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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확실한 것(certainty)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공부를 하는 수험생이든 연애를 하는 청춘남녀이든,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든 국가을 이끌어가는 위정자이든 간에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는 것을 선호하고 그런 확실성을 갖추기 위해 시험에 자주 나올만한 문제들, 연인의 성격과 취향, 향후 고객들의 니즈와 효용등,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 구성원들의 정체성이나 각종 경제적 지표들을 포함한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자인 타인들 보다 많은 수고와 비용을 지출하면서 확실성에 접근할려고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확실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한 간단명료할 것이다. 다름아닌 불투명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들 스스로의 통제범위를 벗어나 있는 영역이니 그 만큼 불안을 가중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아프리카의 드넓은 대초원(당시에는 사바나성 기후가 대세였다)에서 지금의 각 대륙으로 이동하였고 농업혁명이라는 회기적인 발명으로 수렵채집의 노마드적인 문명에서 한곳에 정착하는 혁신을 가져왔다. 그리고 인류는 먹거리와 더불어 기초적인 경제활동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다름아닌 수렵채집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농업이라는 정해진 수순에 따른 회득의 산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변화일 것이다. 정확히 몇월 몇일에 파종을 하고 언제 김매기를 하면 풍요로운 먹거리를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은 막연한 감으로 먹거리를 찾아 해매였던 수렵시대보다는 확실성에서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인류를 편안한 상태로 이끌었다. 그러나 인류는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겪으면서 이러한 확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조금씩 키워오다가 급기야 글로벌시대와 디지털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속으로 던져지면서 이제 그동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확실성의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고 한치 앞도 예측 할 수 없는 불확실성(uncertainty)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흔히 대한민국 정치권을 풍자하는 말인 안개정국이라는 표현처럼 우리의 앞은 가시거리가 극도로 불투명해진 안개속에 내던져 있는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은 이렇듯이 예측불가능한 지금의 시대와 그리고 향후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각계의 지성인들이 토로하고 제시하는 불확실한 세상을 헤처나가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손에 든다면 차라리 시작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즉 저자들은 이 책에서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아만 가게 된 배경을 고찰하므로서 향후 미래의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낮추어보자는 견지에서 토론의 대상 폭을 정하는 것이지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때문에 대안없는 과제를 접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치,경제,문화,종교,과학이라는 인간활동의 큰 테두리안에서 그동안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확실성에 대한 자부심을 스스로 키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실성에 대해서 아니 적어도 불확실성을 해치한다는 대안으로 많은 제도적 방안과 의식적인 사조들을 탄생시켰지만 결국은 불확실성의 크기만을 증폭시킨 자가당착에 빠졌이었던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결국 개미가 뫼비우스띠를 따라 끊임없이 제자리를 걷듯이 불확실성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또 다른 난관에 부딛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는 불확실성 아니 정확히 확실성에 대한 수 많은 오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럼 불확실성을 해치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자칫 이러한 논조가 다시금 종교로 회귀하자는 퇴보적인 의식이나 자포자기적인 주저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오해의 소지도 있지만 저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다름아닌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도 가장 확실한 자료들 즉 우리가 겪어왔던 지난일들에 대한 상고와 재검토를 통해서 불확신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 비겐슈타인은 "확실성이란 새로운 대안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닫힌 공간"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이 상징하는 의미에서 바로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시금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불확실성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대안이라는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오래전 우리 조상들이 불확신한 수렵채집의 시대를 마감하고 농업혁명이라는 획기적인 대안을 찾았듯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말인 것이다. "안전벨트의 역설"에서 알 수 있듯이 다가오는 미래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세상이며 브레이크를 밝기 전까지 앞의 像이 허상인지의 여부도 닥쳐봐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허상을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오히려 확인도 못하고 빈털터리로 일어서는 카드게임과도 같은 것이다.
