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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난 뒤 그냥 접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두고 두고 펴 볼 것 같은 책이 있다. 박경미의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없이 그냥 살아지는대로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엄습해 올 때, 속물적인 유혹에 시험당하고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고통에 처할 때, 마음을 가다듬으며 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좋은 책이다. 저자인 박경미는 기독교를 전공한 신학자로서 2천년 전 예수의 삶과 시선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낙원 밖에 살지만 끊임없이 낙원에 대한 기억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하는(p100) 인간의 딜레마와 고통을 성찰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누구나 이 물음 앞에 서 있다. 박경미는 '그러므로 이 물음 앞에 얼마나 자주 서는가, 이 물음에 얼마나 진지하게 답하는가 하는 정도로만 나는 진실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과연 기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다. 구원은 커녕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어야 할 종교가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곳곳에 서 있는 십자가들. 남산 위에서 바라본 서울의 밤하늘은 빨간 십자가가 빼곡히 늘어선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 많은 십자가들 중에 진정으로 하늘에 닿아있는 생명의 사다리는 몇개쯤이나 될까.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대중속에서 헌신하는 성직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들의 깨끗한 영혼의 힘으로 정화시키기엔 한국의 기독교는 너무나 타락하지 않았을까. 진정한 예수의 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마몬의 교회가 득세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생명과 평화, 구원의 상징이길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공허한 외침만 있을 뿐.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경의 한 구절이다. 박경미는 예수의 준엄한 질타를 되새기면서 '돈 귀신이 지배하는 시장전체주의는 비판적인 지성을 무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가 꿈꿨던 하느님의 나라, 우정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한탄한다. 경쟁이 도덕의 자리를 대신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진리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는 '장사꾼의 소굴'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장사꾼의 소굴'로 변한 세상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다. 마몬의 세계, 야수의 세계다. 마몬의 세계 속에 마몬의 교회가 있다. 박경미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종교는 많고, 기독교만 거기서 예외가 되라는 법은 없다. 영양 부족도 치명적이지만 영양 과다는 치명적인데다가 추하기까지 하다. 지금 기독교는 혈관 속속들이 끈적끈적한 기름이 끼어 비대한 살집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잠시 더 버티겠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가 산다. (P247)
갈릴리 마을에서 '가난한 공동체'를 꿈꾸다 이 책이 나를 오랫동안 붙잡아 둔 이유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때문이다. '다빈치코드'를 읽고 예수의 신성에 의문을 품으며 그의 존재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흥미를 가지기는 했지만 정작 예수의 전 생애, 그가 진정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했으며 어떻게 투쟁했는지에 대해서는 공부해 볼 기회가 없었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를 읽으면서 얻은 큰 수확중에 하나는 예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침탈과 헤롯 가문의 수탈이라는 2중고에 시달리던 2천년 전 갈릴리 마을. 상부상조와 연대의 원리를 삶의 근간으로 삼아왔던 갈릴리 농경사회는 지배자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예수는 핍박받던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삶을 나누었다. 이스라엘 민중의 지도자 예수가 현실에 되살리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공동체였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수천명이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들을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향해 회복시키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킨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도록 요청받았다. (p251)
갈릴리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는 가난을 한탄하는 대신 서로의 빚을 탕감해주고(누가 11:2~4, 마태 18:23~34) 상대방의 근심과 기본적인 필요를 들어주라(누가 6:27~36)고 요구한다. 이는 예수가 설계한 지역공동체 갱신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확신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본적 생활 형태를 이루었던 마을공동체들에서 평등주의적이며 서로간에 지원하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재확립하는 갱신 프로그램을 밀고 나갔다. 물자가 충분하지 못하고 빈곤한 고대 농경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포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좀 더 가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어야 나눌 수 있고, 나눌 수 있을 때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다. 공동체적 삶의 조건이란 가난함과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박해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강조한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고 영혼의 구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진실한 사랑에 바짝 다가가고자 한다면 '가난하고 베풀라'고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와 민주주의
하나님을 믿고 섬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향유하는 물질적 삶의 도덕적 토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에 대해 물어야 하고, 어떠한 개인의 미덕도 분쇄해서 가루로 날려버리려는 악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오래전 톨스토이가 했던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한다. (p14~15)
예수의 가난한 마을공동체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현실 또한 '밥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르게 먹기 위해서는 한정되어 있는 밥을 나누어야 한다. 세상의 절반 이상은 굶주리고 있고 5초에 한명씩 어린아이가 굶어 죽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다. 밥이 한정되어 있다면 나누어야 한다. 혹자는 가진자들이 소득의 5%만 나누어도 세계적인 빈곤을 영원히 퇴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단지 조금만 나누면 매년 거의 1천만명에 달하는 굶어주는 아동을 살릴 수 있다.
한정되어 있는 밥을 나누는 것은 다시 말해 분배이고 정치다. 박경미의 지적대로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성, 인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차원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민주주의란 먹고사는 일에서 도덕을, 인간다움을 세우는 일이다. 인간이 먹고 사는 일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분배와 나눔의 문제일 것이다...(중략)...먹고 사는데에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은, 실은 성장에 한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p28)
사람은 빵 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랑으로 산다. 오늘날 '사랑'을 물질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가난'일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비유로부터 들어야 할 도덕적 경제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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