화라는 애칭을 가진 방미진의 작품!! 삼총사를 졸라대어 선물을 받은 책인데 이정도로 독특하고 음습할줄은 몰랐다. 정말 여고괴담을 보는 기분이랄까? 존재감이 없던 친구가 벽이되어 나를 흡수해버리고, 벽에서 피어난 곰팡이는 집안을 삼켜버리고, 할퀴고 싶어 미치겠는 손톱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수많은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함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악몽과 환각의 장면이 쉴세없이 펼쳐졌다. 이게 왜 청소년문학이지? 중반을 넘어가는 찰나 책에 적혀있는 청소년문학이란 글에 의문이 생겼고, 지나간 줄거리를 되내이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기 시작했다.

 

 

5편의 단편집으로 구성된 <손톱이 자라날 때>는 청소년시절 정확하지 않은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며 고민하는 문제점의 소재에 방미진 특유의 강렬하고 호러틱한 문체가 더해져 독특한 소설로 완성되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벽 혹은 집안에 작게 피어난 곰팡이를 시작으로 더욱더 커져가는 상상의 나래속에 두려움과 공포감이 더해져 스티븐 킹 이상의 독특한 호러소설이 펼쳐진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 상상력이 아닌 지나치기 쉽고 찾아내기 어려운 우리들 청소년시절의 공포감에 대해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는것 인데 "왕따에 대한 두려움" 이나  "학우에게 무시당할하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가난에 대한 열등감"등등이 그것이다.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웠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며 이 책을 음미해 보는것도 꽤 괜찮을듯 싶다.

 

 

n******s 2010.07.21. 신고 공감 7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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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오싹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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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뷰를 작성하기도 쉽지 않고, 함축된 내용을 다시 펼치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장편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한때 블로그를 통해서 서평이벤트를 했던 작품. 호기심에 빌려온 책인데 읽고 나서 가슴 한쪽이 묵직해진다.   하얀벽 : 나는 누구든 뒤돌아 볼 미모를 자랑한다. 사람들이 날 쳐다보며 수근 대는 것도 다 나의 미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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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뷰를 작성하기도 쉽지 않고, 함축된 내용을 다시 펼치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장편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한때 블로그를 통해서 서평이벤트를 했던 작품. 호기심에 빌려온 책인데 읽고 나서 가슴 한쪽이 묵직해진다.

 

하얀벽 : 나는 누구든 뒤돌아 볼 미모를 자랑한다. 사람들이 날 쳐다보며 수근 대는 것도 다 나의 미모를 칭찬하기 위해서 이다. 나는 늘 그렇게 나의 얼굴에 자부심을 갖고 생활한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항상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난 얼굴이 예쁘니까 친구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는 건 당연하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부터인가 욕이 적힌 편지가 도착한다. 책상위에 혹은 책상 속에.. 그리고 나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다. 혼자가 되고 보니 나의 짝 기주가 생각난다.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기주. 텅빈 교실 나의 단짝이었던 희진이 나에게 악담이 담긴 편지를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교실의 하얀 벽이 나에게 말을 건다. 늘 너의 말을 들어줬으니 이젠.... 나의 말을 들어줄 차례라고...

 

난 네가 되고 : 주영이와 나는(지영이) 쌍둥이다. 하지만 어느 날 부모님과 주영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날부터 나는 지영이가 아니라 주영이가 되려 한다. 언제나 꿈꿔왔던 상황. 주영이가 죽고 내가 주영이가 되는 상황... 병원에서 퇴원해 나는 내가 다니던 교실이 아니라 주영이가 다닌 교실로 간다. 친구들은 모두 내가 주영이 인줄 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주영이라는 쌍둥이에게 함몰되어 간다. 지영이는 없어지고 주영이만 있는 세상.. 친구들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 한다. 재수 없다고. 닮았다고 지영이가 주영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 지영이의 영혼은 사라진다.. 난 지영이가 된 것일까?

 

붉은 곰팡이 : 반 지하로 이사 왔다. 도배된 벽은 깔끔했고 지하의 습한 기운을 없애려는 듯 인위적으로 깨끗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비가 오고 연일 습한 기운이 온 집안을 덮고 나서야 반지하의 붉은 곰팡이가 보였다. 닦아도 닦아도 다시 피어나는 붉은 곰팡이의 생명력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무능력한 아빠, 그런 아빠를 보고 악다구니를 지르는 엄마. 엄마는 이야기 한다. 곰팡이한테서 도망칠 수 없다면... 곰팡이처럼 살아... 광기가 드리운 썩은 내가 풍기는 그런 미소. 2년을 그 반 지하에서 살고 도망치듯 나왔다. 새로운 주인에게는 이런 안락한 반지하가 없다는 듯 연기를 했지만 가족은 안다. 도망치듯 반 지하를 나왔어도... 우리 가족은 그래 곰팡이처럼 살게 될 거라는 걸...

 

손톱이 자라날 때 : 같은 반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 따돌리는 아이들 중 나도 끼어 있다. 친구들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 그것은 나의 강함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약해져선 안 된다. 미림이가, 지나가 나를 무시할수록 나는 나와 친했던 친구들을 더 악독하게 괴롭힌다. 손톱으로 아람이의 얼굴을 그었다. 이제... 다른 아이들은 별게 아니다. 일진 인척 나를 괴롭히던 아이도 이젠 별거 아니다. 하지만..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친구 앞에서 나는 심장이 작아진다. 길어진 손톱만큼 심장은.... 작아진다.

 

고누다 : 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뭔가를 복제할 수 있는 능력. 복제라기 보다는 분신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나의 능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하지만... 내 주변에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알지 못한다. 복제를 하면 진짜가 가짜를 먹는 다는 것은 알았지만 가짜가 진짜를 먹는다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내 주변. 엄마, 아빠, 누나 심지어 나까지... 진짜가 아닌 것은 아닐까? 없어지는 것은 나이자 남는 것도 나. 나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어렴풋이 이 책이 주는 내용, 주제를 알 것 같지만... 나의 부족한 글 솜씨로 표현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요즈음 아이들은 상처가 많은 모양이다. 어느 때 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가지고자 마음먹으면 쉽게 쟁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그건... 일부 선택(?) 받은 자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 보다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되는 시간에는 책을 읽기 보다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을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울타리에 함께 있지만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본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심도 배려도 없다.