지나온 시대에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여겼던 진리와 가치관들이 과연 확실하였는가에 대한 고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미래의 불확실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이 비로소 생길 수 있다는 극히 간단단순한 논지를 우리는 항상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렇게 자기반성에서 우러나오고 축적된 자기테크놀러지가 결국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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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잠시 꽃샘추위이겠지 했는데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날씨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삶이 불투명해서 그런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이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좌우된다. 뭔가 확실(certainty)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확실(uncertainty)하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지난 2009년『파이낸셜 타임스』가 현대 사회를 좌우할 열쇳말로 꼽힌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런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강양구외 7인이 엮은 『불확실한 세상』을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 책을 들여다보면 불확실성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과학의 분야에서 불확실성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를 장담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 ‘불확실성이라는 괴물의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는 지혜를 모색’하고 있어 다행스러웠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삶의 불확실성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지하철형이고 다른 하나는 코코넛형이다. 지하철형이 측정가능한 불확실성이라고 한다면 코코넛형은 측정불가능한 불확실성이다. 가령, 지하철형은 통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도 평균에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코코넛형은 지진처럼 전혀 뜻밖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정보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프랭크 나이트가『리스크,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에서 지적했듯 불확실성과 리스크(risk)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앞서 말한 상황을 정보의 성격과 비교하면 지하철형은 리스크, 코코넛형은 불확실성이 된다. 경제학에서 리스크는 주사위 도박 같은 것으로 확률 분포를 알 수 있다. 반면에 불확실성은 주식 투자여서 확률 분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 투자에서 실패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박종현은 주식 투자를 리스크로 오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불확실한 상황에서 논리가 아닌 감정이나 직감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야성적 충동이다. 특히 김재명은 확률의 딜레마를 ‘확실함의 비율(確率)이지만 시실 그 진짜 의미는 불확실함의 비율인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덧붙이면서 확률적인 지식은 우리가 대상을 덜 알고 있다는 뜻일 뿐이며 언젠가는 대상을 더 많이 알아 가면서 확률적인 지식이 확실한 지식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확률의 개념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언 해킹은 인식론적 확률과 통계적인 확률로 구분했다. 프와송과 쿠르노는 전자를 ‘probabilite’, 후자를 ‘chance’로 불렀으며 루톨프 카르납은 ‘확률 1’과 ‘확률 2’라고 했다. 19세기에는 확률적 사유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는데 바로 물리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이며 수학에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였다. 하지만 개념과 달리 제도나 시스템의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상당하다. 가령, 박성민은「한국인은 왜 불행한가?」에서 정치의 불확실성을 파헤치고 있다. 가장 좋은 정치의 정의는 다름 아닌 ‘Agenda’를 ‘Non-Agenda’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는 이와 반대다. 그리고 박종현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보장 제도의 민영화는 삶의 안정성을 파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유인즉 경제적 지불 능력이 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차별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보호를 더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명우는 금융 공학의 맹점을 파고들면서 경영학적 자기 관리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성공과 지배라는 경제적 관계로만 환원시킨다고 했다. 한편으로 불확실성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확실성이란 새로운 대안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닫힌 공간”은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불확실성은 역동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역동성은 곧 유동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그문트 바우만이『액체근대』에서 말하고자 했던 ‘액화하는 힘’이다. 즉 액체는 견고한 것(고체)들을 녹이는 것이며 동시에 새롭고 향상된 견고한 것들이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불확실한 세상’을 두루 살펴보면서 문제점과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실하다는 것에만 맹목적으로 소비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불확실한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앞서 말한 역동성이 발휘되면서 불확실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러자면 불확실성을 제대로 다루어야 하는데 스피로스 마크리다키스, 로빈 호가스, 애닐 가바 등은『지하철과 코코넛』에서 3A를 아주 유효하게 제시하고 있다. 3A는 받아들여라(Accept), 평가하라(Assess), 확대하라(Augment)는 것이다. 이러한 3A의 지혜가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다.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삶의 불확실성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이며 자신과 타인의 관계는 총제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경제적 주체라는 환원의 악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 태동한다는 주장은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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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바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첫째, IMF가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즈음 한국 사회에는 '위험사회론'이 대두되었었다. 