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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 그리고 각종 고시라는 타이틀속에 지금 이 시각에도 신림동을 비롯한 대학가 주변에서 전용면적 10㎡미만의 고시원에서 불철주야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럼 왜 많은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감행하면서 확률적으로 극히 낮은 게임에 도전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뻔하지 않을까 싶다. 고시합격이라는 OUT-PUT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메리트가 기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고위직 공직생활의 기본전제이고 세상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고시합격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신분상승의 공식적인 창구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빗나간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수 없이 많겠지만 굳이 이러한 반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나열치 않더라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소위 출셋길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고시가 근대화의 산물이었을까?
해답은 이미 고려시대 광종때 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과거제도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고시의 차이점은 아마도 근대적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인해 응시자격의 정확하게 신분의 차별만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대동소이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지금 고시의 역사적 연원의 뿌리는 아주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면에서 이번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과거제도 특히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을 통해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방에서 치루어지는 향시부터 시작해서 군주앞의 최종시험인 전시까지 조선의 과거는 지금의 고시와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서 과거급제는 개인의 출셋길을 넘어서 대대로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되었고 왠만한 양반가에서는 과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 생활 양식이 바뀔 정도였다. 개국의 이념이자 정권유지의 정신적 어젠더였던 성리학을 표방하는 조선에서도 과거의 급제를 위해선 민간신앙의 구복이나 이단시 되었던 불교의 귀의등 그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정도로 과거급제는 일생일대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난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하물며 과거급제의 꽃이라 불리우는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달콤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위한 개인, 집안마다의 독특한 교수법까지 등장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물신양명으로 노력을 했고 결국 태종은 조선시대 국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임금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 사대부들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조선에서 과거는 국시인 성리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의 인격적인 판단까지 아울러 제단했던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고시는 그저 성적의 상하로 합격기준이 나뉘어 지지만 과거제도는 성적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인재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의 고위직 진출이 월등히 많았으며 이들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동량이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과거라는 제도는 조선이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적시스템의 최상에 위치한 보기드문 제도였다. 하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이러한 과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면서 과거제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인사적체가 만연되고 일부 가문의 세도 및 특정 당파의 독점으로 인해 순수한 과거선발제도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제도가 갖는 의미는 조선시대 그 어떠한 제도보다 많은 면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과거는 엘리트라고 지칭하는 사대부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사회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컸다는 것이다. 현대처럼 직업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조선시대 과거는 사대부로서 도가 아니면 모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감독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패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부정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는 참혹했다. 적어도 법규정에 의하면 과거라는 대안없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전무한 사대부들에게 과거의 부정은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좀더 과거시험을 잘 보려고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고 이러한 부정들로 인해 조정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리시험이든지 답안지 맞바꾸기에서 부터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과거급해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급제를 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처음 예상처럼 장미빛 인생만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선택, 가문의 힘, 개인의 영달등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급제자들의 인생항로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경우가 역사에는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 책은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허와 