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7)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26%
  • 리뷰 총점8 33%
  • 리뷰 총점6 26%
  • 리뷰 총점4 4%
  • 리뷰 총점2 11%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2.0
  • 40대 6.0
  • 50대 6.0
리뷰 총점 종이책
이런 괴악한 유사 역사서는 제발 그만 나오기를! (백지원 씨의 글에 답함)
"이런 괴악한 유사 역사서는 제발 그만 나오기를! (백지원 씨의 글에 답함)" 내용보기
정식으로 역사학을 전공했거나 학위를 딴 적도 없으면서 역사학자라고 자칭(또는 타칭)하는 백지원 씨가 낸 최신작이다.     사실,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을 읽고 그 무지막지한 괴악함에 질려버려서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신경쓰지 않고 관심도 접으려 했는데, 아는 사람이 말해주길래 혹시나 해서 오늘 쭉 읽어봤다.     소감은 "...그러면 그렇지"였다. 이모티콘
"이런 괴악한 유사 역사서는 제발 그만 나오기를! (백지원 씨의 글에 답함)" 내용보기

  정식으로 역사학을 전공했거나 학위를 딴 적도 없으면서 역사학자라고 자칭(또는 타칭)하는 백지원 씨가 낸 최신작이다.

 

  사실,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을 읽고 그 무지막지한 괴악함에 질려버려서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신경쓰지 않고 관심도 접으려 했는데, 아는 사람이 말해주길래 혹시나 해서 오늘 쭉 읽어봤다.

 

  소감은 "...그러면 그렇지"였다.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면 ^___^~

 

  영화 007 네버다이에서 주인공 007이 언론 재벌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 뉴스를 보는 것만큼의 고문도 없을 거야."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이 책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서 읽는 것처럼 가혹한 고문도 없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괴로웠다.

 

  전작인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은 그 내용이나 구성의 졸렬함은 그렇다쳐도 읽는 재미나마 있었지만, 이 책은 그런 것도 없다. 책장을 덮을 때까지 지루하고 따분했다.

 

  고려사 자체를 다룬 사료 중 남아있는 것이 적다고 해도, 고려 시대가 결코 조선보다 따분한 시기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작가의 역량 부족탓이겠지만...

 

  집에 온 지금, 책을 읽었을 때의 구절들 중 인상 깊은 것이 떠오르는 데 우선 아래의 문장을 올려본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 같은 대국들을 모조리 정복했다."

 

  난 이 대목을 읽고 머리가 띵했다.

 

  작가는 아마 지금 세계 지도에서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러시아를 떠올리고 으례 몽골이 쳐들어 갔을 때의 러시아도 큰 나라였을거라고 여겨서 그렇게 서술했나 본데, 한마디로 땡! 이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휩쓴 서기 13세기, 러시아는 지금처럼 거대한 나라가 아니었다. 우랄산맥 서쪽에서 노보고르드, 키예프, 블라디미르, 라잔, 모스크바 같은 작은 공국들로 나뉘어져 서로 분쟁을 벌이며 통일도 되지 않았던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이걸 대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싸우던 고대 그리스를 가리켜 누가 대국이라고 말하던가?

 

  이왕이면 "몽골은 당시 세계 문명의 중심이던 중원과 이슬람권의 대부분을 점령했다."라고 쓰면 덜 어색하겠다. (그런데 이 책의 교정 위원도 아닌 내가 이런 일은 왜하고 있을까?)

 

  또, 저자는 당시 몽골이 워낙 강한 나라이니 몽골의 고려 지배가 세계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알려진 문명세계를 모조리 정복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자세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13세기의 유라시아에서 서하나 호라즘처럼 몽골군에게 멸망당한 나라도 많지만, 몽골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국토 방위를 완수한 나라도 얼마든지 있다. 다음 권에서 저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할 사무라이 재팬은 뒤로 차지하고서라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및 북인도의 노예 왕조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도 몽골군과 싸워서 크게 무찔렀다.

 

  특히, 베트남은 훌륭한 명장 진흥도를 중심으로 세 차례에 걸쳐 무려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몽골군을 백등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물리쳤다. (아마 저자를 포함한)우리들은 베트남을 미개한 나라라고 깔보지만, 19세기 전만 해도 동남아 일대에서 베트남은 나름대로 상당히 잘 나가던 나라였다.

 

  몽골군은 인도네시아의 수도를 점령했지만 곧 반격을 받아 물러났고, 북인도에서도 몇 차례 쳐들어왔다가 모두 격퇴되었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맘루크 왕조는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가 이끌던 몽골군과 정면으로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고, 이로써 이집트는 몽골군의 침략에서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는데, 혹시 저자가 내가 써놓은 후기를 보고 "고려는 베트남이나 이집트보다 못한 후진국이었어!"하고 신나서 비웃을까봐 몇 마디 덧붙인다. 그럼 몽골한테 끝내 멸망당한 금나라와 남송, 서하, 호라즘은 고려보다 못한 나라였나? 

 

  행여 일본의 어느 작가가 "전 세계에서 몽골군 막아낸 건 일본 밖에 없다!"하고 헛소리를 한 것처럼 저자도 똑같이 따라할까봐 두렵다.

 

  그리고 원나라의 지배 기간을 저자는 식민지라고 표현하는데, 이 또한 수정이 필요하다. 식민지라 함은 주권을 잃고 그 나라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인데, 당시 고려는 원의 내정 간섭은 받았을지언정 식민지는 아니었다. 말장난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려를 다스리는 왕도 있었고, 엄연히 원나라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국가로 존재했으니 말이다. 속국이라고 표현하면 몰라도...

 

  뭐, 저자는 중국에 조공바치면 속국이고 이를 곧 식민지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식의 논리라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식민지가 아닌 나라가 없었게? 심지어 일본도 기회만 되면 중국에 조공 바칠려고 안달했으니까.

 

  참고로 원나라 조정은 나중에 고려를 아예 자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까지 세웠다가,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고려인 출신 환관들이 적극적인 로비를 해서 이를 무마시킨 일도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이미 고려가 원의 식민지나 다름없는데 왜 이런 짓을 했었을까?

 

  정말로 원의 식민지라고 하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원의 직접 통치를 받은 금나라와 남송, 서하, 호라즘, 대리국 정도가 되겠다.

 

  거기다 "유럽은 대포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정복한 몽골을 간단히 쫓아내고, 세계를 재패했다."란다.

 

  정말 궁금한게, 명색이 10년 동안 자료를 모았다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몽골이 간단히 쫓겨나?

 

  아마, 뒷부분에 저자가 참조한 책들이 조선일보 기자인 김종래 씨가 쓴 "밀레니엄 맨"이나 "유목민 이야기"같은 종류라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이왕 몽골이나 유목민에 대해서 말하려면 최소한 르네 그루세 교수가 쓴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나 군사 연구가인 에릭 힐딩거가 쓴 <초원의 전사들> 정도라도 봐야 되는 거 아닌가? 아, 저자는 교수들을 "할 일 없는 밥버러지"라고 부를 정도로 무지 싫어하니 볼리가 없지.

 

  칭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차남 바투가 남러시아에 킵차크 칸국을 세운 연도가 1241년이다. 이 때로부터 약 150년 후인 1399년 8월 12일, 드네프르 강 하류의 지류인 보르스클라 강 연안에서 몽골군은 리투아니아 군대와 싸웠다. 당시 리투아니아 군대는 대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승리는 몽골군이 차지했다. 왜? 대포만 있으면 그까짓 몽골군 간단히 몰아낸다는데?   

 

  대포, 대포 하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초기의 대포는 지금처럼 포탄을 발사하면 폭발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저 화약의 힘으로 돌멩이나 쇳덩어리를 날리는 식이었다. 참고로 지금처럼 포탄이 물체에 닿으면 주위에 큰 폭발이 일어나는 현대적인 작렬탄은 19세기 초, 영국에서야 비로소 나왔다. 그 이전까지 포탄은 폭발하지 않고, 그냥 물체에 부딪쳤을 때의 충격력을 발휘하는 정도에 그쳤다.

 

  킵차크 칸국은 1502년에 내분으로 무너졌지만, 갈라져 나온 분국인 크림 칸국은 1571년에 모스크바를 공격해 10만 명의 시민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울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리고 1771년에야 러시아에 합병되니 바투가 유럽을 침공한지 자그마치 5백년이나 러시아를 포함한 동부 유럽에 몽골 세력이 드리워졌던 셈이다. 이걸 대포 만들어서 간단히 쫓아냈다고? 5백년의 역사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서양이 단순히 대포 만들어서 그걸로 세계 재패했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대포는 서양만 만들어서 썼나? 오스만 투르크를 비롯한 이슬람권도 대포 잘 썼고, 명나라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인들에게 대포 제조 기술 배워서 청나라 군대 막는데 나름대로 유익하게 사용했다.

 

  서구의 전장에서 대포가 처음 도입된 시점은 14세기부터다. 그런데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굴복시키고, 인도의 식민지화를 완수하는 시기는 19세기 중엽에 가서야 가능했다. 대포가 만들어졌다고 금방 서구가 세계를 재패한 게 아니란 말이다. 수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들을 고작 무기 한 개 만들었다고 정복해?

 

  사실, 서구의 세계 재패는 19세기의 산업 혁명으로 인해 가능해졌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이론이다. 단순히 대포라는 무기가 아니라, 대량의 공업 생산 능력과 효율적인 세금 제도와 관료제, 우수한 과학 기술의 발명 같은 모든 요인들이 종합되어서 이루어진 일인데... 그래, 저자가 가볍게 무시하는 학자들이 한 소리니 듣지도 않겠지.

 

  전작에서 조선의 신분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악질이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저주한 저자가 이상하게도 고려의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너무 관대하다. 천민들을 떠돌이 유민인 양수척으로 만들어서 계층 간의 이동도 거의 불가능하게 해놓다가 고려가 어떻게 되었나? 나중에 몽골군에 쫓긴 거란군이 고려로 들어오자 원한을 품고 있던 양수척들이 이들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를 한바탕 분탕질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자는 양수척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욕설이나 악담 없이 그냥 넘어간다.

 

  고려가 조선보다 신분상승이 더 쉬웠다지만, 그건 국가의 제도가 문란해지는 무신 정변기간에나 가능했고, 그 밖의 다른 시절에는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은 당연히 거론하지 않는다.

 

  조선이 비굴하게 사대했다고 이를 박박갈던 저자가 고려 태조 왕건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5대 10국의 혼란기에 휩싸여 있던 중국에 거듭 사신을 보내서 자신이 찬탈로 세운 새 왕조 고려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너무 점잖다. 저것도 엄밀히 말하면 사대일텐데...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옥황상제(玉皇上帝)와 동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둘은 엄연히 다른 출신 배경을 가졌는데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나?

 

  참고로 원시천존은 우주가 혼돈에 빠졌을 때, 나타난 반고진인이라는 신이었고 옥황상제는 광엄묘락국이라는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다가 8백 겁의 세월동안 수행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승천하여 신이 되었다. 이런 둘이 같은 존재로 보이나? 차라리 힌두교의 주신 비슈누와 이슬람의 유일신 알라가 동일한 신이라고 말하라. 

 

  책의 도입부에서 루이 16세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라고 말했다는 낭설을 그대로 실은 장면에서 또 실소가 나왔다. 그 말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고, 원래는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케이크의 일종)라도 먹지."인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루이 14세의 왕비가 했다는 말이 잘못 전해지면서 엉뚱하게 앙투아네트가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10년 동안 자료 조사했다면서 이런 것도 몰랐나? 그동안 대체 뭘 했길래?

 

  정말 궁금한 건, 전작인 <왕을 참하라>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을 거의 인간 쓰레기 수준으로 멸시하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썩은 선비와 사대부, 유학자들이 엉터리로 왜곡한 책이라 믿을 수 없다."라고 간단히 무시했으면서, 정작 그 유학자들이 만든 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잘도 인용해서 고려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하긴, <조일전쟁> 도입부에서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라 믿을 수 없다면서, 정작 책의 본편에서는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가 어머니에게 차를 가져다 주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인 것처럼 인용한 작가이니, 무얼 더 말하랴? 뭐, 중국인 소설가는 못 믿겠고 일본인 소설가는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사소한 오류들 이외에도 내가 저자와 저자가 쓴 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책의 내용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중간 쯤에서 간도 문제를 꺼내면서 "지금은 안 된다고 해도, 말 한 마디 하는 거야 못하나? 2천년 동안 고향을 잃고 쫓겨났던 유태인들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아랍인들 몰아내고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는 묘청의 서경 천도설을 다루면서 "고구려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식의 망상을 멀리하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써 놓았다.

 

  두 문장을 같이 놓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잃어버린 영토에 대해서 말 한 마디 하는 거야 못할 리 없고, 잘 하면 유태인들처럼 다시 찾을 수도 있다고 하다가 갑자기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니? 도대체 뭘 어쩌란 건지?