지금도 울리히 벡을 읽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암튼 그 즈음엔 그랬다. 나는 우리가 직면한 불확실성이란 일면 위험사회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현상을 재미있게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만 있을 뿐 나는 내게 주어진 일상에 치여 헉헉 대고 있었다. 누군가 내 대신 명료하고 명쾌하게 정리를 해준다면, 정말이지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삶의 한 의문점이 해결된다면 지금보다는 가볍게 세상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째,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유럽도 몸살을 앓았고 한국 역시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사실 나는 이후의 미국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자생하려는 노력을 할지 궁금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갈까?' 물론 이 역시 헉헉 대는 일상에 바빠 의문점으로만 남겨 놨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관련된 아티클들을 찾아봐야지, 혹은 사례들을 찾아보며 예측해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마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의 수준에서 거의 불안이나 공포에 가깝게 '불확실성'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이라면 바로 이런 측면이 아닐까 싶다. 경제의 불확실성. 작년에 한국에 나갔을 때 지인들과 이야기하다보니 거의 아노미 수준에 가까운 충격이 전해졌다. 반토막난 펀드 앞에서 모두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이나 공포는 '이코노믹 포비아'(economic phobia)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상실감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점집이라도 찾아갈 기세였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불확실성 앞에서 점집을 찾는 행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한편 나는 정말 의문이 들었다. 나름 지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사람들이 왜 모두 펀드에 목을 맨 것일까? 정말 펀드가 일확천금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을까? 펀드니 주식이니 하는 것들은 일종의 '돈 내고 돈 먹기'식 도박이 아닌가. 투자에 위험이 따르고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만큼 수익률이 높은 것이다. 대박이 날 수 있다는 건 달리 말해 쪽박을 찰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 아니면 도인 건데, 왜 그걸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이것은 미국발 금융위기를 접하면서도 느꼈던 동일한 감정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비롯한 파생상품들을 만들면서 월가의 그 똑똑하고 잘난 금융맨들은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니 사실 그들도 무분별한 모기지 승인이 결국에는 많은 대출자들의 지급불능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위험이 존재하니까 다른 쪽에서는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의 금융행태도 불확실성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위험을 계속 커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결국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불확실한 세상'이라는 것도 그런 측면에 포커스를 두지 않았을까 싶었다. 도대체 그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경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일까?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최악이었다. 엄마는 잡혀 있던 수술 일정을 거부하면서 일체의 수술 및 항암 치료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셨다. 아는 지인은 자살을 했다. 어떠한 전조 증상도 없었다. 나는 무능한 딸과 친구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3월부터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떠한 것도 내가 미리 예측하거나 예견했던 것은 없었다. 인생은 언제나 지뢰밭길을 걷는 것 같다. 어디서 언제 어떤 지뢰가 터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전방 1미터 앞에 지뢰가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몇 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조차 전혀 알 수 없다.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책을 읽었다는 걸 가정하더라도, 사실 이 책은 그다지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내가 기대하고 있던 바와 일치하지 않아 당황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것을 다루는 그런 책은 아니었다.
솔직히 저자들 중 조효제씨를 빼고는 전혀 모르는 이름들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 지가 꽤 되기는 했지만, 일종의 '세대교체'로 이해해야 할까? 이 저자들이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 두 개의 글만 빼고 나머지 글에는 참고문헌이 없다. 이것은 각 글의 포지션이 참 애매하다는 게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학술적인 논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시사적인 글이나 평론적인 글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어찌보면 술자리에서 친한 선후배들끼리 하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물론 저자들이 인용하는 내용이 누가 어떤 책에서 이야기한 책인지 소상히 밝히고는 있지만, 글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독자의 타깃을 누구로 잡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글들은 그 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매우 지루하고 따분할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내 견해이고, 정치, 경제, 종교, 지구(생태), 과학기술의 전공자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논의를 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각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논의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각각이 말하는 '불확실성'이 동일한 개념인가도 의심스럽다(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우리가 '불확실성'이라 뭉뚱그려 말하는 개념 안에 얼마나 다양한 내용과 이해, 해석이 포함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정치, 경제(넓게는 사회까지는 포함할 수도 있겠다)에 포커스를 맞추어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논의가 아닌, 실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일상생활,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대인들이 정말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우리가 겪는 '불확실성'을 미시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설명하는 (그리고 어렵기는 하겠지만 아주 작은 대안이라도 제시할 수 있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라는 게 불확실성을 먹고 사는 괴물이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말이다.