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새롭게 등장하는 부정 그리고 과거를 통해서 장차 관직생활을 했던 이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서 과거라는 제도가 조선 사대부들에게 미쳤던 영향을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하여 과거와 사대부들간의 역학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과거는 비단 서생들만 발탁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미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당하관이하의 관리들도 응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인재등용의 POOL를 확대했고 이러한 바탕에서 과거제도는 인재산실의 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에 기상천외한 부정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어 그 의미를 퇴색시켰으나 결과론적으로 과거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급제를 위해 온갖방법을 동원하는 그들의 모습과 급제 이후 삶을 통해서 과거의 정책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유익한 담론들이 한편으로 역사에 재미있게 다가가는 방편이라고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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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면 과거는 그 목표에 근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관문이었다. 그런 만큼 가문의 영광과 자신의 관직을 위해 사대부들은 과거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는 길도 있었지만, 음서 출신들도 과거에 응시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서는 승정원,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 이른바 청요직에는 문과 급제자 아니면 임용이 될 수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음서보다는 등과하는 것이 출세하는 데 유리했다. 과거에 급제해야 주변의 인정을 받으며 떳떳하게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대과는 급제자 수가 33명에 불과한 좁은 문이다 보니, 그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에서는 과거와 관련한 사실과 명암이 교차한 인물을 담고 있다. 과거제는 고려 광종 9년 서기 958년에 실시됐다 다시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중시를 제외한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됐고, 모두 만 4천 6백여 명의 급제자가 배출됐다고 한다. 이들 중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율곡 이이였다. 그는 명종 3년(1548년)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진사시 초시를 시작으로 29세 때인 명종19년 (1564년)까지 연달아 아홉 번의 장원을 차지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장원급제를 무려 아홉 번이나 차지한 그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호가 따라 다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이를 비롯해서 정인지나 김육, 서거정, 정철 등 장원급제를 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과거는 많은 학자나 문인, 공직자들을 배출한 등용문의 역할을 수행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하찮은 시골의 가난한 선비에게는 문과 급제야 말로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 입신출세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실제적으로 과거를 통해 개천의 용이 돼 집안과 고을의 명예를 높여준 선비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최고 교육 목표는 과거에 필요한 경학과 시문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가 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양반자제들은 7,8세에 서당에 들어가 훈장에게 천자문과 동몽학습을 익히다 15,6세가 되면 서울은 사학(四學), 지방에서는 항교에 서 5,6년 공부하고 소과에 응시하는 것이 보통 사대부 남아들의 과거 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과거 역시 실시될수록 시행상 한계와 제도 자체의 결함이 드러났다. 3년마다 실시됐던 정규 시험 식년시 외에 수시로 치러졌던 부정기 시험은 서울 거주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도 그렇다. 얼마 전 외교부 장관은 자신의 딸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외무부 공무원으로 특채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장관의 딸이라는 이유로 국가 공무원에 특채된 것은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들어서도 채용 과정에서 부정이나 특권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데 봉건사회였던 조선 사회에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순전히 실력만으로 장원급제자가 가려진 것은 아니었다. 장원급제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집안은 전주 이씨,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여흥 민씨, 청주 한씨, 연안 이씨, 남양 홍씨, 파평 윤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청송 심씨, 등이었다. 모두 조선의 명문으로 꼽히는 집안인데, 이중 안동 권씨, 여흥 민씨, 청송 심씨, 청주 한씨 등은 대표적 훈구파 가문으로 왕실과 혼인 관계와 공신 책봉 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다수의 장원을 배출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과거가 문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 이에도 부정행위도 고질적이었다. 부정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점점 당파에서 주도하는 양상으로 번졌다. 기존 문벌의 영향력에 더해서 각 당파는 과거를 자파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생각해서 대대적으로 부정을 행했던 것이다. 그 단초가 열린 것은 광해군 때 집권한 동인 정권이었지만 그 뒤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역시 이런 부정을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그들 역시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 과거 부정을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과거 응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과 경제력 싸움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29.2세이던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후기로 가면 36.9세로 7세 이상 높아졌다. 