 

그러다 보니 늘 혼자 말하고 혼자 달래고 혼자 화를 낸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유대감도 없고 사랑도 우정도 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을 왕따 시키고 혹 자신도 왕따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친구들을 괴롭힌다. 괴롭히지 않으면 나 역시도 왕따가 되니까... 왕따가 되는 세상, 왕따일 수밖에 없이 혼자만 아는 아이들.. 모두가 불쌍하고 안타깝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강했다면 상대에 대한 배려도 충분했을 것이고, 쌍둥이의 다른 한 쪽 삶을 살려고 내가 아닌 주영이가 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 지하에 살더라도 곰팡이처럼 살라고 외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들을 복제하면서 다른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본다. 훗날 아이들이 학교만큼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고개 돌리는 곳이 아니길 빈다. 이 아이들이 모두 사회에 나와 일반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픔보다는 기쁨이 많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고 배려하고 싶다.

 



YES마니아 : 로얄 k*****3 2012.08.07. 신고 공감 6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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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습한 우울을 봄볕에 말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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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이다. 봄볕이 따스하다. 가끔 생을 휘감고 있는 습관적인 우울이 나를 잠식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해야 할 일 외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위로하고 싶지도 않다.  책은 읽히지 않고 몸은 이유없이 무겁다.  긴 겨울 끝에 찾아든 봄은 나를 짓누르는 기운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은 정상이나 영혼은 유폐되어 있다.  이 섬뜩한 감정은 삶의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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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이다. 봄볕이 따스하다. 가끔 생을 휘감고 있는 습관적인 우울이 나를 잠식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해야 할 일 외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위로하고 싶지도 않다.  책은 읽히지 않고 몸은 이유없이 무겁다.  긴 겨울 끝에 찾아든 봄은 나를 짓누르는 기운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은 정상이나 영혼은 유폐되어 있다.  이 섬뜩한 감정은 삶의 곳곳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보인다.  항상성에 대한 욕망이 유일한 브레이크다.  이렇게 따스한데 봄볕 한 가운데 곰팡이 같은 우울이 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든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우울은 생의 수렁이니까.  호르몬의 작용 같은 것일게다.  육체는 영혼을 감쪽같이 속인다.  무력감을 해치우기 위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방미진의 소설을 읽은건 선택일까? 우연일까?  솜털처럼 우울도 가볍다는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방미진의 소설 <손톱이 자라날 때>을 읽은건 잘한 일이다.  우울함이 보편적인 증세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글이니까.  이 소설집엔 다섯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유일한 중편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곤, 모두 단편이다.  최근에 가장 빠르게 읽은 소설이다. 

 

우울의 원인은 사소할 수 있다. 소화불량 같은거라면 어떨까?  농담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이 풍선처럼 확대된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쉽게 즐겁고 쉽게 우울하다. 그들의 자아가 유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불안을 확대한다.  방미진은 이 우울한 자아를 교실속에 방목한다.  그들은 하얀 벽이 둘러쌓인 교실에서 방목되는 타인과 유동하는 또다른 자아들과 섞인다.  갈등을 경험하는 장소로서 교실은 최적의 장소다. 그러나,  어떤 장소건 이면이 존재한다.  방미진의 소설속 공간, 교실은 경쟁이 움트고 증오가 삭트고 미움이 부유하는 곳이다.  일면 그럴 수 있다. 허나, 온전히 그렇진 않다.  장소는 상대적인 공간이다.

 

[하얀벽]안의 기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고, 나는 가해자다. 괴롭힘을 당하는 기주는 괴롭히는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그닥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자만으로 가득차 있다. 예쁘고, 똑똑한 나를 타인은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게 이상하다.  기주는 못생겼고,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무시당해도 될만한 외모, 태도, 기주가 당하는 일들은 기주가 불러온 것들이라 난 생각한다. 위압적인 선생님, 이기적인 아이들, 나를 제외하곤 모두 옳지 않다.  어느날 선생님은 기주의 전학을 통보하고, 벽에 못을 박다 손가락이 으깨진 선생님도 교실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아이들에게 `나'는 기주를 대신해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사각의 교실을 구획하는 하얀벽은 은폐된 진실을 알고 있다.  기주도, 나도, 선생님도, 이기적인 아이들도, 모두 벽처럼 무딘 존재들은 아니었다. 나는, 말랑하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벽을 상상한다.  한껏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존재들이나 그것은 아직 상상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 한계.  

 

"축축하고 물렁한 벽이 등 전체로 느껴졌다.  손처럼 내 어깨를 짚은 벽이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벽이 말했다. "그래, 이젠 네가 내 얘기를 들어 줄 차례야."   p.52 [하얀벽]

 