한가지 고무적인 것은, 출판사의 요구사항인지 저자들의 적극적인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들이 독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많이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적극적인 만남과 대화, 토론, 소통의 장을 통해서 불확실했던 것들이 조금은 확실해지고 예측가능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불확실한 것이 아니니깐. 두려움이 없다면 어느 정도는 이긴 싸움이라고 낙관할 수도 있는 법이니깐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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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에 경계는 불안이다. 불안의 징후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불안의 골이 깊을수록 세상은 더욱 비열해진다. "불안은 삶의 조건이며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하는 유쾌한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불안은 욕망의 또 다른 존재인지 모른다. 이처럼 불안은 인간의 삶과 함께 뒹굴며 껴안고 살아가는 객체이다. 더욱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념도 정치도 과학도 문화도 모두 불안하다. 마치 심연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불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더 나아가 불확실함을 추동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 불확실한 것의 개념을 확실의 범주로 끌어내려 원인이라는 씨줄과 결과라는 날줄로 치밀하게 엮었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과학의 인식 있는 건강한 생각의 총합이 이 책으로 귀결된다. 결국 불확실을 통해 확실로 나아가는 지혜를 찾는 대항해에 비유된다. 이러한 각기 다른 제 분야의 공통점을 하나의 요소로 묶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념의 중추를 이끄는 알고리즘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작용하지 않는 이상 그 전제는 취약해 진다. 그래서 10명의 각 분야의 석학들이 모여 불확실성을 치유할 키워드를 찾고자 생각을 모았다. 그들이 고민하고 숙고한 흔적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불확실한 세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 그리고 그의 돈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보장해주는가로 측정되어 진다. 그래서 권력은 계층을 생산하고 계층은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 이러한 계급화 사회는 우리 사회를 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정치현상을 꼭 이와 같이 그린다. 우파와 좌파에 대한 본질, 이해관계에 얽힌 집합체, 명분을 중시하는 오염된 정치세력 등 정치의 오랜 불신을 모두 담는다. 아마 파벌현상은 인간이 사회를 만든 그 시점부터 생겼으리라. 그것이 건전한 견제와 건강한 이념을 유도하는 교집합이 된다면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사회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이 책이 지목한 정치의 혼탁은 본질에 대한 정체성과 직결된다. 정체성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일깨우는 방증이자 체제를 유지시키는 견인차가 된다. 그것은 또한 불평등을 제거하는 평등의 산물이며 인간답게 하는 삶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박성민 대표가 말하는 가시거리의 이론은 실로 적절한 비유다. 정치의 출발이 무엇인지 절로 묻게 된다.
경제 또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압력에 정치만큼 불확실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된 경제시스템은 다수의 노동을 통해 소수가 착취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면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발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그것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제국주의의 폭압과 식민화를 통해 일궈진 부의 기틀을 서양은 오롯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발주자로 뛰어든 우리 경제가 그들과의 경쟁에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그것에 있다. 그들이 주창하는 경쟁의 미덕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며 비열함을 감춘 부정의 소치다. 결국 저자들이 지적하는 정보화를 통한 분배의 양극화, 비효율성, 경제테크놀로지는 이미 그들로부터 비롯된 체제의 오류와 다르지 않다. 브랜드화를 부추기고 소비를 미덕이라고 삼는 기회의 개방은 유리 막처럼 차단된 모두를 서민화시키는 첩경인지 모른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의 안전판이 바로 공공복지다. 복지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릴 사회적 담보장치다. 그러나 우리 현재 복지정책은 역주행을 신나게 한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전차처럼 말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종교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혼재이다. 맹목적인 광신도나 종교근본주의자가 희박한 토양에서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으로도 이례적이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사회와의 밀애는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달아 오른 곳 또한 우리 사회다. 종교의 본질은 차치하고라도 종교가 하나의 기업화로 관변단체로 이행한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종교는 성스러움을 최고 가치로 삼고 불안한 인간을 보듬는 안식처와 같은 존재다. 무신론자가 넘쳐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그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이념의 물경화다. 물신주의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종교적 선을 추구하기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더욱이 종교의 본질이 위협받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근접한 거리에서 위무하는 유일한 개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끝으로 세계화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 중 과학의 대중화와 정보기술의 발달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과학과의 연계는 직접적이고 빠른 전이가 특징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화에 인간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흡수되거나 도태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세기말부터 지속된 바이러스의 전파는 그러한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질병의 과학적 불확실성이라는 특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따라서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위험에 대처하느냐가 공중 보건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는 강양구 기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 정보의 독점화로 인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와 결부된다면 신종플루나 조류독감의 위험성마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생산한 우경화는 집단 무의식 속에 위험을 담보로 우리는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밖에도 지구 온난화의 실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불확실성을 포섭한 과학과 수학의 관계에 대한 논제는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추적된 불확실은, 궤적의 평행선을 뚫고 그려 나아가 그 선상의 대척점으로부터 순항하며 영원불멸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긴박하게 우리를 향한다. 