그만큼 과거에 합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공부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인데, 이것 또한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부유한 사대부가 선비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돼 버렸다. 고전소설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이 약관의 나이로 장원급제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는 달랐던 것이다.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중국에서는 천민 외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선의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양인에 대한 응시 제한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소과와 대과는 양반들의 전유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서얼의 응시까지 제한함으로써, 적서 차별을 공고화하는 기제가 됐다. 서얼들이 허통과 과거 응시자격을 달라는 요구를 꾸준히 하면서, 마침내 숙종 대에 이르러, 양첩 아들과 천첩 손자도 문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과거의 폐단은 심각해졌다. 늘어난 양반의 수에 응시자는 급격하게 늘어가지만, 양산되는 과거 급제자로 인해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급제자 또한 많아졌다. 거기에 부정이 판을 치면서 과거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에 과거를 철폐하고 천거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지만 조선에서는 세도 정치가 실시되는 등 이미 자체적으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은 상실한 상태였다. 그렇게 과거제는 갑오개혁으로 폐지됐다. 과거제가 수명을 다한 것은 조선 사회를 지탱했던 신분제의 몰락이 가져온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의 필자는 학자답게 꼼꼼하게 자료 수집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거와 관련한 다양한 사실과 인물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나열된 인물들이 오히려 이 책을 읽는데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강조되는 것 없이 나열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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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학벌위주의 형식이 아직까지 우세한듯 보이는게 현실이다. 요즘은 그래도 실용주의로 능력이 우선시 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학벌을 따지는 관습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옛날 우리 선인들도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책을 보니 그 당시에도 살면서 학문이 얼마나 중요시 되고 못배우면 출세도 못하는 억울함이 자리하는지 명확히 알수 있다. 과거 시험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고 그것을 위해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면서 일생을 바치는 선비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의 모습과 여실이 비교가 되면서 새삼 그당시에도 공부와의 싸움이 치열함에 안타까워 진다. 출세를 하기 위한 지름길이 장원급제라고 한다. 문과는 조선시대 과거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시되어 문과 급제는 곧 가문의 영광이며 사회적인 인정과 명예를 얻는 지름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속의 수험생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치열하고 살벌하다. 조선시대에는 상을 치르는 3년동안은 유생들이 과거를 보지 못했다. 그래도 자식된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행이다. 엄격히 따져 과거시험에는 신분적 제한이 없었으나 시행상으로는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했다. 평민들은 사실상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과거시험은 더군다나 힘든게 현실이었다. 과거,특히 문과와 소과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할수있다. 그래서 더욱 신분 상승이 어려웠으리라... 시험을 보기 조차 어려운 서얼의 자식이나 재혼자의 자식들은 그당시 신분상승이 꿈에서도 하기 어려운 실정에 얼마나 답답했을지 마음으로도 느껴진다. 문과에 장원급제 하려면 소과에 합격하고도 전기에는 8년,후기에는 10년 정도 더 공부해야 했으니 과거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알수있다. 요즘의 대학 시험처럼 그당시에도 과거 고시라 불릴만 했으리라...
조선의 과거시험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천태만상의 부정행위와 신분에 따른 제도적인 차별,끊이지 않는 비리들로 마치 오늘날 교육계에 현실적 모순과 폐허를 보는듯해 과거와 현실의 구분이 모해지는것 같다. 왜 그토록 과거라는 시험에 연연하며 일생을 공부에 빠져 살아야 했는지 책을 읽다보니 오늘날의 수험생들이 떠올라 새삼 기분이 씁쓸해진다. 인생에 있어 공부가 다는 아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자신의 꿈과 성공을 위해서는 그 지름길이 될수있는게 바로 공부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새대적 차이를 벗어나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공부에 매달리는 것이리라.. 인생성공의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일등인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요즘 아이들의 사교육을 생각하면 좀더 바른 시험제도와 교육제도가 올바르게 확립되기를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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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고는 장원급제 가는 길에 대한 여러 물리적 상황에 대해 상상했었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다 도적에게 쫓긴다거나, 인왕산을 넘다 호랑이를 만난다거나, 막상 읽어보니 장원급제라는 조선 대표 고시를 통해 조선 정치사회의 여러 모습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로드무비가 아니라 정치드라마인 것이다.
흥미롭고 안스럽다. 과거라는 제도, 지금의 사법고시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등용문. 그것 하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글공부를 한 선비들과 그의 서포터들. 그러나 장원급제한다고 철밥통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의 왕권과 체계는 불편부당함이 아니었던가?
재미있는 당시의 출셋길, 사회상 인재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문체가 좀 딱딱함이 아쉽다. 그리고 몇몇 뭉클한 사연들. 마음에 담아두기로 한다.