 

  그리고 요즘같이 인터넷이 일반화되어서 모든 정보와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상에서 말 한 마디 잘못하는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 저자는 알고나 있는건가? 자신의 아내가 한류 팬이라며 친근감을 드러내던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가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말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지금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는데 말이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간도 문제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 중국이 아랍인들처럼 힘없고 비리비리한 집단으로 보이나?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한테도 대들고 자국 영토에서 마약을 팔았다는 이유로 영국인과 일본인도 거침없이 사형시킬 정도로 강대국이다. 그런데 이런 중국을 향해서 말 한 마디라도 "야, 간도가 옛날에 우리 땅이었으니까 돌려주면 안 돼?"라고 해봐라.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가만히 넘어갈까? 당장에 유형무형의 보복과 불이익이 돌아올게 뻔한데? 이런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지.

 

  두 대목을 보면서 저자는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한 말을 다음 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을 수 있다니. 그냥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서 아무 생각도 없이 말을 꺼내는 건가?

 

  아, 어쩌면 저자는 "한국은 무조건 까야 해."라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간도 영역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한국을 까고, 다음 장에서는 혹시나 한국이 잃었던 만주에 눈독이라도 들일까봐 다시 현실 운운하면 깐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보기에는 엉터리 같지만 실제로 이런 식의 수법으로 인터넷상에서 한국을 욕해대는 혐한 일본인들도 수두룩하니까.

 

  이밖에도 할 말이 수없이 많지만, 일단 생각나는게 이 정도라 여기서 끝낼까 한다.

 

  -------------------

 

  서문을 읽어 보았더니 저자가 고조선사와 삼국시대, 그리고 중국사와 세계사도 쓴단다.

 

  하지만 난 그 책들에 대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어볼 마음도 안 든다. 책의 내용이야 보나마나 뻔하겠지. "고조선이나 고구려는 주제도 모르고 중국한테 까불다가 잘 망했다." 이렇게 말이지.

 

  강자(승자)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찬양 VS 약자(패자)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 이게 저자의 근본적인 인식이다. 도저히 학자의 생각이라고 보기 힘들다. 정식으로 학위를 딴 적도 없고 전공한 적도 없으니 엄밀히 말하면 학자도 아니지만.

 

  하긴, 13세기 러시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모르면서 세계사를 다루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쓴웃음만 나오니까, 뭐.  

 

  이번 작품을 보면서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바로 책의 뒷편에 자료의 출처들을 적어 놓았던 점이다. <왕을 참하라> 1쇄에서는 자료 출처를 전혀 안 적었더니, 그러다가 누가 "저작권에 위배됩니다."라고 귀뜸이나 해주었던 모양이다.

 

  ------------------------------

 

  황송하게도 저자인 백지원 씨가 직접 반박문을 썼길래 그에 대한 반박을 다시 올립니다.

 

  1. 몽골의 러시아 점령

 

  13세기 러시아가 연방 형태?

 

  연방이라 함은 오늘날의 미국이나 독일, 스위스처럼 강력한 중앙 정부 아래에 지방 정부들이 안정적으로 통합된 형태인데, 당시 러시아가 그랬나?

 

  전혀 아니다.

 

  당시 러시아는 같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는 점 말고는 공통점도 거의 없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별개의 도시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치적인 통일 기구나 법률도 없이 분열된 채로 살았던 도시 국가들이 무슨 연방을 이루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러시아의 도시 국가들은 자기들끼리도 치열하게 싸웠다. 중세 러시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국가인 키예프는 1169년에 수즈달 공국의 침략을 받고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니까.

 

  이런 걸 연방이라고 부른다면 어불성설이다.

 

  내가 13세기의 러시아 공국들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특성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외부 세력인 페르시아에 맞서 동맹군을 결성해 싸운 것처럼, 러시아 공국들도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싸웠지만 외부 세력이 쳐들어오면 서로 연합해서 맞서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에 맞서 동맹군을 결성해 싸웠다고 해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연방을 이루었다고 하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 없다.

 

  영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몽골의 침입을 받기 이전의 13세기 러시아는 정치적인 성격상, 고대 그리스와 같은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이며, 제대로 통합된 국가가 아니었으니 '대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하다.

 

 

  2. 이 문제는 내가 하권을 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지원 작가가 써온 책들을 보면 굳이 볼 필요도 못 느낌. 그 밥이 그 나물식이라...

 

 

  3. 고려의 왕은 원에서 책봉을 받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으며,/

 

  조선의 왕들도 명나라에서 책봉을 받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을 줄기차게 깐 건가?

 

 

  4. 충혜왕 같은 이는 원 사신이 구타하고 원으로 끌고 가서 혼자 유배를 보내는 바람에 유배가다 객사했다./

 

  충혜왕이 원 사신에게 체포되고 원으로 끌려가 귀양가다 죽은 건, 이 인간이 자기 의붓어머니이자 원나라 공주를 겁탈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것이 직접적인 원인임.

 

  개인의 무기 휴대까지도 금지했다./

 

  개인의 무기 휴대가 금지된 건 몽골 치하의 남송 한인들도 마찬가지. 그래도 우리는 독자적인 정부와 왕도 있었지만, 그네들은 그런 것도 없지 않았나?

 

  주권이 자주 침해당하는 것과 그 주권이 아예 없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당신은 이 점을 흐릿하게 지우려 하고 있다. 술과 물이 비슷하다고 해서 둘을 동일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5. 최초의 서양의 대포는 프랑스에서 발명되어 14세기부터 실용화되기 시작했는데, 15세기 중반이 되면,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당시 서양에서 가장 튼튼한 성으로 인정받았던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대포로 인하여 허물어지는 바람에 동로마제국이 망했다. 물론 당시 대포가 좀 크기는 했지만. 당시 대포의 성능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세계 전쟁사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기 바람. <왕을 참하라>도 그렇고 <조일전쟁>도 그렇고 당신이 전쟁이나 무기사에 대해서 하는 말들은 극히 피상적이거나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들임. 또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철썩같이 사실로 믿고 있는 경우. 자료 조사를 제대로 안 했든지 아니면 상당히 게을러서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조일전쟁>을 읽으면서 내가 제일 어처구니가 없었던 게 뭐냐 하면, 조선군이 임진왜란 때 다양한 종류의 화약무기를 사용했다는 건 마치 작가 혼자만 알고 있었던 양 자랑을 했던데...

 

  조선군이 다양한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2005년에 출판된 <조선의 무기와 갑옷>, 그리고 소설 <정유재란>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졌는데, 그건 전혀 모르고 자기가 세상에서 처음 알아낸 듯이 요란스레 굴었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임진왜란 때, 활밖에 없어서 졌다고 했어?"

 

  당신이 저렇게 말한 내용이 <조일전쟁>에 분명히 나온 걸로 기억한다. 내가 분명히 읽었다니까...  

 

  뭐, 2005년에 이미 반환된 북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는 줄로 알고 <조일전쟁> 1쇄판에 떡하니 써놓았을 실력이면 오죽하리만은... 언론에 공개적으로 보도되어서 인터넷 검색만 하면 알텐데 말야.

 

  본론으로 돌아가서, 콘스탄티노플 함락 원인을 들자면 흔히 사람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거포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대포로 인하여 허물어지는 바람에 동로마제국이 망했다. 물론 당시 대포가 좀 크기는 했지만. 당시 대포의 성능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이제 보니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 지문 읽고 나는 굉장히 실망했다. 명색이 유명 작가라면 으례 알려진 통설보다 다른 내용이나 관점을 들고 나와야 하지 않을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포 때문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플을 다룬 많은 책에서는 마치 술탄 메메드가 동원한 대량의 대포가 삼중성벽을 걸레로 만들고 함락시킨것으로 묘사하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큰 이유는 오스만 군이 발사한 포탄을 맞고 성벽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보급과 내부갈등, 병력 부족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지역의 성벽이 열렸기 때문이다.

 

  물론, 성벽이 포탄에 맞으면 당연히 구멍이 뚫렸지. 하지만 방어를 맡은 비잔티움 수비군은 바보인가? 구멍이 뚫리는 족족 다시 흙과 돌을 가져와서 복구를 했지. 따라서 오스만 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해도 성곽 방어에 구멍이 생기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수비병이 턱없이 부족해서 방책과 외성벽 이외에는 전혀 지키지 못했을 뿐이고, 가장 견고한 내성벽은 끄떡없이 남아 있었으니까. 오스만 군이 그렇게 거포를 쏘아대었어도 말이지.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고 있던 비잔티움 수비군은 고작 8천 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포위된 지 50일 동안이나 10만의 오스만 군대와 그들이 연일 퍼부어대는 포탄 세례를 맞으면서도 정말 훌륭하게 선방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메드 2세도 그 모습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서 공성전을 중단하고 철수하려고 했다가 대신인 자가노스 파샤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전투를 재개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가 오스만 군대의 총공격이 다시 감행되던 날인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 군사들이 오스만 군대를 기습할 때 사용하던 콘스탄티노플 최북단의 블라케르나의 성벽 모서리에 있던 케르코포르타라는 작은 비상용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서는 그걸 폐쇄하는 걸 깜짝 잊고 안 하는 바람에, 그것을 본 오스만군 병사들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진입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져 결국 함락되게 된 것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참조하라. 

 

 

  6.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15세기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가 킵차크 칸국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공납 바치기를 중단한 시점이 1480년이니, 맞다고는 할 수 있지만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카잔 칸국은 1552년까지, 아스트라한 칸국은 1556년까지 존속했고 남러시아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 있던 크림 칸국은 1783년까지 버티면서 러시아를 수시로 침략하고 군사적인 압박을 주었으니 러시아에 대한 몽골 세력의 영향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던 셈이다.

 

  덧붙여 러시아가 몽골에 대한 공납을 완전히 중단한 시기는 17세기인 표트르 대제때 가서였음.

 

 

  7. 그리고 작열탄이 출현한 것은 13세기였으며, 16세기 말인 조일전쟁 때는 당시 최첨단 작열탄인 ‘진천뢰’가 조선군의 보편적인 무기였는데, 어째서 작열탄이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출현했다고 우기는지 모르겠다./

 

  진천뢰가 13세기 중국에서 생겨났고, 부분적으로 폭발한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작렬탄은 지금처럼 포탄 전체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포탄에 미리 파둔 일정한 구멍으로 쇳조각 같은 파편이 쏟아져 나오는 형식이었으니, 현대와 같은 작렬탄이라고 보기에는 부적합하다. 때문에 작렬탄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한 것임. 역사스폐셜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으니 찾아보기 바람.

 

  현대처럼 포탄 전체가 폭발하는 작렬탄은 19세기 영국에서 나온 쉐라프넬탄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16세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포병대가 사용하던 포탄들은 대부분 물체에 닿으면 폭발하는 포탄들이 아니라, 폭발하지 않고 충격만을 주던 용도였다. 심지어 돌을 포탄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조선군에서도 말이다. 

 

  덧붙인다면 근대 이전 동서양의 화약 무기들은 파괴력과 명중률에서 현대의 화기들보다 훨씬 성능이 뒤떨어졌으며, 때문에 직접적인 살상보다는 큰 소리와 연기 및 화염으로 적을 놀라게 하는 것이 주된 용도였음.  


 

  8. 서양 침공의 첨병은 함선에 설치된 대포였다. 인도가 그렇게 해서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이나 조선이 개항한 것이 그럼 대포 때문이 아니고 함선에 육군을 수십만을 싣고 왔기 때문이란 말인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게 언제인지 잘 알고 오기 바람. 그리고 인도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시점이 언제인지 잘 알고 오기 바란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인도 서해안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고 개항을 성사시키긴 했지만, 인도 대륙 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무굴 제국을 상대로는 감히 그런 시도를 하지 못했다. 전체적인 국력에서 무굴 제국은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대한 나라였으니까.

 

  그럼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건 뭐냐고 물을테지.

 

  영국이 인도에 정치, 군사적으로 손을 뻗기 시작한 시점은 18세기 초부터인데, 이미 그 때가 되면 무굴 제국은 이슬람교 강요로 인한 인도인들의 반란과 마라타 동맹이라는 내부 복병을 만나서 와해되기 직전이었고, 인도는 강력한 통일 정권없이 지방의 제후들끼리 서로 내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757년 6월 23일의 플라시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휘하에 세포이라고 불리던 인도인 용병부대를 다수 고용했고 영국에 맞선 벵골군은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와 손잡고 싸웠다. 물론 플라시 전투는 엄연한 육전이었지.  

 

  영국 함대가 인도 해안에 와서 대포 몇 방 쏘니까 그 즉시 인도 전체가 백기 들고 항구를 열어주며 식민지가 된 게 아니란 말씀.

 

  이어지는 말에서 일본과 조선의 개항을 근거로 들었는데, 당시 일본은 막부 말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여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압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점이 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또, 조선 문제도 그렇다.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만 보면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일도 떠올려 보기 바란다.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와 군대가 쳐들어오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조선군이 일본에게는 왜 그렇게 쉽게 개항을 했을까?

 

  일본의 군사력이 프랑스와 미국보다 더 강해서? 물론 아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조선을 통치하던 대원군 정권은 어느 정도 기본은 해나가던 반면, 운요호 사건 당시의 조선은 부패와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던 민씨 황후의 척족 정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군사가 무슨 상관이냐고? 당연히 상관이 있다.