그들이 바라 본 세상의 불확실은 다름 아닌 모두의 불확실로, 어김없는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확실의 요체는 확실이라는 상태를 통해 단련되어 지며 긴장의 순간은 더욱 바싹 고삐를 조여 옴을 알게 된다. 집단최면으로 얼룩진 불안한 이념의 동요가 계몽된 이성의 지각위에 우뚝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희망하는지 모른다. 타락한 천민자본주의가 세상을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여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현재의 가치로 변함없다. 맨틀의 거대한 움직임처럼 나아가고 움직인다는 만고의 진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돌며 불확실이 확실로 확실히 불확실로 바뀌는 역전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동력삼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불확실성으로 뭉친 확실성의 길을 나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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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확실히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으며, 예측 가능하던 경제상황도 예측을 뛰어넘는 변수로 인해 경제 전문가의 진단을 무색케 하고 있다. 정치, 경제적인 상황만 그러한가. 일상생활을 둘러싼 문화, 기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되는 이상기후는 더 이상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전보다도 훨씬 풍부해진 정보와 기술, 물질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바라보듯 마음을 졸여야 하는 것일까. 한국의 지성 10인이 나름대로 불확실성에 대한 진단을 내려 보았다. 누구도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었던 의문과 현상들을 분야별로 진단하여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건네주고 있다. <불확실한 세상>(2010년, 사이언스북스)은 한국의 지성들이 전하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지침서’와도 같은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들의 진단을 통해 불확실성의 원인은 무엇이고, 불확실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과거의 통계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안전한 방공호가 없다. 물론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것만도 아니다. 과거에 비해 확실성이 늘어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한편 “‘불확실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 또한 가질 수 있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지만 그만큼 기회는 더 다양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론이 정해져있지 않다는 사실은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결론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해 나갈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이유는 사회를 긴장의 나락에 떨어뜨리기 때문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충분히 이를 극복할 지혜를 인간은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불확실한 현상’ 자체만을 바라보며 무기력에 빠질 때 사회는 건강성을 회복할 수 없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불확실성’에 대한 논의는 지속되어야 하며 현명하고 합리적인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에 작은 기폭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by 꽃다지, 2010년 5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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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하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은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을까? 분명 인류는 많은 시대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역사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유독 현재의 생활을 더욱 불확실하다는 말로 표현을 하고 우리는 그 것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시대를 살면서 불확실하다는 현실을 그냥 당연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의 본질이 불확실성을 주재로 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하여 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불확실성에 대한 현대인의 궁금증을 다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분야의 불확실성이 가져다줄 변화와 우리에게 미칠 영향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10명의 저자가 자신의 분야에 대한 불확실성의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지구, 과학과 기술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을 하여 각 분야 별로 불확실성이 증가된 이유와 흐름 그리고 현재의 불확실성이 발생한 원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한번 이야기 해볼 사안이 있다. 왜 사람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불확실한 사안과 흐름을 받아들이기에 사람의 감정과 의식은 스트래스라는 감정의 흐름을 발생시키며 사람을 불안정한 상태와 초조한 상태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협 받는 상태로 가져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의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자기 삶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25쪽) 이라고 한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키고 자신이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의 변화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 현대 사회는 개인이 받아들이 힘들 정도의 변화속도 그리고 의식전환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품어왔던 행복지수에 대한 고민 즉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것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서 해소가 된다. 