[난 네가 되고] 속, 쌍둥이 자매 주영과 지영. 사고로 주영은 죽었다.  항상 비교되어온 지영은 주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절묘한 기회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주영을 대신, 지영은 주영이 된다.  삼촌을 속이고, 선생님을 속이고, 아이들을 속인다. 부모에게,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언제나 지영은 왜 주영보다 못하냐? 란 말을 들어왔다. 그 마음속에 움튼건 주영에 대한 미음과 증오 뿐이다. 죽은 주영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사라지고, 비교되는데 익숙해온 아이는 철저히 주영을 연기하는데 열중한다. 어느날, 아이들이 자신이 주영을 연기한다는 걸 알고도 속아준 사실에 분노하지만, 더 철저히 죽은이가 지영임을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주영이 되었다. 허나, 본래의 자신을 죽여버린 아이는 문득 못난 `지영'에 연민을 느낀다. "좋아해 줄걸. 한번이라도 나를 좋아해 줄걸. 이렇게 사라져 버릴 지영이란 이름을." p.84 [난 네가 되고]   이 괴기스런 마음은 전혀 아이답지 않다.  어쩌면 그게 편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아를 지키고 살 수 없는 세상을 교실은 연습하게 한다.  교실이 요구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당하는 아이, 지영은 자신을 자해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아이의 눈으로 사회를 보게 하는 작품이 완성도 있는 문장으로 실려 있다. 방미진의 <붉은 곰팡이>는 가난한 가족이 찾아들어간 지하 월세방에서 곰팡이와 섞여 산 몇 개월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놀랍도록 사실적인 문장들은 어쩌면 작가의 경험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단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집의 중심에 놓여 이 작가의 색깔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가난, 월세방, 아버지의 무능, 엄마의 히스테리, 나의 반항, 철부지 동생의 무고함이, 치우면 치울수록 번져나가는 곰팡이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융합하지 못하고, 독단적인 교실속의 자아가 어쩌면 사회적인 궁핍과 곤란이란 환경속에서 자라났을 수도 있음을 의심케 해준다.  아이의 눈으로 자신의 가족이 그리고 자신이, 이 사회속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는 지하방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묘사하는 모습에선,  작가의 체념과 상실감이 짙게 드리워진다.  유동하는 자아를 감금하고 있던 교실의 하얀벽은 이제 곰팡이가 피어난 벽이 대신한다.

 

"얼른 돈 벌어서 좋은 데로 가야지", 엄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섯 살 난 동생이 찡찡거리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엄마는 동생을 안고서 그 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p.97  [붉은 곰팡이]

 

표제작 <손톱이 자라날때>와 마지막으로 실린 <고누다>는 역시 전편이 갖고 있던 교실안의 무기력과 냉소, 원인없는 증오와 미움이 극단적인 폭력과 환각 살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아 도취에 흠뻑 빠진 아이는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아이들을 할퀴고, 손을 들어 총을 쏘는 모습으로 호흡하는 모든 존재를 환각 살인한다. 이야기는 여느 교실처럼 사소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은 캐리커처 처럼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폭력의 극단성은 손톱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환상을 통해, 교실안의 1인자를 꿈꾸고 맘에 들지 않는 존재들에게 총을 겨누어 진짜와 가짜를 인위적으로 나누고 상상살인을 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모두가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면, 소설로서의 서사로 읽힐 수 없는 것들이다.  여느 여고생의 일기장에 실린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미움과 증오의 언설들 같다.  만약, 중편 <붉은 곰팡이>가 아니었다면, 독자로서 화가났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것은 내 독해의 한계일지도 모르지.  내 생각엔  <붉은 곰팡이> 한 편으로도 이 소설집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어찌되었든,  봄바람과 함께 내 영혼에 날아든 우울의 기운이 대책없이 음울한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 휘발되고 말았다.

 

굳이 소설속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의 학창시절 유동하는 자아는 충분히 능욕을 당했으리라. 그 시절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감수성이 더 예민한 아이들의 고통은 더 심했겠지. 그러면서 아이의 자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생의 어느 시기엔 영혼의 내진 설계가 필요한 법이다. 세상풍파에 쉽게 쓰러지지 않을 그런 웃음과 여유를 영혼에 장착해야 한다. 인간을 어느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 시절엔 아이였기 때문에 비관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항상 자아는 생안에서 불완전하고 유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봄이 왔다. 우울해서 더 음울한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 마음의 간사로움은 이미 예고된 회복기로 나아갈 것을 부추긴다.   탈탈 털고 일어나야겠다. 따스한 봄볕에 습한 우울을 말리고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 " 사람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떻게 존재할지,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결정을 내린다. "  그러면 이제, 긍정,희망,즐거움,기쁨 이런 단어들을 억지로라도 생각해볼까?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와 하루를 보내는거다.   인내와 성실, 이 추상명사엔 답답하지만 삶의 진실과 결실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한다.   쓰나미에 모든게 휩쓸려간 사람들앞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존재들앞에, 우리의 긍정은 당연한 결론이다.  건강히 존재할 수 있음에 우린 여전히 긍정하고, 희망해야 한다.  그게 지금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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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19

 

s*****7 2011.03.19. 신고 공감 4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불안과 공포를 잘 포착한 작품이다.
"불안과 공포를 잘 포착한 작품이다." 내용보기
<금이 간 거울>로 미스터리 호러작가로 이름을 올린 방미진 작가는 <손톱이 자라날 때>로 그 이름을 더 공고히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단편 5편이 속해 들어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다섯 작품은 인간의 불안한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공포에서 출발을 한다. ‘하얀 벽’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음에도 누구에게도 기억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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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거울>로 미스터리 호러작가로 이름을 올린 방미진 작가는 <손톱이 자라날 때>로 그 이름을 더 공고히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단편 5편이 속해 들어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다섯 작품은 인간의 불안한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공포에서 출발을 한다.

‘하얀 벽’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음에도 누구에게도 기억 되지 못하는 두려움, 늘 존재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인식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과 불분명함은 하얀 벽에 투사 되어 더 큰 공포를 일으키고 있다.