조선 시대에는 뇌물을 받거나 나라의 재물을 횡령한 죄를 범한 관리, 즉 장리의 아들은 서얼의 자손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종종 6년(1511)에 32세로 별시 문과에 장언급제한 강태수는 비록 장원이었지만 이 규정 때문에 관직 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성종 때의 대신 강희맹의 손자로 일찍이 백부 강귀손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그런 까닭에 그의 생부 강학손이 관노비를 사사로이 점유했다는 이유로 장죄를 범한 것으로 판정받았지만 과거를 보고 장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원급제한 후 관직에 임명될 때 생부의 장죄가 문제가 되었다. 그를 공조 좌랑에 임명하자 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오달제가 마지막으로 "신이 나라를 위해 죽을 곳으로 나아가니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일은 가엾고 또한 아름답다. 청나라 대신이 말한 것을 따라 뜻을 굽혀 애걸했더라면 혹 살길이 있었을 것인데, 오랑캐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의리 때문에 죽도록 굽히지 않아 나라에 빛이 있게 했다. 오달제의 말은 매우 아름답다. 죽고 살 즈음에 명예와 절조를 잃지 않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인조실록> 권35, 15년 7월, 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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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시험을 얼마나 볼까.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시험, 승진시험 이책은 장원급제, 과거에 관한 책이다. 이책은 우리가 단순하게 알고있는 과거가 아니라 옛날 과거에 관하여 우리가 모른는 사실까지도 알려주는 책이었다. 과거를 보기위해서는 성균관에 들어가야 한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명륜당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또 2번의 휴일이 있으며 그날 세탁등을 한다고 한다. 과거를 보면 모든 사람의 소원이 장원급제였다. 장원급제라는 것은 과거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원급제를 정할때 임금의 선택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 장원급제를 하면 잔치를 해주었다. 또 한집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한명이 나오기도 힘든데 잡원이 몇명씩 나온집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의 시험은 정시가 있고 또 수시로 과거가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과거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서울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였다. 또 과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에 서울에서 잘사는 선비들은 돈걱정없이 공부를 할수있지만 지방의 선비, 또 결혼을 한 선비들은 어렵게 공부를 하게되고 과거만이 나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지방의 선비들은 열심히 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다고하지만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나올정도다. 이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의 스트레스에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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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시대 과거를 준비한 분들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 과거시험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율곡 이이는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한 것이 맞는지, 장원을 차지한 인물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장원급제자의 삶을 알려주고 있다.
소과로 생원, 진사 시험이 있다. 생원은 경전 위주, 진사는 작문 위주 시험이다. 각각 100명을 뽑는데 초시와 복시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퇴계 이황도 초시에 세번이나 낙방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렵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면 대과에 도전할 수 있다. 대과는 초시, 복시, 전시가 있다. 초시에서 240명을 뽑고, 복시에서 33명을 뽑았다. 대과 시험의 초시와 복시는 각각 초장, 중장, 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요즘도 고시과목이 다양하듯이 당시에도 과목이 다양했다. 지금은 알지도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시를 짓거나 책문에 대한 대책을 썼다.
성균관은 생원이나 진사 합격자가 들어갔다. 대략 1년 공부하면 대과볼 자격을 얻었다. 과거 중에 '알성시'라는 것이 있었다. 봄, 가을에 임금이 문묘에 배향하는데 이 때 단판 시험을 봐서 몇 명을 뽑았다. 성균관 유생끼리 제한 경쟁이 전국규모 과거와 동등했으니 대단한 특혜였다.
3년마다 있는 시험 말고 부정기적 시험이 자주 있었는데 서울 사람들이 당연히 유리했다. 시골에서 어떻게 부정기 과거시험 정보를 알고 준비하나? 동점일 경우 서울 사람을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왜 기를 쓰고 과거에 매달렸을까? 과거 급제가 곧 개인의 출세요, 가문을 살리는 길이었다. 고을에서도 좋아서 난리가 났다. 관리가 되면 녹봉으로 돈을 많이 벌었을까? 녹봉보다는 승진했거나 지방관이 되어 나가는 등 중간중간에 받는 선물이 더 대단했단다.