 

  정치가 제대로 되면 그 나라와 사회 전반이 건전하게 운영되면서 동시에 군대도 제대로 돌아가고, 반대로 정치가 엉망이면 나라 전체는 물론 군대도 형편없이 몰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한 나라의 사회 구조가 정치와 동떨어져서 별개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는 서양에서 구입한 우수한 신식 함대와 무기가 있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어. 그건 청군이 사용하던 무기의 성능이 일본군보다 뒤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당시 청나라의 정치가 너무나 엉망이라서 정권을 맡고 있던 서태후가 군대에 필요한 자금을 몽땅 자기 생일 파티와 이화원이라는 별장 짓는데 써버리는 바람에 청나라 해군은 함포에 넣을 포탄도 부족해서 시멘트로 급조한 가짜 포탄까지 사용했을 정도였으니까.   

 

  당신처럼 역사를 전공하거나 정식으로 학위를 딴 적도 없지만, 나름대로 역사를 공부해 온 내가 자신있게 단언하건대, 정말 제대로 된 "나라"라면 고작 무기 몇 개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있다면 그건 내부적으로 부패와 혼란이 겹쳐 말기 증상에 시달리던 나라들이지.  

 

  덧붙이건대, 영국이 중국을 강제로 개항시킨 두 번의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수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만 정도는 되는 육군을 싣고 왔다. 설마, 영국이 동원한 해군 함대 몇 척에서 대포만 쏴대니까 중국이 겁먹어서 굴복했다고 믿는 건 아닐테지?

 

 

  9. 이 문제는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고려는 천민만 빼고, 조선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였다./

 

  천민만 빼고?

 

  일본 학자 나카무라 사토루가 쓴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27페이지의 각주 13번, <성종실록>에 따르면 노비(천민)은 1478년에 성년남자 인구의 80-90%를 차지했고, 양민은 10-20%에 불과했다.(吉田光男, 「朝鮮의 身分과社會集團」,『岩波講座』世界歷史 13, 1998) 그러던 것이 17세기 말에는 양민과 노비가 각각 40-50%를 차지했으며, 나아가 18세기 말에는 노비가 10% 정도까지 감소했다.

 

  이는 양반과 노비로 구성된 농장형태인 상층농의 쇠퇴와 감소, 그리고 자율적인 양민중심의 소가족 농작형태인 중-하층농의 증가에 따른 추세이며 또한 조선시기 전반에 걸친 노비 신분의 숫자가 감소하고 양민들의 숫자 증가한 추세에 의한 것이다.

 

  시대적으로 고려와 가까운 조선 초에 전체 성년 남자의 80~90%가 노비였고, 고려와 거리가 먼 조선 말에 노비들의 비율이 10%라니, 그렇다면 고려 시대에는 노비가 아닌 인구의 대략 10~20%만 자유롭고 활기찼다는 말인가?

 

  이 기회에 고려라는 사회의 성격을 확실히 알고 넘어가기 바란다.

 

  고려는 '중세국가'였다. 때문에 대다수의 피지배층의 상황은 "거기서 거기"였고, 후기로 갈수록 "전 백성의 천민화"가 진행되었다. 참 활기찬 사회였나 보다. 더욱이 고려는 지배층의 신분 자체가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된 나라였는데, 5품 이상 관료들에게 '은음(恩陰, 음서)'을 허가하여 사실상 재배층이 고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다만 경인의 난(무신정변) 같은 정치적 변화에서 [정말, 일부, 극소수의 하급신분]이 귀족층으로 올라간 경우가 가끔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백성들이 '천민'이었고, 양민들도 지배층의 등쌀에 시달려 사실상 [농노]의 신분을 세습하며 살아가던 사회가 고려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노비세습] 등 고질적인 병폐가 있긴 했지만, 신분이동 자체는 상당한 수준으로 일어난다. 후기에는 아예 "전 백성의 양반화"가 일어날 정도였고, 공명첩이나 납속 등을 통해 서민이나 노비도 "합법적인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중국은 당나라 때에 벌써 나온 공명고신(공명첩)이 고려시대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위에도 이야기한 폐쇄적 지배층과 관련이 깊고, 고려인이 신분상승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군공을 세우거나 왕이나 유력귀족의 눈에 드는 방법 외에는 거의 없었다.

 

  고려는 심지어 관료사회에서도 폐쇄성이 두드러진다. 고려는 광범위한 [판사제(判事制)]를 운영하면서 고위관료들이 사실상 여러관아의 실질적 수장역할을 '겸직'했기 때문에, '재추' 그러니까 5성7추(五省七樞)의 극소수 관료들이 사실상 국정을 전단했으며 후기에는 각종 '상의직(商議職)'을 만들어 유력한 권문세족들이 모여서 자기들 마음대로 나랏일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엄연한 중세귀족국가에서 신분이동이 자유로웠다니, 참으로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10.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출판사에 물어보라고 했는데/

 

  나도 출판사와 몇 번 일해봐서 알지만, 출판사는 작가가 원고 보내주면 문장의 흐름이나 문맥 및 단어의 오탈자만 조사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그대로 책으로 내준다.

 

  더욱이 책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책을 쓴 작가 자신일텐데, 그 작가와 인터넷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내가 왜 책을 지은 장본인인 작가를 놔두고 출판사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는가?

 

  설마 본인인 작가보다 제 3자인 출판사가 책의 내용이나 자료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는 것인가? 책의 내용에 대한 의구심이나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스스로 나서서 해명을 해야지, 왜 출판사에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지 모르겠다.

리뷰 총점 종이책
저술가- 학문과 대중 사이를 잇는 가교, 그러나...
"저술가- 학문과 대중 사이를 잇는 가교, 그러나..." 내용보기
칼 세이건, 시오노 나나미, 리처드 도킨스,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난 저술가이다. 이들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권장도서로 추천받을 정도로 내용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대중 저술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데, 저술가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역사 쪽이 아닐까 싶다.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저술가도 여
"저술가- 학문과 대중 사이를 잇는 가교, 그러나..." 내용보기
 

칼 세이건, 시오노 나나미, 리처드 도킨스,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난 저술가이다. 이들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권장도서로 추천받을 정도로 내용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대중 저술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데, 저술가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역사 쪽이 아닐까 싶다.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저술가도 여러 명이 있다.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 실록 상: 왕권시대’의 필자 역시나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역사 저술가인데, 이 책을 덮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논쟁 꺼리가 많고, 독자들의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책이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있게 잘 읽힌다. 저술가로서 재미있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건 분명 큰 장점이다. 고려사를 왕권시대와 비 왕권시대로 정리해서,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 고려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거기에 냉소와 독설이 섞인 필자의 관점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정사와 야사, 동서양사, 조선사 등 종횡무진 비슷한 사례를 들어주며 역사 속을  누비고 있다.

또 학교에서 배웠던 관점과는 다른 주장이 여러 가지인 이것 또한 눈길을 끌어당긴다. 고려가 원나라의 식민지였다거나 고려는 조선에 비해 천민을 제외하고는 신분적으로 자유로웠다든가 하는 주장이 그렇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익숙해진 민족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고, 자신의 평가와 주장을 제기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쾌도난마로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문제는 그 주장의 강렬함에 비해, 그 근거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허난설헌이 자살했다는 언급처럼 그 예가 사실인지 여부도 판가름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왜곡된 기록이 많다는 점을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접했던 평가와는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이렇다고 누차 강조하는 것은 결국 역사 전체를 불신하는 것으로 연결되지, 필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논문으로 학설을 주장하는 강단 학자와 저술가는 그 역할이 다르다. 저술가는 전문적이라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의 내용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주는 것이 일차적 임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지원의  완간 고려 실록 상: 왕권시대’는 저술가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역사 분야의 경우에는 강단 학자와 저술가가 이견이 표면화 돼 논쟁으로 이어진 경우가 있었다. 정조 독살설을 주장한 이덕일 한가람 역사 연구소 소장과 정조 독살설은 허구라며 이 소장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유봉학 한신대 교수와의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학계에서는 정조 독살설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대중들에게는 정조 독살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런 경우 대중들은 혼란스럽다. 학자의 논문을 접하지 않는 이상,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더 높은 저술가의 이론이 대중들에게는 더 호소력을 갖기 마련이라..둘 사이에 생산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렇다면 백지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찜찜했던 것은 필자의 내공이었다. 필자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역사 토론 클럽을 결성해 5년째 강의와 토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 통사에 관한 책 ' 왕을 참하라' 상하 권을  낸 게 불과 작년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다시 고려 실록을 두 권으로 완간했다. 고려사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것은 1차적으로 사료 부족이었고, 2차적으로는 고려사 대한 관심 자체가 적었다가, 최근에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그는 밝혔다. 그럼에도  참고한 책 목록에 나와 있는 64권 중에는 논문이 단 한 편도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것은 그리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전공을 하지 않았기에 더욱 논문이나 최신 학설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타국에서 한국역사를 저술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이 최근 연구 성과를 챙겨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고려 역사를 이처럼 쾌도난마로  평가할만한 지식적 깊이와 내공이 있는 건지 거기까지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학문을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가교가 되는 저술가의 역할은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아, 더욱 막중해지고 있다. 저술가에게는 인문학적 정신과 통찰력 그리고 글솜씨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쓰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은 지식과 이해일 것이고, 그것은  저술가로서의 역량과, 역할, 책임감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술가에 대한 신뢰와도 이어져 있다.

덧붙여 이 리뷰 앞머리에 거론한 시오노 나나미, 그녀는 15년에 걸쳐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했고, 30년에 걸쳐 로마사 연구에 천착했다는 사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명성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가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적어도 제목에 자기 이름이  박힌 책을 내는 저술가라면 ..  

e****0 2010.05.03. 신고 공감 13 댓글 35
리뷰 총점 종이책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돌팔이 사학자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돌팔이 사학자라고?" 내용보기
본래 무식한 자들은 자신이 무식한지 알지 못하고 특히 무식한 자들은 스스로를 유식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무식한 자들의 언행은 대부분 주변에 피해를 끼치기 쉽지만 가급적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역사인문서와 역사소설을 쓰는 전문작가로서 원고 마감에 바빴던 데다, 식솔들 먹여 살리느라 직장까지 다니다보니 비판하고 싶어도 미처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최근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돌팔이 사학자라고?" 내용보기

본래 무식한 자들은 자신이 무식한지 알지 못하고 특히 무식한 자들은 스스로를 유식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무식한 자들의 언행은 대부분 주변에 피해를 끼치기 쉽지만 가급적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역사인문서와 역사소설을 쓰는 전문작가로서 원고 마감에 바빴던 데다, 식솔들 먹여 살리느라 직장까지 다니다보니 비판하고 싶어도 미처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최근 원고도 마감하고 직장에서도 약간 여유가 생기게 되었는바, 청장이라는 분이 최근에 출판한 책 가운데 일부 내용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나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한 대목은 상권 371쪽에 있다.

 

「이럴 때인 1127년,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한국 역사상 일천 년래 최대의 사건’으로 규정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사실 이 난의 전후를 살펴보면 사대주의에 식상한 신채호가 묘청의 참신한 구호에 너무 들떠서 괜히 흥분한 것이지, 그게 무슨 놈의 일천년래 사건이냐」

 

청장은 표현이 극히 자유로운 수준을 한참이나 초월한 경지에 오른 분이라 어지간하면 참고 넘기려 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을 돌팔이 사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다. 청장의 시각에 의하면 단재는 ‘사대주의에 식상하고 땡중의 참신한 구호에 너무 들떠서 괜히 흥분하는’ 돌팔이 사학자에 지나지 않는 모양인데, 내가 아는 단재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청장이 실제와 정반대로 왜곡한 인물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느냐만, 단재는 청장 같은 사람이 함부로 폄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단재가 관통했던 시대와 그의 삶을 약간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함부로 폄훼하지는 못하리라.

단재는 꼿꼿하고 학식이 검증된 유학자 출신으로서, 실천적 사상가이자 사학자이며 언론인에다 교육자까지 겸한 당대에 보기 드문 지성인이었다. 그는 붓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일제와 투쟁하고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위인이다. 그런 단재와 편하게 앉아 되는 대로 글 쓰고 두둑하게 인세 받는 청장은 너무나도 비교되는데, 함부로 단재를 폄하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하기야 충무공도 거침없이 폄훼하는 분이 누군들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사설은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단재의 저술 <조선사연구초>에서 해당 부분을 발췌한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 : 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다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이에 대해 청장은 373쪽에서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친, 그저 개혁 사상을 가진 튀는 중에 지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의 밑천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이 당시 고려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뿐이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반박에 그치지 않고 ‘그게 무슨 놈의 일천년래 사건이냐“며 대놓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하는바, 단재와 청장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사학자를 빙자한 돌팔이가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사학자의 기본을 취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킨 배경부터 살피도록 하자. 묘청의 난은 의외로 뿌리가 깊다. 거시적으로는 주류와 비주류의 격돌이며,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단재의 사상에 포괄적으로 대입될 수 있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복잡하고 골치가 아프다. 모든 인과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개경파와 서경파의 격돌’이라고 축약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을 때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호도 고려로 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도를 개경으로 정한 다음 서경에도 상당한 전력을 상주시키고 군비를 비축하였지만 실제로 북진하여 고토(古土)를 수복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서경에 강력한 전력을 상주시킨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대한 상징적인 예우이자, 북방 세력에 대한 실질적인 방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건이 건국한 이후 호족세력이 급격히 재편되는 바, 중앙에 진출하여 기득권을 장악한 부류가 개경파로 응집하고 주류세력에 편입되지 못했으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의 결집체가 서경파로 보면 그리 틀리지 않다. 논제가 되는 당시 개경파의 대표는 김부식(金富軾)이며 서경파의 대표는 묘청과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이었다. 청장에게 묘청은 ‘땡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묘청은 의외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먼저 청장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시의 승려와 지금의 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당시의 승려는 상급의 지식인 계층이었으며, 그들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는 상당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묘청도 그런 승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서 서경파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었다.