‘난 네가 되고’는 매사에 자신보다 우월했던 쌍둥이 언니 주영이의 삶을 동경해왔던 지영이 부모를 비롯하여 주영이가 죽은 상황에서도 ‘주영이로 산다면.....’하는 생각을 한다. 주영과는 쌍둥이였고 늘 주영에게 촉각을 곤두세워왔으므로 주영이로 사는 것은 지영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지영이는 자신이 주영이로 살고자하면 할수록 진짜 자신은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붉은 곰팡이’는 빠른 속도로 지하방 벽을 잠식해가는 붉은 곰팡이에 거대한 미지의 생명체라는 상상력을 불어 넣으면서 자신들의 목을 옥죄는 현실의 답답함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가난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부모,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무리해서 지하 방을 탈출하면서 돌아보는 지하방의 붉은 곰팡이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끼지만 왠지 그 붉은 곰팡이가 언제 새로운 생명체로서 그들의 목을 옥죌지 모르겠다는 불안이 남아있는 작품이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아이들이 자기의 존재감을 획득하는 동기가 우연이거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 기인하는 것을 보여고 있다. 우연히 긴 손톱이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번 획득한 존재감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불안 심리를 잘 그리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무언가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 발상에서 시작한 작품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고누다’는 손가락으로 지목해 둘! 외치면 지목된 생명체가 하나 더 만들어진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고누다가 손가락으로 지목해 만들어 낸 나지막 생명체는 보라2다. 고누다가 보라2를 만들어 낸 이유는 진짜 보라와 친구가 되기 위해 연습용 보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라고 믿었던 아이가 자기가 만들어 낸 가짜 보라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무엇이 진짜인지 고민하고 진짜라고 믿는 모든 것이 정말 진짜일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배경을 학교로 하고 등장인물을 청소년기 인물로 하고 있지만 굳이 청소년으로 독자 대상을 제한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 가지는 불안은 스스로 공포를 만들고 그 공포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모습을 작가는 잘 포착하고 있다.

c********k 2010.04.23. 신고 공감 4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방미진] 손톱이 자라날 때
"[방미진] 손톱이 자라날 때" 내용보기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일이 있어서 이 책을 들고 갔다. 1년 전부터 책꽂이에 꽂힌 채 읽기를 미뤄오던 책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안 읽은 것이 아니라 업무가 밀려서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청소년 성장소설이 학생 지도에 도움이 될 듯했다. ‘손톱이 자라날 때’란 제목과 소녀가 앉아 있는 표지그림으로 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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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일이 있어서 이 책을 들고 갔다. 1년 전부터 책꽂이에 꽂힌 채 읽기를 미뤄오던 책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안 읽은 것이 아니라 업무가 밀려서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청소년 성장소설이
학생 지도에 도움이 될 듯했다. ‘손톱이 자라날 때’란 제목과 소녀가 앉아 있는 표지그림으로 보아서 사춘기 소녀가 성장하면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닥치는 일상을 담은 성장소설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단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내게 참고자료가 되리라고 본 것이다.


둘째,
책의 분량이 적당했다. 작은 판형에 219쪽 정도니 왕복 3시간의 버스에서 읽기에는 적당하다고 본 것이다.


내 예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소녀들의 아기자기한 일상을 다룬 성장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마치 공포물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 긴장되었다. 그러나 40쪽 내외의 중편 5편이니 그리 지루하게 읽지는 않았다. 수월하게 읽었으니 반은 맞은 것이다.


이 책에는 「하얀벽」, 「난 네가 되고」, 「붉은 곰팡이」,「손톱이 자라날 때」, 「고누다」의 5편이 실려 있다. 5편 모두 무거운 분위기이다. 학교의 왕따 문제를 다룬 작품이 2편, 교통사고로 가족을 읽은 쌍둥이 소녀가 언니와 바뀐 삶을 살려고 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 문제,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으로 인해 빈곤에 허덕이며 무너지는 가족의 갈등처럼 가족간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 2편이다.


내가 교사라서일까? 왕따를 하고 당하는 여학생들을 다룬 「하얀벽」과 「손톱이 자라날 때」가 인상에 남았다. 두 작품 모두 평범한 학생이 친구를 왕따시키는 가해자가 되고, 결국은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환상적인 추리물 형식으로 전개되는 「하얀벽」을 전율 속에 읽었다. 이 작품은 약간은 공주병 증세가 있는 여학생 조민희를 화자로 하는 1인칭 소설이다. 그녀는 첫 친구인 기주를 왕따를 놓아서 결국은 전학을 가게 한다. 그렇다고 함께 기주를 괴롭리며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우정이 돈독한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서로를 질시하며 불신하고 있다.


그러던 중 민희의 책상에는 매일같이 누군가가 보내는 저주의 편지가 배달이 된다. 민희는 점점 공포를 느끼게 된다. 범인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이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세 번째 작품인 「손톱이 자라날 때」도 비슷한 주제이다.


왕따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게 해 준 책이었다. 그러면서 이 책을 각급학교 도서관에 비치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왕따의 가해자는 성찰의 자료가 되고, 피해자는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교사로서 부끄러운 점을 하나 고백하겠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도 벽처럼 말없는 친구, 힘겹게 학교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니 나도 그렇게 벽처럼 생활했던 시절이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임을 하는 교실에도 그런 학생이 있었던 듯하다. 그것을 막지 못한 무능함에 대해서 깊이 반성한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통해 생각지 않은 성과를 얻은 책이었다. 이런 망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y******3 2011.10.16.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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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장막이 걷히고 어둠이 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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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과 다름없이   고등학교 3학년생, 수능을 두 달여 앞둔 가을이었다. 모두가 예민하게 들떠 서로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의 점수를 힐끔거리던 때. 경쟁자는 대한민국의 모든 고3이었지만 우리는 늘 좁은 교실 안에 있는 서로의 점수에 안도하거나 혹은 불안을 느끼며 종종걸음 쳤다. 오고가는 말들이 삭막하게만 느껴졌고 별것 아닌 것에도 쉽게 휘청 이고 상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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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과 다름없이

 


