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유행이었던 모CF에서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며 연인과의 이별을 선언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며 무너진 사랑에 가슴 아파한다.
완소영화중 하나인 '글루미 선데이'에서 일로나는 두명의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다.
그녀의 남편 자보는 "당신을 잃느니 반이라도 갖겠다" 고 했다.
이처럼 사랑은 절대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유일무이 하지도 않다라고 생각한다, 난.
때로는 지리멸렬한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때로는 동시다발적일 수도 있다.
사랑을 믿는 것과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것, 둘 중 어떤것이 더 행복할까? 라고 묻는다면,
상처를 받는다해도 사랑을 믿는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쪽이다.
그 비교급의 '더'가 행복을 가능케 해주는 게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한해서 말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행복하지 않는것은 아니다]
게다가 절대적이지 않다해서, 유일무이 하지 않다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데다가, 가치가 없는것도 아니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사랑은 일종의 '기만'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섹스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포장이 있을까?' p.5
'사람에게는 타고난 체취라는 것이 있다. 타인의 체취에 대한 호불호도 유전적으로 타고난다.
(중략) 타고난 체취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장차
아이를 낳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p.160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신기하게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생물학적
본능을 축소하고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p.275
사랑에 대한 생물학적인 저자의 논조는 흥미로웠고 제법 재미도 있었다.
사랑에 앞서, 우리는 각자가 느끼는 상대의 이성적인 매력도에 따라 혹은 무의식적으로
유전자의 기록대로 그 취향에 따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형은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했지만 어느 항목에서는 매양 일관적이다.
꼭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질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런면에서 생물학적인 시각에서의 "파트너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이론은
합당성을 얻는다.
서로의 성(性)은 그런 선택기준을 속물화 시키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본능의 이끌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이는 사랑을 시작하는 기본적인 '단계'의 이유로서는 수긍이 간다.
문제는 저자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차이인데, 구태여 섹스는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되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 = 섹스'의 공식이 아니다.
사랑을 하면 섹스를 할 수 있겠지만 섹스 한다고 해서 사랑은 아니며, 우리는 그걸 꼭 사랑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착각할순 있지만)
인과오류는, 상위개념인 사랑과 하위개념인 섹스가 동일하게 여기거나 대치함으로써
사랑의 의미는 혼동되고 축소되며 부정되어진다.
따라서 본성은 일부일처제를 위배한다 할지라도, 사랑(상위개념)은 그 제도의 존속을 가능케 한다.[제도의 부당성은 논외로 한다]
그 제도가 생겨난 이유가 어찌되었든간에.
게다가 오늘날에는 자손 번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쾌락본능의 이유가 더 크다.
쾌락 본능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각종 피임방법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아무리
종족보호 본능이라고 기본적인 기능을 설파한다해도 더이상 그 근본적인 기능이 행위의
주(主)가 되지 않음은 인정해야 함이다.[언제까지 무의식에 잡혀 살 것인가]
끝으로, 한 웹잡지에 실린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발췌:브레인미디어, 전채연님)
"첫눈에 반할 수는 있어도 첫눈에 정이 들수는 없다. 그러니 열정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성급한 판단은 일단 보류해야 마땅하다. 사랑은 그저 단순한 열정이나 생리적 반응이 아니다.(중략) 그러니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학설을 철석같이 믿고
섣부른 판단으로 사랑을 놓치거나 단편적인 잣대로 사랑을 재단하지 말 일이다.
깊고 지긋한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이 차츰 시들어갈 즈음,
오래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만 비로소 주어지는 특권일테니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