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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브룩 실즈 주연 '블루 라군'의 오피셜(?) 속편이다. 오리지널이 나오고서 10여년 후에 제작, 공개되었으나, 시장과 평단의 냉랭한 반응만 얻고 잊혀진 準 망작이며, 다만 어린 시절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밀라 요보비치가 출연해서 눈길이 간다, 뭐 이 정도가 우리 대중에게 간신히 남은 인상이다. 어제 슈퍼액션에서 이걸 틀어주길래 봤더니, 의외로 생각할 점이 새로 몇 떠올라 이렇게 리뷰를 남긴다. 물론 그 훨씬 이전 이 dvd 디스크 포맷으로도 관람하였기에 이 리뷰는 영화 자체와 2차 매체에 공히 해당하는 감상평이다. 이 영화의 원편 '블루 라군'은 우리가 잘 알듯 주제의식 쪽보다는 주연 배우들의 충격적인 노출 씬 몇으로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경이라면 등급제가 대단히 불비하던 시절이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시 영화 제작자들은 설익고 치기 어린 원초적 색정을 스크린 위에 부끄러움도 책임감도 없이 담뿍 담아내곤 했는데, 이런 저차원 미의식을 오늘의 우리가 비판 없이 받아들일 일은 당연히 아니다. 아무튼 그런 半 도색물이 기억에 남긴 야릇한 설렘을 기대하고 이 '속편'을 골랐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큰 실망만을 감상 후에 안을 줄 안다. 영화는 사실 그런 기대 아닌 다른 어떤 시선으로 봐도 별 '재미'는 없는 편이다. 영화는 원편 '블루 라군'에 나온 두 남녀 주인공이, 표류하는 보트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편에서도 두 주인공들은 그들의 아기를 갖게 되는데, 저 표류하는 보트를 발견한 '문명의 선원들'이 이 아기를 구조한다는 설정으로, 원편과의 연계를 아슬아슬하게 마련하고 있다. 다소 황당한 점은, 아기의 구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상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여성 선원 한 사람과 그 여성의 어린 딸, 예의 그 구조된 아기(사내아이임), 그리고 젊은 남성 선원까지 네 명을 작은 구명선에 태워 따로 보낸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 '그들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선장의 결단에 의한 조치였는데, 문제는 표류가 길어지고 식량, 식수난이 심해지자 함께 탑승한 젊은 남성 선원이 흉칙한 마음을 품고서, 입 둘을 덜기 위해 두 갓난아기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려 든다는.... 여인 새러(리사 펠리컨 扮)는 주저하지 않고 삿대로 선원의 후두부를 타격하여 절명시킨 후 시신을 大洋에 버린다. 두 영아 중 한 명은 자신의 소생이기도 했거니와, 정황을 보아 이는 별 장애 없이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는 정당방위임이 분명한 행동이다. 나는 이 대목이 2013년작 '라이프 오브 파이'에 끼친 영향이 혹시 어땠을 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세하게는 후자에 대한 스포일링이 될 터라 말하지 못하지만, 모르긴 해도 이안 감독이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제 나름 마음에 남은 바가 컸던 건 아닌지 짐작이 되었다. 아무리 정당화 상황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긴박한 순간 여인의 입장에서 남성 범죄자를 가차없이 처단하는 게 쉬운 결정, 행동은 아니다. 여성의 심지가 대단히 굳어야 저런 액션이 나올 텐데, 이를 뒷받침하는 설정이라면... 캐릭터 새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문명이 베푼 혜택이 원시 그대로의 인간에게 베푸는 바 종교적 구원의 의의에 대해 깊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영혼이다(라고 영화는 힘주어 강조하나 절대 다수의 관객들은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언제쯤이나 19금씬이 나올지만을 기대). 