고등학교 3학년생, 수능을 두 달여 앞둔 가을이었다. 모두가 예민하게 들떠 서로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의 점수를 힐끔거리던 때. 경쟁자는 대한민국의 모든 고3이었지만 우리는 늘 좁은 교실 안에 있는 서로의 점수에 안도하거나 혹은 불안을 느끼며 종종걸음 쳤다. 오고가는 말들이 삭막하게만 느껴졌고 별것 아닌 것에도 쉽게 휘청 이고 상처 받았다. 갈수록 팽팽해지던 공기 속에서 잠시 서로를 한마음으로 묶었던 건, 바로 그 날의 비보 때문이었다. H고등학교의 학생이 우리 학교 뒤편 아파트 단지 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 고등학교는 내력이 깊은 알만한 곳이었고, 중학교 시절 잠시 친했던 친구가 입시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곳이었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믿지 않으려 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뒤통수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이들은 저마다 동요하며 일제히 웅성거렸다. 학교 뒤편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집값 떨어지게 시리 왜 여기서 지랄이야? 지네 집 옥상에서 뛰어내릴 일이지.' 하며 볼멘소리를 했고, 몇몇은 죽음을 택해야 했던 그 아이를 이해한다며 안타깝게 여기는가 하면 몇몇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 무시하기도 했다. 마주보며 아무 말 하지 않는 아이들, 혼자 집에 갈 일을 걱정하면서 남학생에게 좀 데려다 달라 부산을 떠는 여자애도 있었다. H고등학교에 친구를 둔 아이들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소식을 주워 나르기도 했다. 그 아이가 1교시가 끝난 뒤 죽겠다고 교실을 나갔는데 왠지 그날따라 그 말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졌다는 이야기. 붙잡으려 했는데 잡지 못했고, 담임선생님이 계속 이리저리 찾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교실 안에 어지럽게 떠돌았다. H고등학교에는 매년, 자살하는 고3학생이 있다는 믿기 힘든 소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화르르 타오르던 이야기들은 10분간의 쉬는 시간이 지나고 나자 더 이상 탈 것이 남지 않은 불씨처럼 사그라졌다. 누군가가 고요하고 엄숙한 교실에 심심풀이로 툭 던지고 간 불씨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묻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야자가 시작되던 하루 동안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교실 창문에는 어느 날과 다르지 않게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간간히 복도를 서성이는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쉬는 시간에는 저마다 짝을 이뤄 화장실을 다녀오고 엎드려 잠을 잤다. 그 때 나는, 그 동급생의 죽음보다도 그 이야기가 아무 일도 아닌 듯 사라진 것에 대해 공포감을 느꼈다. 사실 그 사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에 상처가 생긴 것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학교에서 보낸 시간들은 그렇게, 모래 위로 쏟아진 물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듯 헛헛한 것이었다.

 


『손톱이 자라날 때』
를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쭈뼛 서거나 간담이 서늘해져 늘 옹송그린 자세로 책을 읽었다. 쉽사리 끌어안을 수 없는 책이었다. 청소년 소설인데 희망은 없고 곧 소나기가 내릴 듯 거무튀튀한 먹구름만 끼어있는 것이 자꾸 맘에 걸렸다. 작가의 의도가 의뭉스러웠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면 어김없이 고등학교 시절이 하나 둘 떠올랐고, 금방 읽은 내용들을 머릿속에 되새김질했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에서 느껴지던 불길함과 분노.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 그것으로부터 태어난 형체 없는 공포의 그림자들이 십 년이 지난 그 시절 속에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학교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 돈 많은 집 아이는 과외를 위해 야자를 제외시켜주고, 그저 그런 아이들이 야자를 땡땡이치면 죽어라 매를 때리고 운동장을 돌리던 잔인한 시절. 키 작은 담임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던 시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나는 다시 곱씹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 아프게 말이다.

 

하얀 벽에서는


그 시절 우리의 도처엔 죽음이 깔려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다. 일기장엔 죽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이 썼고, 혹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전교 2등이 전교 1등이 되기 위해 전교 1등을 학교 옥상에서 밀어버리는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했고 시시했다. 그보다 더 섬뜩한, 얼굴을 알 수 없는 공포가 이곳저곳에 깔려있었다. 실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두려운 무엇들. 한걸음을 떼면 곧 끝없이 추락해 버릴 듯 한 불안감. 스스로에 대한 못미더움. 타인에 대한 갈망과 패배감. 하루하루를 지워나가면서 기다리는 D-day의 팽팽함. 그것들은 무언가, 단 하루 만에 내 인생이 평가받고 뒤바뀔 수 있다는 불안감의 변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얀 벽」의 민희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예쁜‘ 아이로써의 자신감이 넘쳤다. 친구들이 자신을 독보이게 하는 들러리가 되길 원하고, 그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비하하고 놀리며 자신의 우월함을 모두에게 증명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희진이나 기주의 매력을 안다고 해서 그 애들을 나보다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싫다. 누구나 다 나름대로 예쁘다는 게 나는 너무 싫다. 그 애들은 나를 돋보이게 해 주면서, 배경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면 되니까.
                                                                    - p.16,「하얀 벽」부분

 

 그런 민희에게만 들려오기 시작한 이상한 소리.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불안의 움직임이었다. 아이들은 민희의 모습을 꺼리고 있었다. 민희에게 배달되기 시작한 비난의 편지들. 민희는 절친이라 여겼던 아이들로부터도 겉돌게 된다. 아이들을 의심하며 혼자가 되고, 기억 속에서 자신이 무시하며 혼자로 만든 몇몇의 친구를 떠올린다. 그 친구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그들을 떠올리게 된 민희.