평생동안 공부할 책을 쌓으면 대략 어른 키만큼 된다. 의외로 분량은 얼마 안 된다. 하지만 그걸 다 달달 외워야 하니 만만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울고 웃었던 실제 인물들의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제도보다는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평범하거나 비범한 삶에서 더 큰 감동과 교훈을 받는다. 많은 장원급제자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흥미롭지만 대표적인 인물 한두명은 좀 더 자세히 서술했으면 독자에게 훨씬 더 생생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서울 사람이고 있는 집 자손이 유리했다. 예를 들면 시험지를 각자 준비했는데 있는 집 응시자는 두껍고 질좋은 종이를 써서 금방 표가 났다. 유배지에서 다산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굶더라도 서울에 살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성종대 부터는 재혼한 여성의 아들도 차별대우를 받았고, 뇌물 받은 사람 자식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재혼이 무슨 죄라고? 아무리 제도를 보완해도 부정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긴 인간사에 어찌 불공정한 게임이 없어질 수 있을까?
지금은 서울 아니고 없는 집 자손도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할까? 외무부 간부 자녀 특채 사례만 보아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여간 이와 같은 역사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은 변하지만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장원급제자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안내하고 있으므로 과거시험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다른 책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과거시험에 대해 참고할만한 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송기호 <과거보고 벼슬하고>, 김태완 <책문>, 국사편찬위원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미야자키 이치사다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장중례 <중국의 신사>등이 있다. 전문성이 강한 책은 너무 어려워서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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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과거제도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하면 지금의 교육과는 많이 다를 거라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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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과거는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광종9년(958년)에 시작되었고 조선까지 이어져 왔으니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시행되어왔다. 이 과거제도는 가문에서 혈연을 매개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므로 임금에게는 자신의 권력 조력자로 자신의 신하들을 등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몇 안되는 입신의 방법으로 명예와 부를 동시에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대대로 과거에 장원급제자를 우대하는 전통까지 있었으니 출세에 목마른, 혹은 명문가를 이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과거는, 특히 장원급제는 반드시 잡고 싶은 과제였으리라.
이 책은 조선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 조선시대에 문과 시험이 744회 치러졌고 이 시험에서 장원이 몇명이나 나왔고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이 얼마였으며 그들의 가문은 어느 성씨가 가장 많았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어떻게 바뀌는지 과거를 실시함에 따라 나타난 병폐와 과거장의 모습, 장원을 뽑는 장면, 여러번 장원급제를 한 사람들과 장원들이 영욕을 누린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이 책은 <책문>을 생각나게 한다. 책문은 과거시험에서 최종등수를 가리는 마지막 시험인데 왕이 문제를 출제했단다. <책문>의 저자 김태완은 조선의 책문을 정리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통치 이념이 "유교"에 있음을 밝히고 기록된 책문과 급제자의 답안을 추려 왕들이 어떤 성향을 지녔으며 무엇을 중요시여겼는지를 쓰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선조와 광해군 때의 책문을 보면서 임금의 마음을 짐작하고 신하된 자의 마음과 그 시절의 상황들을 느끼고 세종의 책문을 보며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를 알아갈 수 있다. <책문>이 시대와 왕들의 통치이념을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 이 책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조선의 과거제도 자체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는 듯 하다. 과거시험을 치르는 행정 절차들도 잠시 보이고, 과거에 임하는 선비들의 시험장 입장 모습도 그려내고, 장원을 했을 때 주어지는 각종 특혜들과 그 부모에 대한 포상 등 조선의 과거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하여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이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서적인지 전공하는 학생을 위한 조선의 인재등용에 대한 안내문인지 조선의 과거제도를 연구하고 쓴 논문에 살짝 살을 붙여놓은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나 책을 읽은 즐거움에 여럿이 있고 그중 지식의 확장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추천할만 하다. 또 과거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므로(예를 들면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기네스 기록에 오를만한 사람은 율곡 이이였다) 대화에 좋은 소재를 얻을 수도 있고 과거와 오늘의 대학 논술시험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며 과거에 바쳐진 인생과 과거에 장원을 했지만 몰락의 길을 간 인재들을 통해 생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출세의 길과 조선의 출셋길이 어떻게 닮았는지, 혹은 다른지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이 책으로 직접 경험해 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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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험>을 통해서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뉘어 시행되었고 문과는 대과와 소과로 나뉘었다. 관료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과에 급제를 해야한다.
