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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해가 밝았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많은 꿈들을 꾸게 된다. 다른 나라 말 하나는 제대로 배우겠다, 담배를 끊겠다, 술을 줄이겠다, 씀씀이를 알뜰하게 하겠다... 그러나 한 해가 끝날 때 보면, 꿈꾸었던 일들은 저만치 멀어져 있고 엉뚱한 쪽으로 흘러간 모습을 드러낸다.
꿈은 꿈으로 끝나고, 꿈꾸던 일은 머리 속에서만 남는다. 세월만 흘러가고. 삶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될대로 되라'며 무너지기 쉽다.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삶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장 뤽 고다르 감독이 1962년에 만든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Film en douze tableaux / My Life to Live>다. 한 아낙네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 제 꿈을 이루며 살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2. 프랑스 파리에서 레코드 가게에 다니며 일을 하는 나나(안나 카리나)는 영화 배우가 되려는 꿈을 꾼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워 간다. 그러나 음악을 하는 옆지기 폴은 그런 나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잠깐씩 보일 뿐 뒷모습만 보여주는데, 카페에서 나누는 둘의 얘기는 헛돌기만 한다. "난 잔인하지 않아 나나, 우울해" "난 우울하지 않아요 폴, 난 끔찍해요"
헤어지려는 나나한테 폴은 말한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날 떠나는 거지?" 나나는 왜 헤어지려는지 밝힌다. "당신은 날 사랑한다지만,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옆지기와는 헤어지고, 같은 일터에 다니던 리타가 2,000프랑이나 빌려간 뒤 달아나 돈이 없는 나나. 영화계로 나가려고 애쓰지만 쉽지가 않다. 오히려 일은 꼬이고 집에도 못 들어간다.
먹고 살려면 돈은 있어야 하는데 돈벌이는 안 되고...끝내 길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게 된다. 알고 지낸 동무인 이베트의 도움으로 아예 포주인 라울(사디 레보트) 밑에서 일을 한다.
3. 영화 배우가 되려는 나나가 오히려 몸을 파는 갈보가 되어버리는 삶. 그 삶을 영화는 열두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장면마다 이름도 붙여서 나온다. (1) 카페 : 나나는 폴에게서 떠나길 원한다 - 핀볼 기계 (2) 레코드 가게 : 2,000프랑 - 나나는 제 삶을 살고 있다. (3) 관리인 - 폴 - 쟌 다르크의 열정 : 신문기자 (4) 경찰서 : 나나 심문 당하다. (5) 큰 길 : 첫번째 남자방 (6) 이베트를 만나다 : 교외의 카페 - 라울 - 거리에서 총을 맞다 (7) 편지 : 다시 라울 - 샹젤리제 (8) 오후 - 돈 - 침몰 : 즐거운 호텔 (9) 젊은 사람 루이기 - 나나는 자신이 행복한지 궁금해한다. (10) 거리 - 한 사내 : 행복은 재미가 아니다. (11) 플라스 드 샤뗄레 : 낯선 사람 - 나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철학자 (12) 다시 젊은이 : 타원형의 초상화 - 라울, 나나를 팔아넘기다.
나나의 삶을 차례대로 보여주는데, 나나가 다른 아낙네가 길에 떨어뜨린 1,000프랑을 줍다가 경찰서까지 가게 된 넷째 대목과, 나나가 처음으로 사내한테 몸을 팔 때 입술은 주지 않으려 끝까지 고개를 돌리는 다섯째 대목에서, 제 꿈과 다르게 흘러가버린 스물두 살 나나의 삶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나 철학자가 나와 "말하며 살기 위해서는 말하지 않는 삶의 죽음을 빠져나와야 하는 거요" 하거나, <삼총사> 가운데 포르토스가 폭탄을 들고 건물 지하에 들어가서 나올 때를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는 삶을 살려면 날마다 죽어야 해요" 하는 대목은 좀 엉뚱하다 싶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4. 영화 첫 머리에 보여주는 나나의 얼굴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왼쪽 옆 얼굴을 보여주다가, 앞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오른쪽 옆 얼굴을 보여주는데, 울먹이고 눈물이 가득한 얼굴이어서 보는 내 마음도 짠했다. 말없이 나나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담배를 피우던 라울이 담배 연기를 입맞춤으로 나나한테 넘겨주고 나나가 연기를 내뿜는 모습은 감독의 장난끼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롭고 힘든 모습이 이어지는 가운데도 즐거운 대목이 눈길을 끈다. 헬밋을 덮어쓴 듯한 머리 모양의 나나로 나온 안나 카리나가 주크 박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당구장에서 춤을 출 때가 보기 좋았다. 사내 셋은 저마다 제 할 일을 하면서 쳐다봐주지도 않지만.
나나나 다른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줄기차게 피우는 모습은 오래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즈음 영화라면 몸에 나쁘다는 담배를 그렇게 피우기 어려울 것이다.
사는 곳이 달라 그런지 몰라도 알 수 없던 대목은 헤어지려던 나나와 폴이 핀볼 기계에서 같이 놀 때다. 헤어지는 마당에 놀이를 같이 할 수가 있을까?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
5. 사랑을 느끼며 오래 같이 살고 싶은 사내가 생기면 갈보가 될 수가 없다. 나나는 갈보가 되는 바람에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시 사랑을 꿈꾸는 탓에 돈을 많이 버는 갈보마저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삶'마저 쉽지 않은 나나의 '살아야 할 내 삶'은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감독의 물음에 그저 고개 숙이고 생각에 잠기게 되는 영화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은 아닐지라도 돈 때문에 갈보가 되는 나나의 삶을 그린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을 더 즐기고 느슨해진 사랑을 팽팽하게 만들려고 스스로 갈보가 되는 상류층의 아내를 그린, 루이스 브뉘엘 감독이 만든 <세브린느 Belle De Jour> (벨르 드 주르, 아름다운 오후)가 생각난다.
몸을 팔아도 먹고 살려고 파는 것과 즐기려고 파는 것은 다를 것이다. 하나는 슬프고, 하나는 짜릿하지 않을까?
쉰 해가 다 된 오래된 영화라 그런지 화면은 가끔 빛깔이 번져 깨끗하지 못하다. 소리는 그런대로 괜찮다. 보너스로 예고편마저 없다. 게다가 우리말로 옮긴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마디는 빼먹기도 하고. 그래서 13,200원은 비싸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