「하얀 벽」은 고요하지만 분명 모습을 갖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시선을 환기시킨다.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사라진 줄 모르고 전과 다르지 않게 똑같이 되풀이 되던 교실의 일상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칠판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서걱거리는 연필소리에 묻혀 스스로를 잃어버린, 벽이 되고 나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약자의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나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학창시절, 우리 안에는 지킬 수 없는 하얀 벽이 존재했다. 깨끗이 닦인 그 벽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 아이 저 아이가 무심코 팔을 걷어붙이고 쓴 말들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내 것이지만 정작 나는 손댈 수 없는 그 자리엔 거침없이 타인이 갈겨 뱉은 말들이 들어찼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들을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모두 사고로 죽었음에도 쌍둥이 언니 주영의 죽음을 확인하며 희열을 느끼는 지영의 이야기. 단편「난 네가 되고」는 비교의 대상이었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증오로 증폭되어 결국 가족의 사라짐까지 기쁨이 되고 마는 비극을 보여준다. 그토록 미워했지만 주영이 받던 인정과 시선을 소유하고 싶은 지영은 주영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는 자신이 주영이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자부하면서도 주영이의 행동과 말투를 점차 자신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고 지영은 주영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지영이 원하던 것이 완벽한 주영이가 되는 것이었을까? 주영이 못지않은 지영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존재였던 지영은 자신의 본질을 잃고, 말 그대로 타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것도 자신이 너무나 부정했던 주영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누다」
에도 지영과 같이 자신을 믿지 못한 아이가 등장한다. 자신의 연약함을 끊임없이 의심한 '고누다' 이야기. 두 번째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겨누어 '둘'이라고 외치면 둘이 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진짜가 가짜를 잡아먹어버리는 고누다의 능력.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교실 안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그 능력을 마구잡이로 쓴다. 자신을 마주보지 못하고 피하는 이들에게 희열을 느끼면서 그리나 친해지고 싶었던 '보라'에겐 그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능력을 쓴다. 그러나 존재는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가.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겉모습이 아닌 내면이라는 걸 아직 몰랐던 고누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맘에 들지 않는 타인을 벌주기 위해 사용한 자신의 능력이 주변의 모든 관계를 망가뜨려버리고 결국 자신마저 옭아매버리고 만다. 가짜로 남은 가족과 보라, 그들의 편에 서기 위해 고누다는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겨눈다.
 

 

먹히는 것은 나. 먹는 것은 나.

없어지는 것은 나. 남는 것은 나.

나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 p.215, 「고누다」부분

 

'나'를 바라보면서도 '나'인줄 몰랐던 때를 떠올려본다. 주변의 환경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고 바꾸려 하면서 느꼈던 혼란과 절망의 시간들. 그 때의 감정들이 판타지 요소를 입고 보다 유쾌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지지만 썩 편하지만은 않다. 누군가를 파괴하고 변화시키고자 한 고누다의 심리와 불완전한 존재로써 느끼는 갈등의 극대점은 인상 깊은 장면으로 다가왔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느꼈던 낯섦의 시간, 거울이 이글어지며 나를 공포로 몰아넣던 환상들.

 

그 시절엔 누군가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공부든 뭐든 스스로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규격화된 학생의 하루는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을 놓지 않았고 더러는 채찍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내가 보내는 신호를 귀담지 않았다. 서가에서 꺼내 방바닥에 던져버린 책과 찢어버린 노트들을 울면서 스스로 정리해야 하듯 불안과 분노의 감정 또한 토해놓은 뒤엔 내가 주워 담아야 했다. 그 때의 나는 누군가 내가 쏟아놓은 감정을 쓸어 버려주었으면 했다. 그렇게 알아주기만 해도 맘이 가벼워질 듯 했다. 하지만 가족조차도, 내겐 그런 ‘누군가’가 되어주지 못했다.

 

 


여전히 불완전한

 
그렇게 모든 상황에 홀로 맞서야 하는 개인으로써, 서로를 이간질하고 비아냥하며 겉으로는 좋은 척 아부를 떨고 상대를 염탐하는 일은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보다는 내가 낫지'라는 우월함에서 '너보다도 못해' 라는 절망으로의 오르내림, 그리고 나를 포기하고 너를 선택하는 일.

오히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현실은 더욱 아이들의 차이를 극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다. 키, 외모, 머리 길이, 체형, 성적, 말투 등의 외부적인 것들로, 아이들은 명명되었고 분류되어졌다.

 

「손톱이 자라날 때」 의 유지는 힘센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고 있었지만, 때론 그 아이들의 힘을 따라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힘센 아이들이 부러워한 '손톱 밑살에 바짝 붙은 길고 볼록한 손톱'은 유지가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점점 힘센 아이들을 의식하면서 그 틈을 파고들던 유지는 손톱이 길게 자란 손으로 반 친구의 얼굴에 상처를 내면서 자신은 강하고 아이들은 그런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손톱이 점점 길게 자라고, 유지 안에는 폭력이 억누를 수 없는 크기로 자라 큰 희열과 위로가 될 때쯤, 손톱은 유지를 고통스럽게 하고 비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스스로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자라난 폭력은 급기야 유지에게 정신적 혼란을 가져오며 마치 자신이 어느 연극의 배우가 되어버린 듯 한 이상한 상황으로 빠져들어 간다. 폭력을 행하던 아이들이 괴물로 변해 버리고 유지는 희미하게 파닥이는, 아주 작아진 심장으로 폭력의 대상이었던 선주에게 제어당하고 만다. 증폭된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의식을 읽어버린 유지는 폭력의 희열과 내면의 도덕성이 뒤엉킨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토록 혐오했던 패배자가 되어, '부러진 손톱에서 뚝뚝, 피를 흘'리며 말이다.



곰팡이처럼 산다는 것
 

 

우리가 움직이는 공간은 삶의 빛깔과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 회사와 집의 공간에 내가 다르듯, 지하철과 버스, 혹은 넓은 집과 좁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모습이 다르듯. 그것은 마음과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빈곤하고 무력한 한 가정이 쏟아지듯 들어온 낡은 빌라의 반지하가 등장하는 「붉은 곰팡이」에는 가난으로 위축된 사람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국가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또 그에 반박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빠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엄마, 그런 부모가 못미더운 딸, 그리고 너무 어려 화풀이 대상이 되고 마는 동생. 그들 가족의 혼란은 집안 곳곳에 피어나는 곰팡이만큼이나 빠르게 번져나가 서로를 단절시키고 내치기에 이른다. 분노하며 아이에게 화를 쏟고 아픈 아이의 상처 앞에도 무감각해진다. 곰팡이가 잠식해가는 집, 거실을 가로질러 뛰는 쥐, 매번 막히는 변기, 화장실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엄마의 기미, 아빠의 그늘, 동생의 농가진. 물기가 맺힌 벽지 위를 타고 오르듯 축 처진 그들의 삶에도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 후, 불면 사라질 상흔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생겨나고 생겨났다. 