 

묘청의 난을 부검하기 이전에 반드시 이해해야 할 점은 당시의 임금인 인종과 고려가 처한 국제적 상황이다. 인종의 장인으로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던 이자겸(李資謙)이 척준경(拓俊京)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왕권(王權)이 회복되지는 못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자겸이 제멋대로 금(金)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미 노쇠한 송(宋)나라를 대치하는 과정에 들어간 금나라와 대등한 관계가 될 수는 없겠지만, 왕도 아닌 이자겸이 마음대로 맺은 외교 사안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에 대해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던 것은, 어차피 상황이 그렇게 전개될 이상에는 금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길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된 탓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서경파에게 공격당할 빌미가 되어버린다.

 

일단 인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하마터면 이자겸에게 목숨을 잃고 나라까지 빼앗길 뻔 했던 인종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왕권의 회복이 절실했을 것이다. 인종이 너무나 혹독하게 당하다보니 그를 폄하하는 시각이 적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종도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이자겸 일파가 제거된 다음 어떻게든 왕권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개경파들이 인종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는 왕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인종에게 묘청을 필두로 한 서경파의 등장은 복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청장의 평가 가운데 ‘그저 개혁 사상을 가진 튀는 중’이라는 부분이 대단히 이율배반적이지만 청장의 저술에 그런 부분이 워낙 많은 관계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잠시 묘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청장은 묘청을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친, 그저 개혁 사상을 가진 튀는 중에 지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의 밑천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이 당시 고려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뿐’ 식으로 평가절하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서경파의 핵심이던 백수한은 당시 국가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천문과 음양, 복술의 전문가로서 국가의 공인을 받은 일관(日官)의 신분으로 묘청에게 감복하였다. 특히 정지상은 시대를 통틀어 손가락에 꼽히는 쟁쟁한 문인으로서 그가 남긴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洞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는 조선시대는 물론 지금에까지 애송될 정도다. 물론 같은 서경파라는 입지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정지상에게까지 인정받고 총수로 추대될 정도의 인물이 어찌 범상할 수 있겠는가.

 

청장은 풍수지리를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돈 많고 이름 있는 자들이 어떻게든 명당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풍수지리 최고봉이 가지는 비중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겠다. 아무렴 정지상 등의 인물이 괜히 묘청을 인정하고 추대하였겠는가만, 청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역사는 승자가 마음대로 날조하고 왜곡하는 것’의 등식에 의해 ‘땡중’으로 평가 절하되었을 것이다.

 

「개경은 도읍으로서의 기운이 쇠하고 궁궐도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흥하니 서경으로 도성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서경파의 주장은 메가톤급 위력으로 정치권을 강타했다. 지금도 수도를 옮기려면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는 판에 서경으로 천도하는 날이 제삿날이 될 것이 분명한 개경파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문제는 인종의 의중이었다. 인종이 묘청의 손을 들어 주자 개경파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경악했다. 왜 인종이 묘청의 손을 들어주었는지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천도가 결정된 이후 서경에 초스피드로 궁궐에 세워지고 인종이 자주 행차하는 등으로 행동하자 천도는 피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그런 와중에서 서경파가 송나라를 도와 금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는 등으로 외교노선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고 심지어 ‘칭제건원(稱帝建元)’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짐작컨대 단재의 시각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 부분이 바로 칭제건원인 것 같다. 중원의 지배구도에 편입되지 말고 고구려처럼 독자적인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발원했겠지만 단재가 처한 시대와 사상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30년 전의 민주와 현재의 민주의 패러다임이 다른 판에,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하여 울분으로 날을 지새우던 암울한 시대에 묘청을 정점으로 한 서경파의 주장은 수용하는 의미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단재가 그 사건을 ‘일천년래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 으로 규정한 것은 시대적 상황 탓이 크겠지만, 단재는 입에 맞는 것만 추출하는 사이비 사학자가 아니다. 단재의 철저한 고증과 객관적인 이론이 집대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설파하는 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해도 충분한 설득력과 이론적 타당성으로 커버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의 부활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역사를 파헤쳐 저술했던 단재가 편하게 앉아 글을 쓰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북관대첩비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청장에게 폄하될 수 있겠는가. 지하의 단재가 알았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각설하고, 묘청과 서경파의 염원이 좌절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자연현상 탓이었다. 천도가 결정되고 인종의 입주만 남은 시기에 심각하고 놀라운 재해가 꼬리를 물었다. 심지어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했을 때도 이유없이 말이 날뛰어 장수가 떨어져 죽을 뻔했던 데다,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할 때는 광풍이 몰아쳐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위기마저 있었다. 불길한 자연현상은 개경파에게 좋은 반격의 재료가 되었지만 인종은 묘청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서 계속 재해가 빈발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인종도 어쩔 수 없이 서경으로의 천도를 재고하기에 이른다. 천도가 백지화되면 서경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졸지에 역전당할 위기에 몰린 서경파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서경파를 박멸하려는 개경파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이후의 전개과정을 살피면 묘청의 난은 김부식 등이 등을 떠민 결과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킬 당시 정지상과 백수한은 개경에 있다가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정지상과 백수한은 서경파의 핵심으로서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서경이 있는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묘청 스스로가 자신의 수족을 자르는 것과 진배가 없지 않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말 묘청이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면 반역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을 미리 빼돌렸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묘청이 과연 제정신일 것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인데, 실제로 백수한은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

 

더욱 수상한 것은 김부식이 인종에게 알리지도 않고 정지상과 백수한을 죽여 버렸다는 점이다. 정말 묘청이 반역을 일으켰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지상과 백수한을 체포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서경파의 핵심들이 개경이 있다면 즉시 체포하여 정보를 캐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김부식은 그들을 죽이고 말았다. 게다가 인종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김부식이 정지상과 백수한을 죽인 것은 묘청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할 수단이었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이후 묘청의 반란은 졸속하게 진행되다가 김부식이 출격하여 서경을 포위하자 묘청이 부하 조광(趙匡)에게 살해당하는 바, 실제 묘청이 반란을 기획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묘청이 죽은 이후였다. 조광이 묘청을 죽인 것은 자신이라도 살아남기 위함일 것인데, 놀랍게도 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지상과 백수한에 이어 묘청까지 죽었지만 김부식은 서경파의 씨를 말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크게 후회한 조광이 결사항전하게 되고 무려 1년이 넘게 끌고서야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고려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면 관계상 이쯤해서 그만 쓰고 싶은데, 보다 상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내가 2007년 이후 출판한 역사교양서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청장은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내 책을 다 읽은 다음 말하라”고 줄기차게 주장하였으니 나의 주장에 반박하고 싶다면 일단 나의 책을 읽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청장의 전작인 <조일전쟁>에 적시된 참고자료 목록에 나의 책도 있는 만큼 그리 거리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청장에게 하나 물어보자.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모든 별 볼일 없는 사건, 인물, 연대를 시시콜콜하게 암기시킬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이해시키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 몇 명만 깊이 알고 그들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식으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역사 과목을 암기 과목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해 과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고 하였는데, 본인은 과연 그렇게 하였는가?

묘청의 반란을 거시적으로 소개하고 미시적으로 인수분해 하기는커녕,  “이럴 때인 1127년,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한국 역사상 일천 년래 최대의 사건’으로 규정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사실 이 난의 전후를 살펴보면 사대주의에 식상한 신채호가 묘청의 참신한 구호에 너무 들떠서 괜히 흥분한 것이지, 그게 무슨 놈의 일천년래 사건이냐”는 등으로 대략 약분하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학생들에게 모든 별 볼일 없는 사건, 인물, 연대를 시시콜콜하게 암기시킬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이해시키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 몇 명만 깊이 알고 그들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과 아예 동떨어져 있지만 역사를  "모든 별 볼일 없는 사건, 인물, 연대"  등으로 뭉뚱거리고 단재 같은 사학자들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는 행태에는 소름마저 끼친다. 

  

그리고 청장은 조선이 망한 이유로 중세의 이념인 낡아 빠진 유교 사상을 점 하나 고치지 않고 근대까지 신봉했기 때문“ 으로 줄기차고 일간되게 주장하였는데, 고려의 운영체제가 유교였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 정몽주(鄭夢周) 이전에도 고려를 움직인 관료들은 유학의 기반에서 태동한  학자들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개경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과 유학의 산실인 성균관(成均館)이 존재하였는데, 청장의 주장대로라면 그토록 큰 해악을 끼쳐 조선을 망친 유교가 어찌하여 고려는 그냥 놔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제발 속 시원히 설명해주면 고맙겠다.

 

또한  “허난설헌 당시 (제14대 선조) 관습에 따라 시집에 들어가서 생활했는데, 친정에서 살 때는 그렇게 똑똑한 여식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그녀가, 낯선 시집살이에다 평생 같이 살아도 자신보다 전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던 시원찮은 남편 때문에 속을 썩이다가, 20대의 청춘으로 비관 자살을 하고 말았다.”고 한 대목도 사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있다. 청장은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시집가면 시댁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그리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적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았다. 유산의 분배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 제사에도 참가할 권리도 있었다. 이혼을 하더라도 친정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는 등등, 지금에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여성들이 몰락하게 된 계기는 주로 전쟁이었는데, 특히 조선을 굴복시킨 병자호란의 탓이 컸다.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하였으며, 남자들은 환향녀들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심지어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자결을 강요하거나, 자살을 위장한 타살까지 발생할 지경이었는데, 여성들에게 돌아갈 재산을 가로챌 목적도 적지 않았다. 그런 몹쓸 풍조가 자리 잡자 여성들의 권리가 급격히 축소되었으며, 경제권을 상실한 여성들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시대에는 비교적 여성들의 권리가 나쁘지 않았으며, 허난설헌의 죽음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청장의 주장대로 따지면 똑똑하고 사랑받았던 여성들은 시집을 간 다음 대부분 자결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똑똑하기로 따지면 신사임당을 따라갈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청장의 주장이 옳다면 신사임당은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자결해야 마땅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시원치 않은 남편”에게 시집간 다음에도 이율곡을 낳고 천수를 누렸으니 참으로 해괴할 노릇이다.

 

 “고려는 천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조선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라는 주장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청장의 주장을 약간 바꾸면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먹고사는데 어렵지 않다”거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머리가 나쁘지 않다” 는 문장이 구성될 수 있다. 천민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고려시대는 천민만 자유롭지 못하고 활기차지 않았다는 청장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천민과 가장 대칭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왕일 텐데, 34명에 달하는 고려의 왕 가운데 최고의 자유와 활기를 향유할 수 있었던 왕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역사 실력을 따지기 이전에 문장력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첫 작품부터 이번에 이르기까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방대한 분량의 역작을 어쩌면 이렇게 빨리 완성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전작인 <조일전쟁>이 작년 8월에 나온 이후 불과 8개월 만에 역작을 두 권이나 낸 청장이 너무나 존경스럽다. 게다가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료가 빈약하고 열악한 고려시대를 1년도 되지 않아 완벽히 되살리는 청장에게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다. 대표작으로 자부하는 이순신과 임진왜란 관련 인문서를 내기까지 무려 9년 남짓이나 걸렸던 나 같은 하류작가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스피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쓸 수 있는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을 따름이다.

 

추신 : 다음에는 포괄적인 문학적 접근방식을 통해 청장을 논하고 싶다. 가급적 빨리 시간을 내도록 하겠다.

 

p******n 2010.05.07. 신고 공감 11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백지원, 붓을 잡아서는 안될 자
"백지원, 붓을 잡아서는 안될 자" 내용보기
나보고 과격하기 그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주 작정하고 까대는데 재수없다, 악의에 가득 찬 인신공격이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작이라는 출판물을 내면서 사람들 홀려먹고 있고, 이게 베스트셀러 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다 싶어서 쓴다. 내가 이 양반더러 붓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간략하게 말하자
"백지원, 붓을 잡아서는 안될 자" 내용보기

나보고 과격하기 그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주 작정하고 까대는데 재수없다, 악의에 가득 찬 인신공격이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작이라는 출판물을 내면서 사람들 홀려먹고 있고, 이게 베스트셀러 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다 싶어서 쓴다.
내가 이 양반더러 붓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집, 독선, 교만, 편견을 아주 골고루 갖추고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대로 된 소리를 하면서 주장한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 봐 줄 여지가 없다.  