새러는 두 갓난아기와 어떤 섬(전에 같이 표류했던 자신의 남편이 묻힌 장소이기도 한)에 고립되어 사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철저한 문명인의 생활을 추구하며, 언어나 예절,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두 아이에게 철저히, 자신이 이해하고 숭앙하는 문명적 방식을 훈육하고 체화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다. 이 영화 주제의식 핵심의 절반은 (19금은커녕) 바로 이런, 아녀자판 로빈슨 크루소像의 구현에 있으며, 실제로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시대도 우리 시대보다는 대니얼 디포의 시대와 더 가까이 닿아 있다. 두 아이의 엄마(한 아이에게는 생모, 다른 아이에게는 양모) 새러는 아이들이 취학 연령쯤에 도달할 때 숨을 거둔다. 친딸(이자 자기의 분신) 릴리에게 잘 당부하여 남편(아이에게는 아빠) 곁에 묻어달라고 한 후 숨을 거두는데, 문명인으로서 철저한 교육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이후 무인도에 둘만 남아 생존을 도모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들임이 분명하다. 크루소 식 분투를 이어가는 건 고사하고, helpless한 자신들만 남기고 어른이 죽는 현장을 목도한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만 같았으나, 어찌된 곡절인지 아이들은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갖고 야생(아주 빈약한 문명의 이미테이션만 어머니가 남겨 놓은 채인)에서 잘도 씩씩하게 살아남는데, 뭐 어쨌든 보는 입장에서야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낙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으나, 보름달이 뜰 때면 야만인들의 불길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오는 걸 안 새러는, 아이들에게 철저히 이 날을 주의할 것을 생전에 당부하곤 했다. 이제 생물학적으로 장성한 남자아이 리처드는 어느 날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수수께끼의 근원과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데, 양모 새러의 예상대로 과연 그것은 주기적으로 원정을 나오는 야만인들의 함성이었음을 확인하고, 그들 중 낙오자 한 명과 대단히 위험한 조우를 하기에 이른다. ![]() 피부가 검은 원주민들은 얼굴에 흰 분장을 하고, 태생이 백인인 리처드는 반대로 검은 칠을 하고 있다. 이 장면 후, '그들만의 패러다이스'에 조만간 저들 야만인 무리가 들이닥쳐 생사를 건 쟁투가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떠오를 수 있고, 실제 감독도 이를 노린 듯 릴리의 대사에 슬쩍 이 팩터를 끼워 넣고도 있다. 사실 그런 요소는 원편 '블루 라군'이 아니라. '블루 라군'의 짝퉁인 피비 케이츠 주연 '패러다이스'에 나오(다 마)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친부모('블루 라군') 뿐 아니라 양부모('패러다이스')의 유전자까지 슬쩍 물려 받은 묘한 혈통인 셈. ![]() 이 짧은 순간 리처드가 만난 건 진짜 야만인이 아니다. 아버지뻘 쯤 되어 보이는 저 成人은 피를 이어 받지는 않았어도 근원적 유대를 함께하는 동족이며, 더 나아가 리처드의 내면에서 언제나 탈출을 꿈꾸는 야만성의 화체일 수 있다. 만약 이때 리처드가 과잉 방위 욕구를 작동하여 손에 쥔 창으로 '저 야만인'을 죽였다면, 현실에서 복수를 꿈꾸는 부족의 대거 내습을 부를 수 있었겠고, 내면에서 스스로 고귀한 휴머니티를 말살한 자아, 즉 리처드 자신의 도덕적 파멸로 귀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처드는 두 가지 의미, 육과 영 양면에서 이 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위기를 현명히 넘긴다. 무의식에 도사린 내면의 짐승과 싸우는 모습은 다시 한 번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올리게 하며(이 사람 꼬마 때 이 영화 본 거 확실하네, 응?), 얼굴과 신체에 저런 위장을 한 모습은 '파리 대왕'의 비주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음도 짐작게 한다. 두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대조 분석을 시도해 볼 수 있겠다(난 이제 나가 봐야 해서 리뷰는 여기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