 

급해질수록, 궁지에 몰려 갈수록 우리를 속이고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꼬여 들었다. 엄마는 곪은 상처를 안고 도망 다니는 짐승처럼 날이 갈수록 히스테릭해졌다. 그런데도 아빠는 남의 일처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래저래 시간만 흘러갔고, 결국 잴 겨를도 없이 구하게 된 집이 바로 이 지하방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변해 가고, 사람들이 변해 가고, 엄마가 지쳐 가고, 아빠는 한 발짝 떨어져 구경하고.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지하방에 도착하기까지의 시시한 과정이다. 이 모든 상황이 삼류 코미디만큼이나 어이없다. 
                                                                -p.96,「붉은 곰팡이」부분

 
가난에 억눌린 가족은 아주 작은 사고마저도 자신들의 불투명한 현실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 자책한다. 삶은 열열이 사랑할수록 저만치 달아났다. 손에 쥔 돈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수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곰팡이의 일부처럼 그 반지하 방에서 썩어가던 그들은 그곳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삶을 꿈꾼다. ‘곰팡이처럼만 살아.’ 라고 생각하며 도망치듯 그 집을 떠나는 가족들. 그들의 짐을 싣고 출발하는 차, 그러나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뒷모습에는 끝없이 따라붙는 가난의 꼬리표가 너풀거리고 있었다. 다만 이 소설의 빛은 이 모든 사건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기술해간 불완전한 존재의 모습에서 꺼질듯, 안타깝게 비롯되고 있다. 비극적이고 삼류 코미디 같기만 한 삶. 그러나 스스로에게 주어진 오늘을 인정하고 가족의 상처를 보듬으며 새 집으로 향하는 큰 아이에게는 이미 많은 공포를 목격해버린 자의 담담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목격해버린 그 담담함이, 오랫동안 슬프게 느껴졌다.


그토록 간절히 갈망했던 것은
 

수능 점수가 발표된 뒤 대입 원서 접수 기간이었다. 학교 건물 안에 처음으로 신발을 신고 당당하게 계단을 올랐다. 고3교실이 있는 3층은 텅 비어 있었다. 떼는 걸음마다 복도를 울려댔고 교실문은 아무렇게나 열려 있었다. 기대보다 낮게 나온 수능 점수 때문에 재수를 준비할 요량으로 교과서를 챙기러 간 것이었는데, 삐뚤빼뚤한 책상 줄과 듬성듬성 문짝이 떨어진 사물함이 음산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수능이 끝난 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사물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챙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환영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의자를 빼는 소리, 책상이 넘어가는 소리, 지우개를 터는 소리, 바람이 휭, 하고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바람의 손이 차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시간이 지나가버린 듯 했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고3 시절이 지나가고, 고등학교의 시절이 지나간 듯 했다. 나이보다는 학년으로 나를 가늠했던 그 시간을 떠나 스물이 되어 그 텅 빈 교실에 놓여있을 때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얽매여 이 시간들을 송두리째 도둑맞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갈망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이 집은 괴물이 아닌 낡은 집일 뿐이다. 굴 같은 화장실은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입도 항문도 아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비위생적인 공간일 뿐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발목이 잡아채인 듯 미끄러져야 했던 망령 들린 계단은, 미끄러운 타일 조각을 덕지덕지 붙인 초라한 계단일 뿐이다. 집 곳곳에 핀 곰팡이 역시, 풀처럼 약한 생물일 뿐이다. 두려워할 것까진 없었는데. 곰팡이는 어떤 악의도 없었으니까. 악의를, 공포를 만들어 낸 건 곰팡이가 아니라, 곰팡이를 보는 우리였으니까.

 

-p.129, 「붉은 곰팡이」부분

 


나이가 들수록 책을 받아들이는 시선 또한 달라진다. 그것은 살아온 삶을 통해 내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지나 온 삶엔 끝없는 갈등과 혼란이 점철되어 있었다. 하나하나의 고비에 도착한 뒤엔 어김없이 무언가가 결정되었고 나는, 다시, 행복을 바라며 열심히 이 시간을 살아내면 되었다. 행복한 시간이 머물지 못하고 지나가듯 혼돈의 시간도 그렇게 머물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이 책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청소년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생경한 작가의 소설들 속에서 낯익은 풍경과 익숙한 향기, 덜 마른 시멘트 냄새와 다 지워지지 않은 칠판의 글씨들이 떠올랐다는 건 내가 통과해 온 그 시간이 아직 내게 적잖은 영양분을 주고 있는 이유일까. 사실 그 시기는 그저 거대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 때가 인생의 전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답습되어져오던, 학생의 신분, 성적의 중요성.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나를 이루는 일부분일 뿐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자신감을 갖고, 여러 가지의 꿈을 꾸면서 그렇게 자신을 믿고자 한다.  돌아갈 수 없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때 미처 알지 못해서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 교과서 밖의 책을 읽고 연극을 보러 가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 등 - 지금의 청소년들은 그들을 위한 책을 통해 꼭 채워나갔으면 한다.

이 책이 청소년기에 접어든 독자들에게 거울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막막한 어둠을 헤집고 걷듯 불길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조차 걷어낼 수 없었던 내면의 흰 장막을 걷어내고 드디어 불안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고 인정할 수 없는 몰골로 본인을 더욱 자책하게 만들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괴롭고 힘없는 웃음이 세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는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삶은 두 번 사는 것이 아니고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그 시간을 통화하면서 그 시간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할 순 없는 것이다. 그저 어둠에 가려져있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것 만으로도, 그것은 비록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무언가 가슴께에 뭉클하고 이는 통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시간을 지나 곧 무언가를 이루게 되리라는 꿈, 멋진 성인이 되리라는 희망이 그곳으로부터 일어나리라는 것도.