1. 있는대로 빌빌꼬인 시각 1-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일부 독자들은 사서가 재미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역사서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서도 수많은 인명과 연대가 나오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모두 기억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독자들이 사서를 읽으면서 유의할 것은 인명과 연대가 아니라, 그저 시대의 전체적인 흐름과 어떤 세기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결말에 도달했는가 하는 정도의 스토리만 알면 된다. 
 우리 세대가 학교 다닐 때 지겹게 암기한 '태정태세문단세'가 그 후 일생을 사는 동안 무슨 교훈을 주었고, 몇 번이나 도움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그나마 밥값이라도 한 왕은 대여섯명 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 멍청한 왕들에 대하여 우리가 왜 그렇게 상세히 알아야 되는지 필자는 잘 모른다.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실록 상권. p.10)


원하는 것만 기억하는 것.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역사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계속 누적되어 온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잘라먹어서 기억하자고?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가면 아우슈비츠를 외면하는 독일사가 나온다. 감이 가시는가?
아니, 이미 구제 불능의 결과가 나왔다.

조선이 망한 것은 중세의 이념인 낡아 빠진 유교 사상을 점 하나 고치지 않고 근대까지 신봉했기 때문이다. 무려 500년 동안 쓸 만한 개혁 한번 없이 버텨 온 조선은 20세기 초 망할 때에 세계에서 가장 후진 나라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던 나라였다.(p. 381)

유교 사상을 점 하나 고치지 않고 신봉했다고? 이황과 이이가 이루어 놓은 학문적 사상이 조선을 이끌었다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유교는 낡아빠졌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본인이 원하는 것만 보니 저런 횡설수설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모든 별 볼일 없는 사건, 인물, 연대를 시시콜콜하게 암기시킬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이해시키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 몇 명만 깊이 알고 그들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식으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역사 과목을 암기 과목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해 과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p.11)

역사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 안에는 한 사회와 국가, 공동체가 만들어져온 모든 과정이 누적되어 있다. 이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딛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정체성을 잡아주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 중요한 건수와 인물 몇 명만 알고 스토리만 짚고 넘어가자는 식으로 하면, 학생들이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심심풀이 옛날 이야기?

우리는 지혜의 보고인 역사를 통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고, 또 그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말을 보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p.4)

그래, 내 말이 그거야. 그런데, 그걸 안다는 양반이 역사에 대해 뭐를 어떻게 알면 된다고?

2. 있는대로 빌빌꼬인 시각 2-승자의 기록?

많은 사람들이 밟는 지뢰 가운데 하나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면서, 사료를 자기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하는데, 이 양반은 더 나아가 이 표어가 아예 하나의 신앙처럼 되어 버렸다.

......문제는 어느 나라 역사건 왜곡과 윤색, 심지어는 조작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싶고 제가 한 일은 모두 잘했다고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이는 순간부터 왜곡되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책을 쓰는 저자들 또한 역사의 치부를 감추고 있고, 책을 보는 대중들 역시 치부를 보기 원치 않아 역사책의 저자와 영합한다. 둘은 가장 커다란 역사 왜곡의 공범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왜곡된 역사는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 모두의 가치관을 왜곡시킨다. (
p.4)

위의 글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참하라]나 [조일전쟁]에서 끝없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하나의 표어 내지는 신앙처럼 여기는 모양이다.
시작이 빗나갔으니 다음 소리도 빗나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실제로 『고려사』는 세종의 지휘 아래 편찬되었는데, 그나마 다른 사람에 비하여 학문이 탁월하고 공정한 시각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학자인 세종에 의하여 편찬되었는 데도 왜곡이 이 정도임을 생각할 때, 어째서 역사에 그렇게 많은 소설이 삽입되는지 이제 감을 잡을 것이다. (p.41)

역사가 죄다 왜곡의 집합체인 소설로 보이셔서 위의 망언을 하기라도 하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조일전쟁] 쓰면서 자료참고 할 때 가관을 보여주셨지. (
여기 참고)
그리고, 본인이 쓴 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담보는 어디서 나오는가? 거기부터 벌써 본인의 입맛에 맞게 쓴 것인데?
잠깐 여기서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부터 집고 가자. 이 말 자체가 틀렸다.

사마천은 『사기』를 남겼다.
-사마천이 역사의 승자여서 역사서를 썼는가? 그가 한무제에게 어떤 벌을 받았는가?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 3국의 전쟁이었다.
-조선측 사료에 조선군의 승리만 나와있는가? 일본측, 명측의 기록에는 자기쪽의 승전만 기록에 남았는가?

조선은 청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를 청나라가 대신 써주기라도 했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를 승자가 쓴다면서 왜곡과 윤색, 조작의 집합체로 보는 주장 자체에서 모순이 시작된다. 저런 주장은 역사학의 존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소리이다. 위의 주장대로라면, 본인이 말하는 것 아니면 전부 왜곡이라는 소리이다. 그럼 본인이 사료를 믿고 쓰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믿을 수 없는 글을?
그러면서 역사학자와 대중을 '치부를 감추어 역사를 왜곡하는 공범'으로 몰며 매도하고 있는데, 역사학자는 역사 기록이 당사자의 시선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며, 이를 대중에게 알린다. 댁이 매도하는 대로 생각없이 무턱대고 수용하거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빠져 역사를 호도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의 네티즌들이 자신을 욕하고 비방하니 인터넷 실명제를 쓰자고 하기 전에 본인이 뿌린 씨가 있고,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나는 이전에 다른 블로그에서 이 양반에 대해 유사역사학자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도현신이라는 작가분이 YES24리뷰에서 쓴 용어이기도 하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xvz12&artSeqNo=2203061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유사역사학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역사에 진실이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갖춘 것처럼 위장하는 것인데, 저 주장이 아주 전형적으로 쓰이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자 대부분은 기존의 사학자들을 '식민사학의 계승' 운운 해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드는데, 이 양반은 '승자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해서 학문적 우위를 점하려 든다는 것이다.

3. 앞뒤 가리고 일관성 있는 소리를 하셔야지

위에서도 보이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바로 앞에서 이 양반이 사학자들을 매도한 것을 얘기했는데,  자신의 저작물은 뭐라고 하는지 좀 보자.

필자의 저서는 물론 필자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필자는 수많은 선배 제현들의 노력의 결실을 섭렵한 후 이를 집대성하여 가장 진실에 가깝게 그리고 평이하고 재미있게,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을 뿐이다. 이 책의 영광은 그간 수많은 고려사 관련 서책을 쓰신 선후배 제현들의 것이다.  (p.17)

역사 왜곡의 주된 원인인 사학자들의 내용을 정리했다는데, 그럼 '기존의 역사왜곡을 정리한 책'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진실에 가깝께 쓴 책? 그럼 기존의 '선후배 제현들'이 정리한 것이 맞는다는 소리잖아?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자신의 글을 높이느라 모순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측은할 지경이다.
긍휼히 여겨줍시다.
아, 그리고 '필자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필자는 수많은 선배 제현들의 노력의 결실을 섭렵한 후 이를 집대성'했다는 구절을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란다. 이 양반이 글을 쓰는 방법을 제대로 실토했으니까. 뭔 소리인고 하니, 이 양반은 이런 저런 책들에서 자기 입맞에 맞는 내용을 골라 ctrl+c, ctrl+v를 하고, 여기저기 자기 생각을 더했다. 그러다 보니 이 내용들이 서로 상호 보완적이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다. (이게 또 유사역사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아주 대표적인 예를 하나 보여주겠다. 고려-여진 사이의 전쟁에 있는 내용이다.

싸움하기 싫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때 고려 조정 신료들의 결정은 겨로가적으로 볼 때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우리 나라가 다시 요동으로 진출하여 대제국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는데, 이를 너무나 쉽게 포기했던 것이다.
그간 막대한 국력을 쏟아부은 데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힘들여 확보한 요동의 영토와 9성을, 싸움이 귀찮다고 고스란히 넘겨주겠다는 발상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고려 대신들의 매국적 결정이었다.
어느 나라나 쇠퇴하기 시작하면 이런 한심한 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이지, 한심한 인간이 지도자가 되어서 나라가 쇠퇴하는 것이 아니다. (p.346)


여기서는 9성 반환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묘청의 난과 관련해서는 뭐라고 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신채호가 묘청의 난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읽어보자.

금이 나라를 창건하기 전인 예정(제16대) 때에, 여진족들이 별개 부락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 윤관이 북벌을 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은 일이 있었다. 이 때도 여진의 일부 부략을 공략하는 데 거의 전 고려의 국력을 쏟아부을 만큼 여진의 기병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말 그대로 철기(鐵騎)였다.
윤관이 동북면의 여진족 수만을 몰아내기 위해서 동원한 병력이 자그마치 17만이나 되었고, 여진족을 몰아내고 9성을 쌓은 후에도 조정은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런 냉엄한 현실은 접어놓고, 말만 앞세운 묘청의 주장이 무슨 우리 민족의 자주성 되찾기 운동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신채호 당시에는 윤관의 북벌 실패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p. 372~373)


같은 책 안에서 이렇게 말이 안 맞고 날림이 심할 줄이야......청장 선생, 생각은 하고 글을 쓰셔야 할 것 아니오......

4. 배경공부나 자료수집은 제대로 하셨나?

이전의 [조일전쟁]에서도 지적했는데, 이번에도 변한 것이 없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6개라고 설레발을 치질 않나(
여기 참고), 고려가 천민 빼고는 조선시대보다 자유로운 신분제를 가진 사회였다고 하질 않나(『경국대전』과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같이 펴고 대조해도 이건 아니............아, 이 양반 『조선왕조실록』이나 『경국대전』 안 보지)......

거기에, 전쟁사와 관련해서도 헛소리가 또 나왔다. 도현신 작가분께서 올리신 리뷰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xvz12&artSeqNo=2203061에서도 지적되었는데, 이걸 가지곤 부족하다. 대박이 남아있으니.

내가 이전에 쓴 글에서 이 양반이 병법을 제대로 안 읽고 이순신의 전공에 대해 헛소리를 한 것을 지적했는데, 이번에도 공부 안 한 티를 내며 인물 평에 대해 헛소리를 한 것이 나왔다.
 
거란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 낸 일등 공신은 1차 침공 때의 서희, 2차 침공 때의 양규와 김숙홍, 그리고 3차 침공 때의 강감찬인데, 1차 침공 시 서희는 외교로 승리했고, 3차 침공 시 강감찬은 21만의 대군으로 10만의 거란군을 막아 승리를 이끌었으나, 2차 침공 시의 양규는 겨우 수천의 병력을 지휘하여 수만의 거란군을 살해하고 일곱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으니, 거란의 침공을 격퇴한 일등 공신은 서희나 강감찬이라기보다 양규가 되어야 옳다고 본다. (p. 302)

'서희<양규'라......'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승리'라는 병법의 기초를 모르고 끄적여놓고 있다.
그리고, 양규의 분전도 서희의 빚을 진 것이 많다. 서희는 강동 6주의 땅을 획득한 뒤,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요새화했다. 994년과 995년 2년 동안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 상의 요지에 성을 쌓았고, 무려 29개 소에 성을 쌓거나 보강하여 북방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서희는 이 때 지나치게 무리를 했는지 공사가 끝난 후 병석에 누웠고, 3년 뒤인 998년 사망했다. 그러나 사후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입증된 이 방어선의 가치는 그의 노고를 충분히 보상해주었다.
양규의 분전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고 하겠지만, 성을 쌓은 것은 단순히 그 지역의 요새화에 그치지 않는다. 성은 하나의 요새이자 보급 기지이다. 양규가 수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거란군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전투력을 보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보급기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래도 서희의 공이 양규보다 작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감찬이 숫자가 적은 적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으니 양규보다 별볼일 없다고? 지난번에 『손자병법』으로 이유식을 만들어 드렸건만 안 드신 모양이군 거란과의 3차 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봐도 이 소리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

1018년 12월 하천을 건너던 거란군은 고려군의 매복과 기습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소배압은 아예 계속 남하, 고려의 수도 개경을 직공한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계속 남하했다. 당시 개경에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 완성된 상태도 아니었고, 전성기 때처럼 수도에 3만의 상비군이 있었던 상황도 아니기에 이것이 실현되면 고려로써는 치명적 공격을 당하는 셈이었다.
옛날에는 무선도, 공중정찰도 없기 때문에 조금만 상황을 오판하면 적을 놓치고, 작전은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이 때 강감찬은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기동력을 무기로 하는 거란군을 상대로 이에 못지 않은 기동전을 펼친다. 거란군이 남하하는 것을 안 강감찬의 고려군은 추격을 개시, 마탄과 자주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에 불구하고 거란군이 계속 남하하자 김종현의 부대를 급파, 개경을 구하게 하였다. 결국 전투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개경+김종현의 협공을 받을 처지에 놓인 거란군은 금교역에서 요격을 당하자 퇴각을 결정했지만, 퇴각하던 중 개천과 영천 부근에서 다시 고려군에게 꼬리가 밟혔다. 결국 고려군의 맹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귀주에서 결전을 치르지만, 대참패를 당한 채 돌아가게 된다. 상황을 종합해서 보면 강감찬은 빠르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숫자가 적은 적을 깼다고 우습게 볼 부분이 아닌데?