과거시험이 어렵고 합격자의 수가 적어짐에 따라 대리 응시,시험 문제의 유출, 응시자를 미리 알려주는 식의 부정행위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부정행위를 넘어 과옥으로 번지는 일까지 생긴다. 시험에 부정행위가 발생하는 것이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이지만, 이렇듯 과거시험의 패해가 끊이지 않음은 과거시험 이외의는 별다른 출세길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양반들에게만 응시자격이 주어지거나 양반 중에서도 서얼이나 재가녀의 자손들은 응시자격 조차 주어지지 않았음을 보면 조선시대가 얼마마 페쇄적인 신분사회였는 지를 짐작케한다. 응시자격 제한을 통해 과거제도가 유능한 인재들을 가리기 위한 등용문인 동시에 기득권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된다.
시험을 준비하는 데는 돈과 시간이 든다. 과거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경제적인 지원이 어려운 선비들은 시험준비에만 전념하기 어려웠다. 지방출신보다는 서울 출신의 급제자를 선호한다거나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부정 시의 경우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선비들을 응시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지방에 거주하는 선비들이 서울로 유학을 오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 권문세가에서 장원급제자들이 많이 배출된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이런 결과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특정 지역출신과 경제적인 배경이 합격 여부를 좌우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의 시험제도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들을 그래도 답습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과거시험이 부정적인 부분만 가지고 있었음은 아니다. 과거의 본래 목적이 실력에 근거한 인재등용에 있음은 2부에서 소개되는 장원급제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과거급제를 한 공직자의 모습을 통해 공직자의 자질을 논한다. 장원급제자들의 삶을 통해 시험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이었을까?
이들의 행보를 통해 시험 그 자체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것을 잘 보여준다. 공직자들에게 능력뿐 아니라 높은 도덕심이 필요했음은 비단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공직사회가 요즘 그 도덕심으로 매우 시끄럽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출세에 대한 보증수표를 보장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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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는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것이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장원급제자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특히 장원으로 급제하는 일은 개인으로뿐만 아니라 가문과 마을의 영광이었다. 행실이 나쁜 여인들과 삼가녀(三嫁女)들은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해 부녀자들의 행위를 규제했다. 과거를 볼 수 없는 등 자손들이 불이익이 당하는데도 세 번 결혼한 그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상대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식들의 삶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 할머니의 행위로 과거를 볼 수 없었을 때, 꿈을 포기해야 했을 자식들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통했을 것이다. 어렵게 붙은 급제, 그것도 장원에 급제했다면 당연히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싶을 것이다. 유가(遊街)는 지금의 축하 퍼레이드다. 부친상을 당하고 상복을 입은 채 유가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는 글에선 똑똑하다고 해서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모든 임금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임금이 답안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상황에서 장원을 결정했다는 대목은 많이 화가 났다. 임금은 가장 공정해야 할 자리 아니던가.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에서 ‘누리지 못하는 성공이라면 그것은 실패’라고 말했다. 76세에 노령급제한 김효용은 후생의 모범이 되었지만 제대로 일을 하지도 못하고 이듬해에 숨을 거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성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너무 늦으면 꿈을 펼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열심히 꿈을 꾸고 노력해야 하는 모양이다. 남이는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고도 장원에 집착했고 이석형은 세 번 연달아 장원한 인재였으나 승진에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에선 삶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인생엔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지 않았던 하숙산의 모습은 공직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를 통해 만난 다양한 인물군상들의 모습은 국가와 사회에 속해 살아야하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국가고시에서부터 학교 시험까지 크고 작은 온갖 시험들이 존재한다. 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을 가질 수 있고 자격을 갖춰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공정해야 할 시험에 ‘사람의 이해’가 개입되어 능력 없는 자가 시험에 합격하기도 하지만 시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인재를 뽑는 최선의 방법이다. 삶의 목적이 무조건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를 지위를 갖추지 않으면 불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분과 지위를 얻기 위해 오늘도 밤을 새며 책(혹은 기술)과 씨름을 하는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