지금 나를 괴롭히는 불완전한 시간 역시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이 시간은 괴물이 아니라 나를 자라게 하는 시간일 뿐이다. 내가 지나온 그 시간을 지금 나보다 더 치열하게 통과하고 있을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이 책이 어둠을 걷어가길 바라본다. 아니, 그 어둠을 이겨내고 스스로 걷어낼 준비를 해나가길, 그 용기를 길어 올리며 기꺼이 곁에 있는 어둠을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m****y 2011.03.2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열 다섯 살의 살아 있는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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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난 밉살스러운 아이였어요. 중학교 입학 후, 구 교복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검정색 교복, 나팔 치마, 커다랗고 어깨를 덮는 하얀 칼라를 달고 네모난 가방을 들고 다녔지요.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에 앙 다문 입술. 그게 나였어요. 아, 그래도 사진은 칼라였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면서 내 몸에 닿는 사람들, 눈에 거치는 사람들, 내 주위에 숨쉬는 것들이 다 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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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난 밉살스러운 아이였어요. 중학교 입학 후, 구 교복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검정색 교복, 나팔 치마, 커다랗고 어깨를 덮는 하얀 칼라를 달고 네모난 가방을 들고 다녔지요.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에 앙 다문 입술. 그게 나였어요. 아, 그래도 사진은 칼라였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면서 내 몸에 닿는 사람들, 눈에 거치는 사람들, 내 주위에 숨쉬는 것들이 다 싫고, 밉고, ... 그러면서 혼자있기는 무서웠어요.

 

점심시간이면 후다닥 점심을 먼저 먹고 고등학교 언니들이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앉았더랬지요. 그 틈에 고고하게 앉아서 앙드레 지드를 읽는거예요. 등 뒤에 꽂히는 언니들의 눈총이 따갑지요. 쟤, 뭐냐?

 

어느덧 나도 그 언니들 처럼 자라서 고등학생, 또 대학생, 어른이 되었어요. 그리고 내 큰 아이의 입술 위로 거뭇 거뭇한 그림자가 생겼어요. 아직은 어벙한 교복을 입고 등교길에 나서는 내 아이의 모습 위로 그 옛날 고집불통 제 모습이 떠올라요.  그 땐, 나도 그랬다, 고 아이와 말을 하려고 보면 그 아이의 눈동자에 언뜻 언뜻 분노가, 아니 비웃음 같은 게 비치는 것 같아요. 그땐 입을 다물고 문을 닫아야지요.  

 

여기 이 책 속에서 만난 아이들도 다르지 않아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서 흠칫 놀랐을 뿐이에요. 여고괴담이 묻어나는 하얀 벽, 그저 벽처럼 남의 말을 들어주고,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가 뒤늦게 그 존재를 느끼는 민희를 그 속으로 초대하지요. "너도 이제 혼자구나." 등을 돌려 눈을 맞추기가 이리 힘들었을까요. 왜 우리는 계속 견주고 미워하고 무서워했을까요. 다 똑같은 마음이었을텐데.

 

쌍둥이로 자라면서 언니에게 한없는 질투를 느꼈던 지영이는, 주영이가 되면 행복할거라고 믿었어요. 엄마와 아빠를 다 보내놓고 삼촌과 선생님들도 속이면서, "난 네가 되고" 만 이루어 진다면, 주영이는 없어지겠지만 지영이도 사라지는 걸 그 아이는 알까요?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와 함께 반지하 연립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만나는 곰팡이는 눅눅한 벽 뿐이 아니라 소녀의 아빠의 팍팍한 목, 동생의 여린 살, 엄마의 얼굴에도 번지고 있지요. 어디로 도망쳐도 할 수 없어요. 그저 내가 붉은 곰팡이 처럼 악착스레 살아낼 수 밖에요. 아마 주인공 아이도 어른이 된 다음에, 엄마처럼 곰팡이 기미를 얼굴에 쓰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몰라요. 너무한가요? 하지만  도망갈 수가 없어요. 영화 '링'의 복수처럼 저주는 계속되는 기분이에요. 

 

얄미운 동급생의 얼굴을 손톱으로 내리 쳐서 생채기를 내고, 두 손을 쫘악 펴서 내 힘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아, 저에게도 있었다구요! 다만 나는 얄궂은 책상만 볼펜으로 콩콩 찍어서 곰보를 만들었지요. 아이들이 내 뱉는 욕설들은 둥둥 떠다니면서 전염이 되나봐요. 욕을 안 쓰면 욕을 먹는거야. 그게 싫으면 욕을 뱉고 괴물이 되어야해. 손톱이 자라날 때 괴물로 변하는 유지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어요.

 

괴물이 아니라면 아주 독살스러운 가짜가 되는 방법도 있어요. 나 혼자라도 나에게 둘! 하면서 손가락을 고누(다) 고 그 일을 해 내는 거예요. 그럼 난 새롭게 될거예요. 지금의 나는 다 필요없으니 아무리 아프더라도 잡아 먹히고 새롭게 태어나는는 거예요. 이런게 사춘기인가요? 진짜의 흐릿하고 멍한 상태 따위는 다 없어지고, 남들처럼 뻔뻔해지고 싶어요.

 

진짜? 진짜 그럴까요? 어른이라고 다 아는것 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시 열 다섯 소녀로 돌아가서 읽었어요.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생생하게 겪는 공포와 환상이 펼쳐졌어요. 아이들에게는 학교, 선생님, 집, 친구, 부모, 공부, 언니나 동생, 모두 다 공포였어요. 슬프게도 이야기들 속에 믿을만한 어른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그래서 더 진짜 열 다섯에 겪었던 내 이야기 같았어요. 아이들이 좀 편한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해 줄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나도 이미 진짜를 잡아 먹어버렸나봐요.

y********o 2010.04.02. 신고 공감 2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