평가에서 저 정도를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하겠지만, 아래의 부분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서양에서 화포를 사용한 최초의 해전은 고려의 진포해전보다 거의 200년이나 뒤인 1571년 10월 7일 유럽의 신성동맹함대가 오스만 튀르크의 지중해함대를 격파한 레판토해전이다. 
교황과 베니스 그리고 에스파냐 연합함대인 신성동맹함대는 함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오스만 튀르크 해군은 함포 없이 단지 개인 화기인 화승총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양군의 함선과 병력은 별 차이가 없었다......(p. 201)


본인이 역사에 내공이 쌓여서 책을 이렇게 금방 쓴다, 관심가져서 잘 아는 분야가 전쟁사다 하기 전에 제발 공부 좀 더 하고 왔으면 좋겠다.  
우선, 양측의 무기를 설명한 것부터 틀렸다. 신성동맹함대는 물론이고 오스만 투르크 해군 역시 함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구경이나 위력이 작은 것이 탑재되곤 했지만) 또, 오스만 군은 화승총을 보유하긴 했지만, 활을 더 선호했다. 연사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스만 투르크 해군이 뭐가 없이 뭘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이 때의 대포는 그렇게 경이로운 무기가 아니어서 연사속도가 느리고 사정거리도 그렇게 길지 않았다. 때문에 주된 전투는 백병전으로 치루어졌다. 양측의 함대가 접근하여 함포를 주고받은 뒤 배를 붙이고 상대방의 배로 넘어가서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 주된 전술이었고, 특히 스페인은 배를 코앞까지 붙인 뒤 일제사격으로 총탄과 포탄을 퍼붓고 도선하는 전법을 선호했다. 그런데 신성동맹함대가 함포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오스만 군을 이긴 것처럼 서술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독자더러 그걸 믿으라고?

차라리 이 소리를 믿고 말겠다.


이 양반은 제대로 된 정보를 갖추지 않은 채 독선, 편견, 아집, 교만을 골고루 갖추고 자기가 진실을 말하는 양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다. 이런 유사역사학자가 책을 내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아까운 종이와 나무 낭비에 사람들 인식만 뒤틀리지 않는가? 그래서 내가 이 양반이 붓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P.S: 책을 보면 더 나아가서 중간에 본인 멋대로 '추측+창작' 거리를 가져오고 첨부하는 등 난리가 나셨다.

허난설헌은 당시 (제14대 선조) 관습에 따라 시집에 들어가서 생활했는데, 친정에서 살 때는 그렇게 똑똑한 여식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그녀가, 낯선 시집살이에다 평생 같이 살아도 자신보다 전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던 시원찮은 남편 때문에 속을 썩이다가, 20대의 청춘으로 비관 자살을 하고 말았다. (p. 138) 

태조의 원본 훈요십조도 전쟁 중에 없어졌는데, 후에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이 사본 한 부를 간직하고 있다가 바치는 바람에 훈요십조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손을 댔느니 안 댔느니 하고 조작설이 떠도는 것이다. (p. 298)

조선의 제 12대 왕이었던 인종도 부왕인 얼뜨기 중종이 죽은 후 너무나 상심해서 몸을 버리는 바람에......(중략)......아프기는 왜 아프단 말인가. 더구나 중종 같은 멍청이가 죽었는데. 물론 인종은 병사한 것이 아니고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321)


오호라, 자살한 허난설헌에, 덕일사마의 독살설을 베끼고, 일제의 훈요십조 조작설도 가져오고......여기에 보너스(?)도 있다.

일제 강점기 36년을 경험하고서도 6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식민 잔재가 남아 있는지 모른다. 하다 못해 식민사학(植民史學)이 아직까지도 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다. (p. 169)

무려 식민사학 드립까지......제 2의 떡사마로써 기반을 다져나가고 계시는도다.(응?)




 

i*****n 2010.05.02. 신고 공감 8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기대했던 데로임. 안 사기 잘했음.
"기대했던 데로임. 안 사기 잘했음." 내용보기
하필이면 외숙부님께서 무려 이 책을 돈주고 사시는 사태가 있어서 오랜만에 외가에 놀러간 조카 입장에서는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지만, 결론은 맨 첫 리뷰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비판에 대해 대처하는 백지원 작가님의 언행입니다.      엄연히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내시는 분일진데, 왜 뻔히 반박당하는 FAC
"기대했던 데로임. 안 사기 잘했음." 내용보기

 하필이면 외숙부님께서 무려 이 책을 돈주고 사시는 사태가 있어서

오랜만에 외가에 놀러간 조카 입장에서는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지만, 결론은 맨 첫 리뷰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비판에 대해 대처하는 백지원 작가님의 언행입니다.  

 

 엄연히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내시는 분일진데, 왜 뻔히 반박당하는

FACT에 대해 어거지로 고집을 피우고, 내부 논리가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 빠져나가시려고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었고 조선왕조실록도  데이터 공개가 되어 누구나

기본적인 지식에 접근이 가능합니다. 그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백지원 작가님께서 친히 여러모로 틀린 반박 글을 올리셨길래,  

애초 리뷰어의 그에 해당하는 재반박 글을 다시 주욱 긁어서 싣습니다. 당신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한테 이러는가, 하신다면, 무슨 해군국과 육군국 어쩌구를 서점에서 돈 주고 산 독자의 자격으로 이리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1. 몽골의 러시아 점령

 

  13세기 러시아가 연방 형태?

 

  연방이라 함은 오늘날의 미국이나 독일, 스위스처럼 강력한 중앙 정부 아래에 지방 정부들이 안정적으로 통합된 형태인데, 당시 러시아가 그랬나?

 

  전혀 아니다.

 

  당시 러시아는 같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는 점 말고는 공통점도 거의 없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별개의 도시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치적인 통일 기구나 법률도 없이 분열된 채로 살았던 도시 국가들이 무슨 연방을 이루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러시아의 도시 국가들은 자기들끼리도 치열하게 싸웠다. 중세 러시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국가인 키예프는 1169년에 수즈달 공국의 침략을 받고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니까.

 

  이런 걸 연방이라고 부른다면 어불성설이다.

 

  내가 13세기의 러시아 공국들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특성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외부 세력인 페르시아에 맞서 동맹군을 결성해 싸운 것처럼, 러시아 공국들도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싸웠지만 외부 세력이 쳐들어오면 서로 연합해서 맞서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에 맞서 동맹군을 결성해 싸웠다고 해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연방을 이루었다고 하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 없다.

 

  영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몽골의 침입을 받기 이전의 13세기 러시아는 정치적인 성격상, 고대 그리스와 같은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이며, 제대로 통합된 국가가 아니었으니 '대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하다.

 

 

  2. 이 문제는 내가 하권을 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지원 작가가 써온 책들을 보면 굳이 볼 필요도 못 느낌. 그 밥이 그 나물식이라...

 

 

  3. 고려의 왕은 원에서 책봉을 받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으며,/

 

  조선의 왕들도 명나라에서 책봉을 받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을 줄기차게 깐 건가?

 

 

  4. 충혜왕 같은 이는 원 사신이 구타하고 원으로 끌고 가서 혼자 유배를 보내는 바람에 유배가다 객사했다./

 

  충혜왕이 원 사신에게 체포되고 원으로 끌려가 귀양가다 죽은 건, 이 인간이 자기 의붓어머니이자 원나라 공주를 겁탈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것이 직접적인 원인임.

 

  개인의 무기 휴대까지도 금지했다./

 

  개인의 무기 휴대가 금지된 건 몽골 치하의 남송 한인들도 마찬가지. 그래도 우리는 독자적인 정부와 왕도 있었지만, 그네들은 그런 것도 없지 않았나?

 

  주권이 자주 침해당하는 것과 그 주권이 아예 없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당신은 이 점을 흐릿하게 지우려 하고 있다. 술과 물이 비슷하다고 해서 둘을 동일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5. 최초의 서양의 대포는 프랑스에서 발명되어 14세기부터 실용화되기 시작했는데, 15세기 중반이 되면,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당시 서양에서 가장 튼튼한 성으로 인정받았던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대포로 인하여 허물어지는 바람에 동로마제국이 망했다. 물론 당시 대포가 좀 크기는 했지만. 당시 대포의 성능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세계 전쟁사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기 바람. <왕을 참하라>도 그렇고 <조일전쟁>도 그렇고 당신이 전쟁이나 무기사에 대해서 하는 말들은 극히 피상적이거나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들임. 또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철썩같이 사실로 믿고 있는 경우. 자료 조사를 제대로 안 했든지 아니면 상당히 게을러서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조일전쟁>을 읽으면서 내가 제일 어처구니가 없었던 게 뭐냐 하면, 조선군이 임진왜란 때 다양한 종류의 화약무기를 사용했다는 건 마치 작가 혼자만 알고 있었던 양 자랑을 했던데...

 

  조선군이 다양한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2005년에 출판된 <조선의 무기와 갑옷>, 그리고 소설 <정유재란>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졌는데, 그건 전혀 모르고 자기가 세상에서 처음 알아낸 듯이 요란스레 굴었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임진왜란 때, 활밖에 없어서 졌다고 했어?"

 

  당신이 저렇게 말한 내용이 <조일전쟁>에 분명히 나온 걸로 기억한다. 내가 분명히 읽었다니까...  

 

  뭐, 2005년에 이미 반환된 북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는 줄로 알고 <조일전쟁> 1쇄판에 떡하니 써놓았을 실력이면 오죽하리만은... 언론에 공개적으로 보도되어서 인터넷 검색만 하면 알텐데 말야.

 

  본론으로 돌아가서, 콘스탄티노플 함락 원인을 들자면 흔히 사람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거포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대포로 인하여 허물어지는 바람에 동로마제국이 망했다. 물론 당시 대포가 좀 크기는 했지만. 당시 대포의 성능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이제 보니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 지문 읽고 나는 굉장히 실망했다. 명색이 유명 작가라면 으례 알려진 통설보다 다른 내용이나 관점을 들고 나와야 하지 않을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포 때문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플을 다룬 많은 책에서는 마치 술탄 메메드가 동원한 대량의 대포가 삼중성벽을 걸레로 만들고 함락시킨것으로 묘사하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큰 이유는 오스만 군이 발사한 포탄을 맞고 성벽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보급과 내부갈등, 병력 부족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지역의 성벽이 열렸기 때문이다.

 

  물론, 성벽이 포탄에 맞으면 당연히 구멍이 뚫렸지. 하지만 방어를 맡은 비잔티움 수비군은 바보인가? 구멍이 뚫리는 족족 다시 흙과 돌을 가져와서 복구를 했지. 따라서 오스만 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해도 성곽 방어에 구멍이 생기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수비병이 턱없이 부족해서 방책과 외성벽 이외에는 전혀 지키지 못했을 뿐이고, 가장 견고한 내성벽은 끄떡없이 남아 있었으니까. 오스만 군이 그렇게 거포를 쏘아대었어도 말이지.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고 있던 비잔티움 수비군은 고작 8천 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포위된 지 50일 동안이나 10만의 오스만 군대와 그들이 연일 퍼부어대는 포탄 세례를 맞으면서도 정말 훌륭하게 선방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메드 2세도 그 모습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서 공성전을 중단하고 철수하려고 했다가 대신인 자가노스 파샤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전투를 재개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가 오스만 군대의 총공격이 다시 감행되던 날인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 군사들이 오스만 군대를 기습할 때 사용하던 콘스탄티노플 최북단의 블라케르나의 성벽 모서리에 있던 케르코포르타라는 작은 비상용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서는 그걸 폐쇄하는 걸 깜짝 잊고 안 하는 바람에, 그것을 본 오스만군 병사들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진입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져 결국 함락되게 된 것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참조하라. 

 

 

  6.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15세기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가 킵차크 칸국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공납 바치기를 중단한 시점이 1480년이니, 맞다고는 할 수 있지만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카잔 칸국은 1552년까지, 아스트라한 칸국은 1556년까지 존속했고 남러시아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 있던 크림 칸국은 1783년까지 버티면서 러시아를 수시로 침략하고 군사적인 압박을 주었으니 러시아에 대한 몽골 세력의 영향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던 셈이다.

 

  덧붙여 러시아가 몽골에 대한 공납을 완전히 중단한 시기는 17세기인 표트르 대제때 가서였음.

 

 

  7. 그리고 작열탄이 출현한 것은 13세기였으며, 16세기 말인 조일전쟁 때는 당시 최첨단 작열탄인 ‘진천뢰’가 조선군의 보편적인 무기였는데, 어째서 작열탄이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출현했다고 우기는지 모르겠다./

 

  진천뢰가 13세기 중국에서 생겨났고, 부분적으로 폭발한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작렬탄은 지금처럼 포탄 전체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포탄에 미리 파둔 일정한 구멍으로 쇳조각 같은 파편이 쏟아져 나오는 형식이었으니, 현대와 같은 작렬탄이라고 보기에는 부적합하다. 때문에 작렬탄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한 것임. 역사스폐셜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으니 찾아보기 바람.

 

  현대처럼 포탄 전체가 폭발하는 작렬탄은 19세기 영국에서 나온 쉐라프넬탄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16세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포병대가 사용하던 포탄들은 대부분 물체에 닿으면 폭발하는 포탄들이 아니라, 폭발하지 않고 충격만을 주던 용도였다. 심지어 돌을 포탄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조선군에서도 말이다. 

 

  덧붙인다면 근대 이전 동서양의 화약 무기들은 파괴력과 명중률에서 현대의 화기들보다 훨씬 성능이 뒤떨어졌으며, 때문에 직접적인 살상보다는 큰 소리와 연기 및 화염으로 적을 놀라게 하는 것이 주된 용도였음.  