그럼 불확실한 것을 인위적인 가미를 통해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인류의 조상들이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해결을 해 왔을 것이다. 이는 분명 사람이 추구하려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간단하면서 명료하다. 현재는 불확실한 시대이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미래에 대해 준비해야 할 중심축이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지 않아서 일 지도모르겠다. 한국의 정치적인 불안,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불안, 금융위기가 가져온 불확실한 금융시장, 정보가 넘쳐나면서 생긴 경재에 대한 불안감, 이런 빠른 변화 속에서 변화하는 문화 코드, 그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피해가기 위한 노력 종교, 마지막 원유를 놓고 불안해 하는 인류의 에너지원, 이런 불확실한 세상에서 과학이 지표로 삼아야 할 것들 등등 이 책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광범위하며 독창적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은 작고 초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불확실성을 좁혀주지는 않는다.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마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불확실한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랑, 우애, 연대 등의 가치를 떠올리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Page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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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지금의 현실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불확실함'이 '확실함'으로 바뀌는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 생각해본다.
정치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중 가장 훌륭한 것은 'Agenda를 Non-Agenda로 바꾸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슈가 될 것을 정치권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슈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29쪽) '그런것이 정치였던건가?' 통계조사에서도 밝혀졌지만,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100위권밖이라고 한다. 구지 통계조사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딱 봐도 위태롭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판이다. 선진화란 이런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외면하는 우리의 현실이 무서울 지경이다. 불확실성을 완전히 종식시킬수 있는 방법이 떡하니 나타났으면 좋겠다. 영화, TV, 소설에서조차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자꾸만 부추긴다. 투모로우, 지구가 멈추는 날 등 많은 영화속에서 우리는 지구의 멸망을 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화의 마지막은 멋지게 '희망'으로 장식하지만, 잠깐의 햇살이 우리의 '불안감'을 사라지게 하진 않는다. 뉴스를 보면 심정이 복잡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물건을 구매할때 검색을 통해 입맛에 맞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 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지식 및 학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또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외부성이 발생하면서 경제는 점점 '양의 되먹임' 혹은 수확 체증의 특성을 띤다. 효율적이라고 살아남으리란 보장은 없어진지 오래고 살아남은 것이 모두 효율적인 것들이라는 근거도 없어졌다. (118쪽)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이 제약되고 있으며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우리의 선택이 어쩌면 '자유의사'가 아닌 '어쩔수 없는 선택' 인지 모른다. 과거에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대략적인 예측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변화에 대한 예측이 어렵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의 힘으로 다른 종교를 질타하거나 때론 사람들 모아서 운동도 자주 하시던데. 이 책에서는 불확실성의 시대, 종교의 끝, 혹은 종교를 떠난 성스러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교의 모든것이 성스러울수만은 없다
쇠고기의 안전성은 불확실성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10쪽) 문제없다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무엇이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우병외에도 무서운 병들이 많다.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할경우 불안감은 더욱 확산될 수 밖에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가장 우선에 놓고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223쪽) 어찌보면 불안한것은 당연할 것일수도 있으나 '불안함의 지속'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 불안함을 어떻게 극복할것인가? 이 글을 쓰면서도 '불확실한' 혹은 '불안한' 이라는 단어를 많이도 사용했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것도 아니고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고 열심히 운동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것이 중요할 것 같다.
주어진 특정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과 자연을 이루는 존재들의 각각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어떤 지성이 이 모든 정보를 다 분석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면, 이 지성은 우주의 거대한 천제들로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운동을 같은 공식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어떤 것도 불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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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중에 있던 책이고, 미리보기, 독자리뷰에서 상당히 좋은 느낌을 받아서 구매하기로 결정한후, 도서관에서 대여 가능함을 확인하여 빌려서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