 

  8. 서양 침공의 첨병은 함선에 설치된 대포였다. 인도가 그렇게 해서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이나 조선이 개항한 것이 그럼 대포 때문이 아니고 함선에 육군을 수십만을 싣고 왔기 때문이란 말인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게 언제인지 잘 알고 오기 바람. 그리고 인도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시점이 언제인지 잘 알고 오기 바란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인도 서해안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고 개항을 성사시키긴 했지만, 인도 대륙 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무굴 제국을 상대로는 감히 그런 시도를 하지 못했다. 전체적인 국력에서 무굴 제국은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대한 나라였으니까.

 

  그럼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건 뭐냐고 물을테지.

 

  영국이 인도에 정치, 군사적으로 손을 뻗기 시작한 시점은 18세기 초부터인데, 이미 그 때가 되면 무굴 제국은 이슬람교 강요로 인한 인도인들의 반란과 마라타 동맹이라는 내부 복병을 만나서 와해되기 직전이었고, 인도는 강력한 통일 정권없이 지방의 제후들끼리 서로 내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757년 6월 23일의 플라시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휘하에 세포이라고 불리던 인도인 용병부대를 다수 고용했고 영국에 맞선 벵골군은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와 손잡고 싸웠다. 물론 플라시 전투는 엄연한 육전이었지.  

 

  영국 함대가 인도 해안에 와서 대포 몇 방 쏘니까 그 즉시 인도 전체가 백기 들고 항구를 열어주며 식민지가 된 게 아니란 말씀.

 

  이어지는 말에서 일본과 조선의 개항을 근거로 들었는데, 당시 일본은 막부 말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여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압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점이 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또, 조선 문제도 그렇다.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만 보면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의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때의 일도 떠올려 보기 바란다.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와 군대가 쳐들어오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조선군이 일본에게는 왜 그렇게 쉽게 개항을 했을까?

 

  일본의 군사력이 프랑스와 미국보다 더 강해서? 물론 아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조선을 통치하던 대원군 정권은 어느 정도 기본은 해나가던 반면, 운요호 사건 당시의 조선은 부패와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던 민씨 황후의 척족 정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군사가 무슨 상관이냐고? 당연히 상관이 있다.

 

  정치가 제대로 되면 그 나라와 사회 전반이 건전하게 운영되면서 동시에 군대도 제대로 돌아가고, 반대로 정치가 엉망이면 나라 전체는 물론 군대도 형편없이 몰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한 나라의 사회 구조가 정치와 동떨어져서 별개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는 서양에서 구입한 우수한 신식 함대와 무기가 있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어. 그건 청군이 사용하던 무기의 성능이 일본군보다 뒤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당시 청나라의 정치가 너무나 엉망이라서 정권을 맡고 있던 서태후가 군대에 필요한 자금을 몽땅 자기 생일 파티와 이화원이라는 별장 짓는데 써버리는 바람에 청나라 해군은 함포에 넣을 포탄도 부족해서 시멘트로 급조한 가짜 포탄까지 사용했을 정도였으니까.   

 

  당신처럼 역사를 전공하거나 정식으로 학위를 딴 적도 없지만, 나름대로 역사를 공부해 온 내가 자신있게 단언하건대, 정말 제대로 된 "나라"라면 고작 무기 몇 개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있다면 그건 내부적으로 부패와 혼란이 겹쳐 말기 증상에 시달리던 나라들이지.  

 

  덧붙이건대, 영국이 중국을 강제로 개항시킨 두 번의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수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만 정도는 되는 육군을 싣고 왔다. 설마, 영국이 동원한 해군 함대 몇 척에서 대포만 쏴대니까 중국이 겁먹어서 굴복했다고 믿는 건 아닐테지?

 

 

  9. 이 문제는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고려는 천민만 빼고, 조선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였다./

 

  천민만 빼고?

 

  일본 학자 나카무라 사토루가 쓴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27페이지의 각주 13번, <성종실록>에 따르면 노비(천민)은 1478년에 성년남자 인구의 80-90%를 차지했고, 양민은 10-20%에 불과했다.(吉田光男, 「朝鮮의 身分과社會集團」,『岩波講座』世界歷史 13, 1998) 그러던 것이 17세기 말에는 양민과 노비가 각각 40-50%를 차지했으며, 나아가 18세기 말에는 노비가 10% 정도까지 감소했다.

 

  이는 양반과 노비로 구성된 농장형태인 상층농의 쇠퇴와 감소, 그리고 자율적인 양민중심의 소가족 농작형태인 중-하층농의 증가에 따른 추세이며 또한 조선시기 전반에 걸친 노비 신분의 숫자가 감소하고 양민들의 숫자 증가한 추세에 의한 것이다.

 

  시대적으로 고려와 가까운 조선 초에 전체 성년 남자의 80~90%가 노비였고, 고려와 거리가 먼 조선 말에 노비들의 비율이 10%라니, 그렇다면 고려 시대에는 노비가 아닌 인구의 대략 10~20%만 자유롭고 활기찼다는 말인가?

 

  이 기회에 고려라는 사회의 성격을 확실히 알고 넘어가기 바란다.

 

  고려는 '중세국가'였다. 때문에 대다수의 피지배층의 상황은 "거기서 거기"였고, 후기로 갈수록 "전 백성의 천민화"가 진행되었다. 참 활기찬 사회였나 보다. 더욱이 고려는 지배층의 신분 자체가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된 나라였는데, 5품 이상 관료들에게 '은음(恩陰, 음서)'을 허가하여 사실상 재배층이 고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다만 경인의 난(무신정변) 같은 정치적 변화에서 [정말, 일부, 극소수의 하급신분]이 귀족층으로 올라간 경우가 가끔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백성들이 '천민'이었고, 양민들도 지배층의 등쌀에 시달려 사실상 [농노]의 신분을 세습하며 살아가던 사회가 고려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노비세습] 등 고질적인 병폐가 있긴 했지만, 신분이동 자체는 상당한 수준으로 일어난다. 후기에는 아예 "전 백성의 양반화"가 일어날 정도였고, 공명첩이나 납속 등을 통해 서민이나 노비도 "합법적인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중국은 당나라 때에 벌써 나온 공명고신(공명첩)이 고려시대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위에도 이야기한 폐쇄적 지배층과 관련이 깊고, 고려인이 신분상승하는 대표적인 수단은 군공을 세우거나 왕이나 유력귀족의 눈에 드는 방법 외에는 거의 없었다.

 

  고려는 심지어 관료사회에서도 폐쇄성이 두드러진다. 고려는 광범위한 [판사제(判事制)]를 운영하면서 고위관료들이 사실상 여러관아의 실질적 수장역할을 '겸직'했기 때문에, '재추' 그러니까 5성7추(五省七樞)의 극소수 관료들이 사실상 국정을 전단했으며 후기에는 각종 '상의직(商議職)'을 만들어 유력한 권문세족들이 모여서 자기들 마음대로 나랏일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엄연한 중세귀족국가에서 신분이동이 자유로웠다니, 참으로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10.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출판사에 물어보라고 했는데/

 

  나도 출판사와 몇 번 일해봐서 알지만, 출판사는 작가가 원고 보내주면 문장의 흐름이나 문맥 및 단어의 오탈자만 조사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그대로 책으로 내준다.

 

  더욱이 책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책을 쓴 작가 자신일텐데, 그 작가와 인터넷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내가 왜 책을 지은 장본인인 작가를 놔두고 출판사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는가?

 

  설마 본인인 작가보다 제 3자인 출판사가 책의 내용이나 자료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는 것인가? 책의 내용에 대한 의구심이나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스스로 나서서 해명을 해야지, 왜 출판사에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지 모르겠다.

h******r 2010.04.17. 신고 공감 8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한 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는 수준급임을 인정함
"한 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는 수준급임을 인정함" 내용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머릿말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당췌 알 수가 없다. 아니 알기는 쉬운데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논쟁거리 가득한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역사책인데도 역사에 대한 논란보다 "
"한 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는 수준급임을 인정함" 내용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머릿말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당췌 알 수가 없다. 아니 알기는 쉬운데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논쟁거리 가득한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역사책인데도 역사에 대한 논란보다 "백지원 작가가 풀어 쓴 글투가 싸가지 없어서 재수없다.", "아니다. 나름 재미있고 속시원히 까발리는 솜씨가 점잖은 체하지 않아 신선하다.", "신선하다고? 감히 <역사> 같이 무겁고 깊은 학문을 알량한 지식 나부랭이로 왜곡을 일삼고 있는데도 신선하다 말할 수 있는가?" "어차피 <역사>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저런 견해를 밝히는 것이 어찌 '왜곡'이란 말인가? 좀 제대로 공부나 해보고서 제대로 비판을 하라. 비난하지 말고.", "뭐야, *&^%$#@#$%^&^%^&"야", "이#$%^&*(&^%$#"......

 

  한마디로 이 책을 말하자면, 절대 쓰레기 같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책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면 또 절대 그렇지 않은 그저 그런 책일 뿐이다. 딴에는 작가 나름대로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공부하여서 [백지원식의 <역사>]를 그려 내었다. 그러나 독창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별로 없고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콕 집어서 [나는 이렇게 본다]는 식으로 서술했을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우리 사학계의 고질적인 [식민주의 사관]과도, [민족주의 사관]과도 다른 색다른 [백지원식 사관]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전적으로 임금이 못나고 양반들이 무능한 탓이었다. 그러니 [왕을 참하라]고 말했고, 임진왜란은 왜곡투성이다. 이름부터 그러하다. 그러니 [조일전쟁]으로 고쳐야 한다. 고려는 사료가 부족할 뿐 스펙타클하고 판타스틱한 시대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려시대를 분석해보니 크게는 [왕권시대]와 [비왕권시대]로 나눌 수 있고, [왕권시대]는 나름 좋았으나 [비왕권시대]는 별로 좋지 않았다. [무인시대]는 실속없었고, [원식민지시대]는 어쩔 수 없었고, [왕정복고시대]는 그저 그런 시대였다. 앞으로도 계속 풀어 쓸 삼국시대는 사국시대를 넘어 열국시대라 불러야 제대로 된 역사라고 외칠 요량이시란다.

 

  논쟁은 삼간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작가 백지원은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울 것도 없이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의 일부분에 [백지원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그저 서술했을 따름이라는 거다. 그것도 아주 적은 분량으로 말이다. 나름 용하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책에 반만 년 역사를 담아내는 사람도 있으니 별로 신기할 것도 없지만서도.

 

  아마도 작가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길 바란 모양이다. 적어도 그런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서 책을 풀어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시시콜콜 거의 모든 것을 수박 겉 핥기보다는 깊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역사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지는 않을 정도로 풀어 썼으니 말이다.

 

  정말 문제는 문제다. 아무리 역사가 방대해서 어렵다 하여도 역사의 진국을 맛보려면 한 권이나 몇 권을 읽는다고 통달할 수 없는 법인데 그런 식으로 역사를 공부하려 덤벼드는 독자들에겐 추천해줄 책마저 없을 정도다. 만약 이런 분들이 있다면 [백지원의 우리역사진실찾기 시리즈]를 권해주고 싶다. 그분들이야 어차피 쉽게 풀어 쓴 책을 원할 테고 술술 읽히는 책을 고집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재미와 참맛을 느낀 분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익히 아시겠지만 이 작가가 풀어내는 역사에는 <역사적 사실이 왜 논란이 되는지는> 딱히 서술하지 않고서 [백지원식만 옳다]고 풀어 썼기 때문에 독자들이 골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은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알고 있는데 [백지원 작가]는 저것이 옳으니 저렇게 말하네. 왜 그러는데? 왜 설명이 없는 거야. 에이 답답해...뭐, 충분히 이해된다. 한정된 지면(책 2권 분량)에 고려 500년 역사를 모두 담으려니 그럴 수도 있다.

 

  분명 논란거리가 적은 [왕권시대(상권)]보다는 [비왕권시대(하권)]에는 논란이 되는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며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의 색다른 주장에 <설득력>이 담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책 자체는 대체로 무난한 편이다. 어설피 아는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봄직한 내용이 서술되었을 뿐이고, 논란이 되긴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아량을 베풀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을 가진 또 다른 몇몇 분들에겐 읽는 것 자체가 고욕일 수도 있겠다. 작가는 나름대로 진실을 파헤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썼는데 이런 독자들에겐 곱게 보이질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책엔 오탈자가 왜이리 많은 걸까? 교정하는 사람이 게으른 탓인가? 아니면 백지원 작가가 자신이 쓴 그대~로 써주길 바라서 일부러 교정을 안 한 탓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스스로 그렇게 썼다는 얘긴데...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책 186쪽에 [향악구급방]이란 책이 나오는데, 이 책은 [향약구급방]의 잘못 아닌가? 검색을 해보니 백과사전이나 다른 역사책에서는 [향약구급방]은 등장하는데 [향악구급방]은 없고, 인터넷 일반검색에서는 종종 발견되니 정확히 어떤 것이 사실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 스스로 상당한 사료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직접 검증해주길 바란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10.05.03. 신고 공감 5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실록 상]판단은 독자의 몫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실록 상]판단은 독자의 몫" 내용보기
참 이렇게 리뷰 쓰기 난감한 책도 오랫만이다.   그럭저럭 좋았던 점   대중역사서로는 흔치않게 고려시대를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고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사, 다른 시대의 국사를 비교하며 서술했다는 점. 예를 들어 고려시대 왜구 퇴치에 사용한 화약무기를 서술하면서 서양의 레판토해전을 같이 거론한 201쪽 같은 경우가 재미있었다(물론 이 부분도 오류가 많지만,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실록 상]판단은 독자의 몫" 내용보기

참 이렇게 리뷰 쓰기 난감한 책도 오랫만이다.

 

그럭저럭 좋았던 점

 

대중역사서로는 흔치않게 고려시대를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고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사, 다른 시대의 국사를 비교하며 서술했다는 점. 예를 들어 고려시대 왜구 퇴치에 사용한 화약무기를 서술하면서 서양의 레판토해전을 같이 거론한 201쪽 같은 경우가 재미있었다(물론 이 부분도 오류가 많지만, 여하튼 시도는 좋았다는 말임).

 

그러나 이런 식으로 통시공시를 넘나들면서 서술하려면 엄청난 지식이 필요하며, 실수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허난설헌이 비관자살했다고 단정하는 대목(138쪽)이라든가 마리 앙트와네트(57쪽) 언급한 부분, 몽골제국이 (그 당시엔 작은 공국들 밖에 없었던) 러시아를 정복했다는 부분(15쪽) 등 기타 허다한 부분들.

 

흠, 이렇게 쓰고 나니, 이 부분도 좋았던 점이라고는 할 수 없을듯.

 

그외 내 시각에 별로였던 부분은 아래와 같다.

 

1 우선, 왜 제목이 '완간 고려왕조실록'인지? 난 처음에 고려왕조실록을 정확히 번역, 간추린 책으로 알았다. 이 책의 내용은 '완간 실록'보다 '고려사 이야기'에 가깝다. 책 뒷면에는 '우리는 이제 신화와 소설이 아닌 진실의 역사를 당당하게 대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이라 인쇄되어 있건만, 이 책 내용을 보면 신화, 야사 소개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작가의 썰렁한 농담과 함께.

 

2 책 뒤의 참고문헌을 보면 1차 사료가 <역주 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도경(422쪽의 표기임)><고려사열전>의 4권밖에 안된다. 나머지 60권은 대중역사서이다. 최근 논문은 한 편도 없다.

 

3 상권만 읽어서인지, 저자가 주장한 '원 식민지 시대'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모르겠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었다. 상권에서라도 식민시대와 간섭기를 보는 각각의 입장 소개가 간략히 있었으면 좋겠다. 이 부분은 저자만의 진실찾기가 아니라 이미 학계에 나온 부분이므로. 그런데 궁금한 부분을 해결하기위해 하권을 읽고 싶지도 않다. 

 

4 자신의 저서 안에서도 앞뒤 내용이 다른 부분이 많다.

 

7쪽에서는 '사람들이 막연히 고려에 관한 사서가 적어서 실체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말들하지만, 독자들이 고려에 대하여 거의 완전히 알만큼 고려에 대한 기록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조선에 관한 사서는 넘쳐나지만, 고려에 관한 사서는 별로 많지 않다'라고, 28쪽에서는 '고려의 사료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의 <고려도감(28쪽의 표기임)>외에 당시 시인들의 문집에 일부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사료가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근래에 들어서서 고려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져서'라고 되어있다. 내가 모자라서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강하게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이는 순간부터 왜곡되게 마련이다(4쪽)'이라 한다. 일단 이 주장의 시비는 가리지 않기로 하고, 저자의 저서 내에서라도 일관성 있게 서술되는지를 살펴보자.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처리한 부분에서는 '그래야 그들을 죽이고 건국한 조선 개국 세력들의 행위가 정당화되기 때문이었다(41쪽)'라는 식으로 승자의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견훤에게 당한 부분에서는 '경애왕이 포석사에 가서 사당에 국가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드렸다는 설도 있는데, 확인은 되지 않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신라는 망할 때가 되어서 망한 것이니까(92쪽)'이라고 논하고 있다. 몇년 전, 포석정 근처에서 포석사라고 적힌 기왓장도 발견된 바, 그리고 저자 스스로 말한 승자에 의해 왜곡된 역사 진실찾기라는 점에 비추어도 이는 앞뒤가 맞지 않다.

 

5 부적절한 개그, 독설, 반말투, 상당히 불편하다.

 

이 저자는 역사 사실 사이사이 자신의 논평을 하고, 독설과 썰렁 개그를 넣으시는데, 이거 나는 읽으면서 너무 불편했다.

 

'세종 때도 흙을 퍼먹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백성들의 살림은 궁핍했기에 태평성대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 참, 세종 때에 그 흔했던 흙 요리의 전승이 끊어져서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요즘 보니까 그게 단절되지 않고, 이번에 큰 지진이 있었던 아이티에서 맥을 있고 있었다.(315쪽)'라는 부분을 보면, 지진으로 사람들이 죽고 굶주리는 게 왜 개그 소재가 되는지 소름이 다 끼친다.

 

독자들에게 반말로 '책 좀 보고 공부 좀 해라(317)'는 부분도 많다. 왜 독자들이 대놓고 저자에게 반말을 들어야할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에 간 것도 아닌데?

 

또 거란장수 야율아보기의 9척 키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9척이면 최홍만이하고 맞먹는 키(271쪽)'라고 쓴 부분을 보면, 저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깔고 보는 것 같다. 혹시 모르겠다. 저자가 최홍만 선수의 삼촌이시거나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인지. 

 

6 저자의 사관?

 

비록 숙종이 어린 조카를 윽박지르고 왕위를 찬탈했으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헌종이 계속 왕위를 보전했으면 숙종보다 더 나은 정치를 펼쳤을까. 수양대군 때도 똑같았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지만, 역사가 꼭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329쪽) 

 

한 나라를 창업하면서 고려의 왕건이나 조선의 이성계처럼 쉽게 무혈혁명으로 그냥 건진 예는 아주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도 알다시피 석두 전통도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광주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다. 피를 흘려야 정상인 것이다. (90쪽)

 

에휴, 이 부분은 내가 논평을 못 하겠다. 헌정파괴와 쿠데타로 인한 공신양산과 대대로 부여되는 기득권,,,그로인한 민중들의 고통,,, 그리고 아직 아물지못한 광주민주화항쟁의 아픔,,, 이런 말 무식한 내가 해서 무엇하리오. 헐, 그저 먼산만 바라볼 수밖에.

 

판단은 독자의 몫

 

여하간, 저자의 말씀대로 '왜곡된 기존 역사에 길들여진 멍한 독자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기본(41쪽)'이라시니, 내 주제에 뭘 더 언급하리오. 저자 스스로도 '언젠가는 독자들 수준도 나아지겠지'라시니,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참, 오자가 무진장 많다. 처음에는 펜으로 표시하여 고치며 읽었으나 곧 포기했을 정도이다. 내가 쓴 윗글의 별로인 부분 2와 4의 첫문단을 보면 서긍의 <고려도경>이 한 번은 <고려도경>으로, 한 번은 <고려도감(28쪽)>으로 나와 있는 거, 일부러 책에 인쇄된 표기 그대로 타이핑했음을 밝힌다.

m******n 2010.05.03. 신고 공감 4 댓글 17
리뷰 총점 종이책
[고려왕조실록 상] 진실과 허구의 차이
"[고려왕조실록 상] 진실과 허구의 차이" 내용보기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많은 역사들이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되었음은 물론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것 투성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일반인이 그런 부분을 눈치라도 채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최근에 부는 사극열풍은 역사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으니, 역사의 진실을 허구에서
"[고려왕조실록 상] 진실과 허구의 차이" 내용보기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많은 역사들이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되었음은 물론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것 투성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일반인이 그런 부분을 눈치라도 채는 것은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최근에 부는 사극열풍은 역사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으니,

역사의 진실을 허구에서 분리해 내는 것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마음 속에 앙금은 조금쯤은 걷어 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백지원님은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조명하시려고 노력하셨다.

물론 개인적인 사견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실제 사실을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추가적으로 왜곡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가 그 가능성을 언급하여 주셨던 부분은 참으로 고맙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그냥 "그려려니~" 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했다.

 

예를 들면, 궁예에 대한 부분은 역사적 자료에 따라 기술하면서

동시에 그 기록이 궁예에게 반란을 일으킨 왕건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킴으로 혹시 있을 수 있는 승자관점의 역사를 주의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쉽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2종류로 나뉜다.

딱딱한 역사를 상세하고 자세하고 지루하게 풀어쓰는 방식과

역사의 이면의 숨겨진 야사나 소설식의 방식이다.

이 책은 딱 그 중간에 위치한 느낌이다.

 

여려운 내용임이 분명한데, 글 자체는 어렵지 않다.

약간의 비속어가 있음에도 그리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이 윤활제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완벽한(?) 책에 한 가지 단점은 이 책이 '상'이라는 점이다.

'하'도 읽어봐야 하겠지만...

'상'의 내용 중 절반 이상의 고려의 제도나 사회상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만큼 역사적 흐름이라든지 재미있는 사건은 채 반도 나오지 않았다.

뒤의 1/3정도만이 고려 전기의 '왕조시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즉... 감질난다는 점이다.

 

곧 '하'로 들어갈 생각이다.

무인시대와 원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l*****8 2010.05.0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풍성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려왕조를 제대로 만나다
"풍성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려왕조를 제대로 만나다" 내용보기
'조선왕조실록'은 그 자체로 귀에 익숙하지요. 저처럼 범인이 조선왕조에 대해서 탄탄한 왕조의 존재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할 정도로 조선왕조는 그만큼 풍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역사서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사료적 신뢰감이 더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서 '고려왕조실록'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낯설고 고려의 역사를 다룬 역
"풍성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려왕조를 제대로 만나다" 내용보기

'조선왕조실록'은 그 자체로 귀에 익숙하지요. 저처럼 범인이 조선왕조에 대해서 탄탄한 왕조의 존재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할 정도로 조선왕조는 그만큼 풍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역사서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사료적 신뢰감이 더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서 '고려왕조실록'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낯설고 고려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들을 잘 보아오지 못했던 만큼 이 책에서 과연 고려의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의구심 모두를 가지고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려왕조실록>은 상권과 하권으로 구성되어서 실로 방대하게 고려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지금까지 고려왕조의 역사에 대해서 읽어온 책이 적어서 이 책이 다루는 고려왕조의 역사에 대한 분량과 해석의 심도, 그리고 그것이 사료에 대한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역사 바르게 읽고 평가하기를 또 한 번 시도하는 역사서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가웠고요. 고려왕조의 계보를 정리한 것도 사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하는지라 특별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학창시절 배운 내용을 토대로 보았을 때 그것보다 훨씬 심도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왕조에 대한 설명들도 깊이있게 되어있었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방대한 고려왕조의 역사를 상권과 하권의 두 권 구성으로 모두 담으려 하다보니 솔직히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기술되었다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과 좀더 많은 사료에 대한 시각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은 해보았습니다.

 

상권에서는 크게 5장으로 구성하여 우리들도 들어본 적이 있는 고려의 주요 역사서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체적인 고려역사를 평가하는 1장의 개요부분과 본격적인 고려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고려가 세워지게 된 배경이 되는 후삼국 시대의 역사까지 아우르며 역사 이야기를 진행하는 2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고려시대의 제도들과 왕권, 왕들의 업적과 평가에 이르는 3-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솔직히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2장과 5장인데, 조선시대의 왕들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를 담은 책들을 접해보았지만 고려시대의 왕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내용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들까지 곁들여서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잘한 역사와 잘못한 역사를 더 사실적으로 평가하는 객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사관의 역사서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y****7 2010.05.03.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다양한 시각을 충족시켜주는 역사서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양한 시각을 충족시켜주는 역사서라는 생각이 드네요." 내용보기
어떤 역사도 일방적으로 이렇다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 북한 문제에 대한 6자회담이랄지, 미국과의 관계랄지 이시대에 우리가 느끼고 알고 있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수 백년 후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수백년 전에는 편향된 시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더 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다양한 시각을 충족시켜주는 역사서라는 생각이 드네요." 내용보기

어떤 역사도 일방적으로 이렇다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 북한 문제에 대한 6자회담이랄지, 미국과의 관계랄지 이시대에 우리가 느끼고 알고 있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수 백년 후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수백년 전에는 편향된 시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더 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방적으로 기술된 역사책들만 보아오다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역사서를 접하니 뭔가 중심이 잡혀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져 있는 역사관에 익숙하다보니, 백지원 선생님의 책들이 너무 파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떤 책이든 그대로 믿는 것은 또 다른 편견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나와 있던 고려사 관련 서적들과 백지원의 고려왕조실록은 균형을 잡는 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배울때는 고려때 몽골과 교류가 많다는 정도만 배웠는데, 다른 정황을 볼때, 대등한 교류가 아니었던 것 같은 심증만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실상이 이랬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몇몇 의문점들을 풀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파격적으로 느껴지는건 기존의 책들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올바른 역사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앞으로도 좋은 책 써 주시기 바랍니다.

 

 

 

 

h******n 2010.04.27.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